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고


컬럼


  • 트위터
  • 인스타그램1604
  • 유튜브20240110

연재컬럼

인쇄 스크랩 URL 트위터 페이스북 목록

파리스케치 : 15. 새싹들의 미소

정택영

칙칙했던 파리 도심의 우울한 색채는 겨우내 깊은 동면에 빠졌던 나무 등걸들과 화단의 식물들이 새싹을 틔우고 봄 내음을 풍기며 생기를 돋우기 시자합니다. 회색의 겨울 동안 죽은 듯 움츠렸던 모든 식물들이 무거운 땅거죽을 뚫고 고개를 내밉니다. 지난 것은 죽고 새로운 삶이 시작되는 순간입니다. 실로 살아 있다는 것이 얼마나 경이롭고 아름다운 것인지 생각에 잠기게 만듭니다. 모질고 매서웠던 지난겨울의 찬바람을 이겨낸 나무들의 등걸을 바라보며 그들의 인내가 얼마나 강인하고 처연한 것이지를 가늠하게 됩니다. 그것은 마치 거친 노동으로 굳을살이 겹겹이 박힌 흰머리 노인의 그 피부와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그리고 앙상한 가지만을 남긴 채 모든 잎을 떨구고 숨죽였던 꽃나무들 가지에서 새순이 돋아나는 모습을 보면서 삶과 주음의 경계가 얼마나 묘연한 것인지 깊이 생각하게 만듭니다.



그들이 모진 겨울을 이겨내는 힘은 분명히 봄이 온다는 약속의 확신이 있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 약속이 너무나 확연하기에 껍질이 추위에 부르트고 진물이 나는 것쯤은 거뜬히 이겨낼 수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화창한 봄날의 자애로운 봄볕에 새순과 꽃망울이 터지며 생의 축제를 벌이게 될 것입니다. 그러면 그들도 행복한 생애를 스스로 누리게 되는 것입니다. 그 화려한 꽃나무들과 하늘을 찌를 듯 길다란 나무들이 늘 행복하기만 하리라고는 생각 하지 않습니다. 어쩌면 그들은 모진 겨울을 나는 고통과 잎사귀들이 드리워지면 물을 빨아올리는 거친 노동과 따가운 불볕을 이기고 멪은 열매를 익히려 안간힘을 쏟아 붓는 그러한 뼈저린 고통에 더 잘 익숙해 있을지도 모를 일입니다. 바로 이것이 삶의 본래의 모습일 것입니다. 아름다운 꽃송이가 누리는 행복보다 고통을 이겨내는 것이 더 쉬운 그 생명의 경이로움.


'진짜 행복의 대가는 아주 저렴한데도 우리는 행복의 모조품에 참으로 많은 대가를 지불한다,'고 발로는 우리들의 성숙되지 않은 속된 삶의 모습을 질타했습니다.


우리가 추구하는 것이 고작 좀 더 젊어 보이는 것과 좀 더 예뻐 보이는 것, 좀 덜 뚱뚱해져 보이는 것, 주름을 없애고 아이를 낳아보지 않은 듯해 보이는 날씬한 몸매와 아직은 훨훨 날아다닐 것 같은 날렵한 몸매를 유지하고 있다는 것들입니다. 그 아름다운 몸매를 유지하기 위해 아이를 낳고 싹을 틔우는 것이 그리 쉬운 일은 아닐 것입니다. 그러다 보니 인구감소로 걱정이고 헛된 것에 낭비되는 돈이 앞산보다 더 크며 결혼은 남 보기에 그럴듯하게 내비쳐야 하기에 비용을 추산해 보니 점점 결혼할 엄두를 내지 못하는 사회를 만들어가기도 합니다. 이것이 우리가 그토록 꿈꿔오던 행복의 모습은 아닐 것입니다. 새싹을 틔우기를 거부하는 꽃나무가 온전히 그 자리에 계속 꽃나무로 남아 있을 수 있을까요?


어린이를 태운 뿌세트(유모차)가 유난히 많은 파리 시내의 정경을 보며 지나갑니다. 그 형태로 다양하지만 그 어린 새싹들의 피부색과 모습도 다양합니다. 그리고 그 새싹들이 자라나는 모습을 지켜보면서 그들이 맞이할 미래를 그려봅니다. 그 새싹들이 밟게 미소를 띠며 지나갑니다. 그 뿌세트를 밀며 지나가는 어머니는 더 이상 몸매를 신경 쓰며 두리번거리지 않고 오직 앞만 보고 갑니다. 약속된 미래가 너무나 분명하기에 두리번거리며 주변을 살필 이유가 없기 때문입니다.


약속된 미래가 있는 사회는 밝습니다. 조만간 앙상했던 꽃나무에 새싹이 트이고 형형색색의 꽃들로 파리 시내는 현란한 작품으로 수놓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그 꽃들은 열매를 맺기 위해 기꺼이 그 자리를 떠날 채비를 할 것입니다. 여행 가방을 끌고 막 도착한 파리의 이방인처럼 말입니다.


월간에세이 2010년 3월호

정택영(화가)


하단 정보

FAMILY SITE

03015 서울 종로구 홍지문1길 4 (홍지동44) 김달진미술연구소 T +82.2.730.6214 F +82.2.730.921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