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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삶 나의 보람

김달진

- 나의 삶 나의 보람 -
한국 현대미술의 올바른 기록
김달진(김달진미술연구소장)

얼마전 정모씨로부터 e-mail이 날아왔다. 미술서적을 출판하는데 도판자료가 필요하다며 22점 작품 목록까지를 첨부시켰다. 지난 4월에는 미국 펜실베니아에서 미술사를 공부하는 대학원생 박모씨로부터 미술자료를 찾는 편지를 받기도 했다. 그 내용은 “한국전쟁 당시 국방부 정훈국 미술대 소속으로 많은 화가들이 종군화가단에 참가해서 활동한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정확히 얼마나 많은 화가들이 어디에서 어떤 활동을 했는지, 그리고 참여한 작가들은 누구누구인지 자료를 구하고 싶습니다.” 라는 것이었다.

이런 사례 이외도 작가의 주소를 묻거나 자기가 소장하고 있는 작품의 작가를 찾아달라는 문의 등으로 다양하다. 지금이야 미술계에서 “김달진”하면 모르는 사람이 없을 만큼 유명인이 되어 있다. 나는 미술자료전문가로 불리어지는 게 합당하다고 생각하는데 나를 사랑하는 많은 사람들이 “걸어 다니는 미술사전”이니 “미술자료 컴퓨터”, “금요일의 사나이”로 별명을 붙였다.

꼬마 수집광시대

나는 5남1녀 가운데 막내로 태어났다. 바로 위가 누님이며 큰 형님은 아버지처럼 느껴질 만큼 나이 차이가 많다. 어머니는 초등학교 4학년 때 돌아가셨다. 내성적인 성격에 맞게 수집이랄 것도 없는 단순히 모으는 취미가 생겼다. 주위에서 접할 수 있는 담뱃갑, 껌종이, 동전도 좋았다. 다른 사람들 눈에는 지나칠 수 있는 것인데 모아서 정리했다. 그것들이 하나씩 쌓여 가는 모습을 보는 것이 내게 더할 나위 없는 즐거움이었다.

고향인 충북 옥천군 이원면에 있는 대성초등학교를 졸업하고 셋째 형님이 계신 대전으로 나와 충남중학교를 다니면서 우표도 수집했다. 기념우표가 나오는 날은 우체국 창구에 남먼저 달려갔다. 우표상을 통해 사기도 하고 교환도 해서 꽤 모았다. 당시 인기를 끌던 동화시리즈, 조선시대 명화시리즈 등은 지금도 가지고 있다.

그렇게 닥치는 대로 모으던 수집품 중에는 미술에 관련된 것으로 명화 도판도 있다. 주부생활, 여원, 여성동아 등 여성잡지에 컬러 인쇄로 실린 세계의 명화가 눈에 띄어 습관처럼 모으기 시작했다. 그림을 모으는 일은 다른 수집과는 또다른 재미가 있었다. 처음엔 보기 좋아서 모았고, 그림에 관련된 이야기들을 읽는 것에 재미를 느끼게 되고, 차츰 미술관련 도서 등으로 관심이 확대되었다. 체계적으로 정리해 보고 싶어서 <서양 미술사>(이영환 저)를 열심히 읽었다. 그렇게 몇 년이 지나자 나름대로 서양미술의 흐름을 유파별 중심으로 파악할 수 있었다.

월간 전시계시대

서울로 올라와 고등학교를 다녔다. 그 때 ‘한국근대미술 60년전’을 관람한 것은 내 인생에 막대한 영향을 끼친 계기였다. 1972년 고3때는 그림 도판수집에서 벗어나 작가 개인별 자료수집에서 미술사쪽으로 넘어 가고 있었다. 마침 경복궁 국립현대미술관에서 전시하는 ‘한국근대미술 60년전’을 관람하러 가는 가슴속은 뜨겁게 달아올랐다. 이중섭, 박수근, 김환기, 이상범의 작품을 직접 본다는 감동 외에도 자료로만 알았던 근대작가의 작품들을 대하는 일은 반갑기 그지없었다. 그러나 유명작가에 관해서는 화집이나 팜플렛을 통해 자료 조사가 쉬웠지만 그렇지 못한 많은 작가들에 대해서는 상대적으로 어려웠다. 이를 계기로 단순히 취미에 불과했던 수집벽은 드디어 목적성을 갖게 된다. 한국 근대미술작가에 대한 기록이 빈약했기 때문에 나는 그 일에 직업적 소명의식을 가질 수 있었다. 내가 해내야만 하고, 또 해낼 수 있을 것이라는 생각에 인생을 투자하기로 결심했다.

이듬해 고등학교를 졸업한 나는 본격적으로 미술자료수집 공부를 하기로 했다. 그러나 우리 미술계에 자료분야는 황무지나 다름없었다. 갑갑한 나머지 미술잡지사, 화랑 미술관, 미술평론가 등에게 일일이 편지를 보냈다. 지금까지 모아왔던 미술자료, 미술에 대한 열정, 미술계에 뼈를 묻고 싶다는 내용이었다. 하지만 막 고교를 졸업한 젊은이의 치기로 치부하였는지 대부분 답장은 오지 않았다. ‘취미가 직업으로 이어지기는 힘들 것’이라는 <뿌리깊은 나무> 편집장의 유일한 격려문만이 지금도 생생하다.

병역의무를 마친 1978년, 동대문도서관에서 월간 <전시계>가 눈에 띄었다. 나는 편지를 보냈고 같이 일해보자는 답장을 받았다. 그렇게 해서 처음의 직장을 얻게 된 기쁨은 말할 수 없이 큰 감격으로 밀려왔다. 처음 <전시계>는 산업전시를 함께 다루다가 미술전시로 한정했다. 전시작품, 기간, 장소를 화보 중심으로 발행하다가 전시 내용을 자세히 소개하면서 좋은 반응을 불러 일으켰다.

용왕매진하는 가운데 조그마한 사고가 일어나기도 했다. 미도파화랑에서 열린 어느 한국화가의 “무적의 후예”라는 작품에 대하여 ‘독수리를 그린 건지 병아리를 그린 건지 모르겠다’라고 기사화한 사건이 있었다. 작가의 거친 항의가 있었고 직장 상사의 중재로 화해했던 이 사건은 젊은 혈기를 가다듬을 수 있는 좋은 경험이 되었다.
이 무렵 한국근대 작고미술가 인명록, 근대미술단체 및 주요 전시회를 기획물로 연재도 하였다. <전시계>에서의 생활은 내게 좋은 경험을 하게 해주었으나 1980년 여름 군사정권이 일으킨 언론 통폐합으로 문을 닫고 만다.

국립현대미술관시대

폐간된 <전시계>의 사장이 미술연감을 만들어 보겠다고 몇 달을 준비하다가 1981년 1월에 결국은 사무실 문을 닫고 말았다. 나는 청주로 내려가서 레스토랑을 하는 누님의 일을 거들었다. 8월에 이경성 홍익대 박물관장이 국립현대미술관장에 임명되었다는 신문 기사를 보았다.

고등학교 3학년 시절 나는 홍익대 박물관장이던 이경성관장님을 찾아가 그 동안 모아두었던 스크랩자료를 보여 드린 일이 있었다. 관장님을 찾아가 넙죽 절하고 그간 모아서 정리했던 스크랩북을 줄줄이 펼쳐 보였다. 관장님은 내 등을 두드리며 다음에 기회를 보자고 말씀 하셨었다.

그 때를 상기하여 관장님을 찾아갔다. 청소부든 뭐든 좋으니 미술관에서 일을 하게 해달라고 말씀드렸다. 바로 서무과장과의 면담이 이루어졌고 나는 1981년 9월에 일당 4,500원의 임시직이지만 국립현대미술관 인생은 이렇게 시작된다. 당시 현대미술관엔 학예직이 없었고 전문위원으로 한 사람 미술평론가 오광수선생님이 계셨다. 덕수궁 석조전에 있었던 미술관 동관 1전시실을 비워 전문위원실과 자료실이 만들어졌다. 각지의 화랑에서 열리는 전시 팜플렛이 미술관으로 배달되어도 수집의 한계가 있었다. 자료를 보내주면 수집 정리가 되지만 그렇지 않으면 누락될 수밖에 없는 것이었다.

몇 차례 제의 끝에서야 금요일 출장을 나가 전시장 순회를 시작할 수 있었다. 미술관에 출근해 도장을 찍고 덕수궁을 나서서 신문회관을 시작으로 사간동, 인사동 일대를 돌고 서울대병원을 가로질러 동숭동엘 가면 거의 모든 전시회를 볼 수 있었다. 아무래도 배달되어진 팜플렛보다는 직접 작가들의 작품을 눈으로 볼 수 있는 것이 좋았다. 실제 작품과 팜플렛 작품사진이 동일한지를 확인하고 출품 작품 수까지 세어 표시를 하기도 했다. 그러나 1980년대 중반 강남 신사동 청담동 화랑이 늘어나고 전시회가 기하급수적으로 팽창하면서 모든 전시회를 돌아볼 수는 없었다.

그러는 동안 팜플렛 작품과 실제 전시작품이 다른 것과 어떤 작품은 같은 기간에 열리는 두 전시회에 자료가 실리는 것도 발견했다. 1985년 계간 미술잡지 <선미술>의 주간으로 계셨던 유홍준선생님의 권유로 나는 다시 사고를 쳤다. 제목은 ‘관람객은 속고 있다’로 지난 세월동안 모아온 자료들을 바탕으로 이루어진 나의 첫 번째 고발이었다. 이 글의 부제는 ‘정확한 기록과 자료보존을 위한 제언’이었는데 작가의 약력, 작가의 연보, 미술연표, 미술연감 등에 나타난 오류, 오기, 누락의 사례를 들며 심각성을 환기시켰다. 이 글의 내용이 신문에 인용 보도되었으나 정확한 근거자료를 바탕으로 했기에 아무도 이의를 제기할 수 없었다.

내가 미술계에 본격적으로 글을 쓰기 시작한 것은 1989년부터로 1년에 5건에서 10건씩을 썼다. ‘60여개의 미술공모전, 그 실상과 허상’, ‘공예대전-통계로 본 역사와 현황’, ‘1980년대 한국미술연표’, ‘미술상의 실상을 분석한다’, ‘미술연감은 발행되어야 한다’, ‘동구미술 어디까지 왔나’, ‘미술잡지의 홍수, 실상을 분석한다’ 등 미술계의 현황을 자료조사 통계를 근거로 밝혔다. 그때마다 일간지에 인용되어 여러 사람들의 좋은 반향으로 메아리쳐 돌아왔다. 1989년 한 일간지에서 젊은 문화주역으로 개인 인터뷰가 소개되며 이름이 일반인에게도 알려지기 시작했다.

나를 가장 슬프게 했고 가장 분노를 사게 한 일은 고졸이라는 학력이었다. 미술 자료에 관한 일은 누구보다도 잘 할 수 있는 능력과 자신감이 넘쳐났지만 학력을 우선시하는 사회 풍토는 예나 지금이나 사회발전의 걸림돌이 분명하였다. 거기에 적응하기 위해서는 체계적인 학습이 필요하다는 것을 실감했다.
1985년에 성균관대 한국사서교육원을 수료하고 준사서자격증을 받았고 2년 뒤에는 비로소 서울산업대 금속공예과를 지원했다. 서울산업대를 지원한 사유는 학력고사를 피해 영어, 석고데생, 정밀묘사 시험만으로 입학이 가능했기 때문이다. 말이 대학이지 두 번 낙방하고 1989년 서른네 살에 대학생이 된 느낌을 어찌 말하겠는가. 물론 금속공예가를 꿈군게 아니고 대학원을 진학하기 위한 과정으로 생각했다.

대학에서 배운 것은 한 점의 작품을 위해 수없이 많은 스케치와 과정을 거쳐서야 하나의 작품이 완성된다는 사실이었다. 보잘것없어 보이는 작품이라도 작가는 최선을 다한다는 사실을 알고부터 작품을 진지하게 대하기 시작했다. 1996년엔 대학원 재학 중에 수원대학교의 요청으로 강의를 맡기도 했다. 그러나 나는 성격상 강의하는 교수와는 거리가 멀다는 것을 느끼고부터 강의를 그만두었다. 드디어 1999년 ‘국내 미술자료 실태와 관리개선 방안연구’라는 논문으로 중앙대학교 예술대학원 문화예술학과를 졸업하였다.

그 이전인 1995년 3월 3일 덕원갤러리에서 <바로보는 한국의 현대미술> 출판기념회를 한국근대미술사학회가 주관하여 열었다. 예술의 전당 전시사업본부장 이구열, 국립현대미술관 학예실장 박래경, 한국미협 이사장 이두식, 한국근대미술사학회 회장 윤범모 씨의 축사가 있었다. 서울대 하동철, 전준, 김병종, 홍익대 김용철, 중앙대 안병석, 이화여대 유희영 교수와 미술평론가 김인환, 윤진섭, 서성록, 오병욱씨 등을 비롯한 미술 관계자 및 멀리 사는 친구와 친척들을 비롯한 300여 명이 성황을 이루며 격려해 주었다.

책을 내야겠다고 생각한 것은 7년 전인 1988년인데 이경성 관장님이 조금 더 기다려 보라며 만류하셨고 끝내 기다린 보람이 있어 출판사 쪽에서 제의가 들어왔다. 이경성관장과 미술평론가 유홍준 선생님 두 분이 추천사를 주셨다. 이 책은 495쪽으로 우리 현대미술의 역사를 자료로 정리하고 미술계의 이면을 살핀 것이다.

- 국립현대미술관의 김달진 하면 나보다도 우리 미술계가 더욱 잘 아는 존재이다. 그와 같은 사람은 미술관이 제대로 돌아가고 또 미술계가 올바르게 발전하려면 꼭 필요한 기본적인 인재이다. 그러나 이것은 누가 시켜서 하는 것이 아니라 김군처럼 자기가 좋아서 자연스럽게 즐기면서 해야하는 것이다. - 이경성 (전 국립현대미술관장)

- 현대미술에 관한 한 어줍지 않은 나의 비평문은 잠시간의 반짝임만으로 그 생명이 끝나고 말건만, 김달진의 명확한 자료와 함께 제시한 증언들은 그 자체가 사료로서 영원히 살아남을 것 같다. 이점을 생각하니 나의 삶이 대단히 소비적인 것이며 고달파 보이던 김달진의 작업과 글쓰기가 진짜 복되고 보람찬 것이라는 생각까지 든다. - 유홍준 (미술평론가)

나는 국립현대미술관에서 1981년부터 86년까지 일용잡급, 1987년부터 89년까지 별정직 7급 상당, 90년부터 공무원 10등급 기능직으로 땀을 흘려 일했다. 단지 선임자가 정년 퇴직할 때까지 기다려 자료정리 별정직 8등급으로 만족하기에는 미흡했다. 자료실 인원도 1983년의 전시회가 한 해 2천여건에 이었던 것이 1994년 5천4백 건이 넘는 전시자료와 기하급수로 늘어나는 미술인 카드 관리를 2명의 직원으로는 감당할 여지가 없었다. 아무리 국립미술관이라지만 일한만큼 대우를 못받으며 40이 훌쩍 넘는 나이에 머무르고 있을 수는 없었다. 그래도 내 젊음을 보낸 14년 5개월 간의 국립현대미술관 자료실은 마음 속에 언제나 남아 있다. 내가 만들어간 공간, 내 손때가 묻은 자료들······

가나아트갤러리시대

1996년 2월부터 가나미술연구소 자료실장의 일이 기다리고 있었다. 가나미술연구소는 우리나라 최고 화랑의 하나인 가나화랑에서 설립운영하며 미술잡지 <가나아트>를 발간하고 미술컨설팅도 하였다. 나는 자료실 운영, 미술저작권 사업, 가나아트 잡지 편집에 참여하고 <화랑․미술관 전시회 가이드>를 만들었다. 이 가이드는 격월간으로 시작하였는데 서울의 160여개 화랑 및 미술관에서 열리는 전시회 일정, 전시장의 위치와 주소, 전화번호를 수록하여 미술애호가들이 좋은 작품을 쉽게 접할 수 있도록 도움을 주고자 제작된 것이다.

1997년엔 더 기쁜 일이 있었다. 제2회 월간미술대상에서 특별부문 장려상을 받게 된 것이다. 선정 사유는 ‘미술자료 수집 정리’였다. 아직 해야 할 일이 많은데 상을 미리 받아 쑥스러웠지만 더 잘하라는 격려의 의미로 받아들였다. 1999년에는 정보통신정책연구원에 의해 ‘한국신지식인’으로 선정되었다. 2000년 1월에 첫 미술 전문 포탈 사이트인 (주)가나아트 닷컴(www.gana
art.com)의 총괄팀장을 맡았다. 경영에 대한 마인드도 없고, 인터넷에 대한 지식도 부족한 때였다. 온라인을 통한 미술품, 아트상품 매매에는 한계가 있고 20명이 넘는 인력 관리도 힘들었다. 얼마 안가 회사는 축소되고 나는 다시 가나아트센터 자료실장으로 복귀했다.

가나화랑에서 근무하며 보람 있었던 일은 1997년 두 차례의 짧은 일본 여행과 2001년 3월 한 달간 파리에 머물며 유럽 5개국 12개 도시의 36개 박물관과 미술관을 섭렵한 일이었다. 프랑스의 퐁피두센터, 루브르박물관, 오르세미술관, 피카소미술관, 로댕미술관, 샤갈미술관, 영국의 대영박물관, 데이트갤러리, 내셔널갤러리, 네덜란드의 암스테르담국립미술관, 반 고흐미술관, 독일의 페르가몬박물관, 게멜데갤러리, 신국립미술관, 피나코테크미술관, 이탈리아의 바티칸박물관, 우피치미술관, 보르게제미술관 등 일정이 벅찼다. 처음 나가는 유럽이라 과도한 욕심으로 강행군을 하면서 참으로 많은 것을 체험했다. 특히 유럽여행은 부부 동반으로 내 생애 최고의 추억이 되었다.

해야 할 일이 많다

2001년 12월 가나아트센터에서 5년 10개월 근무를 마감하고 독립하였다. 김달진미술연구소! 내 이름을 건 나만의 일터는 가슴 벅찬 환희와 두려움으로 다가왔다. 가나화랑의 <서울전시회가이드>를 보완하여 <서울아트가이드>를 창간하였다. 전시회 정보만이 아니라 ‘이경성칼럼’, ‘나의 발언’, ‘다시 읽기’, ‘미술평론가가 평가한 전시회’, ‘미술 신간’ 등을 읽을거리로 제공하며 잡지형식을 갖추었다. <서울아트가이드> 외에도 작가별 자료 정리, 작고 미술가 인명록, 미술계 주소록 등도 차근차근 작업해 나가려는 것이 나의 바램이다. 지금은 아트컨설팅을 진행하며 김달진미술연구소(www.daljin.com) 홈페이지를 구축해 가고 있다. 이곳에서는 온라인의 특성을 살리며 정보제공에 힘쓸 것이다. 그 동안 발표했던 미술자료 정리와 글이 어느 덧 120여 편을 넘었고 두 번째 책도 금명간 발간될 것이다.

나는 사는 동안에 두 사람의 큰 은인을 만났다. 먼저 석남 이경성관장님을 인연으로 해서 국립현대미술관에서 근무를 했으며 석남미술문화재단에서 대학, 대학원의 장학금을 받았다. 또 가나화랑의 이호재사장의 도움도 커서 내가 독립의 꿈을 펼칠수 있었다. 처음에는 취미였던 미술자료 수집이 천직이 되고 사회적으로 인정을 받기 시작하면서 나의 일은 신문 전면 인터뷰, 라디오 드라마, 텔레비젼의 단독프로 방영까지 과분한 주목을 받아왔다. 미술자료 수집 30년! 팜플렛, 도록이 담긴 무거운 가방을 메고 다녀 내 오른쪽 어깨는 처져 있다. 이제 미술자료전문가로 오늘의 현상을 보다 정확하게 정리해서 남겨야겠다는 사명감과 기록자의 입장에서 일을 한다. 아직도 나는 해야 할 일이 너무 많이 남아 있다. 일복이 많은 사람이다.

어느 미술담당 기자가 나에게 너무 편집광적인 것이 아니냐며 반문했지만, 전문가이기 때문에 미술자료의 잘못된 부분이 먼저 눈에 들어오고 발견하는 순간 바로 잡아야 된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미술계가 외형적으로는 비대해졌으나 체계적인 자료정리가 없는 현실이 안타깝다. 제대로 된 미술인명감, 미술가사전이 없는 실정이다. 현대미술의 역사를 정리하는 기초자료들을 끌어 모아 정리하는 일을 계속하고자 한다. 덧붙여 미술자료를 찾는 사람에게 안내자 역할을 하고자 한다. 자료에 대한 몰이해와 부정확함 때문에 제대로 미술사 서술이 어렵다는건 미술계 발전의 큰 어려움이 아닐 수 없다. 내가 했던 말 ‘오늘의 정확한 기록이 내일의 정확한 역사로 남는다’는 말을 늘 상기한다. 그 난제를 푸는데 조그만 힘을 보태고 살아간다. 그래서 오늘도 무거운 가방을 메고 인사동 거리를 걷고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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