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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인의 가공하지 않은, 가능성 예술

변종필



22인의 가공하지 않은, 가능성 예술



영국 신경의학자 올리버 색스(Oliver Wolf Sacks,1933-2015)가 저술한 『아내를 모자로 착각한 남자』 에는 자폐증 화가 호세가 등장한다. 호세는 식물에 대한 전문적인 지식이 없었음에도 묘사가 정확하고 생생한 식물 그림을 그렸다. 그의 그림은 중세의 식물학이나 약초학책에 실려 있는 유명한 사생화에 절대 뒤지지 않을 만큼 꽃에 대한 묘사가 세밀하고, 식물학적으로도 정확했다. 호세는 특별한 전문지식이 없이 식물을 어떻게 정확하게 그릴 수 있었을까? 색스는 “자폐증 환자는 사물을 일반화하는 능력이 결여되어 있거나 사물에 대해 그다지 관심을 두지 않는다고 한다. 대신 자폐증 환자의 세계는 구체적이고 개별적인 사물로만 구성되어 있다. 그들은 하나의 우주에 사는 것이 아니라 ‘다중 우주’ 즉, 수를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많고, 정확하고, 엄청나게 열정적인 개체들로 이루어진 우주에 살고 있다”라고 말한다.*

서울시립북서울미술관의 《길은 너무나 길고 종이는 조그맣기 때문에》 전은 22인(발달장애 작가 16인, 정신장애 작가 6인)의 각기 다른 다중 우주를 품고 사는 장애 예술가들이 참여한 기획전이다. 일반적 상상을 뛰어넘는 순수와 파격의 개성으로 가득한 이야기들이 담겨있는 전시로 제도권 미술의 폐쇄성을 뚫고 나온 가공하지 않은 순수의 세계를 지닌 작가들의 참여라는 점이 각별하다. 

이번 전시는 정규미술교육을 받지 않은 독학파, 개성 강한 아마추어 작가, 발달장애인, 정신장애인 등 미술의 주류에서 벗어나(혹은 제외된) 미술제도권 밖에 놓인 작가들의 창작활동을 대변해온 ‘아르브뤼(Art Brut)’, ‘아웃사이더아트(Outsider Art)’, ‘소박화파(Naive art)’, ‘에이블아트(Able Art)’, ‘비예술가의 예술’ 등과 연결 지을 만하다. 하지만, 이러한 개념이나 용어에 구애받지 않고, 전시구성이나 예술표현 형식만 놓고 보면 일반전시와 크게 다르지 않다. ‘일상성-가상세계의 연구-기원과 바람-대중문화의 반영-노트섹션’이라는 다섯 가지 맥락이나 드로잉, 회화, 모자이크, 콜라주, 텍스트와 도예(입체) 등 22인 작가들의 표현형식들도 미술의 보편적 범위에 속하는 것들이다. 

이 전시에서 주목할 부분은 참여 작가들의 창작과정과 결과물, 즉 그들이 작품에 담고 있는 세상이다. 22인의 작가들이 내면에 품고 사는 다중 우주에 관한 이야기는 현실에 존재하는 것처럼 구체적이다. 장애예술가는 장애를 안고 있지만, 자신의 세계를 구체화시키고, 상징화시키는 부분에 있어서 뛰어나다. 일반인에 견주어 추상적 묘사는 약하지만, 대신 사물을 구체화시킬 수 있는 부분에서 남다르다. 이는 지극히 직관적이고 개인적인 기억과 경험에 의해 사물을 바라보고 이해하는 그들만의 시선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이번 참여 작가들도 구체적인 형상이나 이야기를 통해 극적인 상황을 만들고, 상징적인 캐릭터를 만들기도 한다. 공책, 달력이면지, 연필, 색연필, 신문, 잡지, 스티커 등 특별할 것 없는 주변의 흔한 것들을 재료로 삼아 가상의 생명체나 캐릭터를 창조한다. 지극히 일상적인 생활의 단면들을 소재로 삼은 작품을 통해 ‘오염되지 않은’ 순수함과 자유로운 상상력을 표현한다. 이는 전시 작품에서 확인된다, 

예컨대 참여 작가 중 김경두(b.1993), 김동현(b.1993), 픽셀킴(김현우,b.1995), 나정숙(b.1964) 은 각자 내면에 저장된 파편적 이미지를 필요할 때 꺼내어 집요할 정도의 꼼꼼함과 세밀함으로 각자의 세계를 구체화시켰다. 어떤 도안이나 밑그림 없이 오직 머릿속에 내장된 문서박스의 일부를 꺼내 옮기듯 그려내는 행위들이 놀랍다. 김경두는 0.3밀리 샤프와 지우개만을 사용해 이루 헤아릴 수 없는 선들로 종이 전체를 채워가며 정교한 구조를 지닌 로봇 몸체 혹은 우주정거장 설계도 같은 그림을 그린다. 김동현은 추억의 장소와 상상의 장소가 혼재되어있는 자신만의 지하철 노선도를 세상에 유일한 형식과 방법으로 표현한다. 픽셀킴은 ‘픽셀’을 기본조형으로 화려한 색채의 변주를 리듬감 있게 확장해가고, 가상의 가족을 구체적 이야기로 만들어가는 입체작업도 병행한다. 나정숙은 별 모양의 도형을 촘촘히 짜인 그물이나 직물처럼 서로 연결하는 패턴화 방식으로 독창적인 상상풍경을 그려낸다. 

박범(b.1972), 정진호(b.1993), 양시영(b.1999)과 진성민(b.1990)은 삶의 고통, 괴로움, 불안 등을 잊고 해소하기 위해 그림 대신 텍스트 작업을 하는 공통점이 있다. 박범과 정진호가 짧은 기도문이나 시적 텍스트로 내면의 목소리를 표현했다면, 양시영은 초등학교 6학년부터 고등학교 3학년까지 특유의 필체로 추상화 단면 같이 쓴 일기장이, 진성민은 좋아하는 특정 단어, 혹은 찬송가 문구를 길게 늘어뜨려 되새기는 개성 강한 글씨체가 특징이다. 

‘그림자’ 연작을 통해 간결하고 부드러운 선으로 자신을 표현하는 김진홍(b.1991)과 음악(특히 무명가수의 트로트)을 들으며, 다채로운 색채로 여인(어머니)의 얼굴을 아름답게 화장하듯 그리는 조유경(b.1971)도 맥락적으로 불안·고통의 치유를 위해 그림을 그린다.

그리고 김치형(b.1997), 장형주(b.2011), 정종필(b.1997), 한대훈(b.1995), 한승민(b.1995), 홍석환(b.1998)은 전시 작품 중 대중문화와 연관된 유사성을 지닌 작가들로 꼽을 수 있다. 이들은 특정 대중문화(TV 프로그램, 뉴스와 광고, 애니메이션, 게임, SF히어로물 등)를 반영하여 자신만의 캐릭터나 디자인을 창조하거나, 이종생물의 합성을 통한 신 생명체와 가상세계를 만들어간다. 평면과 입체를 포함한 다양한 표현기법과 색채를 각자의 개성에 맞게 자유롭게 구사한다. 

자연과 일상의 풍경을 대상으로 자신만의 조형탐구와 색의 향연을 펼쳐나가는 작가들도 눈에 띈다. ‘표현주의적 분위기의 배경욱(b.1966)’, ‘후기인상주의 화풍(특히 세잔)에 매료된 고주형(b.1994)’, ‘색면추상적 회화의 이찬영(b.1997), 오영범(b.1997)’이 여기에 속한다. 

한편, ‘신문, 커피믹스, 과자봉지 등 쉽게 버려지는 것들을 삼각형으로 잘라 모자이크 형식의 콜라주로 형상화한 ‘영성체’ 연작으로 괴로움과 고통을 치유하는 작업을 지속해온 윤미애(b.1955)’와 ‘동그란 숫자 스티커를 반복적으로 겹쳐 붙이는 기법으로 리듬감 넘치는 조형을 만들어 냈던 김재형(1988-2018)’은 붙이는 방식으로 자신들만의 조형 세계를 선보였다. 

이상의 작품을 통해서 마주할 수 있는 작가들의 조형적 특징은 22인의 창작세계를 담은 ‘작가의 방’이라는 작가별 인터뷰영상과 ‘작가노트’를 설치한 섹션을 통해서 한층 깊이 있게 이해할 수 있다. ‘작가의 방’에는 작가의 예술적 활동을 이해하는 데 도움 될 내용들로 채워졌다. 이야기, 목소리, 말투, 표정, 제스처와 행동 하나하나에서 각자의 개성이 드러난다. 또한, 하고 싶고, 표현하고 싶은 그림, 그리고 각자의 내면에 스며있는 생각을 읽을 수 있다. 

‘노트섹션’에서는 그야말로 참여 작가들의 가공하지 않은, ‘날 것’ 그대로를 마주할 수 있다. 그들의 노트는 강박적으로 무언가를 표현하지 않으면 못 견디는 직관적 표현의 기록물로 각자 내면에 품고 있던 소중한 기억, 추억, 희망 등이 구체적이며, 개별적 조형 언어로 채워진 창조성의 보고(寶庫)이다. 

참여 작가 중 정진호가 쓴 <야생이란>이란 시의 ‘모든 것은 완벽한 각성이고, 모든 것은 기억이다.’ 라는 글귀는 맥락적으로 참여 작가들에게 공통적으로 해당하는 말이라 할 수 있다. 사실 우리의 삶을 구성하고 있는 것이 기억이다. 기억이 없는 인생은 인생이라고 말하기 어렵다. 사람을 기억하지 못하고, 과거를 기억하지 못하고, 끝내는 자신조차 기억하지 못한다면, 그 존재는 존재의미를 상실하고 말 것이다.  

 『아내를 모자로 착각한 남자』에 등장한 호세는 자폐증환자이고 지능도 뒤떨어졌지만, 형태에 대한 섬세한 표현력으로 독자적인 스타일의 자연파 화가가 되었다.*** 1) 어릴적 아버지와 스케치하며 다녔던 자연과의 관계가 유일한 기억으로 남아있던 그에게 식물(자연)은 그림으로 관심과 열정을 쏟을만한 대상이 되었다. 호세가 자폐증 환자로 특별한 재능을 발휘할 수 있었던 바탕이다. 그리고 여기에는 호세의 예술적인 가능성을 발견하고 세상 밖으로 알린 주변 사람들의 노력도 빼놓을 수 없다. 이번 전시에 참여한 22인이 ‘쓰고, 그리고, 만든’ 작품들 역시 호세와 크게 다르지 않다. 그들의 내면에 기억된 특별한 세계에 관심을 두고, 그들이 사랑하고, 애정을 쏟은 만큼 정확하고, 거짓 없는 세계를 서로 공유하고자 노력한 사람들이 있기에 가능하다. 인터뷰 영상을 통해 본 22인의 작가들은 각자 미술을 시작한 동기는 다르지만, 적어도 작품을 할 때만큼은 자신만의 세계에 몰입하여 즐거운 상상 속에서 마음껏 표현하며, 행복한 시간을 보낸다는 공통점이 있다. 그들에게 예술 활동은 ‘흥분되고, 흥미롭고, 즐거운 일’이다. 

자폐 스펙트럼을 가진 장애예술가들은 타인의 영향에 반응하기보다는 고립된 존재로서 자신 내부의 목소리에 귀 기울이는 경향이 많다. 그만큼 혼자만의 세상 속에 갇혀 살아간다. 그 세상이 자신만의 작품세계를 만들어내는 바탕이 된다. 중요한 것은 자신만의 세상을 만들어 살아가는 그들을 바라보는 세상의 시선이다. 그들의 재능이 세상 밖으로 나오기 위해서는 장애 예술가의 그림이라는 선입견 혹은 편견 없는 시선이 필요하다. 호세처럼 기적에 가까운 장애예술가의 사례가 모든 장애인을 대변할 수는 없다. 모든 사람이 예술가는 아니듯 모든 장애인이 예술가로 성장할 수는 없다. 다만, 장애인의 예술적 행위를 바라보는 시선과 인식의 차이는 크다. 이 점에서 《길은 너무나 길고 종이는 조그맣기 때문에》 전시는 성장 가능성이 다분한 장애 예술가들의 창조적 세계를 보고 이해하며, 공감하고, 함께 이야기 나눌 수 있는 시선을 갖게 한다. 



 1) *, **, *** 올리버 색스 지음, 조석현 옮김, 이정호 그림 『아내를 모자로 착각한 남자』 알마, 2020. p.375-377. 내용 부분인용 및 재작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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