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고


컬럼


  • 트위터
  • 인스타그램1604
  • 유튜브20240110

연재컬럼

인쇄 스크랩 URL 트위터 페이스북 목록

이수종 / 전통과 현대의 보름달 같은 어울림

정영숙

현대도예의 대가

전통과 현대의 보름달 같은 어울림


철화분청의 고지 넘어 60세에 달항아리에 도전···

명성보다는 작품으로 거장임을 일깨워준 작가정신

 

정영숙 갤러리세인 대표, 경희대 겸임교수


삼국시대 토기부터 고려시대 청자, 조선시대 백자와 분청으로 이어지는 도자문화는 우리 문화의 자랑이요. 세계에 내놓을 수 있는 문화유산이다. 현재는 전통 도자(陶瓷)를 잇는 전승공예와 조형성과 기능성을 만족하는 조형도예라는 두 개의 축으로 현대도자가 진행 중이다. 이들 현대 도예가들은 서구의 조형도자를 받아들여 독창적인 조형세계를 표현하는 작가가 있는가 하면, 전통을 계승하여 현대적인 백자·청자·분청 등으로 재해석하는 작가로 크게 구분된다.

45년이나 흙을 만진, 도예가 이수종(66)은 전통을 올바로 학습한 것은 물론 작가 본연의 치열한 창작의 깊이까지 오롯이 다져놓은 현대도예의 대가다. 그는 1969년 대한민국 미술전람회(국전) 입선을 시작으로 1981년부터 2013까지 32회에 이르는 개인전과 국내외 300여 회의 전시회에 참여했다. 그의 작품은 단순한 그릇 작품에서부터 자유로운 조형설치 작업까지 망라돼 있다. 작품도 국내 유수의 미술관을 비롯해 빅토리아 앨버트 박물관(영국), 왕립온타리오 박물관(캐나다), 카사그란데 파다나(이탈리아) 등에 소장돼 있다. 도예가로서의 그의 철학은 “나의 작업은 자연의 재료와 신체의 조화를 통해 전통과 현대의 균형을 유지하는 것이다”(2007)라는 작가노트에 잘 담겨 있다.

도예가 이수종의 작업실은 경기도 화성 시가지를 벗어나 포도밭과 논밭 사이로 2차선 도로를 따라 20여 분을 달려야 만날 수 있다. 작업실에 들어서자 먼저 만나게 되는 것은 그가 살아온 세월의 두께다. 1970년대 작업했던 초기작을 비롯해 1980년대부터 최근에 이르는 다양한 작품, 그리고 아직 진행 중인 작품들이 서로 기묘한 조화를 이루며 축적된 시간의 층을 엿보게 한다. 소성(燒成) 전의 작품들을 바라보노라면 흙을 만지고 물레 돌리고, 때로는 책상에 앉아 드로잉을 하고 있는 그의 일상이 파노라마처럼 그려진다. 작가의 선천적인 재능도 있었겠지만 작업실에서 보낸 긴 훈련의 시간이 결코 녹록지 않았음을 보여주는 듯하다. 자신의 세계에 몰두하는 열정과 땀은 노련한 예술가의 손 끝에 의해 걸작을 남긴다. 높이 1m나 되는 크고 긴 철화분청호 두 점을 보면서 그의 대표작인 철화분청[鐵畵粉靑, 백토분청의 표면에 철사(鐵砂.채색안료)로서 초화문(草花紋), 조어문(鳥魚紋) 등을 장식한 분청사기의 한 종류] 작품 시리즈의 태동이 궁금해졌다. 그가 펴낸 자료를 뒤적거리다 “요즘의 나의 관심은 흙을 빚어 그릇을 만들어 가는 것이 아니라 흙 안에서 그릇을 찾아 가는 것”(1994). “분청의 아름다움은 자유분방함에서 오는 것이 아니라 오랜 시간 숙련을 통한 절제된 표현에 있는 것”(1995)이라는 작가노트가 눈에 띄었다.


         


1 <철화분청항아리>, 32x32x48cm, 2008. 자유롭고 대담하다.

2 <철화백자용문달항아리>, 48.5x48.5x40cm, 2011. 작가가 흑룡해에 작업했다.

철화분청의 대가로 우뚝 서다   


홍익대 대학원 졸업 이후 1970~80년대에는 흙의 물성, 생성과 소멸이라는 주제로 실험성 강한 조형작업과 설치작업이 주를 이뤘다. 1990~2000년대는 분청 작업에 몰두했다. 어느 날 그릇에 대한 인식을 새롭게 발견한 후 예술가적 성향을 자유롭게 발휘할 수 있고 화학반응이 잘 일어나는 철화분청에 집중하게 됐다고 한다. 그는 “분청사기가 지닌 활달하면서도 자유분방하고 거친 듯 입혀진 백화장토(분청사기의 거친 태토를 감추고 밝은 백색의 표면을 얻기 위해 사용되는 것) 위에 간략하고 대담하게 표현된 선각과 철화의 표현이 나의 심성과도 일치하는 것 같았다”고 말했다.

그렇다면 조선시대 철화분청과 이수종의 철화분청의 다른 점은 뭘까?

그의 대답은 명쾌하다. “조선시대의 분청사기는 거친 태토(胎土, 도자기를 만드는 흙 입자)를 감추고 밝은 백색의 표면을 얻기 위해 백화장토를 사용하였으나, 나는 태토를 캔버스처럼 바탕으로 받아들이고, 그 위에 백화장토를 사용하여 드로잉하는 기분으로 때로는 손가락으로 즉흥적인 감흥에 의한 표현을 하기도 하고 채색안료를 이용하여 백색과 짙은 갈색의 대비를 이루는 효과를 얻으려 노력하기도 했다.”

<철화분청도판> <철화 분청항아리> <철화분청호> <철화분청편병>. ‘철화다완’ 등 평면에서 입체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표현이 가능한 그의 철화를 보라. 구상과 추상을 넘나들 정도로 자유분방한 그의 작품은 에너지 넘친다. 추상표현주의의 액션페이팅이 이보다 강렬하랴, 초현실주의의 오토마티즘 회화가 이처럼 자유로우랴, 태토와 화장토(化粧土), 그리고 유약(철화안료)이 화학반응을 제대로 일으키고 불의 온도까지 4박자가 제대로 맞아 떨어질 때 한 작품을 겨우 얻을 수 있다. 화선지에 먹이 스며들 듯, 태토에 화장토가 순식간에 스며들어가는 즉흥적인 붓놀림은 신체와 재료가 한 몸이 될 때 제대로 작품이 된다. 이쯤 되면 우물쭈물 할 시간이 없다. 일수불퇴(一手不退)다. 그리고 소성 이후의 결과는 오로지 겸허히 받아들이는 자세, 도예가의 수용정신이 있을 뿐이다. 소성에 따라 선의 두께는 조금씩 달라지고, 색의 농도도 달라질 수밖에 없다. 그가 40여 년간 소성했지만 가마라는 밀폐된 공간에 들어간 도자기의 크기와 공간 등에 따른 불길은 100% 예측할 수 없는 도예가의 손을 떠난 영역이다.


 

<달항아리>, 52x42x52cm, 2013. 

금강산의 박연폭포가 쏟아지듯, 한 획이 획으로만 끝나지않고 공간을 아우르는 에너지로 충만하다.

60세에 달항아리에 도전하다


한동안 철화분청에 빠졌던 그는 2000년 후반부터는 백자, 그중에서도 달항아리에 집중한다. 무슨 사연이 있었을까?

“철화분청을 30년 넘게 작업했더니 눈을 감고도 원하는 형태, 그림을 그릴 정도로 익숙하고 경지에 올랐다는 느낌을 받았다. 하지만 작가로서는 매너리즘에 빠지는 시기이기도 했다.” 작가로서 경계심을 잃지 않으려 노력했다는 설명이다. 이수종은 철화분청의 대가라는 명성을 뒤로 한 채 그동안 거의 만져보지 못했던 백토(白土)를 선택했다. 분청흙과 흙의 물성이 다르고 성형도 다르고 무엇보다도 소성이 다른 백자 만들기에 도전한 것이다.

역시나 백토는 그에게 수십 번의 실패를 안겼다. 그럴수록 그는 새로운 실험에 끌렸는지도 모른다. 백자 중에서도 그는 달항아리의 매력에 흠뻑 빠져들었다. 그리고 5년이 흐른 후 새로운 작품을 세상에 내놓았다. 철화분청의 대가가 탄생시킨 백자 달항아리는 놀라운 사건이었다. 그가 빚어낸 작품의 완성도는 그가 대가임을 새삼 확인시켜주는 것이었다.

백토를 몸에 익히기에는 고된 훈련의 시간이 필요했다. 환갑 나이인 그에게 무엇보다 체력이 달렸을 것이다. 백토가 지닌 20% 이상의 수축률을 감안한다면 최소 지름 60cm의 항아리를 만들어야 하기 때문에 녹록지가 않았다. 20~30대 젊은 작가들이나 가능할 법한 작업과정이다. 이수종은 달항아리의 형태도 많은 고민을 했다. 조선시대 달항아리를 재현하기 보다는 작가로서 그가 표현할 수 있는 달항아리에 도전했다. 그는 한밤중에 작업을 하다가도 달을 바라보며 조상들이 붙여놓은 달항아리의 의미와 형태성을 고민했다고 한다. 우리 눈에 보기에 가장 적절한 크기, 우리 품에 안길 수 있는 넉넉히 형태, 자연스러운 빛깔, 그리고 21세기에 맞는 달항아리는 어떤 것일까? 이런 탐구 과정을 거쳐 탄생한 달항아리 중에는 조선시대 달항아리와 형태가 유사한 것도 있고, 두 개의 사발을 붙이는 과정을 과감하게 드러내는 이음새가 돋보이는 달항아리도 있다. 그의 달항아리는 철화분청을 그릴 때처럼 자유롭고 대담하다. 철화분청에서의 기개가 달항아리로 전이되어 웅장하고 깊은 울림이 있는 이수종만의 달항아리가 완성된 것이다.


1  


1 작가의 그림, 41x43cm 한지에 먹, 2010.

2 작가의 그림, 106x92cm 한지에 먹,백토슬립, 2013.


작가, 우주의 순리를 따르다


2013년에 개최한 그의 32회 개인전은 대표작인 철화분청과 완성도 높은 달항아리 외에도 그림·조각 등 다양한 작품이 망라됐다. 그중 특히 눈에 띄는 작품은 용 그림이 새겨진 달항아리였다. 그가 2012년 흑룡해에 작업한 것으로 매끄러운 흰 항아리를 캔버스 삼아 일필휘지로 그린 <철화흑룡항아리> 작품이다. 그는 이 용그림을 한 번의 호흡으로 순식간에 그렸다고 한다.

철화와 백자의 조화를 더 빛나게 만든 작품은 지름 47cm 달항아리에 그린 한 획의 철화였다. 이 작품은 어느 미니멀리즘, 단색화, 색면화보다 강렬한 인상을 준다. 금강산의 박연폭포가 쏟아지듯, 이제 막대지에 뜨거운 생명이 자리한 듯 그 획이 하나의 획으로 그치지 않고 공간을 가로질러, 그 공간을 아우르는 에너지를 만들어냈다. 40년 넘게 흙을 만지고, 철화를 30년 이상 작업한 도예가가 표현할 수 있는 경지라고 할 수 있다. 그는 명성이 아닌 작품으로 그 경지를 알려준다.

이수종은 작가로서 훈련과 축적의 과정을 가장 중요시한다. “적어도 작가라고 불리길 원한다면 대학졸업 후 10년 이상 훈련하고 축적된 시간이 있어야 한다. 작가는 기능 외에 자기 시간을 어떻게 관리하고 생활하느냐가 중요하다.” 그는 도예를 통해 늘 자연과 만나고 우주와 만난다.

“도예는 흙을 재료로 한다. 흙이란 다른 어떤 장르의 예술에서 사용하는 재료보다 가공되지 않은 순수한 자연에 가까우며 제작 과정에서 여타의 도구를 거치지 않고 신체와 접촉하게 된다. 흙을 만지고 사는 도예가는 그렇게 자연과 직접 교감하게 되는 것이다. 사람은 땅을 따르고, 땅은 하늘을 따르고, 하늘은 도를 따르며, 도는 자연을 따른다.”

흙·물·불·사람은 우주를 형성하는 기본요소이라고 한다. 이들은 또 도예 작업의 기본이 된다. 흙과 물을 만지고 도자기를 빚고 가마에 불을 넣고 마음속으로 그려진 형상과 유약이 실제로 소성 후에 나올 때의 즐거움은 더욱 커질 것이다. 자연에 순응하며 시간과 땀이 축적된 경험을 통해 하나의 작품이 완성된다. 현란한 개념미술가의 현대미술보다 그만의 체화된 몸의 언어, 흙으로 만든 도자기가 더욱 빛나 보이는 이유다.


    월간중앙 2월호





하단 정보

FAMILY SITE

03015 서울 종로구 홍지문1길 4 (홍지동44) 김달진미술연구소 T +82.2.730.6214 F +82.2.730.921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