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고


컬럼


  • 트위터
  • 인스타그램1604
  • 유튜브20240110

연재컬럼

인쇄 스크랩 URL 트위터 페이스북 목록

<문화기획자> 미술자료전문가 김달진

김달진

문화기획자
- 미술자료전문가 김달진 (김달진미술연구소 소장)


내가 하는 일은 무엇인가

우리는 급변하는 사회, 정보의 홍수 속에 살고 있다. 지금 우리 앞에는 정보사회라는 새로운 사회가 색다른 문화를 잉태하고 있는 중이다. 정보사회란 정보가 물질이나 에너지 이상의 가치를 가지는 사회이다. 미술분야에 있어서 정보는 시간적 추이와 새로움을 찾는 수요에 부응하여 새로운 미술사조와 세계 미술계의 현실을 직시하는데에 이바지함으로써 우리 미술의 주체적인 확립, 넓게는 우리 미술이 세계미술 속으로 진입하는데 중요한 요소로 작용한다. 이제 미술계도 인터넷을 통해 세계의 미술관, 화랑, 미술대학, 연구소, 작가, 경매, 전시회, 미술관련 이벤트 등 수많은 정보를 얻어 유용하게 사용하는 추세이다. 첨단매체와 통신을 이용하여 미술정보를 영상으로 얻을 수 있고 안방에서 작품감상을 하게 되었다. 국내에서도 미술관, 화랑 및 작가들이 미술사이트를 만들고 업체까지 가세하고 열풍이 대단하다. 미술공간도 확대되어 건축물 안의 전시장 또는 야외 공간에서의 전통적인 전시회 외에도 컴퓨터라는 가상공간에서의 전시회도 증가하고 있다. 전 세계인을 대상으로 자신의 작품을 소개하고 판매로 연결도 시킨다.

얼마전 정모씨로부터 이메일이 날아왔다. 미술서적을 출판하는데 도판자료가 필요하다며 22점 작품 목록까지를 첨부시켰다. 지난 4월에는 미국 펜실베니아에서 미술사를 공부하는 대학원생 박모씨로부터 미술자료를 찾는 편지를 받기도 했다. 그 내용은 “한국전쟁 당시 국방부 정훈국 미술대 소속으로 많은 화가들이 종군화가단에 참가해서 활동한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정확히 얼마나 많은 화가들이 어디에서 어떤 활동을 했는지, 그리고 참여한 작가들은 누구누구인지 자료를 구하고 싶습니다.” 라는 것이었다. 또 하나의 사례를 든다면 “중국에서 월북작가인 김주경, 정종녀 등 작품을 구해왔는데 가격이 얼마하느냐”는 질문 이외도 작가의 주소를 묻거나 자기가 소장하고 있는 작품의 작가를 찾아달라는 내용 등으로 다양하다. 지금이야 미술계에서 “김달진”하면 모르는 사람이 없을 만큼 유명인이 되어 있다. 나는 미술자료전문가로 불리어지는게 합당하다고 생각하는데 나를 사랑하는 많은 사람들이 “걸어 다니는 미술사전”이니 “미술자료 컴퓨터”로 별명을 붙였다.

미술자료 수집을 하는 사람은 많지만 이 일과 관련된 글과 자료를 발표하고 저서를 내면서 그들과는 차별화되었다. 정확한 자료를 바탕으로 미술판 현장의 흐름을 꼬집어 내고 우리 현대미술의 기초 사료를 기록자로서 정리해 나간 것이다. 과거 국립현대미술관, 가나화랑에서 미술자료 수집과 정리에 치중했었다. 2002년부터 독립적으로 김달진미술연구소를 시작하고는 <서울아트가이드> 발행과 운영으로 제공자로서 역할이 커졌다. 나의 하루는 신문 보기에서 시작된다. 하루 전날 인터넷에서 미술기사를 찾아 사이트에 올린다. 대개 신문별로 문화면에 미술기사가 나는 요일이 있어 잠자리에 들기전에 올리고 아니면 다음 날 출근 전에 올린다. 이는 남보다 먼저 내 자신이 정보를 접하고 달진닷컴을 찾는 유저에게 빠른 소식을 전해주기 위함이다. 사무실에 출근해 신문을 보고 누락 된 것은 보완한다. 우리 홈페이지 뉴스 메뉴바 밑에는 신문 미술기사 클리핑인 투데이스 톱, 미술계동정, 공모전, 신간 미술도서, 미술잡지 등이 빠르게 업데이트되고 있다.

<서울아트가이드>는 2002년 1월 12쪽 접지로 창간하여 꾸준히 지면이 늘어나 접지 52쪽으로 증면되었다. 이 가이드는 월간으로 210여개 미술관 화랑의 전시회 정보만이 아니라 미술평론가, 큐레이터의 ‘나의 발언’, ‘다시 읽기’, ‘전시 리뷰’, ‘신간 미술도서’ 등을 읽을거리로 제공하며 잡지형식을 갖추었다. 또 하나 무가지로 전시 정보를 찾거나 전시장을 방문하는 미술인, 일반인들에게 사랑을 받고 매월 발행 부수가 모자라고 있다. 앞으로 연구소는 작가별 자료 정리, 작고 미술가 인명록, 미술계 주소록 등도 차근차근 작업해 나가려는 것이 나의 바램이다. 작가별 자료정리는 주요 작가와 관련된 자료를 모아나가고 색인화하는 작업이다. 작고 미술가 인명록은 유명작가 뿐만 아니라 묻혀지고 잊혀져가는 작가들을 정리해나가며 기본 안내자의 역할을 하기 위함이다. 미술계 주소록은 미술계에서 필수적으로 필요로 하는 미술가, 미술관련 기관 단체 등의 주소를 제공해주는 일이다.

달진닷컴 www.daljin.com은 2002년 9월 오픈하여 2004년 1월 전면개편을 거쳐 빠른 정보, 풍부한 컨텐츠로 최강의 미술사이트로 자리잡아 가고 있다. 미술자료실 메뉴바 밑에 인명사전(일명 art 114)은 온라인의 장점을 살려 필요한 작가를 쉽게 찾아 볼 수있게 만들어 가고 있다. 현재 사이트에서 모아지고 있는 미술학회지 논문색인, 폐간 미술잡지 주요 기사 색인은 현재 발행되고 있는 미술잡지와도 통합시켜 주제별로 자료를 검색할 수 있는 체제로 꾸며갈 것이다. 사실 앞에 제시한 몇 건은 활성화를 위해 개인의 능력으로 한계가 있어 공공기관의 지원도 이끌어 내야하는 문제이다.

시작하게 된 배경

나의 미술계의 입문은 자료 수집이 출발이었다. 어린 시절 모으는 취미가 있어 주위에서 접할 수 있는 담뱃갑, 껌종이, 동전 등을 좋아 했다. 다른 사람들 눈에는 지나칠 수 있는 것인데 모아서 정리했다. 그것들이 하나씩 쌓여 가는 모습을 보는 것이 내게 더할 나위 없는 즐거움이었다. 고향인 충북 옥천군 이원면에 있는 대성초등학교를 졸업하고 셋째 형님이 계신 대전으로 나와 충남중학교를 다니면서 우표도 수집했다. 기념우표가 나오는 날은 우체국 창구에 남먼저 달려갔다. 우표상을 통해 사기도 하고 교환도 해서 꽤 모았다. 당시 인기를 끌던 동화시리즈, 조선시대 명화시리즈 등은 지금도 가지고 있다.

그렇게 닥치는 대로 모으던 수집품 중에는 미술에 관련된 것으로 명화 도판도 있었다. 주부생활, 여원, 여성동아 등 여성잡지에 컬러 인쇄로 실린 세계의 명화가 눈에 띄어 습관처럼 모으기 시작했다. 그림을 모으는 일은 다른 수집과는 또다른 재미가 있었다. 처음엔 보기 좋아서 모았고, 그림에 관련된 이야기들을 읽는 것에 재미를 느끼게 되고, 차츰 미술관련 도서 등으로 관심이 확대되었다. 체계적으로 정리해 보고 싶어서 <서양 미술사>(이영환 저, 박영사)를 열심히 읽었다. 그렇게 몇 년이 지나자 나름대로 서양미술의 흐름을 유파별 중심으로 파악할 수 있었다.

서울로 올라와 고등학교를 다녔다. 그 때 ‘한국근대미술 60년전’을 관람한 것은 내 인생에 막대한 영향을 끼친 계기였다. 1972년 고교 3학년때는 그림 도판수집에서 벗어나 작가 개인별 자료수집에서 미술사쪽으로 넘어 가고 있었다. 마침 경복궁 국립현대미술관에서 전시하는 ‘한국근대미술 60년전’을 관람하러 가는 가슴속은 뜨겁게 달아올랐다. 이중섭, 박수근, 김환기, 이상범의 작품을 직접 본다는 감동 외에도 자료로만 알았던 근대작가의 작품들을 대하는 일은 반갑기 그지없었다. 그러나 유명작가에 관해서는 화집이나 팜플렛을 통해 자료 조사가 쉬웠지만 그렇지 못한 많은 작가들에 대해서는 상대적으로 어려웠다. 일제시대 선전에서 특선을 했거나 국전에서 심사위원까지 지낸 작가인데도 약력이나 남아있는 자료 찾기가 어려움이 많았다. 이를 계기로 단순히 취미에 불과했던 수집벽은 드디어 목적성을 갖게 된다. 한국 근대미술작가에 대한 기록이 빈약했기 때문에 나는 그 일에 직업적 소명의식을 가질 수 있었다. 내가 해내야만 하고, 또 해낼 수 있을 것이라는 생각에 인생을 투자하기로 결심했다.

이듬해 고등학교를 졸업한 나는 본격적으로 미술자료수집 공부를 하기로 했다. 그러나 우리 미술계에 자료분야는 황무지나 다름없었다. 갑갑한 나머지 미술잡지사, 화랑 미술관, 미술평론가 등에게 일일이 편지를 보냈다. 지금까지 모아왔던 미술자료, 미술에 대한 열정, 미술계에 뼈를 묻고 싶다는 내용이었다. 하지만 막 고교를 졸업한 젊은이의 치기로 치부하였는지 대부분 답장은 오지 않았다. ‘취미가 직업으로 이어지기는 힘들 것’이라는 <뿌리깊은 나무> 편집장의 유일한 격려문만이 지금도 생생하다.

병역의무를 마친 1978년, 동대문도서관에서 월간 <전시계>가 눈에 띄었다. 나는 편지를 보냈고 같이 일해보자는 답장을 받았다. 그렇게 해서 처음의 직장을 얻게 된 기쁨은 말할 수 없이 큰 감격으로 밀려왔다. 처음 <전시계>는 산업전시를 함께 다루다가 미술전시로 한정했다. 전시작품, 기간, 장소를 화보 중심으로 발행하다가 전시 내용을 자세히 소개하면서 좋은 반응을 불러 일으켰다. 이 무렵 “한국근대 작고미술가 인명록”, “근대미술단체 및 주요 전시회”를 기획물로 연재도 하였다. 원로작가 청강 김영기선생의 낙원동 화실을 드나들며 정리해 놓은 자료도 받았다. <전시계>에서의 생활은 내게 좋은 경험을 하게 해주었으나 1980년 여름 군사정권이 일으킨 언론 통폐합으로 문을 닫고 말았다. 폐간된 <전시계>의 사장이 미술연감을 만들어 보겠다고 몇 달을 준비하다가 1981년 1월에 결국은 사무실 문을 닫고 말았다.

나는 청주로 내려가서 레스토랑을 하는 누님의 일을 거들었다. 8월에 이경성 홍익대 박물관장이 국립현대미술관장에 임명되었다는 신문 기사를 보았다. 고등학교 3학년 시절 나는 홍익대 박물관장이던 이경성관장님을 찾아가 그 동안 모아두었던 스크랩자료를 보여 드린 일이 있었다. 관장님을 찾아가 넙죽 절하고 그간 모아서 정리했던 스크랩북을 줄줄이 펼쳐 보였다. 관장님은 내 등을 두드리며 다음에 기회를 보자고 말씀 하셨었다. 그 때를 상기하여 관장님을 찾아갔다. 바로 서무과장과의 면담이 이루어졌고 나는 1981년 9월에 일당 4,500원의 임시직이지만 국립현대미술관에서 인생은 이렇게 시작되었다. 잠깐 뒤돌아보면 적극적인 삶이 나를 있게 만들었다. 생면부지의 사람들에게 이런 일을 하겠다고 나를 소개하는 편지를 내밀었고 그 과정에서 미술평론가 홍익대 이경성 교수를 만난 인연으로 국립현대미술관에 취직했다.

내가 몸담고 있는 이 직업군의 현황

미술계에도 전시기획하는 큐레이터 뿐만 아니라 세분화된 다양한 전문 인력을 필요로 한다. 경매사, 아트딜러, 작가매니지먼트, 보존관리자, 등록담당자, 교육운영자, 전시디자이너, 자료관리자 등... 또 다른 직종이 기다리고 있을 것이다. 사실 자료의 중요성은 아무리 강조해도 부족함이 없으며 모든 일은 자료찾기에서 시작되는 것이다. 무슨 전시를 기획하면 전에 그런 내용의 전시가 없었나 확인이 필요하고 작가를 알아야 한다. 비미술 전공자로 대학원에서 미술이론을 전공한 큐레이터들은 어느 기간의 연륜이 쌓여야 미술계에서 일을 제대로 해낼 수 있는 것이다.

이제 미술계에서 내 이름 석자면 미술자료전문가로 알려져 있다. 중학교 시절 잡지책에서 인쇄된 명화를 뜯어 모으던 취미가 결국은 나의 직업이 되고 천직이 된 셈이다. 미술자료 수집해서 밥먹고 살 수 있을까 의문이었지만 내가 좋아하는 일을 하고 사회적으로 인정을 받으니 보람된 일이다. 고교만 졸업하고 미술잡지에서 3년, 국립현대미술관 자료실에서 15년, 가나화랑 자료실장으로 6년을 거쳐 이제는 독립을 했다. 직장은 바뀌었지만 나는 미술자료를 정리하는 직업은 이어지고 있다. 당시 국립현대미술관에는 학예직이 없었고 전문위원으로 한 사람 미술평론가 오광수선생님이 계셨다. 덕수궁 석조전에 있었던 미술관 동관 1전시실을 비워 전문위원실과 자료실이 만들어졌다.

나는 국립현대미술관에서 1981년부터 86년까지 일용잡급, 1987년부터 89년까지 별정직 7급 상당, 90년부터 공무원 10등급 기능직으로 땀을 흘려 일했다. 단지 선임자가 정년 퇴직할 때까지 기다려 자료정리 별정직 8등급으로 만족하기에는 미흡했다. 자료실 인원도 1983년의 전시회가 한 해 2천여건에 이었던 것이 1994년 5천4백 건이 넘는 전시자료와 기하급수로 늘어나는 미술인 카드 관리를 2명의 직원으로는 감당할 여지가 없었다. 아무리 하나 뿐인 국립미술관이라는 배경은 좋지만 일한만큼 대우를 못받으며 마흔이 훌쩍 넘는 나이에 머무르고 있을 수는 없었다. 그래도 내 젊음을 보낸 14년 5개월 간의 국립현대미술관 자료실은 마음 속에 언제나 남아 있다. 내가 만들어간 공간, 내 손때가 묻은 자료들, 그 많은 추억과 사연은 영원하다. 2002년 8월 국립현대미술관 도서자료실에서 16년간 일해 온 유순남씨가 전시과로 인사발령에 부당성을 항의해 사표를 내고 미술관을 떠났다. 유씨는 국립현대미술관에 처음 임용될 당시 정사서 자격증이 있으면서도 사서직에 이미 다른 사람이 임용된 관계로, 통역직으로 발령받아 자료실에서 근무해 왔었다. 이 사건은 여러 신문에 비중있게 보도되었다.

국립현대미술관 도서자료실은 일반 도서관처럼 미술도서와 팸플릿 등을 구비해 놓고 도서 열람자를 단순히 안내하는 기능만으로 만족할 수 있는 곳이 아니다. 2차 자료의 생산뿐 아니라 한 나라의 미술문화에 대한 자료수집, 조사, 연구를 책임지고 있는 기구이다. 게다가 미술인들의 활동사항을 기록 관리하며, 현재 일어나고 있는 미술계의 활동을 수집 정리하고, 미술관 자체의 행정적인 기록까지 보존하는 아카이브 형태로의 발전이 필요한 곳이다. 미술관 자료실 사서는 자발적으로 좋아서 일을 찾아 만들어 가고 개발해 나가겠다는 사명감이 없으면 업무를 제대로 볼 수 없다. 필자도 1981년 국립현대미술관에서 일을 시작해 14년 5개월 동안 자료실에서 근무하다 1996년 기능직 10급이라는 한계에 절망해 뛰쳐나온 사람이다. 미술관 행정직들은 자료실 담당자들이 기능직 통역직으로 일하고 있는 문제를 개선해주는 해결책을 찾았어야 했다. 전문가를 우대하지 않는 한 각 분야의 현장에서 터득된 지식은 축적되지 않는다. 미술자료실에서 사서이면 경험없이도 누구나 일할 수 있다는 생각은 곤란하다. 그 후에도 여러 기획전의 도록과 명제표의 오류, 오기가 많이 있었다. 국가의 대표기관이 자료전문가에 대하여 이런 형편이니 다른 시립, 사립미술관이나 화랑에는 아예 자료 담당자가 없는 곳이 많다.

1996년 2월부터 가나미술연구소 자료실장의 일이 기다리고 있었다. 가나미술연구소는 우리나라 최고 화랑의 하나인 가나화랑에서 설립운영하며 미술잡지 <가나아트>를 발간하고 미술컨설팅도 하였다. 나는 자료실 운영, 미술저작권 사업, 가나아트 잡지 편집에 참여하고 <화랑․미술관 전시회 가이드>를 만들었다. 이 가이드는 격월간으로 시작하였는데 서울의 160여개 화랑 및 미술관에서 열리는 전시회 일정, 전시장의 위치와 주소, 전화번호를 수록하여 미술애호가들이 좋은 작품을 쉽게 접할 수 있도록 도움을 주고자 제작된 것이다. 2000년 1월에 첫 미술 전문 포탈 사이트인 (주)가나아트 닷컴(www.ganaart.com)의 총괄팀장을 맡았다. 경영에 대한 마인드도 없고, 인터넷에 대한 지식도 부족한 때였다. 온라인을 통한 미술품, 아트상품 매매에는 한계가 있고 20명이 넘는 인력 관리도 힘들었다. 얼마 안가 회사는 축소되고 나는 다시 가나아트센터 자료실장으로 복귀했다. 2001년 12월 가나아트센터에서 5년 10개월 근무를 마감하고 독립하였다.

현재 국내 미술자료실로는 국립현대미술관 도서자료실, 예술자료관, 한국미술기록보존소 등을 꼽을 수 있다. 그러나 국립현대미술관의 경우도 덕수궁시절 미술관 직제 30명 속에 자료담당은 한명이 없었고, 1986년 과천에 미술관을 신축하여 이전하며 직제가 100명으로 확대되었을 때도 사서 한명과 별정직 자료담당 한명으로 두명 뿐이었다. 몇 년간은 섭외교육과 소속으로 도서실, 자료실, 시청각실로 공간이 분리 운영되다가 시청각실이 자료실에 합쳐지고 그 후는 소속도 학예연구실로 바뀌었으며 자료실을 도서실로 이전 도서자료실로 운영되고 있다. 예술자료관은 서울 서초동 예술의 전당 안에 있지만 운영은 한국문화예술진흥원에서 한다. 한국미술기록보존소(Archives of Korea Art)는 삼성문화재단 삼성미술관 부설로 1999년 개소했으며 이 아카이브는 보존가치가 있는 기록물, 또는 보존기록을 관리하는 기관을 가르킨다. 최근에는 한국근 현대미술 기록에 대한 관심이 고조되고 있다. 2003년 9월에는 문예진흥원 주최, 한국예술종합학교가 주관하여 <한국근현대예술사 증언채록사업> 기초 사업을 위한 공개세미나도 가졌다.

대표적인 작업, 기억에 남는 작업 소개와 성과 정도 분석

내가 본격적으로 미술계에 알려진 계기는 1985년 계간 <선미술> 겨울호 ꡒ관람객은 속고 있다ꡓ라는 글을 발표한 후였다. 선미술은 선화랑이 발간했던 미술잡지로 미술평론가 유홍준 씨가 주간으로 있었으며 글 한편 쓰라는 부탁으로 ꡒ정확한 기록과 자료보존을 위한 제언ꡓ 이라는 부제였다. 날로 늘어나고 있는 미술출판과 전시회의 필수요건으로 되어 있는 팜플렛에서 기록을 살폈다. 작가의 화력, 팜플렛, 연표․연보, 연감 등에서 과장, 오기․오류, 누락 등을 사례를 들어 분석하여 기록이 매우 혼란스러워서 먼 훗날 무엇이 무엇인지를 가늠하기 힘든 일이 생긴 상황의 심각성을 환기시켜 비판했다. 이 내용이 당시 서울신문, 한국경제신문, 일간스포츠, 코리아타임스, 부산일보, 대전일보, 제주신문에 인용 보도되면서 큰 파장을 일으켰다. 그러나 지난 세월동안 모아온 정확한 자료들을 근거로 제시해 아무도 이의를 제기할 수 없었다.

내가 미술계에 본격적으로 글을 쓰기 시작한 것은 1989년부터로 1년에 5건에서 10건씩을 썼다. 1989년 ꡒ60여개의 미술공모전, 그 실상과 허상ꡓ,“공예대전-,통계로 본 역사와 현황”, ꡒ1980년대 미술계 10대 사건 10대 전시회ꡓ 1990년 ꡒ미술상의 실상을 분석한다ꡓ, ꡒ동구미술 어디까지 왔나ꡓ, ꡒ미술잡지의 홍수 실상을 분석한다ꡓ ꡒ외국작가 작품 국내전 40년 소사ꡓ, 1991년 “국립현대미술관 자료수집 현황”, 1992년 “미술계 표절 모방 시비”, “해외 아트페어 참가 화랑 급격히 늘어”, 1993년 “새로운 매체 새로운 미술운동 소사”, “한국공예 해외전, 외국공예 국내전 20년 소사”, “국제전 진출. 개최 30여년 그 실상과 허상”, 1994년 “올해 공모전 이렇게 열린다 - 전국 공모전 102개 가이드”, “국내 문화재단. 연구소. 학회 50여개 현황” 등 미술계의 현황을 자료조사 통계를 근거로 밝혔다. 그때마다 일간지에 인용되어 여러 사람들의 좋은 반향으로 메아리쳐 돌아왔다. 1989년 한 일간지에서 젊은 문화주역으로 개인 인터뷰가 소개되며 이름이 일반인에게도 알려지기 시작했다.

미술도서 전문 출판사로 유명한 열화당에서 <열화당미술연감>을 만들었다. 이 연감은 기존의 한국미술연감이나 문예연감과는 달리 전시회 기록에 충실하였다. 연감 내용은 한 면을 반으로 나누어 한쪽은 전시기록을 한쪽은 전시와 관련된 작품사진을 실었다. 전시 기록은 주요 전시 내용, 출품작가, 그 전시에 관련된 기사 색인 등을 기록으로 남겼다. 특히 이 점은 연구자나 필요로 하는 사람에게 충분한 가이드 역할을 해줄 수 있는 배려였다. 또한 전시작가도 자신의 보도와 전시평가를 다 챙겨보지 못했어도 이를 알게된 셈이었다. 이 연감은 좀더 풍부하고 생동하는 자료로써, 또한 시각적 배열의 특성을 살려 자료적 효율을 높이는 편집방식을 택하여 활용에 편리한 자료집을 만들었다. 나는 이 연감에 자료 협조 및 편집에 적극적인 참여를 했다. 특히 부록으로 공모전 수상자, 미술계 동정, 일간지 미술기사 색인, 잡지 목차, 미술단체, 주요 작가 명단, 미술평론가 명단, 각 대학 미술교수 명단, 미술 관계기관 및 미술관․화랑 주소록 등은 내가 전담했었다. 그러나 제작의 어려움에 비해 판매가 저조해 도판과 내용, 부록 등 내용을 줄여 나갔다. 이 연감은 1984년에서 89년까지 6년권이 나오고 중단되었다.

1995년 3월 3일 덕원갤러리에서 <바로보는 한국의 현대미술> 출판기념회를 한국근대미술사학회가 주관하여 열었다. 예술의 전당 전시사업본부장 이구열, 국립현대미술관 학예실장 박래경, 한국미협 이사장 이두식, 한국근대미술사학회 회장 윤범모 씨의 축사가 있었다. 서울대 하동철, 전준, 김병종, 홍익대 김용철, 중앙대 안병석, 이화여대 유희영 교수와 미술평론가 김인환, 윤진섭, 서성록, 오병욱씨 등을 비롯한 미술 관계자 및 멀리 사는 친구와 친척들을 비롯한 300여 명이 성황을 이루며 격려해 주었다. 책을 내야겠다고 생각한 것은 7년 전인 1988년인데 이경성 관장님이 조금 더 기다려 보라며 만류하셨고 끝내 기다린 보람이 있어 출판사 쪽에서 제의가 들어왔다. 이경성관장과 미술평론가 유홍준 선생님 두 분이 추천사를 주셨다. 이 책은 495쪽으로 우리 현대미술의 역사를 자료로 정리하고 미술계의 이면을 살핀 것이다.

- 국립현대미술관의 김달진 하면 나보다도 우리 미술계가 더욱 잘 아는 존재이다. 그와 같은 사람은 미술관이 제대로 돌아가고 또 미술계가 올바르게 발전하려면 꼭 필요한 기본적인 인재이다. 그러나 이것은 누가 시켜서 하는 것이 아니라 김군처럼 자기가 좋아서 자연스럽게 즐기면서 해야하는 것이다. - 이경성 (전 국립현대미술관장)
- 현대미술에 관한 한 어줍지 않은 나의 비평문은 잠시간의 반짝임만으로 그 생명이 끝나고 말건만, 김달진의 명확한 자료와 함께 제시한 증언들은 그 자체가 사료로서 영원히 살아남을 것 같다. 이점을 생각하니 나의 삶이 대단히 소비적인 것이며 고달파 보이던 김달진의 작업과 글쓰기가 진짜 복되고 보람찬 것이라는 생각까지 든다. - 유홍준 (미술평론가)

처음에는 취미였던 미술자료 수집이 천직이 되고 사회적으로 인정을 받기 시작하면서 나의 일은 신문 전면 또는 문화면 톱으로 인터뷰 내용이 1989년 12월 <스포츠서울>, 1997년 10월 <조선일보>, 1999년 6월 <경향신문>과 9월 <세계일보>, 2002년 2월 <중앙일보> 등 10건이 넘어 섰다. 라디오 인터뷰 및 드라마, 텔레비젼의 단독프로 2000년 9월 KBS2 TV <마이웨이> 방영까지 과분한 주목을 받아왔다. 1997년엔 더 기쁜 일이 있었다. 제2회 월간미술대상에서 특별부문 장려상을 받게 된 것이다. 선정 사유는 ‘미술자료 수집 정리’였다. 아직 해야 할 일이 많은데 상을 미리 받은 소감이었고 더 잘하라는 격려의 의미로 받아들였다. 1999년에는 정보통신정책연구원에 의해 ‘한국신지식인’으로 선정되었다.

어느 미술담당 기자가 나에게 너무 편집광적인 것이 아니냐며 반문했지만, 전문가이기 때문에 미술자료의 잘못된 부분이 먼저 눈에 들어오고 발견하는 순간 바로 잡아야 된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미술계가 외형적으로는 비대해졌으나 체계적인 자료정리가 없는 현실이 안타깝다. 제대로 된 미술인명감, 미술가사전이 없는 실정이다. 현대미술의 역사를 정리하는 기초자료들을 끌어 모아 정리하는 일을 계속하고자 한다. 덧붙여 미술자료를 찾는 사람에게 안내자 역할을 하고자 한다. 자료에 대한 몰이해와 부정확함 때문에 제대로 미술사 서술이 어렵다는건 미술계 발전의 큰 어려움이 아닐 수 없다. 내가 했던 말 ‘오늘의 정확한 기록이 내일의 정확한 역사로 남는다’는 말을 늘 상기한다. 그 난제를 푸는데 조그만 힘을 보태고 살아간다. 그래서 오늘도 무거운 가방을 메고 인사동 거리를 걷고 있는 것이다.

현재 남겨진 과제와 전망

한국미술계도 그동안 양적인 팽창을 보여왔다. 이런 작가, 전시회, 전시공간, 관람객, 미술시장 등의 성장과 함께 관련된 정보와 자료의 양이 증가하고 있다. 이 다양해지는 미술정보를 어떻게 생산하여 수용할 것인가? 어떻게 분류, 정리, 기록, 보존하여 후세에 남길 것인가? 우선 오늘날 대량으로 쏟아져 나오는 수많은 정보 자료를 소멸시키지 않고 효과적으로 정리 보존하는 것에 역점을 두어야 한다. 정보를 사용하는 사람이 있으면 정보를 생산하는 사람이 있어야 한다. 정보의 부가가치는 유통에 있는 것이 아니라 올바른 생산에 있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기록과 자료의 가치와 역할을 과소 평가하거나 아예 무시해 버리는 풍토는 쇄신되어야 할 것이다.

이제는 ꡒ정보의 내용을 안다ꡓ는 뜻의 노하우(Know-How)보다 ꡒ정보가 있는 곳을 안다ꡓ는 뜻의 노 훼어(Know-Where)가 점차 중요시되고 있다. 정보가 아무리 많아도 필요한 정보가 어디에 있는지 몰라 얻지 못하면 소용이 없다. 현재 한국내 미술사이트는 작가개인 사이트를 포함할 때 수백개에 이른다. 또한 미술관 혹은 미술단체, 업체들도 사이트를 가지고 있기 때문에 실제로 인터넷에서의 미술감상은 매우 용이한 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미술에 있어서 인터넷이 보편화되지 않은 이유는 대부분 사이트들이 모두 인터넷 본연의 기능인 정보의 공유와 정보를 통한 부가가치의 창출보다는 “남들이 하니까 한다”라는 막연한 기대심리가 작용하고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컴퓨터는 엄밀하게는 연장에 지나지 않는 것이어서 그것을 사용하는 철학이 있어야 한다. 우리는 이제까지 정보의 고속도로 자체에만 기대를 걸어왔을 뿐 그 고속도로를 이용해서 무슨 정보를 유통시킬 것이냐에 대해서는 생각하지 않았다. 정보의 유통시스템에만 관심이 있었지 생산시스템에는 관심이 없었던 것이다. 결국 첨단 미디어를 이용할 수 있는 하이테크적 기반은 조성됐지만 내용을 채울 소프트웨어의 처리에는 전근대적이고 콘텐츠에 무관심해왔다.

이제는 모든 자료정리의 기초가 되는 양식과 운용체계의 표준화가 이루어져야 한다. 가장 심각한 문제는 한번 잘못된 기록의 오류는 확대 재생산되는 과정이 반복된다. 아직도 인터넷 미술사이트는 열풍에도 불구하고 새로운 정보와 내용을 만나기가 어려운 것이다. 이제 미술정보 자료는 재래식 방법의 도큐멘테이션에서 컴퓨터에 의한 미술정보 검색시스템으로 나아가 미술작품의 화상정보 분석 시스템과도 접목된 다원적 운영시스템 시대가 도래되었다. 아직 국내에는 이러한 단계의 정보시스템을 완벽하게 구축하고 있는 미술관은 없다.

작가가 자신의 작품세계를 알리는 방법으로는 자료집, 카타로그, 파일, 포트폴리오 등이 있다. 개인자료는 대학의 강사자리를 얻기위해, 어느 큰 건물앞에 설치할 조형물 한점을 따내기 위해, 어느 화랑을 노크하거나 전시장 대관신청 등에도 자료제출을 요구받는다. 이제는 작가들도 치열한 경쟁속에서 적응하고 살아남기 위해서는 자신을 스스로 홍보하지 않으면 안되는 시대에 살고 있다. 작품 창작못지않게 자신이 스스로의 작품세계를 잘 알려야 할 의무를 지닌다. 작가개인의 자료는 본인 자신에 의해 정리되는게 가장 바람직하다. 작가들은 창작에 전념하지만 자료를 남기는데는 소홀함이 많다. 예술활동에 있어도 그에 대한 기록은 무관심하고 없는 실정이다. 모처럼 많은 돈과 정성을 들여 만든 호화 카타로그나 화집이 내용을 보면 충분한 자료 가치를 지니지 못하는 아쉬움이 많다. 그동안 사용했던 전시회서문을 연도도 없이 재수록하여 어느 때 글인지 모른다. 화집에는 전시경력, 작품소장처, 본인관련 문헌 등이 상세하게 수록할수록 좋다.

미술이라는 예술행위는 주로 전시회를 통해 그 내용을 사회에 알리는 것이 관습으로 되어있고 작가 역시 전시회를 통해 예술의식을 심화시키는 기회로 삼고 있다. 한 작가나 특정의 전시회에 대하여 누가 감히 성급한 평가를 내리기는 어렵다. 다만 일정 기간 동안 유보된채 관찰하고 검증한 다음에야 정당한 평가를 내리게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간헐적으로 그리고 지속적으로 일어나고 있는 행위와 사건들은 그때그때 포착하여 객관적인 자료를 보존처리해 두는 작업이야말로 중요한 일이 아닐 수 없다. 그러나 수없이 생성했다가는 순식간에 소멸해버리는 오늘날과 같은 정보의 홍보속에서 어떤 것이 보존가치가 있으며 어떤 것이 버려 마땅한 자료인가를 골라잡는 선별안 또한 갖추기 어려운 일이기도 하다.

자료는 단순히 많이 보관만 하는게 아니라 그것을 적절히 활용하는데 가치가 있는 것이다. 자료의 가치를 높히기위해 내용물을 제대로 분석하고 연구하고 평가해서 정보화시켜 주어야 한다. 각각의 자료에 흩어져 있는 단편적인 요소들은 조사와 통합의 과정을 거쳐 하나의 정보로 가치를 지니게 된다. 이러한 결과로 미술관의 조사 연구 성과를 높여 업무수행에 바탕이 되고 한국 현대미술 사료가 단단해지는 것이다. 그리고 매일 발생되는 자료 정보를 업데이트해야 한다. 정보는 작가의 주소 이전, 수상, 직장 변동, 전시회 출품, 단체의 활동 등으로 헤아릴 수 없이 많다. 작가의 활동이 왕성할수록 많이 발생하고 미술계가 풍성할수록 증가하는 현상이다. 정보는 입수되었을 때 귀찮아도 즉시 보완해야 한다. 이 점이 관리상의 제일 중요한 원칙이라 할 수 있고 신뢰받는 지름길이다. 오늘의 정확한 기록이 살아있는 정보이고 내일이면 정확한 역사로 남기 때문이다.

미술자료 업무 종사자는 미술에 관한 전문적인 정보를 얻고자 하는 이용자에게 유익한 모든 자료를 발굴, 제공하고 전문가적 평가로 정리하는 것이다. 업데이트를 위해 자료를 분류 축적하며 미술서적 목록과 연속 간행물 기사색인, 문의에 대한 신속한 응답, 이미 간행된 보고서 등을 통한 안내도 할 수 있는 능동적인 활동을 보여야 한다. 한 작가에 대한 자료도 정확하고 최신 활동까지 정리되어 있어야 한다. 여기에는 미술정보를 담당하는 미술주제 전문사서나 미술자료 전문가의 적극적이고 선별적인 자료수집 태도와 봉사가 선행되어야 한다. 그동안의 도서자료실과 달리 1차적인 자료관리의 기능에서 벗어나 정보중심의 기능과 역할을 확장해 전화, 우편, 팩시밀리, 전자우편 등을 통한 서비스를 강화해야 한다. 이제 자료를 모아가는 곳은 많아졌지만 1차 자료는 한계가 크므로 자료의 분석, 통계, 색인 등을 통해 2차 자료로 가공 생산이 절실하다. 현대의 정보화 시대는 인쇄자료를 떠나 디지털화하여 공유하고 발빠르게 대치해야 한다.

서적 및 사이트, 교육기관 소개

정보화시대는 우리에게 필요한 정보만을 얻어 쓸 수 있도록 해주는데 그치지 않고 홍수 속에서 취사선택을 요구한다. 정보(情報)는 어떤 사정이나 상황에 관한 소식 또는 그 자료나 내용을 말한다. 즉 일상생활에서 다양한 매체를 통해 취할 수 있는 가공되지않은 형태의 모든 소식인 셈이다. 정보는 사회적 수요가 있는 곳에서 생산되어 가공이라는 가치창조작업을 거쳐 이를 효율적으로 전달하는 수단이 강구될 때 유통이 원활하게 된다. 사회적 수요를 외면한 정보는 아무리 많은 노력과 투자를 해도 그 가치를 잃게 된다. 또 아무리 유용한 정보라 할지라도 그 전달과정이 원활하지 못하면 제기능을 살리지 못한다.

미술자료는 미술관계의 전문도서, 간행물, 행정자료, 학위논문집, 브로슈어, 팜플렛, 포스터, 사진, 신문, 리프렛, 일기, 서신, 문서 등 인쇄자료와 필름, 슬라이드, 테이프, 음반, 비디오물 등의 시청각자료 등을 말한다. 미술자료는 크게 개인자료와 총체적 자료로 나누어 볼 수 있다. 전자는 작가 개개인의 창작활동과 관련된 자료이며 후자는 특정시대, 특정지역, 특정유파의 활동과 관련하여 단순히 작품 뿐만아니라 작가, 단체, 전시 및 학술적인 연구와 업적 발표 등의 총체적인 활동과 그 결과물들을 한나라의 혹은 인류의 문화유산의 보존 관리라는 측면에서 대개는 국가적 차원에서 수집, 정리, 보존 및 관리한다. 개인자료는 한 작가의 창작행위 및 작품의 발표와 관련된 정보를 담고 있는 모든 유형의 자료를 포함한다고 말 할 수 있다. 물론 가장 1차적인 자료는 작품 그 자체이며 그밖에 2차적인 자료로써 작품과 관련된 스케치나 원형, 혹은 복제물이거나 슬라이드나 사진같은 작품의 대용물이 있을 것이다. 또한 작가 자신에 의해 기록이건 타인에 의한 기록이건 간에, 작가나 혹은 작품에 대한 연구 및 비평과 관련된 여러 가지 종류의 참고자료들이 있을 것이다. 아울러서 그 작품의 이동이나 소장에 관련한 여러가지 기록들이 있을테고, 그밖에 작가의 행적과 작품에 전거가 될만한 어떤 것이라도 개인의 미술자료에 포함된다고 하겠다.

또한 작품자체를 제외하고서라도 관련된 자료의 크기나 형태는 거의 무제한이라 할 만큼 다양하다. 작가의 스케치북이나 일기장이나 메모쪽지, 주고 받은 편지들, 가지 가지의 민원서류들을 포함한 상장이나, 문서들, 영수증도 있을 것이다. 전시카다록과 초청장, 포스터 등을 포함해서 책자형태의 자료도 다양할 것이고 신문이나 잡지 등의 스크랩 자료들, 작품과 작가의 행적을 담은 슬라이드나 인화된 사진이나 네가티브 스틸, 혹은 그것을 모아놓은 파일이나 앨범, 녹음테이프, 비디오테이프 등이 있을 것이다. 미술정보자료를 자료의 주제범위 및 매체별 유형으로 다음과 같이 파악하고 있다.

1) 자료의 주제범위는 조형예술에 속한다. 조형예술은 전시예술, 시각예술, 공간예술이라고 한다. 대부분 시각에 호소하는 예술로서 한국화, 서양화, 판화, 조각, 설치미술, 공예, 사진, 건축 및 기타 시각예술형식이 있다.
2) 매체별 자료의 종류는
* 시청각매체자료: 테이프, 디스크, 콤팩트디스크, 필름스트립, 슬라이드, 트랜스패어런스, 비디오테이프
* 인쇄매체자료: 일반서지류, 참고 자료, 도서, 정기 간행물, 색인, 초록, 학위논문, 보고서, 문서, 미술관이나 화랑의 안내서, 팜플렛, 간행물
* 사진자료: 마이크로필름, 마이크로프린트, 마이크로카드, 마이크로피쉬
* 전산자료.전자자료: 서지데이터베이스, 전문(Full-Text)데이터베이스
* 전자출판물(Electronic Publications)
* 실물자료: 각종 미술품, 기타
* 전위예술자료: 컴퓨터아트, 행위미술, 환경미술, 비디오아트
3) 우리 미술계의 기본 미술자료집
* 미술연감
- 한국예술지 / 예술원 1966-1992
- 문예연감 / 문예진흥원 1976-현재
- 한국미술연감 / 한국미술연감사 1977-1997
- 열화당미술연감 / 열화당 1984-1989
- 한국미술 / 월간미술 1996-현재
* 미술자료집
- 학술논저총합색인 / 국립중앙도서관 14집:미술 1986, 25집:문화재 1997, 26집:미술 1998
- 국립현대미술관 자료목록집 / 국립현대미술관 1989
- 한국건축사 문헌목록/ 민족건축미학연구회 1993
- 가마골 꼴아솜누리-부산미술 반세기 / 이용길 1993
- 한국미술사논저목록-미술사논단 1호 / 시공사 1995
- 국립현대미술관 사료집 / 국립현대미술관 1996
- 동아시아회화사연표-미술사논단 5호 / 시공사 1997
- 한국현대미술자료 약사 1960 - 1979 / 김미경 ICAS 2003

* 미술전집 및 단행본
- 한국현대미술대표작가 100인선집, 특집 20 / 금성출판사 1977
- 한국현대미술전집 20권 / 한국일보사 1978
- 한국근대회화선집 27권 / 금성출판사 1990
- 한국서양화대관 3권 / 한국미술공론사 1991
- 아르비방 55권 / 시공사 1992
- 한국현대미술100년 / 윤범모 현암사 1984
- 한국미술사전 / 예술원 1985
- 한국예술총집 미술편 4권 / 예술원 1986, 1995, 1999, 2003
- 바로보는 한국의 현대미술 / 김달진 발언 1995
- 한국근대미술의 역사 / 최 열 열화당 1998
- 국역 근역서화징 / 시공사 1998
- 한국서화가인명사전 / 범우사 2000
- 한국근대미술비평사 / 최열 열화당 2001
- 한국미술의 역사 / 김원용 안휘준 시공사 2003

사실 미술자료 정리를 체계적으로 가르키는 학과는 없다. 자료를 관리한다는 점에서 문헌정보학과 출신이 유리하다. 그러나 미술계에는 비도서가 많고 근본적으로 미술이라는 특성을 알아야한다. 내가 미술관에서 목격한 일이지만 사서는 전각이 서예의 한 부분이라는 점을 알지못하고 조각으로 분류번호를 부여하는 실례를 목격했다.
나를 가장 슬프게 했고 가장 분노를 사게 한 일은 고졸이라는 학력이었다. 미술 자료에 관한 일은 누구보다도 잘 할 수 있는 능력과 자신감이 넘쳐났지만 학력을 우선시하는 사회 풍토는 예나 지금이나 사회발전의 걸림돌이 분명하였다. 거기에 적응하기 위해서는 체계적인 학습이 필요하다는 것을 실감했다. 1985년에 성균관대 한국사서교육원을 수료하고 준사서자격증을 받았고 2년 뒤에는 비로소 서울산업대 금속공예과를 지원했다. 서울산업대를 지원한 사유는 학력고사를 피해 영어, 석고데생, 정밀묘사 시험만으로 입학이 가능했기 때문이다. 말이 대학이지 두 번 낙방하고 1989년 서른네 살에 대학생이 된 느낌을 어찌 말하겠는가. 물론 금속공예가를 꿈군게 아니고 대학원을 진학하기 위한 과정으로 생각했다. 대학에서 배운 것은 한 점의 작품을 위해 수없이 많은 스케치와 과정을 거쳐서야 하나의 작품이 완성된다는 사실이었다. 보잘것없어 보이는 작품이라도 작가는 최선을 다한다는 사실을 알고부터 작품을 진지하게 대하기 시작했다. 드디어 1999년 ‘국내 미술자료 실태와 관리개선 방안연구’라는 논문으로 중앙대학교 예술대학원 문화예술학과를 졸업하였다.

그동안 내가 미술자료와 관련하여 발표한 글은
- 관람객은 속고 있다-정확한 기록과 자료보존을 위한 제언 선미술 1985 겨울호
- 미술자료센터의 설립을 위한 제언 현대의 시각 1991 1.2월
- 미술정보의 생산 관리, 새로워져야 한다 가나아트 1996 9.10월
- 하이테크 외면한 미술정보 관리 중앙일보 1996 9.14
- 해도 너무한다, 누가 역사를 그르치는가 가나아트 1997 7.8월
- 새로운 종합 미술자료센터를 만들자 월간미술 1999 2월
- 미술정보 네트워크 구축을 위한 기초자료 미술세계 2000 7월
- 미술인 22명에게 물어본 인터넷 미술사이트의 향방 월간미술 2001 12월호

미술자료 수집 30년! 팜플렛, 도록이 담긴 무거운 가방을 메고 다녀 내 오른쪽 어깨는 처져 있다. 이제 미술자료전문가로 오늘의 현상을 보다 정확하게 정리해서 남겨야겠다는 사명감으로 기록자와 미술정보 제공자로의 입장에서 일을 한다. 아직도 나는 해야 할 일이 너무 많이 남아 있다.

하단 정보

FAMILY SITE

03015 서울 종로구 홍지문1길 4 (홍지동44) 김달진미술연구소 T +82.2.730.6214 F +82.2.730.921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