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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술계의 거목, 석남 이경성 관장을 애도하며

김달진

미술계의 거목, 석남 이경성 관장을 애도하며
- 장례, 생애와 과제


전 국립현대미술관 이경성관장님이 타계했다고 일간지 기자가 전화로 알려준 것이 11월27일 점심시간 지나서 였다. 미국 현지시간으로 26일 오후 10시반에 90세의 생애를 마감한 것이다. 나의 영원한 멘토이며 나를 있게 해주셨던 은인과의 이별이 가슴이 시리어 왔다. 나를 국립현대미술관에 취직을 시켜주셨고, 자료의 중요성을 일깨워주었고, 서울아트가이드 창간에 칼럼 연재로 이끌어주셨던 분이다.

이경성 관장 장례위원회 준비위원 모임이 11월28일 오후 3시부터 김달진미술자료박물관에서 있었다. 참석자는 한국미술평론가협회 서성록회장과 김진엽 총무, 모란미술관 이연수 관장, (사) 현대미술관회 상임고문 임히주, 전 국립현대미술관 강정식, 정준모, 김달진자료박물관 본인과 최열실장 8명이 모였다. 범미술인장으로 구성하는게 좋겠다는 의견으로 좁히고 한국미술협회, 한국미술평론가협회, 한국박물관협회, 한국사립미술관협회, 한국큐레이터협회, 한국근현대미술사학회, 한국화랑협회 7개 미술단체와 장례위원회의 명단 작성을 시작하였다. 달진닷컴에서는 2003년부터 2009년 1월까지 운영했던 이경성홈페이지에 추모게시판을 마련해 28일부터 운영했다. 장례위원회에서는 국립현대미술관 빈소설치가 어렵다는 이야기를 접하고 먼저 강남 삼성병원을 30일 방문했고 12월2일부터 분향소를 설치하기로 했었다.

.... 故이경성 前국립현대미술관장의 국립현대미술관 빈소 설치 좌절은 실로 안타깝다 못해 분노가 치민다. 도대체 누구를 위해 존재하는 국립현대미술관인가. 국립현대미술관의 기반을 닦고, 두 번씩이나 관장을 역임한, 그야말로 기둥을 세우신 미술계 큰 어른에 대한 대접이 고작 이뿐이란 말인가. ‘공식 절차(?)’ 아무리 절차가 중요하다 하더라도 어른이 돌아가셨는데 장례절차 말고 또 무슨 절차가 그리도 중요하단 말인가. 미술관의 존재 이유가 그런 절차나 내세워 귀찮은 일 만났다는 식의 태도를 보인다면 이 땅의 예술은 가는 곳마다 벽일 수밖에 없다. 우리가 이런 케케묵은 의식을 개혁하지 않고서는 예술 발전을 기대할 수 없을 것이다. 지금 당장 국립현대미술관 간판이라도 내려 그 궁색한 변명을 대신해야 하지 않을까. 실로 개탄스럽다.....
위의 내용은 이례적으로 음악평론가 탁계석 씨가 문화저널(www.mhj21.co) 시선21에 12월8일 기고한 내용의 일부이다.

그러나 미국에 있는 유족과의 합의하지못해 장례위원회 구성은 무산되었고 3일 유골이 인천시립박물관에 도착하였다. 일정과 거리관계로 서울에서 조문객이 많치 않았다. 4일 아침 7시 추모식에 참석했는데 배성수 인천시립박물관 전시교육과장 사회로 김용길 시립박물관장의 고인 약력소개, 지용택(새얼문화재단 이사장)추모위원회 위원장과 홍종일 인천광역시 정무부시장의 추모사가 있었다. 조우성 추모위원회 총무의 안내와 추모성금 발표 후, 유족인 이은다 따님의 인사로 끝났다. 운구는 시립박물관 전시실을 돌아 홍익대 박물관에서 노제를 지내고 모란공원으로 향했다. 11시 넘어 모란미술관에서 인천 가톨릭대 조광호 신부의 장례미사 후 안장되었다.

말년의 쓸쓸한 생활

이관장님은 아내와 사별하고 딸이 미국으로 건너간후 여의도 전세아파트에 사셨다. 2001년 청주국제공예비엔날레에 다녀오다 교통사고가 있었다. 안국동 한국병원 노인병동에서 2002년 2월부터 10개월 정도 거주하다 12월 미국으로 떠났다가 2003년 1월말 귀국하여 상계 백병원에 머무르다가 3월 평창동 노인간호센터로 이주하였다. 일주일에 한번 모란미술관 고문으로 외출하기도 하고 그림을 그렸다. 주로 유성 매직펜이나 붓으로 사람을 많이 그렸는데 “사람이 그리워 사람을 그린다”고 했다. 2006년 후학들에 의해 미수논총 <한국현대미술의 단층>이 삶과 꿈에서 발간되어 2월에 석남미술상 시상식과 출판기념회를 가졌다. 4월에는 환기미술관에서 <우정의 가교 - 김환기 이경성 2인전>이 열렸다. 7월에 인천시립박물관이 2년 동안의 증 개축을 거쳐 재개관하며 좌석 200석의 공연장을 다용도 공간으로 사용하고 '석남홀' 로 명명키로 결정했으며 석남은 작품 10여점, 훈 포장, 저서 등을 기증했다. 관내 3층 공예실과 서화실을 이어주는 경사로에 박물관의 60년을 역사를 살필 수 있는 전시관을 마련하였다. 이중 첫 번째 부스에는 초대 이경성박물관장의 진열대를 설치하여 박물관장 재직시절에 썼던 친필 원고와 저서, 소품 등을 전시하였다. 8월말 이관장님은 따님이 있는 미국 뉴욕 뉴저지로 떠났다. 김달진미술연구소가 이관장이 살고 계신 노인간호센터와 가까운 거리에 있어 3년반 동안 자주 찾아뵐 수 있었다. 평생 청빈하게 사셨기에 모란미술관, 갤러리현대, 주위에 몇 분들이 매월 병원 생활비를 후원해 드리기도 했다. 그 후 2007년 2월 몇 명이 모여 미국에 계시는 관장님을 국내에 모시고 오는 이야기를 나눈적이 있다. 이관장님에 대한 통화나 안부가 어려웠고 2008년 12월 본인, 정준모, 조은정, 최열, 최태만 씨와 함께 미국에 가서 재미 조각가 한용진 씨와 찾아 뵙고 식사를 한게 마지막이었다.

이경성관장의 공적과 남은 과제

이관장님은 우리나라 미술비평의 개척자이자 교육자, 미술행정가로 많은 활동을 남겼다. 미술평론가로 해방 직후부터 미술비평활동을 계속하며 한국미술평론가협회장을 역임하고 서울국제판화비엔날레, 광주비엔날레, 오이타아시아조각전 등에서 심사위원을 역임했다. 교육자로는 1957- 60년 이화여대 교수, 1961-81년 홍익대교수로 학부장, 대학원 미학 미술사학과장 등을 역임하며 근대미술사학 연구를 시작했다. 미술관 행정가로 이관장은 해방이후 26세로 인천시립박물관 초대관장을 맡아 1945년 부임하여 1954년 사임할 때까지 8년 5개월간 박물관의 기틀을 마련하였고, 특히 한국전쟁으로 박물관 건물이 소실되는 와중에도 소장유물을 안전한 곳으로 이전․보관하여 오늘날의 인천광역시립박물관이 있게 한 업적을 남겼다. 1981년 그동안 행정관료가 맡아온 국립현대미술관장을 미술인 최초로 맡아 1981-83, 86-92년 두차례 역임하며 덕수궁에서 과천으로 미술관을 이전하였다. 전문인 관장으로 큐레이터제도 도입, 작품 수집 계획 등을 세웠다. 그후 1992-95 일본 소게츠미술관 명예관장, 1992-98 호암미술관 자문위원, 1999-2001 서울올림픽미술관 관장, 2001-2006 모란미술관 관장을 역임했으며 99년 자랑스러운 박물관인상을 수상하였다.

이관장님의 회갑기념을 기해 제정된 석남미술상은 청년작가를 발굴한다는 취지를 내걸고 1981년부터 매년 뛰어난 신진을 발굴하여 좋은 젊은작가들을 배출하는데 공헌했다. 다른 미술상들이 공로상으로 원로 중진작가에게 집중되고 있었는데 석남미술상은 35세미만 작가에게 시상하며 권위를 인정 받았다. 그동안 23여권의 저서를 펴냈고 미술계의 공헌도는 전부 나열하기 어려우며 항상 미술계의 어른으로 중심에서 활동하셨다. 또한 “미술은 모든 사람의 것이다”를 말씀하며 인간적인 풍모, 온화한 성품은 많은 사람들의 존경의 대상이었다.
이관장님은 떠나셨고, 인천에서는 극진하게 모셨지만, 우리 미술계와 국립현대미술관은 큰 아쉬움을 남겼으며 언론보도는 빈약했다. 인천에서는 이관장님의 흉상을 준비 중이고 국립현대미술관은 2월 탄신에 맞추어 이관장 추모세미나를 준비한다고 알려왔다. 석남미술문화재단 김영호, 김장섭, 박서보, 오광수, 임히주, 홍라희 이사가 전부 물러나고 지금은 박경호, 이은다, 안귀숙, 이은숙 씨로 바뀌었다. 후학 5명에 의해 제정되었던 석남미술이론상도 3회 수상자를 내고 중단되었다.
나의 바램은 석남미술상이 제대로 이어지고, 어느 기회에 이경성전집이 꾸며지기를 기대한다.

- 이 글은 부분적으로 줄여져서 미술세계 2010년 1월호에 실려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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