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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립과 고독의 연대, 그 대상과 미적 태도

변종필




2021년 지역네트워크교류전《공(空)의 매혹》
고립과 고독의 연대, 그 대상과 미적 태도 



  ‘외로움으로부터 도망치는 사람은 고독의 기회를 놓친다. 사람이 생각을 ‘그러모아’ 숙고하고 반성하고 창조하는 능력, 그 마지막 단계에서 타인과 대화에 의미와 본질을 부여하는 능력에 바탕이 되는 숭고한 조건을 잃는 것이다. 그러나 고독을 한 번도 맛보지 못한 사람은 자신이 무엇을 박탈당하고, 무엇을 버렸고, 무엇을 놓쳤는지조차 영원히 알 수 없을 것이다.’ 
지그문트 바우만 지음, 오윤성 옮김, 『고독을 잃어버린 시간』 동녘, 2019, p.21.

신체적 제약에 따라 홀로(또는 다수로) 있게 된 고립(孤立) 상황과 누군가 함께 있어도 심적으로 혼자 있는 듯 외로움을 느끼는 고독(孤獨) 상태는 2020년 이후 코로나-19로 보편적 일상이 무너진 우리에게 낯설지 않은 풍경이다. 하지만 고립은 영원하기보다는 일시적이다. 고립되었어도 누군가와 교류할 수 있는 상황이라면 언제든지 고립은 벗어날 수 있다. 고독은 다르다. 설사 사막 한가운데나 무인도에 홀로 고립되었다 해도 고독하지 않을 수 있다. 고립은 타의성이 강하지만, 고독은 자의성이 강하기 때문이다. 고독의 힘겨움은 소통의 대상이 없다고 느껴질 때 극에 달한다. 철저히 혼자 고립되었다는 것을 깨닫는 순간 외로움은 배가 된다. 혼잣말로 애써 외로움을 달래려 해도 대답 없는 허공은 혼자임을 강하게 인지시켜주곤 한다. ‘함께’라는 공동의 가치를 공유할 때에는 미처 알지 못했던 ‘고독과 고립’, 오롯이 혼자일 때 비로소 발견하고 깨닫게 되는 고독과 고립은 결국에 ‘존재’를 인식하는 방식의 하나이다. 

고독은 침묵의 장단(長短)에 따라 달라지는 것도, 침묵의 고저(高低)에 따라 변화하는 것도 아니다. 고독은 자신을 고립시킨 순간부터 시간을 먹고 자란다. 그 시간을 통해서 어떤 대상(상황, 풍경)을 이해하거나 낯섦이 익숙함으로 바뀌기 시작하면 고독은 사그라든다. 낯섦에서 자신을 발견하는 것. 그것은 새로운 장소에서 자신의 존재를 발견(찾는)하는 순간이다. 이것이 예술가에게 고독이 자주 소환되는 이유일지 모른다. 추사가 제주로 유배된 후 겪은 고립과 고독이 ‘세한도’와 같은 절대고독의 명작을 잉태한 것처럼 고독은 예술가에게 창작의 필수 조건처럼 언급된다. 알베르 카뮈는 ‘우주가 얼마나 큰 것인가를 가르쳐 주는 것은 거대한 고독뿐이다’라며 ‘창조를 위해 고독은 꼭 필요하다’고 했다. 창작을 위한 작가의 고독은 멋부림이나 사치가 아니다. 작가에게 창작은 언제나 고통이 뒤따른다. 육체적이든 정신적이든 작가는 고독 속에서 창작의 고통을 이겨낸다. 그리고 이러한 과정을 반복한다. 

2021년 지역네트워크교류전《공(空)의 매혹 : 고립과 고독의 연대》가 코로나-19의 위협으로 많은 것이 단절된 인간의 고립과 고독을 주목한 것도 같은 맥락이며 자연스럽다. 참여작가 김시연·박서은의 고립과 고독의 연대는 두 작가가 제주를 선택한 순간부터 시작된 것이다. 

인간은 누구나 선택적 삶을 산다. 강제적, 강압적 환경의 지배 속에서도 개별적 삶이 만들어진다. 누구나 같은 삶을 경험할 수 없듯이, 누구나 같은 감정과 이성으로 세상을 마주할 수 없다. 기실 어떤 것을 선택하는 순간 포기해야 하는 것들도 생겨나기 마련이다. 실제 훨씬 더 많은 것들이 선택 속에서 사라진다. 그리고, 포기한 것들에 관한 무관심이 깊어질수록 우리도 모르는 사이에 중요한 것들을 잃고 만다. 예술가들은 그렇게 매 순간 선택과 마주한다. 

김시연·박서은은 제주에 입도한 후 작품 제작을 위해 제주 곳곳을 리서치하고 특정한 장소를 선택하거나 포기하는 것을 반복했다. 예술적 영감을 얻기 위해 선택한 자연이 쉽게 곁을 내주지 않아 만족할 만큼 카메라에 담지 못한 경우도 있었지만, 그 실패(?)의 순간들은 온전히 자연을 이해하고, 곁을 내주길 기다리는 시간이었다. 이런 인내의 쌓임 끝에 만들어진 작품들이기에 그들이 선택한 대상과 미적 태도에 주목하게 된다. 

대상1 : 사려니 숲 

제주는 숲을 품은 섬이라 할 만큼 울창한 숲이 많다. 제주만의 숲을 상징하는 곶자왈이 곳곳에 분포되어 있듯이 제주에서 숲은 곧 삶의 환경이다. 숲을 이루는 중심은 나무이다. 한그루 한그루의 고독한 나무들이 모여 숲이 이뤄진다. 

특별실에 설치한 영상작품 <Rêve, 숲이라는 이름에 묻힌 나무>는 제주를 대표하는 사려니 숲(삼나무 숲)을 표현대상으로 삼았다. 사려니(솔안이, 살안이라고도 함) 숲은 ‘신성한(신령스러운) 숲길’이라는 신역(神域)의 산명(山名)답게 숲의 기운이 가득한 곳이다. 이러한 기운은 숲속에 오롯이 혼자 머물 때 밀려오는 고독이 깊어질수록 온몸으로 파고든다. 김시연․박서은 작가는 사려니 숲에서만 느낄 수 있는 기운을 깊은 고독 속에서 오롯이 느끼며 영상을 구성했다. 360도 실측이 가능한 3D 레이저 스캐너와 드론을 이용하여 촬영한 후 독특한 크라우드 포인트 기법으로 회화성 짙은 숲속을 연출했다. 그렇게 연출한 사려니 숲 영상을 3면 매핑하여 숲속에 있다는 착시나 착각을 의도했다. 정작 펼쳐지는 영상은 마치 신령스러운 숲을 관장하는 절대자적 시선을 따라가는 듯한 느낌을 준다. 예술가를 통해 일상에서 경험하지 못했던 새로운 시점의 경험이다. 특히 시각적 몰입감과 더불어 중간중간 대화하듯 흘러나오는 내레이션은 작품의 의도를 한층 명확하게 드러낸다. 
 ‘안녕 어떻게 지내?’
영상 시작과 함께 듣게 되는 첫 음성(내레이션)은 이후 작품의 모든 장면을 주목하게 만드는 문답으로 이어진다. 평상시 사람들 사이에 흔히 주고받을만한 안부가 코로나-19의 시대적 상황과 맞물려 각별한 의미로 다가온다. 시대 정서를 대변하는 세밀한 영상은 제한적인전시환경을 뛰어넘어 관람객을 몰입하게 만든다. 엄밀하게 자연의 힘이다.

대상2 : 마라도
 
  고독에 대한 또 다른 상징은 바로 섬이다. 사방 어느 곳을 둘러보아도 자기 발자국이 있으니 섬 사람은 갇혀 있다는 느낌을 갖게 된다. 이것은 몸서리쳐지는 것이기도 하지만, 또한 애써 추구하게 되는 것이기도 하다.
-장그르니에 지음, 김용기 옮김, 『일상적인 삶』 민음사, 2012, p.183. 

마라도는 최남단의 섬이라는 것부터 이미 고립과 고독이 자연스럽다. 섬 속에 섬을 품고 있는 제주, 섬 주변에 섬들이 있는 자연환경은 인간과 자연과의 관계의 고립과 고독에 관한 정의와 그 존재의미를 성찰하는 기회가 되었다. 

마라도에서의 성과는 우연히 발견한 죽은 나무뿌리 ‘마라73’(작가가 붙인 이름)을 마주한 순간부터 시작됐다. 8년 전 파도에 휩쓸려 마라도의 해변에 도착한 이후부터 지금의 모습까지에 주목했다. 마라도에 갇힌 3일은 ‘마라73’이 지닌 의미를 두텁게 만든 시간이었다. 섬에 고립되자 자신들의 선택에 대한 확신과 불신의 경계를 넘나드는 상황이 반복되면서 불면의 밤이 지속되었다. 결국 고립의 상황이 ‘마라73’의 미술관 반입 결정을 확신하는 계기가 된 셈이다.

그렇게 선택한 오브제는 또 한번의 통과의례(청소, 소독, 절단)를 거쳐 미술관에 놓이게 됐다. 그렇게 탄생한 것이 <Fatigue : Missing pieces, 피로 : 잃어버린 조각들>이다. 

여러 어려운 과정을 감내하며 미술관에 반입한 ‘마라73’은 작가들이 작품화로 선택했던 이유와 마라73에 부여한 의미에 관해 생각하게 한다. 작가는 선택한 오브제에 예술적 의미를 부여하지만, 그 이야기의 완성은 언제나 관객 몫이다. 전시 기간 중 작품을 감상하는 관람객 중 누군가는 뿌리 단면을 벗어나지 않은 범위에서 정교하게 매핑되는 여러 이미지가 생명을 불어넣은 것 같다고도 하고, 누군가는 그냥 신기하고 아름답다고도 한다. 작품이 누군가에게 공감을 주고 낯섦을 통해 색다른 경험과 새로운 발견을 할 수 있는 작품으로 완성(귀결)된다면 작가의 선택은 실패를 넘어선다. 

대상3: 정방폭포

<Fatigue : Missing pieces, 피로 : 잃어버린 조각들> 배경으로 높은 천고의 전시장 한 벽면을 가득 메운 폭포 영상작품 <Ascension, 그리고 사라지듯이>는 정방폭포의 낙하 장면을 느릿하게 연출하였다. ‘높이 23m, 너비 8m, 깊이 5m’의 정방폭포는 제주 서귀포를 대표하는 폭포로 ‘폭포수가 바다로 직접 떨어지는 동양 유일의 해안폭포’로 유명하다. 시점에 따라 마치 하늘에서 폭포수가 떨어지는 듯한 착각을 주는 장관이 보는 이의 마음을 사로잡기 충분하다. 그러나 정방폭포는 관광명소이기 이전에 4․3의 아픈 상처를 안고 있는 장소이다. 이곳을 찾는 사람들은 정방폭포가 품은 슬픈 역사를 말하지 않는다(솔직히 아는 이가 많지 않다). 그렇게 정방폭포는 역사적 아픔의 장소를 뒤로한 채 앞바다에 고독하게 떠 있는 섬들(숲섬·문섬·새섬·범섬)에 폭포수를 흘려보낸다. 그리고 정방폭포에는 물줄기가 낙하하며 내는 소리와 떨어지는 시간만이 존재한다. 김시연·박서은 작가는 폭포의 물줄기가 역류하는 모습을 연상시키는 상승(Ascension)이란 역설적 제목을 달았으나 결국 사라져버려 자연현상(질서)을 역행할 수 없는 사실을, 과거로 회귀할 수 없는 현실을 직시하게 한다. 지나온 고독의 시간이 폭포수가 바위에 부딪혀 사라지듯 사방으로 흩어진다.

대상4 : 빛

공(空)은 무(無)가 아닌 채울 수도 비울 수도 있는 공간을 의미한다. ‘어떤 것이 존재하지 않음이 공이지만, 그 공에 무언가 존재하는 것이 있다면 그것은 실재이다.’(불교의 공사상) 무엇보다 공은 인식하는 주체의 마음과 생각에 따라 존재대상의 크기, 중요도, 질량이 결정된다. 비어 있는 공간에 어떤 것을 채우고, 또한 채워진 대상이 어떤 존재의미를 획득하느냐에 따라 공의 가치가 좌우된다. 김시연·박서은이 생각한 빛의 세계는 공(空)에 어울리는 매혹이다. ‘공(空)의 매혹’은 두 작가의 작품세계의 핵심 Concept으로 이번 전시 전체에 해당하지만, 특별히 <Aura Room, 아우라룸>은 다른 영상과 사진 작품에 견주어 빛과 선이 교차하는 공간을 통해 고립과 고독의 연대를 새로운 방식으로 해석하여 접근하고 있어 새롭다. 디스플레이에 갇힌 레이저 빛은 특정한 틀에 갇혀 벗어나지 못하는 ‘공간에 갇힌 나’를 암시한다. 이번 전시에서 최초로 시도했다는 세밀한 기술(테크니션과 협업)은 암흑 공간 전체로 뻗어나갈 듯 힘차지만, 레이저 빛은 일정한 사각 틀을 벗어나지 못한 채 사라지고, 나타나고, 없어지는 움직임을 반복한다. 또한 전시에 참여한 4명의 작가가 4개의 언어(한국어, 영어, 불어, 일어)로 고백하는 ‘방 속의 방, 섬 속의 섬, 내가 있는 곳, 여기’ 내레이션은 고립과 고독에 관한 각각의 심정이 국적을 떠나 다르지 않음을 느끼게 한다. 

살펴본대로 <Rêve, 숲이라는 이름에 묻힌 나무>, <Ascension, 그리고 사라지듯이>, <Fatigue : Missing pieces, 피로 : 잃어버린 조각들>, <Aura Room, 아우라룸> 등 2021년의 신작들은 유기적으로 연결되어 있다. 자연 대상을 고립과 고독의 연대로 해석하여 만든 작품들이기에 그 관계성이 밀접하다. 이외 사진과 한 공간에 배치한 <Their own ways, 각자의 방식>와 <Drive, 드라이브>다큐멘터리는 이번 전시작품에 관한 별도의 해설이 불필요할 만큼 작가들이 대상(자연)을 마주한 시선과 해석, 제작 동기와 과정 등을 기록하고 있다. 영상을 따라가 보면 매 순간 작업 대상을 놓고 고민하고 선택하는 작가들의 모습이 등장한다. 우연히 만난 젊은이들의 춤사위, 주인이 없는 듯 들판에 외롭게 놓인 ‘마라73’을 마주한 순간과 이후 갖게 된 생각들, 마라도에 고립되어 낚시꾼들과 함께한 밤, 죽은 ‘마라73’이 미술관의 전시작품으로 선택되고, 의미부여가 되는 과정 등 지나칠 만큼 세세한 기록들이 화면을 채우고 있다. 제주에서 보낸 몇 개월 동안 철저하게 자신들의 일상을 오직 새로운 작품제작에 몰입했던 미적 태도를 충분히 목도할 수 있는 기록들이다. 

언급한 영상작품들과 더불어 이번 전시에서 주목할 작품은 사진들이다. 사진은 영상작품들과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다. 사진은 영상의 가장 중요한 장면의 일부이거나 고립과 고독의 연대를 증폭시키는 매개체로서 역할을 한다. 전시에 함께 참여한 프랑스의 작가 아리안느 까르미냑과 일본의 사진작가 다이쥬 사토의 작품도 여기에 해당한다. 철저히 김시연․박서은 두 작가의 시점이 담긴 이미지들은 실제보다 더 흥미로움을 준다. 익히 알고 있다고 생각했던 대상이 전혀 새로운 대상으로 인식되는 것은 시각적 외피를 걷어내고 인간의 눈으로는 확인할 수 없는(혹은 놓친) 순간의 존재적 진실을 들춰내려는 작가적 시선과 의도가 만들어낸 세상이다. 사진작품들은 이번 전시구성의 기획의도를 읽을 수 있는 장치이기도 하다. 이번 전시는 아날로그 방식과 디지털 방식으로 구성했는데 이것은 과거와 현재를 잇는 표현방식이며, 작품의 존재형식이다. 아날로그 방식의 사진은 표현대상의 순간 움직임, 시간의 흐름을 결정적 시선에서 정지시켜 그 표현 존재의 절대성을 부각시켰다. 반면, 디지털 방식의 여러 영상작품은 핵심대상의 반복적 이미지와 BGM이 어울려 각각의 내러티브를 형성하며, 그 내재적 의미를 증폭시키는 역할을 한다. 무엇보다 이번 전시는 아날로그 방식의 사진과 디지털 방식의 영상을 병치 구성함으로써 한 가지 표현방식을 강조하기보다 사진과 영상(사진-영상-사진+영상-사진)을 상호보완적으로 배치했다. 

김시연·박서은 두 작가는 이번 전시에서 어떤 것의 진실은 규정되는 과정에서 왜곡되고, 감춰지고, 사라질 수 있음을 상기시킨다. 또한 지금 보고 있는 현상은 진실이 감춰진 상황이 만들어낸 가상이며 허상일 수 있음을 경고한다. 동시에 그 구분의 모호한 경계를 객관적으로 응시할 수 있는 시선을 유도하고 있다. 예컨대 가상과 실재를 한 화면에 초현실적으로 표현한(스위트홈의 외딴집 불빛, 바다 위에 떠 있는 커다란 달, 백록담의 탐사선 등) 사진작품들이 여기에 해당한다. 

데리다는 우리가 어떤 대상을 미학의 대상으로 인식하는 경계 자체에 주목했고, 아름다움의 경계를 허구로 봤다. 그는 ‘우리가 아름답다고 느끼는 거나 미학의 대상이 되는 것은 예술작품의 안과 밖 사이의 경계 자체이며, 이러한 경계가 곧 아름다움의 실체다’라고 했다. 데리다의 시각처럼 아름다움은 언제나 의미와 무의미의 경계에 있다. 기실 아름다움뿐만 아니다. 세상의 모든 일도 의미와 무의미의 경계에 있다. 세상사가 누구에게는 의미이고, 누구에게는 무의미하다. 누군가에게 고립과 고독은 삶의 힘겨움이지만, 누군가에게는 삶을 존속하는 힘으로 작용하기도 한다.

자연과 도시의 경계, 자연과 인간의 경계, 가상(허상)과 현실(진실)의 경계, 불안과 평안의 경계 등 모든 관계는 보이지 않은 경계를 갖고 있지만, 어느 순간 그 경계를 침범하거나 넘어서기도 한다. 노란 중앙선으로 경계 지어진 도로를 운전하는 <Drive, 드라이브>의 한 장면처럼 작가들은 모든 존재의 관계는 서로의 영역을 지키면서도 때로는 서로의 영역을 내줄 수도 있음을 강조한다. 규범과 규칙을 맹종하기보다 서로의 존재를 인지하고 관계를 존중하며 살아갈 때 규범과 규칙은 자연스러워진다. 마치 자연 질서와 자연 순응처럼. 

타인과의 관계나 사회적 유대를 지칭하는 수많은 개념들이 흔들리는 혼돈의 시대에 진정 필요한 것은 우리(자신)를 돌아보는 성찰의 시간이다. 결국 고독은 개인을 찾고, 발견하는 시간이다. 무한한 자연 속에서 느끼는 고독은 자신을 돌아보는 시간이며, 성장시키는 과정이다. 김시연·박서은이 제주를 선택하고, 제주의 자연을 대상 삼아 자신들만의 조형언어로 표현한 이번 전시도 이러한 과정의 일부이다. 고립 속에서 느끼는 고독, 고독을 위해 선택한 고립, 그럴 때 고독과 고립은 한 덩어리가 된다. 고독은 삶의 존재 확인이고, 그 존재는 사랑할수록 존속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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