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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시리뷰 / 김태호-모호함의 미학, 그 불확실적 풍경

변종필

김태호-모호함의 미학, 그 불확실적 풍경


모호함과 불확실성은 우리가 일상에서 마주하는 삶의 한 단면이다. 삶과 예술도 본질적으로 특정한 개념으로 정의할 수 없는 모호함으로 가득하다.

김태호의 <모호함>(제14회 김종영미술상 수상전)은 뚜렷하게 경계지을 수 없는 불확실시대를 사는 현실을 돌아보게 한다. ‘모호’는 평면, 오브제, 설치, 사진을 포함한 김태호의 작품세계를 관통하는 핵심어이다. 그는 오랜 시간 ‘틀과 경계가 불투명한 설치작품’, ‘시차를 두고 찍은 같은 풍경을 여러 장 겹쳐서 인화한 사진작품’, ‘상자 안의 정체모를 희미한 오브제’ 등을 포함한 ‘space Drawing'를 통해 ‘모호’와 ‘불확실’이라는 작품개념을 일관되게 고집해왔다. 그는 전시마다 작품에 관한 설명, 즉 이해를 돕는 단서 같은 친절함을 배제한다. 이번 전시에서도 특별히 덧붙인 설명이 없다. 대신 모호함을 내세웠다.

1층에 설치한 작품은 어릴 적 동네에 많았던 판잣집에서 떨어져 나간 나무들을 주워 모아 그것을 잇대거나 쌓아 자신만의 공간을 만들었던 추억이 예술표현의 모티프로 작동한 작품이다. 기억 속에서만 존재하는 특별한 장소, 각별한 사물 등 명확한 형태로 재현할 수 없는 소중한 기억의 편린들을 시원의 풍경처럼 표현했다. 설치작품은 애초에 정해진 상이 없어서 자유롭다. 미술관에서 직관적으로 쌓고, 잇대고, 고정한 나무판들이 건축의 속살을 드러내듯 설치되어 공간을 지배한다. 선적구성으로 집적된 날것처럼 생경한 판자들은 흡사 거대한 건축의 일면이거나, 혹은 미완의 선수(船首)같다. 이번 작품은 2017년 미메시스 미술관의 ‘사라진 풍경’展의 설치작품과 동일방식을 택했지만, 형태나 주변작품과 관계성은 사뭇 다르다. 공간과 어울림, 작품과 물질의 관계가 주는 울림의 차이다. 나무설치를 받치듯 놓인 검정거울은 바다 속 심연처럼 깊다. 부유하듯 투영된 거울 속에는 전시장의 또 다른 풍경이 잠겨있다. 순간 촉각적 확인이 가능한 실재와 거울에 반영된 허상의 관계가 궁금해진다. 보이는 실재와 거울에 투영된 설치작품의 내면은 모호함으로 가득한 세상의 또 다른 풍경을 암시하는 듯. 시작과 끝, 안과 밖, 선과 악, 진실과 거짓 등의 판단기준이 인식의 주체에 따라 모호한 세상을 ‘보이는 것이 전부가 아니다’라는 삶의 이치를 빗대어 표현한 의도로 읽힌다. 이 점에서 김태호의 ‘모호함’은 경험하는 주체마다 다르고, 심지어 자신이 경험한 것조차 때와 장소에 따라 달라지는 모든 불확실적인 현상에 관한 의심이며, 사고(思考)이다.

김태호의 작품은 유독 어떤 공간과 만나느냐에 따라 확연한 차이를 드러내는 것이 특징이다. ‘space Drawing'시리즈로 대표되는 색면화가 그렇다. 펄이 가미된 파스텔색조의 단색화는 특정한 형태나 형상 없이 공간에 따라 가변적으로 설치된다. 커다란 공간을 지배하거나, 하나의 장식물처럼 여러 색면화가 벽에 부착되기도 하고, 바닥에 무심하게 놓이기도 한다. 작품은 특정한 공간(벽면)을 차지한다는 고정관념을 무너뜨리며 작품이 무엇인지 경계를 모호하게 만든다. 그의 색면화는 일견 단순해 보이지만, 실제는 칠하고 지워내는 지난한 과정을 거친다. 캔버스 혹은 입방체 나무판에 동일 색을 30~60회까지 반복적으로 칠하면서 처음 머릿속에 그렸던 이미지들은 새로운 이미지들로 덮여간다. 그리고 흘러가는 시간만큼 모든 것은 사라진다. 과거의 작품은 수시로 동일한 색으로 재벌칠 되기도 한다. 이때마다 색이 지배한 화면에서 형태의 기대는 무의미해지고, 침묵과 더불어 모호함은 짙어진다.

단색면 중층의 밀도가 관람자의 눈에는 쉽게 노출되지 않지만, 응시에 몰입하면 어렴풋이 이미지가 그려진다. 무심코 바라본 하늘, 자연의 바람과 향기, 산사의 풍경소리 등 삶이 스치고 지나간 풍경들이 붓 자국과 함께 기억의 저편에서 물안개처럼 피어오르는 느낌을 준다. 안개 속에 갇혔던 풍경이 서서히 형체를 드러내듯이 색면화는 시간과 장소, 작품 위치와 마음 상태에 따라 어떤 감정 혹은 감흥을 일으킨다. 은은함, 고요함, 그리움 같은 심리적 울림의 묘한 분위기에 빠져들게 한다. 이 같은 감정은 같은 색이라도 빛과 위치에 따라 변화하는 색료와도 밀접하다. 방금 떠올렸던 이미지를 부정하듯 변색하여 시선을 현혹하는 것은 빛의 간섭으로 색이 달라지는 효과(Interference Effect)이다. 미세한 간섭효과를 내는 특수물감은 한 가지 색으로 규정할 수 없는 세상의 모호함을 재차 상기시킨다.

‘space Drawing'시리즈를 지속하는 김태호에게 공간은 대형 캔버스이고, 미디어 공간이며, 유년 시절 자유롭게 놀았던 공터 같다. 그는 새로운 건축공간을 만나면 드로잉 하듯 재해석 한다. 이 점에서 김태호의 작품은 자체의 변화보다는 다른 공간(장소)에서 새롭게 태어난다는 의미로 ‘여전히 진행되고 있는 드로잉’이라 할 수 있다. 능란한 구성력과 세련된 조형감각으로 주어진 공간을 자기만의 색과 오브제로 확장하는 드로잉을 시도한다.


<아트인컬처 2019-3월호 FOCU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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