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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간중앙 [정영숙의 아트테크-컬렉터의 수장고를 열다(1)] 이수문 아트센터 화이트블럭 대표

정영숙

[정영숙의 아트테크-컬렉터의 수장고를 열다(1)] 이수문 아트센터 화이트블럭 대표 
미술가들 레지던시에 나무를 심는 사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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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거지와 작업실 등 창작활동 후원하는 레지던시 14년째 운영
초기 입주 작가들 어느덧 중진으로 성장해 미술 시장에서 활약




▎이수문 아트센터 화이트블럭 대표는 예술가의 창작활동을 지원하는 레지던시를 14년째 운영한다.


미술 후원은 일반적으로 “사람이나 단체·작품·예술 등을 뒷받침하거나 용기를 북돋우거나 장려하는 후원자의 행위”라고 정의된다. 예술 애호 정신이 부와 권력을 가진 세력에 의해 적극적으로 육성, 지원된 것을 일컫기도 한다. 대표적인 사례가 르네상스 미술을 꽃피운 메디치가(家)의 후원 활동이다. 막대한 돈을 들여 성당을 지어주고 벽화를 주문하는 등 일련의 후원 활동으로 예술품을 제작했다. 이처럼 미술품 컬렉션을 통한 후원 활동은 정치·사회·역사적 의미를 지닌다. 개인적 취향으로 판단되던 미술 애호는 사회구조와 밀접하게 관련돼 있었다. 20세기 들어 미술 후원의 의미는 다양화됐다. 후원 계층도 과거 귀족이나 왕실 또는 교회 등에 국한됐다면 20세기에는 개인 컬렉터, 공·사립 미술관, 재단, 정부, 화상, 비평가 등으로 다양해졌다. 후원 동기도 권력이나 종교적 신념을 강화하기 위한 공리적 목표에서 미술가나 미술 자체에 대한 순수한 취향으로 변화했다. 이번 연재는 국내외 예술·미술 후원가 중 미술관을 운영하는 미술컬렉터를 중심으로 진행될 것이다. 그 첫째로 이수문 아트센터 화이트블럭 대표를 만났다.

화이트블럭은 경기 파주와 충남 천안에 각각 있다. 파주 헤이리 예술마을에 즐비한 노출 콘크리트 건물 가운데 결이 다른 희디흰 자태로 압도하는 아트센터 화이트블럭이 눈에 띈다. 자연생태와 절묘하게 어울려 갈대광장의 중심축이 되고 있다. 건축물 못지않게 소프트웨어도 훌륭하다. 개관 전부터 독일의 굵직한 작가를 초대했다. 근래에는 원로와 중진을 주목하는 전시도 개최하지만 젊은 작가들의 인큐베이팅(incubating)에 주력하는 경향이 돋보인다. 개관 전부터 화이트블럭 전시와 예술마을 내레지던시(Residency·후원으로 운영되는 예술 창작촌)를 다녔을 때 어떤 분이 이렇게 멋진 공간을, 작가를 위해 레지던시까지 운영할까 늘 궁금했다. 10여 년 만에 그 궁금증이 풀리는 만남이 시작됐다.

중견 기업인으로 차명희 작가 통해 미술과 연결




▎경기도 파주시 헤이리 예술마을에 위치한 화이트블럭의 전경. 희디흰 외벽이 단연 눈에 띈다. / 사진:아트센터 화이트블럭


이수문 대표를 만나기 전 자료를 찾아보니 코스닥 상장 기업을 운영하는 탄탄한 중견 기업인이었다. 중·고등학교 시절에는 열광적으로 연극반 활동을 했고, 대학 졸업 후 연극계에 몸담았을 때는 뮤지컬 ‘명성황후’를 제작했다. 일반적인 기업인에게서 엿볼 수 없는 이색적인 경력은 아트센터를 구축하는데 자양분이 됐을 것이다. 미술과의 연결고리는 평생의 반려자인 아내 차명희 작가의 작품 활동을 지켜보며 형성됐다고 한다. 아주 오래된 시간의 축적이 있었을 것이다.

이수문 대표는 2011년 화이트블럭을 개관하면서 기획전 중심으로 신진작가를 발굴하고 좋은 작가들이 전시할 수 있도록 힘쓰겠다며 운영 철학을 밝혔다. 레지던시는 2009년 헤이리 예술마을에서 ‘스튜디오 화이트블럭’으로 시작했다. 2018년부터는 충남 천안에 세운 ‘화이트블럭 천안 창작촌’에 레지던시를 이전해 운영하고 있다. 이수문 대표는 “주방과 욕실을 갖춘 총 16개 작업실과 전시실, 워크숍과 강연회, 소규모 세미나가 가능한 커뮤니티 라운지 및 산책로를 갖췄다”면서 “초기부터 지금까지 14년 동안 작가 총 61명에게 창작 활동에 전념할 수 있는 작업실을 제공하고 있다”고 말했다.

인터뷰 중에 그는 설계도면을 펼치면서 설명을 이어갔다. 2023년 6월경 개관하는 공연장, 중견작가를 위한 주택단지 터 등 창작 스튜디오의 능선과 산으로 연결된 부지에는 앞으로 채워질 아트센터의 청사진이 구체적으로 표기돼 있었다. 도면 설명을 할 때 그의 목소리에는 힘이 넘쳤다. 목표를 향해 하나하나 실현해가는 과정을 즐기면서 일하는, 관록과 여유가 넘치는 시니어의 모습이었다.

이수문 대표의 경력에 현대그룹 산하 기관에서 중역으로 근무한 이력이 있고, 필자도 현대백화점 수석 큐레이터로 재직한 이력이 있어 대화 중에 자연스럽게 20여 년 전 그 시절 얘기로 대화가 이어졌다. 그중에서도 공통으로 회자되는 거인, 고(故) 정주영 회장을 언급하지 않을 수 없었다. 필자가 신입사원 하계 연수원에서 사원들과 씨름하던 중 정주영 회장을 뵀다면, 이수문 대표는 정주영 회장이 주관하는 회의 참석은 물론 개별 미팅까지 했던 측근이었다. 그래서인지 이수문 대표가 설계 도면을 들고 힘 있는 어조로 구체적인 계획을 설명하는 모습에서 당시의 열정적인 모습을 보는 듯했다.

문득, 이렇게 아낌없이 문화예술에 투자하고 지역 문화 발전에 기여하고 있는 이수문 대표는 무한 지출만 있고 수입은 없는 후원 사업을 어떻게 생각하는지 궁금했다. 어느 미술관이고 마찬가지겠지만 한 해 지출되는 비용만 따진다면 미술관 운영은 난관에 부딪히고 보람도 찾지 못할 것이다. 이수문 대표 또한 연 5억원씩 비용 지출을 감당했지만 지금은 폭이 훨씬 넓어졌다고 한다. 오랫동안 가뭄으로 황폐해 갈라진 땅에 물을 쏟아붓는 형국인데도 아주 장기적으로 투자하고 있는 이유를 물었다. “이 분야에서 이익을 고려하면 아무것도 할 수 없지요. 다만 천안에 공연장이 들어서고 아트 타워가 형성되면 수입이 되는 구조도 자연스럽게 형성되리라고 봅니다. 이 수익은 다시 문화예술 발전을 위해 쓰이겠지만요.” 그는 허허 웃으며 답했다.

역사적으로도 미술 후원자들은 미래를 내다보며 미술가를 후원해왔다. 르네상스 시대의 가장 유명한 여성 후원자, 이사벨라 데스테(Isabella d'Este, 1474~1539)의 미술품 컬렉션은 사회 구조와 밀접하게 연관됐는데 그녀는 당시 유행하는 미술품 외에 신화 이야기까지 주문했다. 추상미술의 전도사, 드니즈 르네(Denise Rene, 1944년 화랑 오픈)는 화랑을 운영하며 매달 작가들에게 재료비와 보조금을 지불했다. 이처럼 오랜 시기를 거쳐 미술 후원자는 예술가를 위해 작품 구입, 재료와 공간에 대한 비용을 지불했다. 르네상스 메디치가는 공간과 일상생활까지 지원했고 현대의 국내외 기업들은 기업 홍보와 이미지, ESG(Environment·Social·Governance, 환경·사회·지배구조)를 위해 미술가를 적극적으로 후원하고 있다.

예술의 미래까지 사들이는 장기 컬렉터




▎이수문 아트센터 화이트블럭 대표의 아내 차명희 작가의 작품 ‘숲’. / 사진:아트센터 화이트블럭


미술관의 가장 큰 재산은 미술 컬렉션이다. 그래서 컬렉션의 규모와 중요 컬렉션에 대해 질문했다. 단연 부인 차명희 작가의 작품이 압도적으로 많았다. 더불어 14년 동안 레지던스를 거쳐간 작가 61명의 작품도 많은 비중을 차지했다. 아울러 전시를 통해 간혹 매입하는 등 컬렉션도 확장하고 있다고 했다. 컬렉터에게 작품 수집만큼 큰 수익은 없다. 하지만 작품은 주식보다 회전율이 낮다. 10~20년이 지나야 결과가 보이기 때문이다. 이수문 대표와 대화하며 ‘아, 현재 보유한 컬렉션보다 앞으로 보유할, 그리고 생물체처럼 변화하는 과정과 작품을 매입하는 아주 특이한 컬렉터구나’ 하는 생각을 했다.

국내에서 기업이 아닌 개인 컬렉터가 미술관 외 창작 스튜디오를 대형으로 운영하는 곳은 전무하다. 경기도 경기창작센터 정도는 경기도라는 지방자치단체이기에 가능하다. 기업에서도 빈 공장이나 빈 사무실 등을 활용한 레지던시를 구축, 확대하고 있으나 화이트블럭만큼의 규모는 아니다. 필자도 2009년 한 중소기업의 레지던시 개설에 기획부터 1기 입주 작가까지 진행한 바 있다. 당시 레지던시 사례를 종합적으로 조사했고, 지난해에는 한국지역 문화학회 소속 박사로서 지역 문화 중 지역별 레지던시의 확장과 변화 추이를 지켜보고 있었기에 그 사정을 짐작할 수 있었다.

이수문 대표는 자신의 작품 취향에 대해서는 말을 아꼈다. 레지던스 1기부터 현재 9기(16명)까지 작가들의 성향을 보면 회화가 중심이지만 조각, 설치, 영상, 사진 등 다양한 분야의 실험적 작가들이 레지던시에 입주해 있다. 레지던시 입주 경험이 있는 작가들을 찾아 인터뷰를 진행했다. “헤이리는 동네 분위기가 마음에 들었다. 천안은 지방이라 좀 멀긴 했어도 주변에 산이 많아 풍경을 보러 다니기 편했다. 작가 입장에서 작업하는 환경으로도 좋았다”는 의견이 많았다. 레지던시 프로그램과 관련해서는 “작가를 양성하는 데 있어서 좋은 방향을 모색하기 위해 항상 여러 각도로 운영됐다. 다만 지역 자체의 특수성 때문이기도 하겠지만, 지역 문화 발전을 위한 콘텐트를 찾는 데 어려운 점도 있었다”는 답변을 들을 수 있었다.

뉴 아방가르드의 예술지형 펼칠 것으로 기대




▎화이트블럭 천안창작촌의 4기 입주작가로 활동한 김건일 작가의 작품. ‘어깨 위에 서서’. / 사진:아트센터 화이트블럭


화이트블럭의 컬렉션 방식은 예술가의 작품을 직접 구입하는 형태가 아니다. 위에서 언급했듯이 전문가로 운영된 시스템으로 작품성이 뛰어난 신진작가와 역량 있는 작가를 선별해 장기적으로 투자하는 것이다. 초기에 입주했던 작가들은 어느덧 중진작가로 활동하며 미술 시장을 선도하고 있어 그 자체로 성공적인 투자 모델이지 않은가 싶다. 더 직접적인 투자의 성공을 따진다면, 구글(Google)처럼 실험 정신이 뛰어난 주요 작가의 작품을 매입해 사옥에 설치하는 방식이 있다. 미술품이 닫힌 업무 분위기를 환기하는 것은 물론 임직원의 스트레스 해소와 아이디어 발상에 도움이 되기 때문이다. 현재 화이트블록의 소장 작품은 파주와 천안 일부 건물에 설치돼 있다. 내년 완성되는 공연장 등에 화이트블록 소장 작품들이 적재적소에 설치된다면 관람객에게 유익한 미술 향유의 경험이 되리라고 본다.

이수문 대표는 레인지 후드(가스레인지 또는 전기레인지 위에 매달려 있는 주방 장비) 업체 하츠 창업자이며 단기간 내 중견기업으로 우뚝 성장시킨 저력 있는 사업가다. 지금은 주연배우처럼 약 9만m에 이르는 화이트블럭의 대지 위에서 지휘를 펼치고 있다. 미술창작의 산실 레지던시, 무대 위 배우가 빛나는 공연장, 예술 산책로 운영을 총괄하고 있다. 마지막 단계에서는 4~5차 산업과 연관된 인공지능(AI), 가상현실(VR), 증강현실(AR) 로봇 등 기술과 예술이 만나는 접점인 뉴 아방가르드의 예술지형을 온·오프라인을 넘나들며 오케스트라를 지휘하듯 장대하게 펼칠 것이다. 천안 호두의 명산 광덕산 아래에서 대형 무대를 감상할 때가 머지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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