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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수형의 ‘무한재생’

변종필


박수형의 ‘무한재생’   


갤러리 이마주에서 열린 박수형의 개인전 ‘무한재생’’(2021.11.27.~12.18.)은 매우 흔하지만, 동시에 특별한 관심을 받지 못하는 도심 속 잔디와 잡초가 소재이다. ‘무한한 들판(infinite fields)’이라는 공통된 제목이 작품의 주제이다. 무한한 들판을 이루고 있는 것은 잔디와 잡초이다. 전시 작품들은 일면 단순 구도와 비슷한 표현기법의 반복이 주를 이루지만, 작품마다 내재된 색다른 감성의 배경과 꿈틀대듯 강한 생명력을 분출하는 잔디와 잡초의 어울림이 작품의 분위기를 주도한다. 

박수형은 잔디밭을 소재로 삼은 이유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잔디밭이 어느 순간 내가 속해있는 사회 같았다. 특히 기계에 의해 같은 높이로 잘려나가는 잔디의 운명이 각자 개별성을 상실한 채 살아가는 현대인의 모습 같아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 이 같은 작품제작의 맥락은 그의 작가 노트에서도 확인된다.
  
“나의 작업은 식물 이미지를 통한 사회상의 은유이다. 여름날의 식물과 겨울의 식물들의 모습을 관찰하여 매년을 주기로 반복되는 영원한 반복을 표현하고자 하였다. -중략- 풀의 짧은 주기를 통해 우리의 삶을 반추해보고, 풀의 역동적 모습을 통해 강인한 생명력을 담고자 하였다.” 
-작가노트 중에서-

우리가 일상에서 쉽게 마주하는 들판에는 다양한 잡초가 섞여 자란다. 잡초는 가장 흔하게 보는 풀이다. 그런데 잡초는 인간의 필요에 따라 관리되거나 제거된다. 잔디로 가꿀 수 있는 풀은 관리 대상이지만, 잡초로 분류된 풀은 제거 대상이다. 잡초는 ‘가꾸지 않아도 저절로 나서 자라는 여러 가지 풀’로 ‘경작지·도로 그 밖의 빈터에서 자라며 생활에 큰 도움이 되지 못하는 풀’을 말한다. 한마디로 하찮은 존재이다. 그래서 잡초는 인간으로부터 차별대우를 받는다. 잡초는 잔디를 위해서나 다른 꽃을 위해서 언제든지 희생되는 대상이다. 보잘것없고 하찮은 것으로 취급되어 뽑히거나 잘려서 사라진다. 어느 유행가 가사처럼 잡초는 이름이 없다. 향기도 없다. 잡초는 사람의 발길이 뜸하거나 특별히 미관을 고려할 필요 없는 장소에서만 자유롭게 살아간다. 잡초는 ‘~같은 인생, ~같은 삶’ 등 인간의 삶을 은유적으로 표현할 때 쓰이기도 한다. 특히 고생과 역경을 견뎌내고 끈질긴 근성으로 생명을 이어나가는 삶을 비유할 때 많이 쓴다. 잡초는 규제나 인공으로부터 자유롭고 강인한 생명력의 상징이기도 하다. 

반면, 잔디는 꾸밈의 식물이다. 들잔디, 금잔디, 갯잔디, 왕잔디, 비로드잔디 등 한국잔디만 해도 종류가 다양하다. 오래전부터 대저택의 정원 혹은 중요한 장소의 잘 정돈된 잔디밭은 부의 상징이나 시각적으로 아름다운 볼거리로 여겼다. 일정한 높이로 정돈된 잔디는 수평적 안정감(균등함)을 유지한다. 넓게 펼쳐진 잔디밭을 보면 전체가 하나인 듯 평등적 균형감을 준다. 박수형은 일정한 높이(크기)로 관리·유지되는 잔디밭을 사회화라는 명목하에 개인성이 상실되어가는 현대사회의 단면으로 본다. 그리고, 잔디와 잡초가 뒤섞인 들판을 보며 자신에게 질문한다. “나는 잔디형인가? 잡초형인가?” 규율에 맞춰 안정을 원하는 사람인지, 자율을 추구하며 모험을 원하는 사람인지. 답은 불투명하다. 그의 답은 들판 그림처럼 현실과 비현실이 교차되는 지점에 놓여있다. 은빛 풀밭과 그라데이션 배경이 몽환적이며, 초현실주의적 분위기를 내뿜는 것도 이와 무관하지 않다. 그림의 전반적 분위기는 사회화를 통해 획일화된 모습으로 살아가는 현대인의 불완전한 모습을 그리고 있다. 은빛을 발산하는 풀은 순수 자연의 색이 아니다. 자연색이 사라진(혹은 제거된) 풀밭은 개인의 개성을 획일화시켜 통제에 순응하는 현대인들의 모습 같다. 규율과 안정이라는 테두리에 놓인 모습이랄까. 

앞서 언급했듯이 박수형은 자신이 사회화되어가는 과정을 작업의 중요한 모티브로 삼아왔다. 특히 사회에서 맺은 인간관계에서 발생하는 이해관계의 중압감을 이겨내고 개인의 정체성을 고찰하는 작업을 지속해서 펼쳐왔다. 

“나의 주된 관심은 정체성의 획일화와 혼돈에 관한 것이다. 시시각각 변화하는 사회에서 본인은 하루하루 새로운 환경에 적응하려 노력한다. -중략- 사회의 개체로서 어떻게 살아갈 것이며, 방향성을 잃은 채 휩쓸리듯 살아가는 모습은 사회화가 되어가는 과정이다.”
 -'어두운 숲<Selva Oscura>에서 나는 무엇을 보았는가?'(룬트갤러리.2018.6.1.~6.30)전 작가노트-

이번 전시에서 ‘infinite fields’ 시리즈는 배경이 중요한 역할을 한다. 은빛 수평선처럼 펼쳐진 들판을 지배하는 것은 배경의 색이다. 실제 작품의 배경색을 빼고 보면 들판 표현에서는 큰 차이를 느끼기 어렵다. 배경색에 의해 잔디와 잡초의 특징이 한층 뚜렷하게 드러난다. ‘iindigo, green, blue, dark green, violet’ 등 은은함과 은근함, 평온함과 강렬함을 품은 색조들이 들판의 상황과 잔디밭과 잡초들이 놓인 현실을 암시한다. 그라데이션(gradation)으로 처리한 색의 미세한 변화들은 날씨와 시간의 흐름에 따라 잔디와 잡초가 놓인 현실을 말해준다. 명도와 채도에 따른 색상의 변화는 이상, 꿈, 어둠, 슬픔 등이 뒤섞인 현대인의 감정을 대변한다. 그림 속 잔디와 잡초는 저마다 생김새가 다르지만, 은빛 단색조의 들판 전체가 하나의 떼를 이뤄 배경색에 대응하기도 하고 순응하기도 한다. 

회색빛의 배경은 높은 건축물로 뒤덮인 거대도시의 무덤덤하고 무감정적인 풍경처럼 다가오고, ‘red_violet’ 색조는 현대인이 품은 욕망의 분출을 자극하는 풍경 같다. 때로는 잔디와 잡초가 배경색을 집어삼킬 듯 자극하기도 하고, 그저 평온함과 아름다움을 유지하기도 한다. 이처럼 배경색은 잔디밭 전체를 지배한다. 잔디와 잡초들을 생명력 넘치게 만들거나 강한 율동을 느끼게 하는 요소로 작용한다. 

전시 작품의 또 다른 특징은 화면구성과 붓질에 있다. 먼저, 극히 단순한 상하 이등분화면구성은 캔버스 크기에 따라 차지하는 면적이 다를 뿐, 들판을 바라보는 시점에 따른 화면분할은 아니다. 시각적으로 가장 안정감을 느끼는 분할로 현실을 지배하는 상황과 그에 대응하는 잔디밭의 힘이 균형적으로 배분된 구성이다. 


화면 구성보다 더 핵심은 붓질이다. 잔디 표현은 색보다 붓의 운필과 강약으로 결정했다. 마치 옛 문인들이 난을 치듯 잡초의 잎과 줄기를 반복적으로 그려 화면을 채웠다. 힘찬 운필이 생동감을 높이는 효과로 이어진다. 방향이나 굵기에 따라 잔디가 놓인 현실상황을 드러내는 배경의 붓질도 잔디의 운필과 관계있다. 평온을 유지하다가도 강한 바람이나 힘에 억눌리는 위기에 놓이는 관계 상황은 잔디와 잡초를 생동감 있게 표현한 운필과 강약의 역할이 크다. 각 작품마다 은빛 잔디들이 배경과 어울려 잔잔함을 주기도 하고, 생명력 있는 율동감을 전달하기도 한다. 솜털 같은 민들레 홀씨가 작은 불꽃처럼 화면에서 피어오르고, 펄이 가미된 은빛 잡초들은 불빛과 보는 각도에 따라 반짝이며 시선을 끌어당긴다. 이러한 느낌은 명확한 재현이 아닌 상상을 통해 잔디와 잡초의 특성을 표현한 효과이다. 특히 <infinite fields-weeds>연작을 보면, 잔디처럼 인공적으로 가꿔지지 않은 들풀의 자유로움이 더 강하다. 잔디밭보다 잡초만의 강한 생명력이 잘 드러난다. 

잡초를 하찮은 존재라고 취급하는 것은 순전히 인간중심의 가치 평가이다. “잡초는 아직 그 가치를 발견하지 못한 식물이다”(랠프 왈도 애머슨)라는 말처럼 잡초의 가치는 보는 관점에 따라 얼마든지 그 존재가치가 달라질 수 있다. 실제 잡초는 ‘환경에 따라 자신을 변화시킬 줄 알고, 새로운 곳을 찾아 번식할 줄도 안다. 잡초는 지구상의 식물 중 하나에 불과하지만, 무한경쟁에서 살아남기 위해 자신만의 전략을 세우고, 환경에 적응하는 생존법을 찾아낼 줄 안다. 그들은 곧바로 싹을 틔우지 않고 최적의 때를 기다릴 정도로 영리하고, 다양한 환경에 맞춰 형질을 변화시키며, 끊임없이 새로운 곳을 찾아 번식한다. 이러한 전략으로 잡초는 가장 약체인 식물에서 강인한 식물로 떠오를 수 있었다.’ 이 같은 잡초의 생존방식은 현대사회와 현대인의 생존환경이나 방식과 닮았다. 들판을 가득 채운 잔디와 잡초는 수많은 익명의 대중과 사회화되어가는 개인을 상징한다. 실제 우리(시민, 군중)는 대부분 익명자로 살아간다. 철저히 규율화된 사회구조에서는 각자 자신만의 색과 향기를 지닌 주체로서 존재감을 드러내기 쉽지 않다. 어느새 비슷한 환경의 반복에 익숙해지고, 점차 스스로 존재감을 잃어간다. 그러나 결국 자신의 존재가치는 스스로 증명하는 것이다. 경쟁사회에서 생존을 위해 끊임없이 노력하고, 새로운 변화에 적응할 수 있도록 자신을 변화시키며, 강인한 주체로 떠오르게 하는 것은 자신에게 달렸다. 바람이 심한 날, 민들레 홀씨는 자신의 의지보다 바람에 의해 흩날리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은 바람이 부는 날에 맞춰 새로운 곳을 찾아 스스로 존재를 이어가는 것이다. 

잡초가 거대한 생존경쟁에서 살아남기 위해 자신들만의 전략과 특성으로 생존법칙과 방식을 찾아내는 잡초성(weediness)을 지녔듯이 작가에게는 작가성이 있어야 한다. 작가성은 작가로 성장하기 위해 지녀야 할 특성이다. 특별한 작가성 없이 미술계에서 자신의 뚜렷한 입지를 세우고, 또 그 위치를 지켜내기란 쉽지 않다. 따라서 수많은 경쟁 속에서 당당히 작가적 위치를 지키기 위해서는 개별성 짙은 시대적 콘텍스트를 지니고 있어야 한다. 맥락적 깊이를 지닌 작품은 울림과 공감을 이끌어 낼 가능성이 높다. 누구나 마주하는 자연이지만, 특별한 시선으로 만들어낸 창작물은 자연과 예술작품에 관심을 동시에 유발시킨다. 


궁극에 박수형의 ‘infinite fields’ 시리즈는 현대사회에서 경관으로 흔히 마주치는 도시공원의 잔디밭을 규율과 자율의 두 가지 인간사회의 법칙으로 접근한 시도이다. 그의 ‘infinite fields’가 던지는 메시지는 오늘날 우리 대부분이 한 번씩은 고민한 생각으로 생활과 삶의 문제에 부딪혀 제쳐두었던 기억을 더듬을 수 있게 한다는 면에서 의미가 있다. 세상은 잔디와 잡초의 구분처럼 이분법적 사고로 가를 수 없다. 현대사회와 새로운 세대가 한층 복잡한 양태로 전개되고 있는 현실에서는 더더욱 그렇다.

결국, 박수형의 ‘무한재생’전은 무한한 들판 속 잔디와 잡초를 통해 규율과 자율의 의미를 되짚어보고, 미술작가로서 자신의 정체성을 냉정하게 고찰하는 기회의 시간이다. ‘infinite fields’는 자신이 놓인 현실의 장(場)이자 자연생명의 존재이유와 가치를 탐구하는 시작점으로 충분히 의미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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