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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순철 / 한국인의 원형 찾는 고독한 관찰자

정영숙

원로화가 권순철

한국인의 원형 찾는 고독한 관찰자


40년 간 산(山)과 얼굴 그림을 그리며 한국인의 ‘넋’을 형상화···

파리와 한국, 동서양을 오가며 ‘젊은’ 예술정신 보여주는 대가(大家)


정영숙 갤러리세인 대표, 경희대 겸임교수, 문화예술학 박사


권순철(70) 작가는 프랑스 파리 근교의 도시 이씨레물리노(Issy-Les-Moulineayx)와 경기도 양주군 장흥 두 곳에 작업실을 두고 있다. 파리에서 활동하는 한국 화가들을 대표한다고 할 정도로 파리 현지에서 명성이 높은 원로여서 오래전부터 작가의 스케줄을 확인해 국내에서 작업하는 시기에 맞춰 장흥의 아뜰리에를 겨우 방문할 수 있었다. 넓은 작업실의 벽면마다 대작들이 즐비하게 세워져 있었는데, 그나마 100호 미만의 작품들은 아틀리에 한쪽에 층층이 쌓아놓았다. 작가가 평생 동안 천착해온 얼굴을 그린 대작 옆에는 작가가 그려온 한국과 파리의 산(山)과 100호 미만의 누드 그림 몇 점, 그리고 얼굴을 그린 소품들이 겹겹이 놓여 있었다. 한창 작업 중인 이젤 위에도 그가 평생을 그려온 얼굴 그림이 미완성인 채로 놓여 있었다. 작업실을 찾아간 날, 마침 작가의 노모께서 와 계셨다. 6·25 때 남편과 사별하고 어린 권 작가와 유복자 동생을 키우셨다는 어머니는 90세가 넘으셨지만 거동에 불편이 없을뿐더러 말씀도 잘하셨다. 청력만 조금 떨어졌다고 했다. 하지만 옛날 기억은 더욱 또렷하셔서 권 작가와 작품 활동의 배경이 됐던 유년시절 이야기를 나눌 때는 어머니께서 오히려 더 세세한 말씀을 들려주실 정도였다. 전란 중에 부산에서 은행지점장으로 일하던 남편과 사별하고 어린 아이들을 키우느라 고생을 많이 하셨다고 했다. 그러고 보니 주름진 할머니의 얼굴을 그린 작가의 그림이 눈앞의 어머니를 꼭 닮았다. 작가가 오랫동안 화두로 삼아 온 인물화의 뿌리를 찾은 느낌이랄까. 얼굴은 권 작가가 40년 가까이 일관해서 다뤄온 소재다.

경남 창원 태생인 권순철은 서울대 미대 재학시절에는 추상을 주로 그렸다고 한다. 일본에서 유학한 교수들의 영향과 외국 미술서적으로 본 서양미술을 수용하며 습작 시기를 거쳤다. 하지만 군대 제대 후 3학년에 복학할 때부터 서구 문화에 대한 무비판적인 수용에 대한 각성과 우리 문화를 찾자는 분위기에 합류해 우리 고유의 것, 순수하고 전통적인 것에 대해 관심을 가졌다.


40년 동안 산을 그리다


1988년 프랑스로 건너간 이후 작가는 자연스럽게 자신의 정체성에 대해 고민해왔고 그 속에서 한국적인 정서, 토착적인 원형을 추구했다. 그 결과물이 바로 산을 그린 그림들이다. 작가와 30년 넘게 알고 지낸 한 평론가의 글에서 작가가 얼마나 산을 그리기 위해 열정을 쏟았는지를 확인할 수 있다. “내가 권순철을 처음 만난 1960년대 말부터 지금에 이르기까지 그는 언제나 한결같은 모습이다. 언제, 어디서나 스케치북과 한두 권의 책을 그것도 겨울철에는 목장갑을 낀 손으로 들고 다니는가 하면 그는 표정은 늘 잔잔하고 말이 없다. 60년대 혹은 70년대 현대미술의 그 요란했던 와중에서 그리고 80년대 초 저 변혁의 열기 속에서 결코 떠나 있지 않으면서도 그는 늘 변함없이 산을 그리고 얼굴을 그리고 넋을 그리고 있다. 이화가의 정신은 도대체 무엇인가.”(김윤수 평론가 <김윤수의 山, 얼굴 그리고 넋>1986년 개인전 평론 중 발췌) 그의 작업실에 있는 몇 점의 산 그림이 눈에 들어 왔다. 눈 내리는 겨울에 작업실 앞쪽에 보이는 산 능선을 그린 설경, 양평고을을 감싸고 흐르는 양수리 야산을 그린 작품, 그리고 서울의 관악산을 그린 그림 등이었다. 작가가 화폭에 담은 산은 웅장한 산의 모습이나 우뚝 선 정상의 절경이 아니다. 그저 산길을 가다가 마주친 야트막한 동산이나 산기슭, 이름 모를 산의 능선이 대부분이다. 어쩌면 너무나 흔하게 볼 수 있는 우리 곁의 산들의 풍경이다. 작가는 그런 산들을 청전 이상범의 실경산수(實景山水)처럼 꾸밈없고 과장 없이 그려냈다. 다만 그가 그린 산의 형상은 산에 내재된 기운이 폭발하는 듯 억만 시대를 살아온 생명의 울림처럼 강렬하고 거칠다. 작가의 작품 목록에서 산의 그림들을 살펴보니 <1987년 비 온 뒤 용마산> <안개 단풍 용마산 일봉> <1988년 눈 용마산> <꿈뫼 용마> <관악> <2000 눈 산등성이> <2005년 용마산> <2006년 북한산> <2010년 설경> 등 수많은 작품이 파노라마처럼 펼쳐져 있다. 파리에 가서도 산을 찾아 작업하는 작가의 모습을 머릿속에 떠올리다 보니 문득 후기인상파 대가 세잔의 <생 빅투와르산(La Montagne Sainte Victoire)> 연작이 떠올랐다. 우주의 변화 속에서 산 지층의 변화를 예리한 감각으로 읽어내며 탐구한, 세잔의 정신이 깃든 작품이다. 세잔과 권순철의 작품에서는 바로 본질을 탐구하려는 정신에서 연관성이 그려졌다. 권 작가의 작품에서는 산의 형상의 본질을 빌린 한국의 정신, 즉 한국인의 넋이 표현되어 있다. 작가는 “국내에 있는 산을 더 많이 못 그려서 항상 미안한 마음”이라고 말했다. 그가 머무는 파리 근교의 산보다는 원만하면서도 강인한 국내산을 더 많이 그리고 싶은 마음을 늘 품고 있다고 한다.

결국 권 작가는 산을 통해 리얼리즘에 바탕을 둔 추상을 그리고 싶었던 것이다. 그러고 보면 그가 매달린 ‘넋’이란 개념 자체가 꽤나 추상적이다. 작가가 그리고자 한 무형의 ‘넋’은 산 그림에서 얼굴 그림으로 옮겨갔다. 형상이 없는 넋은 그의 얼굴 그림을 빌려 존재를 드러낸다. 무녀인 만신(萬神)이 굿을 통해 타인의 삶을 대변하듯이 그의 얼굴 그림은 고통을 승화시키는 씻김굿과도 같다.



<북한산>_60x120cm_oil on canvas_2006

산에 내재된 기운이 꿈틀거리는 듯 억만 시대를 살아온 생명의 울림처럼 강렬하고 거칠다.


한국의 원형, 산에서 얼굴로


작가가 넋이라는 주제에 천착한 계기는 아무래도 그가 겪은 고통스러운 경험에서 비롯된 듯하다. 6·25전쟁 중에 부친과 삼촌을 잃고 전쟁의 참상을 목격한 시기가 그의 나이 십대 전후였다. 그는 참혹한 아픔을 겪은 당시 사람들의 얼굴을 잊을 수 없었다고 했다. 그래서 붓을 들었다. 살아 있어도 살아 있지 않은, 넋이 나간 사람들의 표정, 죽어서도 구천을 떠도는 죽은 이들의 넋을 얼굴 그림으로 형상화하기 시작했다. 그러면서 차츰 일본군과의 싸움에서 피 흘린 조상들, 생존을 위해 길가에서 노점상을 하며 치열하게 사는 사람들, 가족과 집을 잃고 헤매는 사람들의 표정으로 소재를 넓혀간다. 그가 그린 작품 속의 얼굴은 대부분 일그러져 있고 어떤 작품은 뭉개져 있어 얼굴인지 얼굴을 닮은 덩어리인지 구분이 불가능하다. 붓의 터치는 꿈틀거리듯 강렬하고, 색채는 밝고 어두운 색이 중첩되어 있으나 전체적으로는 묵직한 어둠의 빛이다. 그의 얼굴 그림을 보고 있노라면 마음이 저려온다. 이제는 60년이 흐른 6.25전쟁, 분단국가이지만 선진국 못지않게 풍요로운 지금의 한국의 모습에서 처절한 고통이 내재된 그의 얼굴 그림은 어쩌면 부담스럽기까지 하다. 그래서일까? 작가에게 조금 무례하게 느껴지는 질문을 했다. “작가가 그린 얼굴 형상처럼 고통스러운 사람들은 지금 우리나라에는 많지 않다. 작가의 작품에 40년 넘게 일관되게 내재되어 있는 이유는 무엇인가?” 작가가 대답했다. “우리는 아직도 분단국가다. 이산가족 문제 등 여전히 아픔이 서려있고, 종군위안부들의 인권유린문제 등 상처가 치유되지 않고 있다.” 그렇다. 서울이 아무리 파리처럼 화려한 도시로 변했다 할지라도 한국인의 상처는 한국인의 얼굴에 깊이 내재돼 있다. 강제로 끌려간 종군위안부에 대한 피해 배상과 일본 정부의 사과가 이뤄지지 않는 한 위안부 할머니들의 고통스러운 표정은 얼굴에서 지워지지 않을 것이다. 우리사회 곳곳에 권위적인 폭력과 인권유린, 행정과 교육의 부실로 어이없는 죽음이 이어지고 있는 상황에서 침울한 표정은 사라지지 않을 것이다. 권작가는 우리 민족의 비극이나 상처를 작품에서 그대로 보여주기보다는 한 차원 승화된 모습으로 표현하고자한다. “고통스런 표정에서 숭고함을 드러내고 싶다. 오랫동안 살아온 노인의 얼굴에서 담담하게 드러나는 달관된 표정, 고통 이면의 평화로움을 찾고 싶다. 그런데 아직 거기에 못 미치는 것 같다.” 그는 한국 근현대사의 질곡과 고난이 담겨 있는 얼굴, 정신성이 발현되는 얼굴, 내면을 드러내는 얼굴, 슬프지만 위엄을 갖춘 얼굴을 찾는 작업을 40년이 넘도록 해오고 있다. 그는 평생을 그린 얼굴 그림이지만 갈 길이 멀다고 했다.


<누드>_100x81cm_1990년대

작가는 인체가 갖고 있는 역사성을 누드로 구현하고 싶어한다. 

1 2

1 <아낙네>_90x90cm_oil on canvas_2008

작품속의 얼굴은 대부분 일그러져 있고 어떤작품은 뭉개져 있어 얼굴인지 얼굴을 닮은 덩어리인지 구분이 없다. 

2 <얼굴>_120x120cm_oil on canvas_2008

그의 얼굴 그림은 고통을 승화시키는 씻김굿과도 같다.

한국의 현실에 대한 깊은 통찰을 ‘넋’으로 표현


얼굴 그림에서 그가 그린 누드로 발길을 옮겼다. 크로키와 드로잉, 유화작품들이 작업실 한쪽에 가지런히 쌓여져 있다. 남자 누드 중에는 노인을 모델로 한 작품도 눈에 띄었다. 작가는 “파리에서 누드모델은 연령대에 따라 남녀 상관없이 많이 그릴 수 있고 포즈도 잘 취해준다. 파리생활의 최고 장점”이라고 말한다. 국내에서는 누드모델을 그리려면 비용도 비쌀뿐더러 모델이 많지 않다. 그래서 여성누드를 그린 그림도 파리의 모델을 불러 초벌 그림만 그린 뒤 한국으로 옮겨와서 완성하는 중이라고 했다. 그는 “이제는 한국인의 누드를 그리고 싶다. 우리나라 사람만이 갖고 있는 아름다운 비례를 찾아서 이상적인 미의 기준을 담고 싶다”고 말했다. 작가는 인체가 갖고 있는 역사성을 누드로 구현하고 싶다는 계획도 내비쳤다. 윤범모 평론가는 1982년 ‘권순철의 예술세계’를 비평한 글에서 다음과 같은 권 작가의 글을 인용한 척이 있다. “오늘의 작가라면 과거나 현재도 깊이 생각해야 하나 또한 미래의 인류생활이나 문화의 향방에 대해 이렇게 될 것이다든가, 이렇게 되어야 한다는 가정 아래, 다가오는 미래에 대한 예술 정신을 통한 준비가 있어야 할 것이며, 또한 피 흘리는 한국의 현실에 대한 깊은 통찰 아래 인류의 고통을 형상화해야할 것이다. 작가들이나 평론가들, 대중들이 치열하면서도 부드러워야 되지 않을까 싶다.”(작가의 글 <공간>1982년 11월호) 22년 전, 권 작가의 글에는 현재 작업 중인 미술의 방향성이 고스란히 담겨 있는 것이다. 파리에서 25년 넘게 활동했으면 작품이 변할 법도 하지만 여전히 흔들림이 없다. 그는 굳건하고 푸른 소나무처럼 일관되게 한국인의 넋을 파리의 인물에서도 구현하고, 파리지엔느의 누드에서도 한국인의 미의 형상을 찾기 위해 습작을 하고 있다. 거칠고 강렬한 그의 얼굴 그림과 누드 그림이 상이(相異)할 것처럼 보이지만 본질적으로 통하는 측면은 바로 근본을 탐구하는 작가정신에 있는 듯하다.

심청가 중 자진모리, 계면조의 심봉사 통곡하는 소리를 성창순 명창의 소리로 들으면 절절한 울림의 그 슬픔이 가슴을 후벼 판다. 넋을 달래는 그 소리짓을 권 작가는 물감으로 회오리치듯 그려서 넋을 달랜다. 작가의 몸은 한국과 파리를 오가지만 예술정신은 더욱 강건하게 한국에 뿌리를 내린 채 더 깊고 넓게 펴져 나간다. 50여 년 붓을 잡고 있지만 여전히 탐구하고 싶은 것이 많은 그의 고희의 나이에도 ‘젊은 정신’을 가진 대가다.  


월간중앙 9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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