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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리팡세 : 예술가와 화상, 그리고 예술 작품의 보존 정신-2

정택영


L'invitation au voyage Advertisement of Louis Vuitton at Le Musée du Louvre


예술가와 화상, 그리고 예술 작품의 보존 정신-2

Artist & Collector, and preservation of works of art 


1. 

'해바라기', '별이 빛나는 밤' 등의 작품으로 세상에 널리 알려진 이름 'Gogh'를 모르는 사람은 이제 거의 없을 것이다. 그만큼 화가 고흐는 예술 작품으로 뿐만 아니라 그의 삶 자체가 드라마틱 하여 세인들의 기억에 깊이 각인 되고 잊지 못할 예술가로 새겨져 있기 때문이다. 


그는 37년이란 짧은 생애 동안, 870점의 회화와 1,000점 이상의 드로잉 등 2,100여 점의 예술 작품을 남겼고, 벨기에, 프랑스, ​​아를 Ales 과 오베르 쉬르 우아즈 Auvers-sur-Oise 에서의 지난했던 삶, 동생 테오에게 쓴 600여 통의 편지, 고갱과의 논쟁, 그리고 자신의 귀를 잘랐던 비극적 운명, 명예도 돈도 없이 고통스러운 삶의 끝을 내고 말았던 1890년 7월 ㅡ 이 모든 것들이 고흐의 예술에 대한 열정과 그의 처절했던 삶의 단면을 들여다보기에 충분하다.


그의 작품들 중 널리 알려진 '해바라기'는 현재 도쿄의 한 기업인 일본의 보험회사 '손보 재팬 닛폰 코아'에서 구입해 소장하고 있다. 1988년 창립 100주년을 앞두고 이를 기념하기 위해 1987년 구입한 것으로 해바라기가 이 회사가 세워졌던 1888년, 같은 해 그려졌기에 구입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크리스티 경매에서 오스트레일리아 쪽과 치열한 경쟁 끝에 낙찰 받은 가격은 53억 엔으로 현재 우리 돈 530억 원 정도로 당시 회화 거래 가격의 신기록을 세우며 '해바라기'는 일본의 품에 안겼고 지금 가치로는 한화 1,000억 원 이상의 가격으로 추정되고 있다.


그만큼 고흐의 작품들은 천문학적인 경매가 기록을 세우면서 그 가치를 더욱 증폭해가고 있고 모든 미디어 매체들과 미술관에서는 끊임없이 고흐 특별전을 열고 있는 실정이다.


그런데 이러한 고흐의 사후, 작품들이 빛을 발하고 있는 데는 고흐 자신이 작품들을 잘 보존하고 보관해서 가능했던 것이 아니다.


고흐가 불행한 삶을 마감한 후, 동생 테오의 아내였던 요한나 반 고흐 본헤르 Johanna van Gogh-Bonger 의 노력으로 반 고흐의 작품이 빛을 발하게 된 것임을 알아야만 한다. 


그녀는 1862~1925 고흐 형제가 주고받은 660여 통의 편지를 버리지 않고 책으로 출간했고 작품을 잘 관리했기 때문에 반 고흐는 점차 널리 알려지게 되었다. 사망 후 약 50년 후 요한나의 노력으로 마침내 고흐가 세계적인 화가로 인정 받게 되었다는 사실을 기억해야만 한다. 


요한나가 고흐의 작품들과 편지들을 함부로 다루고 없앴다면 오늘날 후대사람들이 어찌 고흐의 작품을 감상하고 그의 예술세계를 이해할 수 있겠는가?

 ............



2. 

프랑스 파리 1구에 위치한 루브르 박물관은 영국의 대영박물관과  바티칸 박물관과 함께 세계 3대 박물관으로 잘 알려져 있고, 전 세계에서 년간 9천 만 여명이 프랑스 파리의 루브르 박물관을 찾고 있어 명실공히 세계 관광대국이 되었다. 이 많은 관광객들이 루브르 박물관 1층에 진열된 고대이집트 미이라를 관람하기 위해 모여드는 것은 아닐 것이다. 대부분의 관람객들은 2층 드농관에 전시되어 있는 '모나리자' 작품을 감상하기 위해 끊임없는 발길이 이어지고 있는 것이다.


잘 아는 대로, 모나리자 작품은 레오나르도 다 빈치가 1503~1506년 사이에 그린 작품이며 그는 이탈리아 사람이다.

그런데 이탈리아 화가가 그린 작품이 어떻게 프랑스의 소유가 된 것인가를 아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을 것이다.

레오나르도 다빈치는 피렌체 부근 토스카나의 빈치에서 태어나 대부분을 밀라노와 프랑스에서 보내게 된다. 


밀라노에서 그를 후원했던 루도비코 스포르차 Ludovico Sforza 를 위해 궁정화가로 일하다가 정치적 문제로 루도비코가 죽자, 1500년 4월 24일 밀라노에서의 18년 생활을 청산하고 피렌체로 돌아오게 되었다. 당시 그의 나이 50세였다.


피렌체에서 머물던 레오나르도는 1513년 피렌체가 프랑스에 점령되자 로마로 이주했고, 그곳에서 교황 율리우스 2세의 지휘아래 성 베드로 대성당의 공사에 레오나르도 뿐만 아니라 브라만테, 라파엘로, 미켈란젤로 등 당시 르네상스의 전성기를 이끄는 최고의 거장들이 함께했다. 


그러나 당시 예순을 넘긴 레오나르도는 그보다 훨씬 젊은 동료들과의 세대 간 갈등은 피할 수 없었다. 이미 노년으로 접어든 자신의 충고 따위는 아랑곳 하지 않는 패기만만한 젊은 천재들을 바라보는 레오나르도는 자신의 머릿속에 끊임없이 솟구치는 아이디어와 지칠 줄 모르는 열정에 비해 점점 노쇠해지는 자신의 육체를 한탄했을 것이다.


이때 문화와 예술을 사랑했던 프랑스 왕 프랑수와1세는 이미 오래 전부터 레오나르도의 재능과 솜씨에 감탄했고 그가 로마를 떠나 프랑스로 온다면 원하는 것은 무엇이든지 해주겠다는 파격적인 조건을 약속했고, 변화의 계기가 필요했던 레오나르도는 조수 두 명과 하인 한명을 데리고 알프스를 넘어 프랑스로 향했다. 이때 레오나르도는 자신의 작품을 몇 가지 챙겨서 가져갔는데, 그중에 바로 <모나리자>가 포함되어 있었다. 인생의 끝자락에 이국땅에서 새 삶을 시작한 레오나르도를 프랑수와 왕은 극진히 대접했다고 한다. 


그러나 건강이 악화된 레오나르도는 프랑스에 간지 4년 만에 프랑수와1세의 품에서 숨을 거두었는데 그의 유언에 따라 자신이 태어난 피렌체나 24년간의 후원을 받은 밀라노가 아닌 프랑스 땅에 묻혔다. 


그의 사후, 프랑수아 1세는 퐁텐블로성에 미술관을 꾸미고 <모나리자>를 포함한 레오나르도의 작품을 전시했는데, 이것은 후에 퐁텐블로 파가 생겨나게 함으로써 프랑스의 르네상스를 시작하게 했다. 


그후 프랑스는 유럽 미술시장의 중심으로 자리 잡게 되었고 프랑수아1세는 <모나리자>를 파리로 가져갔다. 

이 모나리자 작품을 루이14세가 베르사이유 궁전에 가져다 놓았으며, 그 후엔 나폴레옹의 개인소장품이었다가, 전시 작품 중 가장 넓은 자리를 차지하게 된 루브르 박물관에 영구 소장. 전시되고 있는 것이다.  


예술 작품이 빛을 발하기 위해서는 그 예술가를 뒷받침해줄 후원자가 절실한 것이며 동시에 이 작품들을 소중하게 여기고 이를 보존하겠다는 의지가 있어야만 가능한 것이다.


이것은 한 개인의 문제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공공의 문제이며 나아가 정부와 국가에서 예술 작품 보존에 관련한 비상한 관심과 관련 법안을 입법 해 이를 지속적으로 보존 의지를 발현해야만 소중한 예술 작품들이 국가의 재산이 되고, 이러한 예술 작품들이 그 나라의 국력과 국격의 바로미터가 된다는 사실을 인식해야만 한다. 


#정택영어록

2021년 12월 2일

화가 정택영 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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