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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리스케치 : 26. 소음을 삼킨 밀레의 바르비죵 평원

정택영

소음을 삼킨 밀레의 바르비죵 평원

<Keeping back the noise from messed downtown- Froncois Millet's Barbizon>

 

해가 바뀌고 맞이한 새해지만 파리의 정경은 그다지 변한 것이 없어 보입니다. 솟아오르는 아침 햇살을 되쏘며 산산이 부서져 내리는 오페라 하우스 지붕 위의 거대한 황금 조각상 아래로 끊임없이 파리사람들과 이방인들의 물결은 넘실댑니다. 세계 어디나 그러하듯, 대도시의 모습은 늘상 번잡하고 사람들로 북적이며 자동차들의 경적소리와 비상구급차의 요란한 사이렌 소리가 귓전을 때립니다. 금물결같은 노란 머리를 휘날리며 미끄러지듯 자전거 페달을 밟고 지나가는 파리지앵 뒤켠으로 꼬리를 물고 차들이 질주를 합니다. 이렇듯, 도시의 얼굴이란 부산하고 비릿한 어물전처럼 형형색색의 사람들과 소음으로 범벅이 되어 번화함과 화려함, 그 뒤로 감춰진 채 밀려오는 나른한 공허함을 함께 느끼게 하는 곳이기도 합니다. 파리 중심부를 빠져 나와 소음으로부터 일탈해 A6 고속도로를 탔습니다. 남쪽으로 80여 킬로를 내려가면 서서히 수평선 위에 누운 평원이 시야에 들어오기 시작합니다. 나지막하게 지어진 프랑스 전형의 메종들이 듬성듬성 이어진 동네와 마주치게 됩니다. 파리에서의 소음과 질주하는 모습은 찾아보기 힘든 그런 고즈넉한 곳으로 들어섰습니다.


 

눈앞엔 드넓은 바르비죵 마을이 거대한 병풍처럼 펼쳐졌습니다. 대지의 색, 드넓은 대지의 짙은 황토색이 수평선을 그은 것처럼 평화롭게 채색되어 있었습니다. 대지는 말이 없었고 다만 그곳에서 지난 가을 농작물을 거두어간 흔적이 오롯하게 남아 있을 뿐이었습니다. 대지는 거짓이 없습니다. 변덕이나 셈은 물론, 눈치나 동요가 없는, 부드러운 어머니의 가슴 품처럼 편안한 모습으로 그렇게 누워있을 뿐이었습니다. 백 오십여 년 전 바로 이곳에서 밀레는 아득한 지평선을 뒤로 하고 이삭을 줍던 농부의 모습을 바라보고 있던 그곳이었습니다. 그리고 황혼으로 물든 짙은 황갈색 하늘과 이제 막 어둠이 내려앉을 것만 같은 늦은 오후, 그윽이 울려 퍼지는 교회당의 만종소리를 들으며 하루의 감사를 드리는 두 부부의 모습이 저켠에 있을 것만 같은 전원이 펼쳐져 있었습니다. 밀레가 보고 색으로 덧칠했던 바로 이곳에서 노동과 삶의 경건한 목가적 노래가 울려 퍼지는 소리를 들었습니다. 그는 이곳에서 대지를 사랑하고 평온함 속에서 인생의 깊이를 느꼈을 것이며 평화를 한껏 향유했을 것입니다.


 

하지만 밀레가 처음부터 이러한 고요와 평화를 누린 것이 아님을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파리 도심 속에서 살던 그가 궁핍의 삶과 첫 아내와의 사별을 통해 인생의 고뇌와 비애를 느낀 나머지 비통한 세월의 주름을 접고 바르비죵으로 내려와 본격적인 붓질을 시작하게 됩니다. 그 당시 경제적으로는 산업혁명, 사회적으로는 시민혁명 그리고 종교적으로는 종교개혁으로 변화무쌍한 시기에 밀레는 인간의 삶을 객관적으로 반영하려는 그의 의도가 이곳에서 가감 없이 펼쳐졌습니다. 어쩌면 밀레의 눈 속에서 당대의 상류사회를 이룬 부르주아의 삶을 비판하고 춥고 배고픈 이들에 대한 휴머니즘을 통해 삶의 진정성은 바로 이런 것이라고 소리 없이 웅변을 하고 있었던 것일지도 모릅니다.


이삭이란 본디 방랑과 추위와 주림으로 고통 받는 이들을 위해 알곡을 대충 남겨놓은 것들이기에 이삭을 줍는 모습은 가난과 비루함이 아니라 더불어 함께 살아가고자 하는 인간의 저 가슴 밑바닥에 드리운 아름다움 그 자체일 것입니다. 황혼 빛으로 물들어가는 바르비죵의 텅 빈 평원에서 밀레가 덧칠한 살아있는 색을 발견하게 됩니다. 참으로 살아있다는 것은 아름다운 것이며 삶은 화려하고 번화한 것이 아니라 조용하며 그 속에 함께하는 공존의 미학이 깃들어 있을 때 더욱 고매한 것임을 이 광활한 대지 위에서 느끼게 하는 것입니다.


월간에세이 2011년 2월호

정택영(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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