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육근병 / 그림에 소리를 담다

정영숙

설치미술가 육근병

그림에 소리를 담다


미디어아트, 조각, 사진, 음악 등의 장르 넘다들며

보편적 삶을 미학적으로 풀어내는 실험적 행보 계속  

정영숙 갤러리세인 대표, 경희대 겸임교수

 

작가 육근병(57)은 국내와 일본, 유럽 등을 오가며 작품 활동을 하는 세계적인 예술가다. 초기에는 비디오와 미디어, 설치와 퍼포먼스 작업을 발표하며 ‘제2의 백남준’으로 알려졌지만 최근에는 사진·드로잉 등의 장르를 넘나들며 왕성하게 활동한다. 작가의 작업실은 서울 도심을 벗어나 경기도 양평의 한적한 곳에 자리 잡고 있다. 야트막한 산 아래에 위치한 작업실은 먼 산의 능선까지 바라볼 수 있을 정도로 시야가 탁 트여 있다. 밤에는 앞산의 능선과 뒷산의 능선이 먹빛으로 그려지고, 그 위로 반짝이는 별빛들이 보이는 아름다운 곳이다. 작업실 내부는 천고가 높은 복층 형태인데, 대형 캔버스가 여러 개 펼쳐져 있는 미술공간과 미디어 작업을 진행할 때 영상과 사운드 작업이 진행되는 음향시스템 공간으로 구분되어 있다.


작업실에 들어서자 작가가 음악을 틀어주었다. 그가 새벽에 종종 듣는다는 음악으로 기타 하나로 오케스트라 음을 만들어낸다는 러시아 출신 기타리스트 에스타스 토니(Estas Tonne)의 연주곡이었다. “서곡처럼 펼쳐지는 연주의 도입부가 기타소리 같지 않아서 좋고, 연주자가 진정성이 느껴지는 아티스트여서 나와 공감대가 형성된다”고 그는 말했다. 음악을 들으며 눈을 돌려보니 작업실 한쪽 책장에 레코드 음반과 CD가 가득 꽂혀 있다. 그는 대학시절에 음악밴드에서 활동한 경력이 있다.


그는 경희대 미대와 대학원을 다니며 미술교육과 회화를 전공했다. 하지만 1988년 첫 개인전에서는 회화가 아닌 독특한 미디어아트를 선보이며 일약 명성을 얻게 된다. 육근병 작가 하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조형적 형태는 음산한 묘지다. 대형 묘지의 위쪽에 한쪽 눈만 움직이는 모니터가 장착되어 있는 단순한 작품이다. 삶의 현장에서 멀리 떨어져 있는 묘지, 곧 죽은 자의 거처인 묘지를 미술 전시장에 설치하고 살아있는 눈이 촬영된 모니터를 보게 하는 것은 관객의 입장에서는 조금은 당혹스럽다. 작가는 왜 이처럼 도발적인 작품을 발표하게 됐을까?


전북 전주에서 유년시절을 보낸 작가는 집 앞 골목을 걷다 어느 집 나무대문 앞에 종종 머물렀다. 한창 호기심이 왕성했던 아홉 살 무렵의 그에게 관솔(소나무 옹이) 구멍으로 대문 안쪽을 들여다보는 것은 매우 흥미로운 일이었다. 구멍이 뚫린 곳에 한쪽 눈을 대고 바라보는 집 안의 텃밭 채소와 사물들의 형상이 마치 오목렌즈나 볼록렌즈로 보기처럼 왜곡된 모습이 신비롭게 느껴졌다. 작가는 이를 통해 ‘눈’ 그리고 ‘본다’라는 것을 육체에서 가장 중요한 예술 언어로 이끌어내게 된다.


내 몸에서 예술의 키워드를 찾다


그의 작품에 등장하는 무덤은 등하굣길에 친구들과 함께 뛰놀던 놀이터이기도 했다. 그곳에서 낮에는 총싸움과 자치기를 하면서 신나게 놀았지만 밤에는 왠지 무섭다는 생각이 들어 찾아가지 못했다. ‘눈(目)’과 ‘무덤’을 하나의 작품으로 연결한 작가는 그때까지 아무도 없었다. 그는 작업에 몰두하면서 조상의 묘지가 자신에게 일종의 추억이었음을 알게 됐다. 그래서 추억을 현실화하고 조상의 얼을 끄집어내는 것을 모니터 속에 껌벅거리는 눈으로 표현했다고 한다. 작가는 “눈은 가장 순수한 정직의 상징성과 생명의 시작인 신비한 추상성을 함축한다. 그리고 역사의 저변에 선명하게 혹은 잔잔하게 자리하고 있다”고 말한다. 관람객이 바라보는 작품의 눈은 역사를, 작품(눈)이 바라보는 관람객은 현실을 보는 인터렉티브한 효과를 통해 과거와 현실이 공존하는 시간성이 개입된다.


육근병이 이 작품을 처음 구상하던 1980년대는 컴퓨터가 대중화되기 이전이었다. 그는 서울 종로 세운상가에서 TV와 VTR, 그리고 여러 대의 카메라를 구입해 작품을 구상했다. 전자기기를 잘 다루는 기술자를 찾아 자문을 구하기도 했지만 거의 독학으로 기술을 습득해 8년 만에 첫 개인전을 열게 된다. 그 작품이 바로 그에게 유명세를 가져다준 <The sound of landscape+Eye for field=yin & yang>다. 서울 인사동의 작은 갤러리에서 조용히 전시를 시작했는데, 다음날 미술평론가인 유준상 서울시립미술관장이 전시회를 찾아 작품을 눈여겨봤다고 한다. 이후 그의 작품은 국립현대미술관 청년작가전(현재는 젊은작가 모색전) 작품으로 선정됐다. 그리고 이듬해에는 세계적인 미술전람회인 브라질 상파울로 비엔날레(Bienal De Sao Paulo)에 초대받게 된다.


상파울로 비엔날레와 카셀 도큐멘타에 참가


1980년대 컬러TV의 보급은 한국미술에도 ‘미디어아트’가 뿌리내리는 토양을 제공했다. 육근병이 그중 두각을 나타내면서 1992년에는 세계 최고의 미술 행사 중 하나인 카셀 도큐멘타(Kassel Documenta)에 초대받게 된다. 카셀 도큐멘타는 회화, 사진, 조각, 설치 그리고 퍼포먼스에 이르기까지 실험 예술을 주로 발표하는 전시회로 알려져 있다. 한국 작가 중에서는 백남준이 출품한 이래 그가 두 번째였다.


도시 곳곳에 전시 작품이 설치되는데 특히 프리데리치아눔 미술관(Fridericianum Museum)앞 광장이 메인 전시장으로 알려져 있다. 애당초에는 육 작가의 작품이 그곳에 설치되기로 했으나, 중간에 미국 작가인 조나단 브로브스키(Jonathan Borofsky)의 작품으로 교체된다는 소식을 전해 듣게 된다. 육 작가는 고민 끝에 이 일을 카셀 지방법원에서 ‘예술법’으로 처리할 수 있다는 것을 알게 된다. 작가는 카셀시를 상대로 고소장을 낸 뒤 직접 변론을 했고, 결국 육 작가의 작품은 당당하게 메인 전시 장소에 계속 설치되었다.


육근병이 일본과 인연을 맺게 된 과정도 흥미롭다. 1989년 상파울로 비엔날레에 초대받았을 때 국내 언론과 미술계보다는 일본 언론이 이를 대서특필되면서 일본에 초대전을 열게 된다. 이때부터 시작된 일본에서의 작품활동은 지금도 이어지고 있고, 현재 그는 도호쿠예술공과대학 초빙교수로도 활동한다. 마니아들이 생겨나 서울에서 열리는 전시까지 찾아올 정도다.


그의 작업실 벽면에는 일본 소바식당에서 백남준 선생과 찍은 사진이 걸려 있다. 그의 이름 앞에 붙어 있는 ‘제2의 백남준’이라는 수식도 당초 일본에서부터 시작됐다고 한다. 육 작가는 이에 대해 “송구스럽다”고 말했다. 그가 백남준에게 영향을 받았다면 어떤 것이 있을까? 그는 주저 없이 “자부심”이라고 말했다. 백남준은 활동 무대가 주로 유럽이었지만 작품의 근간에 동양정신을 담는 것을 잊지 않았기 때문이다. 예술가로서 당당함과 순수함을 잃지 않았던 그 정신을 이어받고자 했다.


일본 최고의 뉴에이지 피아니스트로 손꼽히는 류이치 사까모토(Ryuichi Sakamoto)와 나란히 촬영한 2008년 <ARTIST SUMMIT KYOTO 2008> 포스터, 그리고 일본의 유명 실험음악가인 도모에 시즈네(Tomoe Shizune)와 함께 작업한 아트뮤직비디오 작품인 <잠으로의 풍경> 포스터도 눈에 띈다.


음악인의 협업은 우연의 산물이 아니다. 그는 대학시절 활동했던 음악밴드에서 기타와 보컬을 맡았었다. 당시의 음악활동은 그가 영상작업을 할 때 사운드 작업을 직접 제작할 수 있는 토양이 되었다. 1995년 리옹비엔날레에 출품한 <Survival history>의 사운드도 지리산을 등반할 때 기타를 메고 노고단을 거쳐 천왕봉까지 가는 길에서 본 고산목에서 영감을 얻었다. 작가의 음악 작업은 지금도 계속된다. 설치미술이나 영상작업에 필요한 음악을 직접 만드는데, 종이 위에 연필로 드로잉하듯이 영상기기 앞에서 조용히 있다가 단상이 떠오르면 악기의 음을 누른다. 작가는 이를 “소리로 그림을 그린다”고 표현했다. 영감이 떠오를 때 그림을 그리듯 ‘음악 드로잉’을 한다는 것이다.



눈과 무덤을 하나의 작품으로 연결한 작가는 육근병 이전에는 없었다. 

작품은 1989년 브라질상파울로 비엔날레에 출품한 작품.

1995년 프랑스리옹 비엔날레 출품작. 관람객이 바라보는 작품의 눈은 역사를.

작품(눈)이 바라보는 관람객은 현실을 보는 인터렉티브한 효과를 준다.



일본최고의 뉴에이지 피아니스트로 꼽히는 류이치 사카모토와 

나란히 촬영한 <ARTIST SUMMIT KYOTO 2008> 포스터.

작가의 작업실 주변 숲 속 풍경을 담은 사진. 사진위에 '+'표식을 

숫자들과 함께 표기해 같은 장소를 여러 번 촬영했음을 알 수 있도록 했다.


“아티스트가 저항정신이 없다면 반성해야”


육 작가는 2013년 개인전에서 새로운 시도를 한다. <The Sound of landscape=Site energy> 작품에서 음향을 제거한 영상작업과 사진작업만 발표한 것이다. 작가는 당시에 발표한 영상작품이 보관된 공간으로 안내했다. <Nothing> 시리즈 중 한 작품은 난간에 눈이 쌓이는 모습이 클로즈업된 풍경으로 담겨 있고, 소리는 없다. 또 다른 사진 작품은 그가 일하는 작업실 주변의 숲 속 풍경을 담았는데, 사진 위에 ‘+’표식을 숫자들과 함께 표기해 같은 장소를 여러 차례 촬영했음을 알 수 있도록 했다. 그처럼 표식을 남긴 이유는 뭘까? 작가는 과거, 현재, 미래를 하나로 보고 있다. 현재는 존재하지 않는 것으로 정지된 시간이고, 그렇기 때문에 아주 사소한 찰나라도 역사의 일부분이 된다는 의미를 내포한다고 설명했다. 작품을 보고 있자니 일상의 삶에서 대자연의 생명력으로 확장하는 작가의 시선이 느껴졌다. 눈에 보이지 않는 추상적인 것을 표현하고자 애쓰는 흔적도 엿보였다. 작가는 이에 대해 “바람, 예술, 사랑, 종교의 공통점은 눈에 보이지 않지만 보이는 것처럼 생각된다는 것이다. 안보이지만 우리가 느끼고 있는 것이다”라고 설명했다. 그는 음향을 배제한 풍경을 담아내듯 형상이 없는 것을 형상으로 담아내는 실험을 하고 있다.


육근병은 최근 여러 가지 대형 프로젝트를 준비 중이다. 작업실 벽면에 부착된 포스터 중에는 <UN Audiovisual Art project>라는 기획 자료가 있다. 그가 10여 년 넘게 구상해온 대형 프로젝트로 뉴욕의 유엔본부 외벽에 설치하는 것을 목표로 진행 중이다. 러시아 바이칼 호수에서 진행할 퍼포먼스도 이색적이다. 바이칼 호수는 우리 민족의 뿌리가 숨겨져 있을지 모르는 곳이다. 바이칼호에서 제의 형식으로 펼쳐질 그만의 퍼포먼스가 구체적으로 어떻게 발표될지 기대가 됐다.


이처럼 그는 우리 역사에 대한 관심을 작품화하는 데 관심이 많다. 그동안 발표한 영상작업도 사회적 담론을 미학적으로 표현한 작품이 많다. 2012년 개인전 때는 종군위안부를 영상화한 다큐멘터리 <훈 할머니>를 발표했고, 독도에 대한 드로잉도 꾸준히 진행 중이다. 그는 “아티스트들은 자신을 둘러싼 사회 환경에 흡수되고 저항정신이 없는 것을 반성해야 한다”고 말했다.


그는 영상과 조각, 설치, 그리고 회화, 사진 등 다양한 장르를 넘나든다. 역사와 사회적 소재, 자연 풍경 등 외형적으로는 다르게 보이지만 우리가 알면서 쉽게 지나치는 것에 대해 시선을 고정하게 만든다. 냉철하고 밀도 있는 시선으로 보편적 삶의 가치를 미학적으로 끌어내는 그의 작품에 미술계가 주목하는 이유다.   


월간중앙 6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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