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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영헌-가상세계 향한 향수를 그리다

정영숙

 

설치·영상미술가 김영헌

가상세계를 향한 향수를 그리다
상상력의 파장으로 확장시키는 현실과 가상의 ‘인터페이스’가 그의 창작 공간
 

정영숙 | 갤러리세인 대표, 경희대 겸임교수
 

 서울 지하철 2호선 문래역 7번 출구에서 곧장 가면‘문래창작촌’이란 표지판을 만난다. 표지판을 지나쳐 왼쪽으로 너른 골목이 나타나는데 이 골목으로 접어들면 다시 갈래길이 나온다. 그 중 오른쪽도로를 따라 들어가면 오래된 철공소 건물 외벽에 보이는 철 부조물과 벽화들이 이곳이 예술가들의 창작촌임을 알려준다. 길을 따라서 5분 정도를 걷다 보면 왼쪽으로 신흥상회라는 작은 구멍가게가 있다. 해질 녘 설치미술·조각·회화·영상작업 등을 하는 작가들이 삼삼오오 가게 앞에 둘러앉아 술 한 잔 나누는 풍경이 정겹게 다가온다. 그 가게에 붙어있는 철공소 골목을 따라50m쯤 들어가면 허름한 건물 2층에 김영헌 작가의 작업실이 있다. 김작가는 영국유학을 마친 뒤 유럽에서 10여 년 동안 활동하다 3년 전에귀국해 이곳에서 작업하고 있다. 퀴퀴한 분위기를 뒤로 한 채 작업실로 들어가면 음악소리와 함께 물감냄새가 배어나온다. 완성된 평면작품과 작업 중인 캔버스가 몇 군데 이젤 위에 놓여 있다. 현란한 색채로 그린 조금은 기괴한 동물 같기도 하고 사람 같기도 한 이미지가 언뜻언뜻 보인다. 어떤 작품에는 시원한 폭포의 형상도 그려져 있고 때로는 캐릭터 형상도 눈에 들어온다. 
 2010년 성곡미술관 초대로 연 김 작가의 귀국전은 기존에는 접하지 못했던 이미지와 설치·영상작업으로 매우 신선하게 다가왔다. 당시 주제는 ‘Electronic Nostalgia : Broken Dream’우리말로 바꾸자면 ‘전자적 향수 : 깨어진 꿈’ 정도가 될 듯하다. 디지털과 아날로그가 합성된 단어의 괴리감이 작품에 대한 궁금증을 유발했다. 그때 전시장에서 그를 만나 작품 내용에 대해 이야기를 나눈 적이 있다. 
 작업실에서는 귀국전에서 보았던 평면작품의 연장선상에서 신작이 진행되고 있었다. 유기적인 곡선이 물결치듯 흘러가면서 무지개 색이 연출되는 ‘혁필(革筆)’ 기법이 눈에 띈다. 혁필은 조선 후기 서민계층에서 소비된 것으로, 넓적한 붓에 형형색색의 물감을 찍어 호랑이나 대나무·문자를 그렸던 민화 중 문자도의 파생종이다. 
 작가는 이런 혁필 기법을 차용해 넓적하고 평평한 붓에 3~6색의 물감을 묻힌 후 호흡을 가다듬고 캔버스 위에 빠른 속도로 칠한다. 진행 중인 작품 중 하나의 배경에서는 전통 산수화의 흔적도 언뜻 보인다. 특히 네개의 인간 머리를 달고 앞발로 포도를 밟고 있는 동물을 표현한 그로테스크한 형상이 인상적으로 다가온다. 이처럼 기이하고 색다른 이미지를 표현하는 영감은 어디에서 시작되었을까?
 “가상세계(VR, Virtual Reality)의 경험이 한 요소였다. 그렇지만 순수한 자연(물결의 흐름, 바람에 움직이는 풀 등), 문학과 시, 그리고 음악도 중요한 영감의 원천이다. 또한 매체를 통한 세계관, 사회적 이슈, 개인의 경험과 감성이 연결하는 지점 등이 혼용된 결과다. 무엇보다 가상세계의 경험은 상상력을 이끌어내는 또 다른 원동력이다.”

 

가상세계의 경험이 상상력의 원천
작가가 강조하는 가상세계의 경험이 어떻게 작품으로 연결되는 것일까? 작가는 영국유학 시절 한국에 있던 지인들과 인터넷 게임을 즐겼다고 한다. 지구 반대편에 있었던 그들과 현실에서는 만날 수 없지만 가상세계에서 아바타로 만나 여행도 가고, 공동으로 미션을 수행하며 특별한 교감을 느꼈다고 한다. 김작가가 말을 이었다.


현실의 오브제를 센서로 연결해 영상속의 퍼포머가 밖의 오브제에 영향을 주어 쌍방향표현이 가능한 2002년의 영상작업<For My Daughter's Daughter2>.영상속의 퍼포머가 숨을 불어넣으면 바닥에 펴져있던 웨딩드레스가 부풀어 오르며 일어선다.

 

 


 
                                                  '혁필'기법으로 가상세계의 이미지를 표현한 김영헌의 평면작품들.

1 <Electronic Cloud-p1101_2011> 97x130cm, oil on canvas. 2 <Electronic Cloud-p1205_2011> 97x130cm, oil on canvas.            3 <Electronic Cloud-p1104_2011> 97x130cm, oil on canvas. 4 <Electronic Cloud-p1107_2011> 97x130cm, oil on canvas.

 

 “사람들은 지난 세월 가보았던 장소나 만났던 사람들에 대한 향수를 가지고 산다. 지금은 가상세계를 향한 그리움도 그 일부가 되었다”통상적으로 향수란 과거의 풍경과 경험이 대상이지만, 이제는 가상경험도 향수의 대상이 될 수 있다는 설명이다. 그는 그 가상세계가 향수의 대상이 되어가는 사회적 현상을 작품으로 담아내는 것이다. 현대인은 물건의 기능보다 기호를 소비한다는 프랑스 철학자 장 보드리야르의 '시뮬라크르(Simulacra: 모든 실재의 인위적 대체물)가 현대에서는 VR 공간이다.
 이 주제는 회화뿐만 아니라 설치나 영상작업으로 이어진다. 그의 작업 특성상 대학 입학 전 미술학원에서부터 대학시절에 배웠던 그림 그리기 방식은 오히려 창작행위를 하는 데 방해 요소가 되었다. 타성에 젖은 몸의 기억을 지워내려고 그는 10년 동안 붓을 들지 않기로 각오했고, 마침내 그 약속을 지켜냈다. 
 김 작가는 1995년 중앙미술대전에서 설치작품으로 대상을 받으며 주목받는 젊은 작가로 떠올랐으나 과감히 유럽행을 택했다. 파리 삼성아틀리에 프로그램 입주작가로 선정(Cite Internationale des Arts, Paris, France)되어 2년 동안 설치·영상작업을 진행하면서 유럽활동을 시작했다. 프랑스와 독일을 무대로 여러 전시회에 초대받으며 활발하게 전시활동을 하던 그는 유학을 위해 런던으로 건너간다. 골드스미스칼리지와 첼시칼리지에서 석사과정(Fine Art)을 밟은 영국유학생활은 그에게 기계적으로 터득한 그리기 방식에서 벗어나 자유롭게 상상하고 표현하는 방법을 스스로 찾아가는 기회가 되었다. 
 그는 삼성미술관에 소장된 1995년 작 <A Nap that Came Like a Giddiness1> 영상에서부터 최근 문래동 이웃들이 함께 만들어가는 ‘공통도시 예술 프로젝트 사진 미디어 영상전’에 출품한 <Back to the future>까지 꾸준히 영상작업을 발표한다. 그런 그에게  영상의 의미 혹은 매력은 어떤 것일까? 
 “영상은 평면이나 오브제 작업과 다른 면모가 있다. 예를 들면 기록적 다큐멘터리 속성도 있고, 한편으로 조작하고 변주할 수 있어 새로운 상상 공간을 제공하는 데도 제격이다. 2002년 < For My Daughter's Daughter 2>에서처럼 영상 속의 퍼포머가 숨을 불어넣으면 바닥에 펴져 있던 웨딩드레스가 부풀어 오르며 일어서듯 현실의 오브제를 센서를 통해 연결해 영상 속의 퍼포머가 밖의 오브제에 영향을 주도록 연결함으로써 쌍방향으로 표현할 수 있는 것도 매력적이다. 지금 이 순간 작동하는 현실과 영상 속의 과거의 기록이 시그널을 통해 현실 속의 오브제와 연결된다.” 
 작업실 스피커는 성능이 상당히 좋아 보였다. 필자가 스피커에서 흘러나오는 음악을 즐기고 있음을 눈치챈 김 작가가 볼륨을 최대한 높이고는 마릴린 맨슨(Marilyn Manson)의 CD 재킷을 툭 건넨다. 표지부터 예사롭지 않다. 처음 듣는 음악이었지만 신비로운 디자인 감각에 매료돼 음악에 빠져들었다. 아마도 김 작가도 이런 상태에서 붓을 들고 캔버스로 향했으리라. 
 굉음 같은 연주, 금지곡에 가까울 거친 가사를 내뿜는 강렬한 보이스와 리듬을 타고 그리는 동안 붓은 자연스럽게 파장을 만든다. 작가가 VR 공간을 표현하기 위한 전자적 흐름은 음악과 연결돼 지극히 자연스럽게 표출된다. 작가는 이처럼 강렬한 해비메탈 음악을 파리 시절부터 듣기 시작했다고 한다. 기존의 관성에서 벗어나기 위해 10년 동안 붓을 놓았던 것처럼 생각을 바꾸기 위해 좋아하지도 않는, 가장 싫어하는 힙합·하드록·헤비메탈을 듣는 한편 붉은색·분홍색·형광색 등을 의도적으로 사용했다. 초현실주의 작가들이 무의식의 세계를 표현하기 위해 꿈의 기억을 끄집어내고 극도의 배고픈 상태에서 무의식적으로 드로잉을 표현하듯 작가는 창조의 영토를 넓히기 위해 과감하게 기존 질서에서 일탈하는 방법을 선택한 것이다. 그는 확신했다. “이런 것들이 내게 새로운 감각(창조성)을 줄 것이다. 사고를 바꾸려고 노력하고 내가 금기시했고 사회가 금기했던 것, 정신적 금지에 대한 탐구가 필요하다”고. 이런 의도적 경험을 거치자 싫어서 깎아내렸던 음악들이 새로운 매력으로 다가와 상상력으로 보상해주더라고 했다. 나아가 자신의 틀에서 벗어나 변신하려는 유연성도 생겼다고 한다. 다루기 싫은 색이나 방법을 의도적으로 사용하는 가학행위를 통해 결국 새로운 것에 대한 포용력을 얻게 된 셈이었다. 조금은 혹독하지만 새로운 상상력 훈련은 유효했고 값어치가 있었다. 
 이처럼 김 작가에게 예술가로서 예술작품을 창조하는 행위의 목표는 무엇일까? “낯선 것이 현대미술에서는 중요하다. 익숙한 곳에서 낯선 틈을 찾아내는 것, 그 틈 사이에서 경험하지 않았던 감각과 상상력을 끌어내는 것이 나의 목표점이다.”  
 그렇다면 순수미술 창작활동이 사회적 유용성에 미치는 영향에 대해 그는 어떤 생각을 가지고 있을까? “순수미술은 다른 방식으로 사회에 기여한다. 세계의 주요 박물관과 미술관은 도시 중심에 있다. 시민들이 쉽게 접근해 많이 보고 느끼며 새로운 창조적 영감을 받는 곳이어야 하기 때문이다. 현대를 사는 보통사람들, 사업하는 사람, 정치하는 사람 등 모든 사람에게 예술은 초월적인 뭔가를 얻는 힘이 된다. 예술의 창조성은 인간에게 영감을 전해주기 때문이다. 최첨단 기계, 정보기술(IT)에도 인문학이나 순수미술이 접목된다.”  작가는 “유학생활보다 값진 경험은 여행”이라고 목소리를 높인다. 전 세계 유명 박물관의 수 백, 수 천 년 전 역사유물 앞에서 경험했던 충격과 어느 미술관에 소장된 거장의 작품 앞에서 느낀 시각적 충격은 창작의 훌륭한 자양분이라는 것이다. 그러면서 그는 국내 한 방송국의 해외 영상취재기자로 일하던 중 유럽·아프리카·아이슬란드 등을 취재한 경험을 들려주었다. 그때의 경험은 자본주의의 가능성과 한계를 눈으로 확인하는 계기였다고 한다. 캐냐 몸바사 항구의 고급 호텔과 리조트 혹은 비치에서는 파라다이스를 보았지만, 그 뒷골목에 펼쳐진 지옥 같은 충격적 풍경은 세상의 부조리를 목격하는 계기였다고 한다. 이 같은 다양한 경험은 외로운 자기와의 싸움에서 그를 지탱하는 원동력이 되어준다. 


싫어하는 음악과 색깔을 의도적으로 사용
“자신의 내부로부터 영감을 끌어내기 힘들 때는 외부에서 빌려올 수밖에 없다. 여행·영화감상, 때로는 사람들을 만나거나 춤을 추기도 한다. 특히 음악은 상상력을 자극하고 영감을 주는 원천 중 하나다. 새로운 비주얼의 이미지를 음악을 통해 얻는 경우도 많다. 그래서 사이키델릭한 음악, 빌보드차트에 올라온 곡, 해비메탈,  K팝 등을 잡식성으로 듣는다.” 
 김 작가는 초등학교 때부터 화가가 되리라 결심했다고 한다. 다행히 그는 멀티플레이 예술가로서의 자질을 갖추고 있었다. 이 같은 그의 자질은 여러 곳에서 드러났다. 한 일간지가 주최한 신춘문예에서는 시부문 최종심사에까지 올랐다. 유학비용을 마련하기 위해 영상취재기자로서 다양한 경험을 하기도 했다. 여기에 뛰어난 디자인 감각도 갖추고 있다. 이 같은 다른 분야에 대한 전문가적 경험과 능력은 예술가로서의 표현 영역을 한층 더 넓혀주었고 유기적으로 연결된 통합적 사고를 이끌어내 작품에 오롯이 반영할 수 있었다.   
 김 작가가 요즘 작업실에서 진행 중인 작품들은 하반기 자하미술관 초대전과 런던 그룹 전시를 위한 것이라고 한다. 그는 미술관의 초대를 많이 받는 작가다. 첫 개인전을 토탈미술관에서 개최한 것도 미술계에서는 이색적인 이력이다.  
 짧지 않은 시간 동안 그와 이야기를 나누다 보니 그가 지금까지 보여준 작품은 그가 표현하고자 하는 세계의 극히 일부분에 불과함을 실감하게 된다. 그런 만큼 김 작가가 앞으로 보여줄 미래의 패러다임에 대한 기대가 커진다. 현실의 삶과 가상의 경험이 뒤섞이는 하이브리드적 향수에 대한 사고가 한층 깊이 있게 전개되리라 예상된다. 그의 작품은 현실과 가상의 경험이 혼재된 상황을 상상력의 파장으로 확장시키는 시뮬라시옹(Simulation: 실재가 아닌 파생 실재로 전환되는 작업)이다.

                                                                                                                          월간중앙 2012년 9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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