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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페이지갤러리의 김춘수, 신수혁, 천광엽의 그룹전 <素_empty morph>

변종필



素_empty morph 



더페이지갤러리의 김춘수, 신수혁, 천광엽의 그룹전 &lt;素_empty morph&gt;는 ‘비목적성·몸의 드림을 통한 하나의 근원(素)으로 회귀하려는 공통의 과정을 추구’한 세 작가의 작품을 선보인 전시이다. 전시의 타이틀과 기획의도만 놓고 보면 이해가 쉽지 않다. 타이틀대로라면 이 전시는 사물의 처음이 형태가 없다(empty morph)는 것을 보여준다. 기획의도대로라면 출품작들은 목적 없이(비목적성) 그저 몸이 꿈꿔 온(몸의 드림) 결과물이며, 어떤 하나의 근원(素)으로 회귀하고 있다.


그러나 전시 연출은 명료하다. 세 작가의 작품을 한 공간에 배치된 R1은 작품들을 나란히 또는 마주하게 하여 작가별 차이와 공통점이 무엇인지, 동시에 작품 상호간 어떤 의미를 형성할 수 있는지 보여준다. 출품작 하나하나를 마주하면 모두 무념의 상태를 대하는 듯하지만, 한 공간에 놓임으로써 하나하나가 굼틀대며 서로 간섭하고 진동한다. 그리고 작가별 작품으로 구성한 공간 R2(신수혁), R3(천광엽), R4(김춘수)는 닮은 듯 다른 세 작가가 지향한 작품세계가 무엇인지를 보여준다. 


푸른 기운이 지배하는 R1과 R4 공간은 울트라마린 단색조로 30여 년 변함없이 자신만의 푸른 세계를 펼쳐온 김춘수(b. 1957)의 작품이 주를 이룬다. 즉흥과 세심함을 적절히 조절하며 손가락으로 찍은 숱한 푸른 점들은 모양과 위치, 색의 농도에 미묘한 차이를 띤다. 특히 화면에 근접할수록 거리를 두고 보았을 때 느껴진 푸른 기운과는 다른 신체적(몸짓) 촉감까지 느낄 수 있다. 이런 촉감은 얼마나 오랜 시간 작가의 손끝이 화면 곳곳을 숨가쁘게 스치고, 머물고, 움직였는지 짐작케 한다. 푸른 색 점들과 캔버스, 표현행위가 한몸-物我一體-이 되도록 반복을 거듭한 끝에 그의 캔버스는 단순한 표면을 넘어 초월적 공간이 된다. 무엇보다 김춘수의 푸른 세계는 화이트의 벽면에 밀착된 커다란 작품일수록 시선을 압도하는 흡입력과 깊이를 지녔다. 깊다는 것은 품을 수 있는 공간이 그 만큼 넓다는 의미이다. 김춘수의 푸른 색조는 2021년 신작에서도 어김없이 이어진 작가의 열정의 깊이며 힘이다.


R2 공간의 4면에 배치된 신수혁(b. 1967)의 작품은 세 작가 중 물질적으로 가장 두터운 표면을 형성하고 있다. 표면의 거친 질감과 숱한 수직·수평의 선이 만들어낸 레이어가 견고한 건축의 구조물처럼 다가온다. 줄무늬가 반복 교차한 플래드(plaid)무늬 속에 물질을 가둔(혹은 갇힌) 형식을 확대하거나 축소하는 방식으로 자신만의 평면성을 추구했다. 물감의 질감이 그대로 전해지는 푸른 색조와 흰색의 화면구성은 끊임없는 반복 행위(경험)으로 만들어 낸 물성의 체득과정을 보여준다. 이는 작가 내면이나 정신을 지배하는 어떤 대상의 내적 본질에 근접하기 위한 행위로 신수혁의 구조적 평면화의 특징이자 작품의 본질적 속성이다. 즉 화면을 엮고 있는 직관적인 선들은 육안으로는 구별하기 어려운(보이거나 보이지 않은) 사물(물질)의 본래 속성을 찾는 과정이다. 그 결과 신수혁은 불투과성의 억제된 단색조와 수직·수평의 짧은 선들의 교차를 통해 모든 사물과 현상이 인식의 유무와 무관하게 관계로 구축되어 있음을 드러낸다.


R3 공간에 배치된 천광엽(b. 1958)의 작품은 근접해서 응시하면 착시현상에 집중한 옵티컬 아트처럼 보인다. 그러나 전체적으로 보면 한 화면에 일정한 간격(작품에 따라 간격은 다름)과 크기의 도트들(dots)이 집합체를 이루며 다양한 파동(wave)을 지닌 정교한 색면화이다. 숨 쉴 여유조차 없을 만큼 빼곡하게 화면을 채우고 있는 도트들은 근접하지 않는 이상 짐작할 수 없는 부분이다. 시작과 끝을 알 수 없는(특히 작품이 끝나는 지점) 도트들은 세상의 모든(omni) 사물이나 현상의 본바탕은 육안으로 쉽게 구별되지 않지만 각기 작은 입자들로 구성된 것임을 암시한다. 천광엽 작품의 완성도는 정신을 초집중해 손끝에 감지되는 예민함을 유지한 채 칠하고 갈아내고, 다듬는 행위를 숱하게 반복하여 밀도를 높이는 노동이 쌓임으로써 결정된다. 전시 공간 한 켠의 투명 아크릴박스에 조각 케이크처럼 진열된 직육면체의 작은 입체물(평면작업의 도트들을 매끄럽게 사포질해 생긴 유화분말을 침전시키는 방식으로 얻은 물감퇴적층)은 작가가 물질성을 탐구하며 보낸 지난한 창작과정에 비례한 시간의 퇴적층이다. 이처럼 천광엽의 작품세계는 물질과 물성의 관계를 자신만의 기호인 도트들로 채워나가는 끝없는 시도의 과정으로 해석할 수 있다. 


이상 세 작가의 작품세계는 각자가 추구하는 방식에 따라 행위와 물질을 닿을 수 있는 극한까지 밀어붙여 드러난 형과 색의 결과물이라는 공통점을 지녔다. 이 결과물은 끝없는 수행의 과정처럼 동일한 행위의 반복을 통한 산물이다. 애초에 아무것도 없었던 흰 캔버스 평면을 채우고, 그리고, 도포하고, 갈아내고, 비우기를 반복해 남겨진(얻은) 화면은 한국 단색화의 특성과 맥락상 닿아있다. 세 작가의 작품이 모두 자신의 몸과 마음(육체와 정신)과 직결되고, 그 관계는 시간과 장소, 일상의 경험들을 바탕으로 삼고 있는 것도 마찬가지다. 한마디로 단색화 작가들에서 빈번하게 등장하는 ‘수행과 반복’, ‘물질성과 평면성’이라는 특징을 세 작가의 작품에도 무리 없이 적용할 수 있다. 실제 이들은 ‘단색화라는 큰 범위 내에서 세대로 분류’되어 왔다.


그러나 이번 전시 작품들을 한국 단색화의 맥락을 잇는 작품들로만 해석한다면 전시기획 의도에서 새로울 게 없어 보인다. 이는 한국의 단색화에 미니멀아트와 모노크롬의 특징을 덧입혔던 과정을 재언급하는 정도에 불과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다시금 주목하게 된 것이 전시의 타이틀로 내세운 ‘empty morph’의 개념이다.


‘empty morph’는 허형태(虛形態)로, “그 자체로는 의미가 없지만 전후 환경에서 그 출현을 예측할 수 있는 것으로서 어떤 형태소(形態素: 말의 형태를 지닌 요소. 의미를 가진 가장 작은 말의 단위이며, 더 나누면 뜻을 잃어버림)에도 속하지 않는 형태”를 뜻한다. 그러므로 허형태는 어떤 특정 의미를 갖지 못하고, 특정 형태와의 관계 속에서만 의미를 생성한다고 볼 수 있다. 이 점에서 이 전시의 출품작품들과 관계 지어 생각해 볼 것이 두 가지다.


첫째, 이들 작품들이 추구한 근원素은 허형태로서 스스로 의미를 갖지 않는다. 그리고 이들 작품은 스스로 의미를 갖지 않는 근원素을 목적으로 한 행위의 결과물이다. 그렇다면 이들 작품에 대해서는 지금까지의 단색화와는 다른 해석이 가능하다. ‘무작위 또는 비워냄’, ‘무위자연 또는 자연’ 등의 개념으로 해석되어 온 기존의 단색화는 뚜렷한 목적성을 갖고 있으며, 한국 현대미술사에서 특정 의미를 지닌 형태소로 기능한다. 그러나 &lt;素_empty morph&gt;의 출품작들이 단색화 모습을 하고 있더라도 전시 타이틀대로라면 스스로 의미를 갖지 않기에 한국 현대미술사에서 그 자체로 해석될 수 없다.


둘째, 이들 작품들이 허형태로 존재한다면 우선 단색화를 해석하는 개념과 어울려 의미를 갖게되고, 그 외에도 다양한 사조나 문맥 속에서 해석되어 여러 가지 의미를 생성할 수 있다. 한마디로 이들 작품이 놓인 전후 환경의 다양성만큼 생성되는 의미는 다양해진다. 그리고, 그 환경이나 의미 속에서도 이들 작품은 자유롭다.


이상 두 가지 생각을 바탕으로 이번 전시의 출품작을 해석하면, 세 작가의 작품들은 분명 단색조란 외형과 1970년대 단색화와 유사한 작법을 지니고 있다. 그러나 어떤 형태를 지향한 것이 아니라 허형태 자체이기에 단색화와 동일선상에서 해석되기는 어렵다. 정작 세 작가에게 중요한 것은 작품의 결과보다는 창작 태도이며, 이들의 작품은 특정 형태나 결과물로 규정되기 이전에 미술행위 그 자체로서의 본성을 갖고 있다. 세 작가에게는 미술행위가 곧 미술이고 작품이다.


그러므로 세 사람의 작업이 애초에 특별한 이념이나 사조에 관한 강한 집착이 없다는 전제 하에서 보면, 이들의 작품은 작가 스스로 좋아해 선택했던 조형의 형식이 단색화 계열로 보일 뿐, 정작 우리 현대미술사를 논할 때는 마치 문장의 허사(虛辭: 실질 형태소에 붙어 주로 말과 말 사이의 관계를 표시하는 형태소. 조사, 어미 따위)처럼 우리 미술사의 허형태로 평가될 수 있다. 부정적인 의미가 아니다. 오히려 이들은 올곧게 자신의 작품세계에 몰두하며 우리 현대미술사가 형태화되는 데 있어서 ‘형식 형태소’의 역할을 한 작가와 작품이라는 유의미한 평가를 받을 수 있다. 예기치 않은 장소, 예측불허의 공간에 불쑥 나타났을 때 특별한 의미부여가 이뤄지지 않는다 해도 각자의 작품은 어떤 형태에도 속하지 않은 그들만의 형태 단위만으로도 존재가치를 이야기 할 수 있다. 기실 세 작가의 작품을 단색화의 계보에서 해석하더라도 허형태로서 존재하는 이상 그 의미는 기존의 단색화 개념과는 다른 의미로 해석될 수 있다. 즉, 오늘의 단색화를 새롭게 해석할 수 있는 또 하나의 통로가 생기는 것이다.


결론적으로 이 전시에 출품된 세 작가의 작품이 진정 어떤 형태에도 속하지 않는(닮지 않은) 허형태로서 한국 현대미술사에 자리매김하게 된다면, ‘素_empty morph’라는 타이틀을 내세운 기획 의도는 충분히 설득력을 갖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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