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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물관이야기_ 오늘의 기록이 내일의 정확한 역사로 남는다.

김정현

                    박물관이야기_ 오늘의 기록이 내일의 정확한 역사로 남는다.

                                                                                            김정현 / 김달진미술자료박물관 학예사


김달진 관장은 어린 시절 그림을 좋아하는 평범한 소년이었다. 중학교 때부터 그의 취미는 상표, 우표, 담뱃갑 등을 모으는 것이었다. 그러다 그는 여원, 여성, 주부생활 등의 여성 잡지의 화보 중 하나인 이달의 명화에 실린 그림 한 장을 우연히 뜯어 가지면서 예술작품 수집으로 방향을 선회한다. 이후 신문, 잡지는 물론 청계천 헌책방을 드나들며 그림에 관한 내용은 모조리 모았다. 가족들은 그의 취미와 미술계에서 일하고 싶어 하는 그의 희망을 걱정하고 법관이 되기를 희망했다. 그러나 1972년 고3시절, 경복궁 국립현대미술관의 <한국근대미술 60년전(韓國近代美術六十年展)>을 본 김달진 관장의 꿈은 오히려 커져만 갔다. 고등학교를 졸업할 무렵 그는 그동안 공들여 온 수집취미로 자신의 인생 승부수를 띄웠다. `두드리면 열리리라는 마음가짐으로 그가 오랫동안 모은 스크랩북과 그의 예술작품 자료 정리 및 수집에 대한 열정을 자기소개서를 담아 각 언론사 미술담당 기자와 미술평론가, 각 학교 박물관장 등에게 보냈다. 답장은 없었다. 다음엔 수집한 자료들을 들고 당시 이경성 홍익대미술관장을 무작정 찾아갔다. 내성적인 성격의 그에게는 큰 용기가 필요했다. 이경성 관장은 그가 초등학생 시절부터 모아온 미술잡지, 신문, 팸플릿을 모은 스크랩북 10권을 보고 깜짝 놀라시며 열심히 하라는 격려의 말을 전했다. 김달진 관장에겐 천군만마를 얻고 그동안의 노력이 보답을 받은 느낌이었다. 이때의 만남이 나중에 큰 인연으로 이어졌다.


서울 인사동 전시장을 돌며 자료를 수집하던 시절 동대문도서관에서 월간전시계(月刊展示界)라는 잡지를 알게 되었고 곧장 편지를 보내 최학천 사장을 만나고 첫 일을 하게 됐다. 1978~80년 사이에 기자로 근무하며 미술 자료를 글로 정리하는 작업을 하는 동안 잘못된 역사적 사실들을 정정하고 뉴스나 언론에서 확대 재생산되는 것을 막는 모범적인 기자로서의 활동을 하였다. 기자 생활을 끝낸 이후 국립현대미술관에서 근무할 때도 글쓰기를 지속했다. 1985년에 관람객은 속고 있다-정확한 기록과 자료 보존을 위한 제언이라는 제목으로 글을 발표하였고. 그 내용은 작가 약력, 연보, 연감 등에서 오류, 오기, 누락이 발생한 사례를 들며 그 심각성을 환기시켰다.

 

시간이 지나 이경성 관장은 국립현대미술관장으로 부임하였고, 예전의 인연으로 그는 1981년 국립현대미술관 자료담당 임시직으로 채용되기에 이르렀다. 그는 오늘날처럼 정보가 돈이 되고 힘이 되는 시대가 올 줄 어떻게 알았을까? 알지 못했다. 그는 당시의 일을 미술 자료로 먹고 산다는 건 상상도 못했던 때였지요. 단지 그림이 좋고 모으는 것이 즐거웠을 뿐이었으니 일당 4,500원의 임시직이라도 감사했습니다.”라고 말한바 있다. 그리고 이는 본격적으로 그의 꿈이 이뤄지는 서막이었다. 81년부터 시작한 국립현대미술관 일용직 자료실 생활은 871월에 별정직 7급으로 격상돼 빛을 봤지만, 3년 계약이 끝난 후 기능직 10급으로 낮아져 그는 속도 마음도 많이 상했다고 했다. 그는 무엇보다 자신의 일에 애정을 갖고 있었고, 혼신의 힘을 바쳐 일했다.

다행히 국립현대미술관에서 14년을 노력한 경력을 인정받아 한국미술계의 양대 화랑이라 할 수 있는 1996년 가나화랑 가나미술문화연구소 자료실장으로 채용되었고, 총괄팀장으로 승진해 인터넷 사업을 개척하기도 했다. 가나아트센터에서의 경험은 그가 앞으로 자신만의 박물관을 가지고 일하고자하는데 큰 도움이 되었다. 이 사이 중앙대 예술대학원 문화예술과 석사를 졸업했다.

월간전시계 기자, 국립현대미술관 자료실, 가나미술문화연구소 자료실장을 거친 김달진은 200112, 마침내 자신의 이름을 건 김달진미술연구소를 열었다. 이듬해 20021월에는 우리나라 미술 전시와 화랑 상황을 한눈에 볼 수 있는 매체가 필요하다는 생각으로 월간 서울아트가이드2002년 창간했다. 처음에는 초라했지만 지금은 국립중앙박물관, 국립현대미술관, 리움, 갤러리현대 등 굵직한 화랑에서 먼저 광고 홍보를 의뢰할 만큼 인정을 받고 있다.

 

그리고 200840여년 가까이 수집한 자료들을 한곳에 모은 김달진미술자료박물관을 개관했다. 그러나 본인소유가 아닌 비좁은 전세건물은 수십 년 동안 쌓여온 방대한 자료를 감당하기엔 너무 부족했다. 종로구 평창동에서 출발하여 통의동, 창성동, 마포구 창전동으로 여러 번 옮겨 다니다가 2015년 마침내 종로구 홍지동 상명대 앞의 구입해 재건축, 미술연구소, 미술자료박물관으로 뿌리내릴 장소를 찾았다. 지금의 김달진미술자료박물관 설립까지 많은 우여곡절이 있었던 것이다.

 

자료수집에 대한 그의 태도는 유별난 것이었다. 월간 전시계기자로 일할 때나 국립현대미술관 시절에는 자료를 일부러 찾으러 간다고 그의 선배들에게 눈총도 많이 받았다. 그 때는 알아서 보내면 받고 아니면 전화로 연락하면 바로 받기만 하면 그만이었다. 당시 소극적인 공무원 사회에서는 그의 태도는 이상한 것이었다. 그럼에도 그는 앉아서 우편으로 오는 자료만 정리하지 않고 적극적으로 자료를 찾아 나서는 사람이었다. 그는 한때 화랑가에서 금요일의 사나이라 불렸다. 금요일마다 인사동과 사간동 일대 화랑을 돌며 팸플릿과 도록을 챙겨 모았던 까닭이다. 매번 엄청난 양의 무게를 짊어지고 다니느라 그의 한쪽 어깨는 아직도 기울어져 있다. 팸플릿, 도록, 입장권, 포스터, 정기간행물, 교과서 등 그의 수집품에는 한계가 없었다. 그래서 모아둔 자료의 양이 20톤에 가까울 때도 있었다. 전셋집 마루가 내려앉아 이웃집 지하실을 황급히 수소문하기도 했고, 안방까지 치고 들어온 박스 더미 위에 매트리스를 올려놓고 자던 시절도 있었다. 그의 가방은 늘 불룩했다.

 

누군가에게는 그저 하찮은 종잇조각에 불과했겠지만 그에게는 소중한 보물이었다. 미술 자료는 그에게 늘 갈증이었다. 예술품을 주로 취급하는 코베이 경매에 그가 매달 참여하는 이유다. 한국 최초의 민간 미술단체인 서화협회의 협회보이자 그에게 있어 가장 애착이 가는 소장품 중 하나인 서화협회회보(書畵協會會報)2권도 경매를 통해 얻었다. 우리나라 최초의 미술 잡지로 1921, 1922년에 발간되었다. “보자마자 두근거렸어요. 아내에게 내가 저건 딸라 빚을 내서라도 내 손에 넣고 싶다고 말했죠. 얼마에 낙찰 받았는지 지금도 내 입으론 말 못해요. 문화재로 지정될 수도 있을 만큼 귀한 책이에요. 김소월 시집 진달래꽃초판본이 문화재로 등록된 것처럼.” 언제인가 때가 오겠지요 그가 수집가에서 기록자로 변천하게 된 것은 우연이 아니었다. 또한 국내에서 인상주의 화풍이 정착됨을 보여준 첫 원색 도판 오지호 김주경 화진 (1938), 1961년 창설된 앙가쥬망 동인회의 활동을 기록한 앙가쥬망 활동일지’, 구한말 조선 아이들의 놀이와 풍속을 다룬 조선아동화담(1891) 등 현재 박물관에서 소장 중인 귀중한 미술자료들도 그가 이런 노력을 들여 얻어낸 귀한 결실이다.

 

수집에만 만족하지 않고 수집한 자료들을 틈틈이 분류하고 정리하며 잘못 알려진 작가의 연보, 약력, 등을 바로잡았다. 우리나라 미술의 흐름을 한눈에 볼 수 있는 한국근현대미술 대표작가 파일 350 , 미술교과서 300여 점, 미술 학회논문 및 학위논문 2,000여 권, 미술정기간행물 10,000여 권, 미술단행본 및 화집 10,000여 권, 전시팸플릿 및 리플릿 20,000여 점의 방대한 자료들은 40여년 동안 화랑가, 도서관, 헌책방을 뒤지고 다닌 땀의 결정체다. “차근차근했어요. 처음부터 큰 욕심을 부렸다면 해내지 못할 일이었지요. 내가 할 수 있는 만큼의 일은 끝까지 해내자, 늘 그렇게 생각했습니다.”

 

김달진 관장의 앞으로의 포부는 5만 여점에 달하는 방대한 자료들과 앞으로 더 수집할 더 많은 자료 보관을 위해 박물관에 좀 더 넓고 쾌적한 공간을 확보하는 것이다. 2014년 단행본 12232, 팸플릿 9353부 등 미술 자료 23979점을 국립현대미술관에 기증했고, 2015년 홍지동에 본인 소유의 박물관을 얻은 지금도 공간이 부족하여 일부 자료는 본인 사옥과 경기도 여주의 컨테이너에 보관 중이다. 현재로선 서울시가 됐건, 국가가 됐건 공간 지원을 공식적으로 요청하고자 관청과 접촉도 해 보았지만 아직은 논의만 있고 실행된 것은 없다. 올바른 아트아카이브 구축은 한국 현대미술이 국제적인 경쟁력을 얻기 위한 첫걸음인 동시에 우리의 특수성 확보와 위작 시비를 줄일 수 있는 당면과제이다. 그러기에 아트아카이브의 활동은 단순히 자료를 보존한다는 일차적 역할에서 나아가 한 나라의 미술문화를 온전히 보전하는 것으로 문화적 정체성을 고취할 수 있는 기반이다. 여러 문제가 사회적인 치매증상으로 이어져 더 큰 문제를 초래하기 이전에 정부는 많은 지원을 뒷받침해주어야 한다.

 

박물관의 희귀소장품은 국립중앙박물관, 국립현대미술관, 사립미술관에서 기획전을 하면서 대여 요청으로 나가고 있다. “일본, 홍콩, 미국, 영국 등 외국에서도 한국미술 자료를 열람하려고 찾아오고 있다..그럴 때면 마음이 뿌듯하지요. 앞으로 남은 꿈은 그동안 모은 방대한 자료를 DB화하여 미술자료 도서관을 만드는 것입니다.”

 

간혹 융통성 없다는 말을 듣기도 할 만큼 정확하고 틀림없는 사람, 김달진 관장. 자신이 좋아하는 일을 하기 위해 세상과 돈과 타협하지 않고 살아온 그는 천천히 걷는 자가 멀리 간다’, ‘작은 물방울이 모여 강물을 이룬다는 성실의 가치를 삶으로 증명하고 있다. 지금도 서울아트가이드 편집인으로 이제는 유튜브 방송까지 하며 한국아트아카이브협회장, 한국박물관협회 감사, 한국사립박물관협회 이사이며 한국외국어대 대학원 정보기록학과에서 강의하고 있다.


                - 한국사립박물관협회 홈페이지  

                     http://pmuseums.org/bbs/board.php?bo_table=brd_story&wr_id=28&page=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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