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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면조건'을 통한 수행적 자기인식-최명영 개인전 'CONDITIONAL PLANES'

변종필



작가 최명영(崔明永:1941~)은 1970년대를 접점으로 한국화단에 등장한 ‘오리진’, ‘A.G’, ‘S.T그룹’, ‘에스프리’ 등 젊은 세대 소그룹을 중심으로 새로운 미술이 활발하게 전개되던 흐름의 중심에 있었다. 한국 현대미술사에서 형태, 이미지, 일루전으로부터 벗어나 회화의 새로운 형식과 이론을 추구하던 화가 중 한 명이다. 그러나 최명영은 당시 모노크롬회화가 주목했던 이미지 부정과는 또 다른 시각에서 회화적 표현에 의문을 던진 화가였다. 그는 회화가 지닐 수 있는 평면의 존재가치를 탐구하기 위해 물성의 체득화 과정에 천착했으며, 회화의 평면화를 위한 ‘평면조건' (Conditional Planes)’에 몰입하였다. 그리고 그 평면조건은 절대시간과 절대조건을 지향하듯 50년을 반복하며 이어졌다. 이처럼 확고한 자기세계를 지속해온 작가이지만, 그는 자신의 작품세계를 ‘단조로움과 무미함의 연속’이라고 말한다. 왜일까?


전시는 시기별 작품으로 구성됐다. 1990~2000년대에 제작한 미공개 작품을 포함한 것으로 최명영의 과거부터 현재까지 작업과정을 살펴볼 수 있다. 그의 작품은 어떤 상념이나 사물에 얽매이지 않고, 순간순간의 붓질로 집적된 질료의 단조롭고 무의식적인 행위처럼 캔버스를 채우고 있다. 그러나 시간을 두고 작품을 들여다보면 무엇인가를 발견하거나 얻으려고 집착한 감상자의 행위자체가 오히려 무모하고 무미함을 일깨운다. 어떤 드라마틱한 내용이나 중심화제 없이 전면적으로 반복 도포한 화면에서 발견할 수 있는 것은 평면탐구를 위한 작가의 행위 자체임을 느끼게 된다. 마치 얽매인 틀 없이 그저 매일 걷는 ‘산책’처럼 그 행위자체가 중요할 뿐. 굳이 산책에 여러 의미를 부여할 필요가 없는 것과 다르지 않다고 할까.


작가가 “평면적 매스, 그 무표정하고 무미한 층위의 지평에서 나는 나의 일상, 정신구역을 통과한 하나의 세계로서의 평면구조와 마주하게 된다”고 말하는 것은 결국 평면성 추구란 ‘질료의 물질성을 넘어 정신의 환원을 통한 평면의 실존적 존재와 조응하는 것’으로 읽힌다. 이는 1970년대 이후 네 단계의 변화를 겪으면서 신체 일부나 도구의 사용을 한층 확장하여 몸과 마음을 하나로 모아 표현한 최근작까지 이어지는 과정에서 확인된다. 특히 수직의 선과 면, 무채색의 중립적 색채 등 평면화의 최소 조건들이 질서와 절제에 의해 균질한 집합체를 이루며, 그 평면성을 확보하는 과정을 보여준다. 여기에 1980년대부터 수평․수직으로 대변되는 ‘평면조건’이 2019년 작품에서는 단색조의 층위가 더욱 뚜렷해지고, 평면에 한층 밀착한 변화도 감지된다. 이런 변화로 화면의 견고성이 약해지고, 물질성이 가벼워진 듯하지만, 반복적 행위가 만들어낸 단조로움과 무미함은 역설적으로 깊게 다가온다. ‘몸을 드리는’ 확장 개념의 수행에서 불필요한 물질과 색을 거두고 비워내 더욱더 간결하게 단순화시켜 소지(본래의 바탕)에 근접하려는 시도 때문이다. 이 점에서 캔버스는 작가에게 자기인식의 장(場)이라 할 수 있다. 캔버스에 물감을 밀착시키는 반복과정에 떠오르는 일상의 온갖 상념을 언제나 무덤덤함으로 도포한다. 평면의 절대성 탐구 외에는 아무것도 기억할 필요나 가치가 없는 듯. 그러나 작가의 자기인식은 바로 이 지점에서 시작된다. 단조로운 붓질을 마음 내키는 대로 휘젓고 싶기도 하고, 또 특별한 대상을 재현해보고 싶은 욕구가 치솟을 때도 그것을 억누르며 평면 자체가 하나의 회화로 인식될 수 있도록 자기절제를 유지한다. 단조로움을 깨고 싶은 욕망을 수행하듯 절제하고 상념을 지워가는 행위의 반복에서 매번 자기 인식이 이루어진다. 그의 작업을 무미건조한 일의 반복이 아닌 누구보다 자신을 냉정하게 바라보며 작업의 가치와 의미를 돌아보는 수행적 자기인식의 과정으로 볼만한 근거이다.


결국, 그의 평면조건은 작가로서 존재성을 확인하는 ‘작가조건’이다. 캔버스에 밀착시킨 붓질의 층위에서 50여 년간 추구해온 작가 의지를 확인하는 순간 그의 작품들은 더 이상 헛헛하거나 공허하게 다가오지 않는다. 그리고 우리의 지성과 작가의 지성이 상호 이해할 수 있는 지점, 즉 물질의 근원적 형질에 다가선 작품의 진정성에 서로가 이를 때, 최명영의 ‘단조로움과 무미함의 연속’은 가치가 더해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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