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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윤정의 ‘맛있는 간판풍경’ -새로운 관계 형성의 의미공간

변종필

한윤정의 ‘맛있는 간판풍경’
-새로운 관계 형성의 의미공간


'당신이 먹은 것이 무엇인지 알려주면 당신이 어떤 사람인지 말해주겠다.' 18세기 말, 프랑스 최고의 미식가로 불렸던 장 앙텔므 브리야 사바랭( Jean Anthelme Brillat-Savarin)의 명언이다. 그의 말처럼 음식은 누군가를 이해할 수 있는 중요한 단서가 된다. 하나의 음식이 한 나라의 사회, 문화를 이해할 수 있는 척도가 되고, 지방 음식이 지역성과 향토성을  이해하는 바탕이 되듯 한 사람의 음식 취향은 그 사람이 어떤 사람인지 알려준다. 어느 음식점을 좋아하고, 무엇을 즐겨 먹으며, 언제 즐겨 찾는지 등 음식은 누군가의 식성과 성향을 드러낸다. 

작가 한윤정은 오랜 시간 음식 그림을 그려왔다. 좀 더 정확히 말한다면 음식과 음식에 얽힌 장면을 그려왔다. 수많은 소재 중 음식을 소재로 한 그림에 집중하게 된 동기에 관해 작가는 이렇게 고백한다. 
   “나는 음식에 관심이 많습니다. 왜냐하면 음식은 나의 주변 상황과 현재 위치를 솔직하게 보여주고 있기 때문입니다. 유학시절, 그저 끼니를 때웠던 음식 속에서 나의 모습을 보았습니다. 또한 친구들과 함께 각자 그들의 나라에서 먹던 음식을 만들고 나누면서 새로운 사회 속에서 적응하고 섞인 우리의 모습을 보았습니다. 나의 음식 그림은 이렇게 시작되었습니다.” 

미술에서 음식은 즐겨 다뤄진 소재 중 하나이다. 미술사에 등장한 음식 소재의 작품들을 보면 시대와 화가에 따라 표현한 구성과 기법이 다양했고, 그림에 담고자 하는 메시지도 분명했다. 대체로 재료를 손질하는 모습, 요리하는 장면, 식사를 하는 풍경들이 주를 이루는데 대부분 바니타스(Vanitas)적 상징이 투영되어 있었다. 
이 같은 미술사의 음식 그림에 견주어 볼 때 한윤정의 음식그림은 인생무상과 같은 통념적 상징성과는 거리가 있다. 또한 음식재료, 요리하는 장면, 식사 장면은 물론 식당, 카페, 슈퍼마켓, 등 음식 공간에서 펼쳐지는 다양한 일들의 순간을 표현한 것이 다르다. 작품 제작 동기에서 드러나듯 한윤정은 지극히 개인의 일상을 작품의 소재로 삼는다. 특히 자신의 주변상황을 솔직하게 보여주는 것이 음식이라고 생각하고 유학시절부터 주력해 그리기 시작했다. 이후 인사동, 삼청동, 종로 등 조그맣거나 큰 식당들이 즐비하게 늘어선 서울거리에서 음식 공간(간판)에 주목한 작업을 추구해 왔다. 
이번에 새롭게 선보이는 ‘맛있는 간판 풍경’ 시리즈도 제주도 음식점이라는 장소적 특별함을 제외하면 맥락적으로 유사하다. 2017년 제주도와 인연을 맺은 후 제주 생활을 시작한 작가는 유학시절처럼 새로운 장소에 자신의 삶을 밀착시켜 살아가는 방식으로 음식 그림을 선택했다. 이는 ‘처음 따뜻한 서귀포 풍경을 그렸지만, 제주시의 구도심과 여러 마을을 돌아다니며 오래된 식당과 그들의 간판에 이끌려 제주도의 음식을 관찰하기 시작하면서 자연스럽게 다시 음식그림을 그리게 되었다’는 작가의 말에서도 확인된다. 이 점에서 한윤정의 새로운 작품은 제주도에서 마주하는 많은 음식간판을 보면서 그 음식점의 맛과 정서를 통해 제주를 이해하고, 그 속에서 자신을 재발견하는 과정을 표현한 것이라 할 수 있다. 

‘맛있는 간판풍경’전을 앞두고 작품제작에 한창이던 작가의 작업실에는 벽면을 차지하고 있는 다양한 드로잉, 휴대폰 사진을 활용해 만든 종이모형, 그리고 음식점 옆으로 난 큰길, 멀리 보이는 바다와 산, 또 드높은 하늘 등 제주의 풍경들이 그려진 나무판으로 만든 입체작품들이 놓여 있었다. 여기저기 놓여있는 작품들은 마치 제주 곳곳에 흩어져 있는 음식점을 마주하는 듯 했으며, 자유로운 붓질, 과감한 색채구성, 다시점을 활용한 조형구성이 작품 전반의 분위기와 작가의 감성을 드러내고 있었다. 
한윤정의 작품을 보면 제주도 음식의 맛과 공간의 분위기가 어렴풋이 전해진다. ‘제주 흑돼지 고기 맛에 흠뻑 매료되어 지인과 동행해서 자주 갔던 음식점’, ‘이주민이 내려와 차린 카페’, ‘편안한 분위기로 즐겨 찾게 되는 작업실 옆 식당’, ‘미용실 간판을 함께 쓰는 카페’ 등 작품에 등장하는 음식점들은 작가가 3년 남짓 제주생활에서 찾은 비밀스럽고 소중한 장소들이다. 
작가에게 식당은 한 끼 식사로 단지 허기진 배를 채우는 장소가 아니다. 사람과 사람을 이어주는 인연의 장소로서 의미가 강하다. 편안한 사람과 만나 맛있는 음식을 먹으며 소소한 이야기를 주고받는 대화의 공간이다. 작품에 담긴 장소는 고급스럽거나, 모던한 인테리어로 시선을 사로잡는 명소도 아니다. 그렇다고 고독과 외로움만이 어울리는 분위기도 아니다. 그저 부담감 없이 누구나 스스럼없이 드나들 수 있는 편안한 곳으로 사람의 정이 쌓인 장소이다.

이번 한윤정의 ‘맛있는 간판 풍경’전에서 눈에 띄는 변화는 조형방식이다. 
지난 음식 그림에서는 그림과 간판을 따로 제작해 평면(회화)과 공간(설치)을 합해 하나의 작품을 이루도록 하였다. 그러나 이번 작품에서 간판은 평면과 다른 독자적인 공간이 아니라 화폭을 확장해 가는 회화적 요소로 작용하며 하나의 입체작품으로 일체화되었다. 이로 인하여 지난 음식 그림에서 간판의 텍스트와 그림의 내러티브 사이 존재했던 이질감-그것이 긍정적이든 부정적이든-이나 그로 인하여 관람자의 상상력이 그 사이를 개입-그것이 의도적이든 의도적이지 않든-하게 했던 부분들이 약화되었다. 그리고 다시점을 활용하여 상호를 해체하고 다시 조합한 간판의 형태는 여전히 관람자의 적극적인 인지력과 사고를 자극하고 있다. 흥미로운 것은 간판마다 밝힌 불이 간판으로서의 순수한 기능을 능청스럽게 수행하는듯하면서 관람자가 해체된 언어를 복기하며 기억을 더듬거나 상상해야 하는 지적 활동의 불편함을 살짝 해소해주고 있다는 점이다. 실제 아크릴 박스에 간판시트지를 콜라주 방식으로 제작한 간판은 사실적 재현보다 중첩되어서 나오는 우연의 효과를 기대한 측면이 짙다. LED로 제작한 간판은 은근한 불빛만으로도 시선을 끌지만, 회화적으로 표현한 가게의 다양한 이미지들과 어울려 많은 이야기를 생산하고 있다. 이 부분이 조형적으로 간판과 평면회화를 분리했던 지난 작품과 확연히 다른 지점이다.
애초에 간판은 ‘옥외 광고의 한 가지로 여러 사람의 시선을 끌기 위해 상호를 써서 내건 표지판’이다. 물건을 판매하는 가게뿐만 아니라 회사, 공장, 공공장소 등 간판은 사람의 주의가 필요한 곳이라면 장소를 불문하고 세워지고, 부착되고, 내걸린다. 그러다 보니 시선을 끌기 위한 간판의 형식과 내용은 파격적으로 변하기도 한다. 표지판으로써 효과를 얻기 위한 목적에서 보면 현대사회에서 간판의 변화는 그 자체로 사회적 변화를 읽는 기호로 작용하기도 한다. 
한유정의 음식 간판은 작가가 선택한 특정 장소의 표지판이지만, 관람자에게는 그 간판이 어느 장소에 어떤 모양으로 있으며, 다른 간판들 속에 어떤 분위기로 노출되어 있는지 명확히 알 수 없다. 오직 작가의 선택에 의해 제작되어 관람객을 맞이할 뿐이다. 그래서 우리는 단순히 간판의 명칭만으로 그곳이 어떤 분위기이며, 어떤 맛을 지닌 음식점인지 사실상 알 수는 없다. 이 또한 작가가 표현한 이미지를 통해 감지할 뿐이다. 이 점에서 보면 한윤정의 ‘간판시리즈’는 특정한 음식점을 지칭하는 ‘장소 지시성’의 역할보다는 <애월 푸드 트럭>, <구도심 쌀다방>, <표선의 횟집과 민박>, <흑돼지 연탄구이>, <함덕의 카페> 등 작품의 제목에서 감지할 수 있듯이 음식점의 성격을 드러내는 ‘음식 지시성’이 더 강하다. 
실제, 음식 간판의 진정한 의미가 어떤 맛을 파는 곳인지 지시하는 하나의 기호라면 한윤정의 음식간판은 그 역할을 일정 부분 충족한 셈이다. 대부분은 음식 맛에 따라, 음식점을 기억하지만, 경우에 따라 색다른 분위기에 끌리거나, 혹은 음식점을 통해 관계를 맺은 추억들로 그 장소를 떠올리게 된다. 한윤정의 작품에 등장한 카페, 민박, 쌀다방, 찐빵집 등 간판언어가 수많은 동종음식점의 존재 속에서 특별히 지칭될 수 있는 것은 이곳에서 새롭게 관계가 형성될 때이다. 즉 한윤정이 작품화한 간판의 진정한 상호는 그 음식점을 드나들며 맺어진 수많은 관계가 모여 만들어진 것이다. 이는 일반적으로 언어가 특정한 사물을 지칭하는 기호에 머물지 않고, 현실세계를 새롭게 인식하게 만드는 도구라고 했던 소쉬르의 언어학적 관점과 연결 지을 만하다. 
특별한 관계형성은 예술작품에서 느끼는 감정과도 크게 다르지 않다.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작품이 작가의 명성과 특성을 내세우며 시선을 끌기위해 제작되지만, 결국 작품에 내재한 고유성과 특별함(진정성)에 의해 작가와 관람자, 작품과 관람자 사이 새로운 관계를 맺어주는 작품만이 차별화된 가치를 지닐 수 있다. 더구나 특별한 관계는 타인의 권유나 강요가 아닌 자신의 주도적 선택에 의한 관계형성일 때 그 감동의 층위와 폭이 달라진다. 한윤정의 음식간판 역시 우선은 간판에 시선이 끌리지만, 곧바로 음식점이 내세운 맛과 분위기, 그 공간이 품고 있는 특징에 관심이 쏠릴수록 의미와 가치가 달라진다.

조형방식에서의 또 다른 특징은 재료와 작품 크기이다.
현대미술에서 작품재료는 곧 작품의 핵심이 되곤 한다. 또한 규모(스케일) 역시 중요하게 다루어진다. 재료의 다양성이 현대미술의 주요 특징으로 강조되면서부터 작가에게 재료의 선택은 곧바로 작품의 콘셉트와 연결되어 작품을 분석하고 해석하는 단서가 된다. 크기 또한 예측불허, 상상파괴라 할 만큼 한 작품만으로 넓은 공간을 채우는 식의 거대 설치작품들이 즐비하게 등장하는 추세이다. 이러한 흐름에 비춰볼 때 한윤정의 입체작품은 호기심을 자극할 만큼 신선한 재료나, 놀라울 만큼 파격적인 규모를 지니고 있지 않다. 주재료는 흔히 어디서나 볼 수 있는 화판으로 극히 평범하다. 그러나 이 흔한 재료에 바로 작가가 작품으로 이야기하고 싶은 메시지가 담겨 있다면 의미는 달라진다. 구하기 힘들거나 고액을 지급해야하는 재료가 아닌 어디서나 쉽게 구할 수 있는 나무판이 연결되어 하나의 작품으로 구성되듯, 누구에게나 열려있는 음식점들을 통해 평범함이 지닌 가치, 정감 있는 공간이 주는 편안함이 자연스럽게 다가온다. 
작품의 크기 또한 눈여겨 볼만하다. 한눈에 들어오는 작은 크기의 작품은 관람자를 주눅 들게 하거나 위압감을 주지 않는다. 책상 한쪽을 차지할 정도의 크기로 은밀하고 조심스러운 관찰을 부추긴다. 한식, 양식, 디저트카페 등 음식 장소에 따른 각각의 특성이 표현된 입체작품의 다양한 이미지는 원근법이 무시되었고, 작가가 관찰자 입장에서 본 이야기 중심의 장면들이 화판의 면면을 차지하면서, 음식점 안팎의 일들을 동시다발적으로 보여준다. 
살펴본 한윤정의 재료와 크기가 지닌 특별함은 나름의 개성을 지니고 있는 것은 틀림없다. 다만, 주목할 점은 세밀하고 정교한 입체작업에 기울인 노력과 정서에 견주어 드러나는 작품으로서 가치와 의미이다. 한윤정이 지닌 작가적 기질은 이번 간판시리즈 작품에서도 유감없이 드러나지만, 한편으로 유사한 형식의 반복이 다른 주제의 작품들과 특별한 차별성을 얼마나 획득하고 있는가이다. 단순한 구성이지만, 음식을 먹는 한순간의 정지장면을 포착한 평면그림의 압축된 힘이 입체작품에서는 크고 작은 면을 통해 다양한 장면으로 분산되었다. 이 때문에 평면그림보다 훨씬 풍부한 내러티브를 담게 되었지만, 상대적으로 복잡하여 단순명료함이 흐려진 측면이 있다. 
사실, 자신의 삶과 예술에 대해 확신을 가진 작가를 마주하기란 쉽지 않다. 미술사에서 뜨겁게 언급되는 명성 자자한 작가들조차 삶과 예술을 들춰보면 온전히 이해하기 어려운 의문들로 가득하다. 그러나 우리가 애써 그 의문들에 답을 구하지 않더라도 작가는 작품만으로 충분한 의미를 전달하기도, 그 만큼의 가치에 매료되기도 한다. 그것은 그 작품만이 지닌 고유성을 마주했을 때 더욱 선명하게 드러난다. 지금까지 한윤정의 창작활동을 살펴보면 드로잉, 회화, 설치, 입체물 등 하나의 틀에 얽매이지 않는 표현방식, 그러면서도 꼼꼼하고 세심한 손끝으로 분명한 자기만의 색채와 조형언어를 지녔다. 이 같은 기질은 친근하고, 진솔한 삶이 배어있는 작품, 그 소박한 진실이 고스란히 묻어나는 ‘맛있는 간판 풍경’전에서 재확인된다. 
이번 전시 작품 또한 작가의 소소한 일상의 이야기에 근거를 두고 있지만, 그 일상이 특별한 사람들만의 일상이 아닌 누구나 쉽게 마주할 수 있는 대상이라는 것을 보여준다. 특별히 소문난 맛집, 값비싼 장치가 없어도 자신이 즐겨 찾는 음식 공간 곳곳에 켜켜이 배어있는 각양각색의 추억과 향기를 취할만한 즐거움이 있다면, 그곳은 ‘변별적 차이를 지닌 의미장소’가 될 수 있음을 상기시킨다. 
결국에 한윤정의 ‘맛있는 간판 풍경’전은 우리가 살면서 맺어지는, 또는 맺어 가야 하는 숱한 관계망의 또 다른 표현이며, 그 새로운 관계망을 통해 일상의 소중함을 돌아볼 기회를 준다. 이에 모호하고 복잡한 의미망에 갇힌 불투명한 조형언어보다, 뚜렷하고 단순한 의미로 자신의 삶과 예술을 음식공간으로 풀어가며 한 사람 한 사람 단골을 만들어갈 때 한윤정의 음식 그림은 새로운 관계형성의 매개체로 사람들의 마음을 잇는 ‘맛의 이야기’로 가득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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