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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미경 / 문화와 시간의 간극을 해석하다

정영숙

'비누의 연금술사' 신미경

문화와 시간의 간극을 해석하다


대리석, 철, 브론즈를 대신해 비누를 이용, 전통적인 

작품을 ‘번역(Translation)'해내는 탐구적 예술세계


정영숙 갤러리세인 대표, 경희대 겸임교수


 현대미술가에게 재료는 창작의 중요한 요소이며 독창적 작품세계를 구축하는 데 역할이 크다.

 작가 신미경(46)은 비누를 미술 재료로 사용한다. 그는 15년 전부터 비누작업을 시작했다. 물론 신 작가 이전에도 비누로 형상을 조각하는 비누공예가 있었다. 하지만 본격적인 미술 영역에서 비누를 대리석이나 브론즈처럼 미술재료로 사용하는 경우는 신작가가 처음인 듯하다. 비누로 표현된 작품도 무척 흥미롭다. 신 작가는 비누의 재료적 특성과 작품의 주제를 연결시켜 뚜렷한 주제의식을 담아낸다. 비누를 작품으로 ‘번역(Translation)’해내는 작가의 통찰력이 돋보인다.

 2011년, 신 작가는 그동안 작업한 300여 점의 작품을 국제적으로 이름 있는 ‘헌치오브베니슨(Haunch of venison)갤러리’에서 발표했다. 이 전시를 통해 신 작가는 미술계의 떠오르는 신성으로 주목받게 됐다. 그리고 2012년, 신 작가는 공공미술 프로젝트의 일환으로 런던 캐빈디시 스퀘어(Cavendish Square) 근처에 컴버랜드 공작의 비누상을 세우는 작업으로 또다시 화제가 됐다. 무려 1.5t에 이르는 비누를 사용해 세운 기마상은 신 작가에게도 큰 도전이었다.

 이 기마상은 과천 국립현대미술관에도 세워졌다. 국립현대미술관이 주관하는 ‘2013 올해의 미술작가상’이 40대 중견작가 4명을 선정했는데, 신 작가도 여기에 포함됐기 때문이다. 신 작가는 ‘트랜슬레이션-서사적 기록’이라는 전시 주제 아래 기마상을 포함해 그의 초기 작품부터 신작까지 모두 120여 점을 전시 중이다. 덕분에 국내에서는 처음으로 신 작가의 작품을 총체적으로 살필 수 있는 기회가 되었다.


대리석 대체할 조각 재료로 비누 선택


신 작가는 런던과 서울의 작업실을 오가며 작업한다. 대부분 의 작품이 국립현대미술관에 전시돼 있기에 그의 작업실을 방문해봐야 텅 비어 있을 터였다. 작가의 빈 작업실 대신 전시장으로 먼저 발걸음을 옮겼다. 국립현대미술관 입구 광장 한쪽에 세워져 있는 대형 기마상은 런던에 설치됐던 것과 같은 작품이다.

 그는 어떻게 비누만으로 1t이 넘는 대형 기마상을 만들 생각을 했을까? 작가는 2008년 어느 날 런던 시내 옥스퍼드 서커스(Oxford circus)광장 뒤편 카벤디시 스퀘어를 걷고 있었다고 한다. 서울의 명동처럼 유동 인구가 많은 이곳을 지나다 사람들이 담소를 즐기는 벤치 뒤쪽에서 눈길을 끄는 빈 좌대 하나를 발견 하게 됐다. 좌대를 요모조모 살펴보다 흥미를 느낀 작가는 집으로 돌아와 인터넷을 검색해 카벤디시 스퀘어의 빈 좌대와 관련된 자료를 찾아보았다.

 그 결과 신 작가는 원래의 좌대 위에 컴벌랜드 공작의 기마상이 세워져 있었음을 알게 됐다. 컴벌랜드 공작의 기마상은 1770년에 세워졌는데, 무슨 이유에서 인지 1868년 철거됐다는 기록만 있었다. 하지만 아무리 자료를 뒤져봐도 동상의 원래 이미지는 쉽게 발견되지 않았고, 카벤디시 스퀘어를 그린 어느 에칭판화에서 동상의 뒷모습만 겨우 찾을 수 있었다. 신 작가는 그때부터 비누작업으로 사라진 기마상을 재현해보고 싶다는 맹렬한 욕구를 느꼈다고 한다. 신 작가는 먼저 지역 자치단체에 작품을 설치하겠다고 신청서를 냈다. 영국예술위원회와 한국문화예술위원회가 신 작가의 작품 제작의 의도를 높게 평가해 지원하겠다고 나섰다. 작가가 개인전을 개최했던 헌치 오브 베니슨갤러리도 후원을 약속했다. 일이 잘 되려고 했는지 다행히도 동상의 축소 모형도 찾아낼 수 있었다.

 이처럼 4년에 걸친 문헌연구와 작품 제작 과정을 거쳐 탄생한 작품이 바로 <비누로 새기다: 좌대 프로젝트(Written In Soap:A Plinth Project)>다. 신 작가는 작품 제작과 동시에 현지 미술계와 대중의 깊은 관심을 받았다. 비누로 만든 기마상은 앞으로 1년 동안 카벤디시 스퀘어의 빈 좌대에 세워졌다가 다시 전시관 실내로 옮겨 설치될 예정이라고 한다. 그렇다면, 신 작가는 인물보다 상징성을 강조한다. 영구적이지 못한 재료인 비누로 제작된 런던의 기마상은 풍화작용을 거쳐 실내로 옮겨질 무렵이면 오래된 유물처럼 상당한 외형적 변화가 있을 것이었다. 똑같은 형태의 기마상이 다른 장소에 설치돼 현지의 특성에 따라 변화해갈 것이다. 그 과정, 바로 변역이다. 이것이 작가가 말하는 작품의 핵심 주제다. 비누라는 재료의 시작, 번역이라는 주제의 시작으로 거슬러 올라가보자. 먼저 작가의 설명은 이렇다.

 “런던에서 살면서 처음 비누조각을 제작했다. 첫 작품은 서양 고전 조각의 복제였다. 슬레이드 스쿨 본관 앞에 서 있던 19세기 이탈리아 조각가 에밀리오 산타렐리(Emilio Santarelli)의 조각이었다. 처음에는 그것이 누구의 작품인지조차 몰랐다. 관심도 없었다. 그저 작품이 놓인 장소의 역사적 의미를 상징하는 흔한 서양 고전 조각 중 하나려니 했다. 현대미술의 관점에서 그 작품은 과거에 뿌리를 둔 작품으로 그 의미가 미술사에 국한될 뿐이었다. 그러나 복원가가 오래된 조각상을 정성스레 세척하는 모습을 지켜보면서 나는 미술작품이 시간의 흐름과 더불어 가치가 축적된다는 사실을 새삼 깨달았다. 그 후로 나는 미술관에 있는 마모된 돌조각들에서 시간의 감각을 느낄 수 있었다. 견고함과 영속성은 돌이 지닌 일반적 속성이지만, 그토록 강한 재료조차 시간이 지나면 마모되고 만다. 이런 생각을 하게 되자 나는 대리석을 대체할 조각 재료로 비누를 사용해야겠다는 생각을 떠올리게 됐다.”


1 2

1 경기도 과천시국립현대 미술관에 세워진 비누로 만든 기마상

2 신 작가의 첫 작품은 서양고전 조각의 복제였다.


대중이 사용함으로써 비로소 완성된다


1998년, 신 작가는 에밀리오 산타렐리의 ‘아프로디테’ 조각상이 세워진 학교건물 내부에서 첫 번째 비누작업을 진행했다. 원작을 모각하는 작업을 하루 10시간 이상, 6개월에 걸친 퍼포먼스로 보여준 것이다. 작가의 노동집약적 작업으로 완성된 작품은 원본에 가깝지만 원본은 아니다. 재현이 목적이 아니라 재현을 통한 원작과 복제의 간극에서 벌어지는 인식의 차이, 실제와 허상의 경계를 드러내는 것이 주된 목적이었다.

작가는 영국 유학 중에 그리스를 여행한 적이 있다. 그때 파르테논 신전에 깊은 인상을 받았다. 이후 런던으로 온 작가는 대영박물관에 전시된 파르테논 신전 유물을 감상했다. 그리스 현지에서 그곳의 공기와 냄새와 햇살을 함께 공유하던 파르테논 신전과 영국 대영박물관의 파르테논 신전은 형상만 같았을 뿐 전혀 다른 느낌으로 다가왔다.

아프로디테 조각 퍼포먼스 이후 신 작가는 본격적으로 그리스 신전의 박공 조각을 재현한 아르카익 기(記)의 조각을 집중 조각하기 시작했다. 그는 그렇게 오래된 유물을 모각하면서 시간의 흔적과 문화적 가치에 대해 스스로 질문을 거듭한다.

 비누가 비누로 쓰이는 공간, 비누 작품마저 비누로 쓰이는 화장실은 비누라는 특성이 고스란히 반영된 제3의 전시공간이다. 국립현대미술관 화장실에도 세면대 옆에 4개의 비누 조각이 놓여있다. 사람들은 이 비누가 현대미술 작품이라는 설명서를 보고는 잠시 고민하다가 머리나 어깨 혹은 얼굴 부분을 문지르기도 한다. 일반 비누를 사용할 때와는 다른 묘한 느낌을 받게 된다. 이렇게 작품에 직접 개입된 체험은 아주 특별하다. 비누 조각상들은 닳은 모양이 제각각이다. 그 모습 그대로 풍화된 화석의 한 부분을 옮겨놓듯 비누는 전시장에 전시될 것이다. 비누의 특성이 작품의 내용과 절묘하게 융합돼 존재와 부재의 간극을 시각적으로 극명하게 제시한다. 비누의 향 역시 비누를 구성하는 중요한 요소 중 하나다. 전시장에 들어서면서 은은하게 퍼지는 비누향은 후각을 깨운다. 그 느낌은 이윽고 시각으로 전이된다. 작품을 직접 감상하지 않으면 도저히 느낄 수 없는 것이 후각이다.

 필자는 신미경 작가의 해외 전시 작품을 영상과 사진을 통해 감상하면서 그 형상과 규모를 가늠해볼 수 있었다. 영국에 있는 작가의 작업실을 촬영한 방송영상을 통해 작품을 직접 대하지 못하는 아쉬움도 달랠 수 있었다. 하지만 지금 이곳에서처럼 작품에서 뿜어져 나오는 향기까지 느낄 수는 없었다. 현장에서 느끼는 공감각은 직접 체험하지 않고는 결코 느낄 수 없는 것이다. 그렇다. 향기는 기억을 불러일으키는 장치이자 원본과 복제본의 차이를 말해주는 요소다. 신 작가는 “어떤 사물을 성공적으로 해석하려면 오감을 동원해야 한다.”고 설명한다.

 “비누는 아주 평범한 일상의 재료다. 그러나 쉽게 닳아 없어지는 특성으로 인해 시간의 흐름을 압축적으로 보여준다. 나아가 이미지의 구분을 두드러지게 하는 향기를 지니고 있다는 점에서 오랜 시간에 걸친 문화의 이동과 전이, ‘Translation’에 관한 나의 관심사를 풀어내기에는 무엇보다 적합한 재료다.”

 그리스 조각, 기마상이 대리석처럼 속이 꽉 찬 비누 덩어리로 형성된 조형이라면, 도자기는 원본 그대로 속이 비어 있다. 작가는 2007년 대영박물관 한국관에 전시됐던 조선시대 대표 유물인 달항아리를 비누로 복제해 원본과 바꿔 전시했다. 당시 관람객들은 이 비누 조각을 원본으로 여기고 감상하고 지나갔다. 신 작가가 비누를 이용해 유백색 달항아리의 색상과 형태를 명확하게 표현했기 때문이다. 이 ‘달항아리 프로젝트’는 작가의 명성을 공고히 하는 계기가 됐다. 이후 작가는 한 중국 전통 도자기 수집가의 후원으로 그의 소장품을 연구하고 작품으로 진행하는 기회를 갖게 됐다. 그런 과정을 거쳐 발표된 작품이 <번역(Translation-Vase)> 시리즈다. 이 작업에서 작가는 도자기의 형태는 물론 화려한 색감과 문양의 특징까지 놓치지 않고 고스란히 복제했다.



비누 작품마저 비누로 쓰이는 화장실은 비누라는 특성이 고스란히 반영된 제3의 전시공간이다.



신미경 작가의 <번역(Translation-Vase)> 시리즈 작품인 비누로 빚은 도자기들.


그의 조각은 세계 곳곳에서 풍화한다


개념미술 성향이 강하거나 대형 작업과 프로젝트 작업을 하는 작가들은 대부분 작품을 직접 제작하지는 않는다. 작품의 크기나 제작 방식에 따라 어시스트를 사용한다. 신 작가도 기마상 같은 대형 작업을 할 때는 어시스트의 도움을 받는다. 실리콘으로 형태를 뜨고, 그 속에 비누 용액을 부어 넣고, 속을 파내는 작업을 혼자 힘으로 감당하기는 어렵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도자기의 섬세한 그림 또한 어시스트의 도움을 받았겠거니 미뤄 짐작했는데 그렇지 않았다. 작품의 조형적 특징을 좌우하는 문양을 상감하거나 천연염료로 그림을 그리는 일도 온전히 그의 손으로 이뤄졌다. 작가가 의도한 느낌을 100% 표현하기 위한 선택이다. 그에게 정밀하게 조각하고 그리는 몰입의 과정은 다음 작업을 계획하는 순간이기도 하다.

 기마상 작업이 한창 진행 중인 경기도 파주 작업실에서 신 작가를 두 번째 만났다. 작업실 한쪽에는 수십 개의 원형 틀이 쌓여있다. 그의 키보다 휠씬 높은 기마상의 곳곳을 섬세하게 다듬고 마무리하기 위해 필요한 단계다. 작은 도구를 이용해 부드러운 비누를 정교하게 조각하는 작가의 손길이 아주 빠르게 움직인다. 이 기마상은 오는 가을 대만 현대미술관에 설치할 작품이다. 영국과 한국, 그리고 대만, 앞으로 세계 주요 장소에 같은 기마상이 세워졌다가 수 년 후 나라마다 기후에 따라 다르게 풍화한 기마상들이 한 공간에 전시될 것이다. 그리고 이 전시는 ‘기마상 프로젝트’에서 ‘풍화 프로젝트’로 전이되는 작품으로 남을 것이다.

 신 작가는 앞으로 건축적(석조 건축물)이면서도 평면적인 작업에 관심이 많다고 했다. 여전히 비누를 재료로 사용할지, 또 다른 재료로 진행될지, 프로젝트의 주제는 무엇으로 명명될지 궁금해진다.

“더 좋은 작가가 되는 데 관심이 있다. 자기 이야기를 하는 것, 자기 언어를 하는 것이 중요한 만큼 좀 더 독창적 상황으로 가는 것에 중점을 둘 것이다.” 더 좋은 작가가 되기 위한 신 작가의 움직임은 영국과 국내를 오가며 더욱 탄탄하게 움직일 것으로 기대된다. 

월간중앙9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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