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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필 / 허공에 뿌리내린 자연, 그 생명의 무궁성

변종필



허공에 뿌리내린 자연, 그 생명의 무궁성


20세기 이래 현대조각의 내용과 형식은 실험적 장르와 소재, 새로운 작법과 재료 등을 통해 한계 없는 확장과 팽창을 거듭해 왔다. 끝을 알 수 없는 변화로 인해 조각 고유의 경계가 무너지고 비조각, 탈조각 등의 용어가 조각 분야에 자연스럽게 수용되는 것이 현대조각의 모습이다. 이 흐름은 조각 고유의 특성과 제작방식을 고집하는 작가들의 급격한 감소로 이어졌다. 이 같은 현대조각의 변화를 보면서 조각 고유의 구상성을 지키며 작업하는 작가를 만나면 일단 그 고집스러움에 주목하게 된다. 조각가 송필이 그렇다.

송필은 1990년대 이후 한국 구상 조각의 대표작가로 꼽힌다. 30여 년간 조각 고유의 제작 방식을 이어온 고집스러운 작가로 구상적 형상을 바탕으로 자신만의 뚜렷한 조형 세계를 구축해왔다. 그는 2013년 이후부터 작품의 시그니처가 된 무거운 돌덩어리, 거대한 나무, 수많은 서랍장과 신발, 겹겹의 유리층을 짊어진 초식동물을 핵심으로 한 실크로드 연작을 지속해서 발표했다. 힘겨운 삶의 무게를 짊어졌지만, 당당하게 세상에 맞서 이겨내는 희망과 의지의 표상을 통해 현대인의 고독한 삶의 여정을 표현해 왔다. 무엇보다 구상성을 고집하면서도 새로운 재료와 작법, 소재 발견, 조형성 탐구에서는 끊임없는 자기 변화를 시도했다. 실험과 도전의 창작 태도로 자신만의 조형 세계를 만들어가는데 게으르지 않았다. 이번 <Beyond the Withered>의 출품작들은 특히 이러한 창작 태도를 보여준다. 그의 신작을 마주한 첫 느낌은 ‘가벼워졌다’였다. 작가의 자화상이자 현대인을 상징하며 작품세계를 주도하던 초식동물이 사라졌기 때문이다. 핵심 소재인 동물을 없애고 나무를 내세웠다. 큰 변화이다. 작품에 등장하는 나무는 잎이나 열매 없이 가지만 앙상하게 남아 있어 어떤 수종인지 알 수 없다. 다만, 전작에서 나약한 초식동물이 현대인의 모습을 상징했듯이 신작은 가녀린 나무들이 주를 이룬다. 표현에서는 자연스럽게 양감(mass) 대신 선이 중심이 되었다. 주지하다시피 서양의 예술론은 언제나 형, 선, 색이 중심이었다. 형과 색은 시대와 작가에 따라 그 중요성을 놓고 대립적으로 충돌을 했지만, 선은 모든 조형의 기본이자 본질로 여겨졌다. 실제 선묘적 표현은 그리스·로마의 조각에서부터 형을 확정하고, 형상의 디테일과 특징을 살리는데 핵심 조형 요소였다. 그리고 이후에도 꾸준하게 입체 조각의 핵심을 결정하는 역할을 담당했다. 선은 모든 대상의 특징을 표현하는 요소이며, 형상을 결정짓는 구조적 뼈대와 같은 역할을 했다. <Beyond the Withered>의 신작들은 이러한 선묘적 표현이 주도한다. 기존의 작품이 지닌 외형적 무게를 덜어내고, 나무를 통한 자연의 숭고함을 최대한 간결한 조형 어법으로 표현되었다. 그 결과 시각적으로 장식성이 가미되고, 조형 구성상 가벼워졌다. 

반면, 제작과정은 한층 정밀하고 까다로워졌다. 6m가 넘는 높이의 <허공에 뿌리내린> 작품의 경우 언뜻 나무에 은색을 도칠 한 듯 보이지만, 실제로는 물푸레나무의 껍질을 제거한 뒤 몸통(속살)을 원형 삼아 작은 스테인리스 조각을 하나씩 두드려서 잇고, 이음매는 다시 연마하여 매끄럽게 마무리하는 방식을 반복했다. 정교한 용접으로 이어나간 수많은 나뭇가지는 동일한 방향이나 같은 모양 없이 각기 다른 길이와 방향으로 자연스럽게 상승하며 뻗어 나가는 표현으로 사실성을 높였다. 그러나 정작 이 작품에서 주목할 점은 나무의 리얼리티를 추구한 외형적 형상보다 작품의 설치 방식과 의미에 있다. 생명을 뿌리내릴 땅도 없이 허공에 매달린 나무는 모든 불완전한 삶을 상징한다. 애초에 거대한 나무가 허공에 뿌리를 내린다는 설정은 그 자체가 불가능하다. 그렇다면, 현실에서는 이루어질 수 없는 이 같은 설정의 의미는 무엇일까? 

작가가 말하는 허공은 현실의 공간이 아니다. 그가 말하는 허공은 특정한 물질적 공간이 아닌 정신 혹은 이상적 공간이다. 마치 깊이를 가늠할 수 없는 인간의 마음 같은 곳이랄까. 이는 작품의 설치 부분에서 일부 감지된다. 전시공간 외부 계단을 오르내리며 볼 수 있도록 설치한 것은 나무가 샤머니즘의 대상이 되어 대대로 마을을 지켜준다고 믿었던 설화처럼 현대사회에서 힘들고 지친 사람의 마음에 위로와 희망의 신목(神木)을 심어주고 싶은 의도로 보인다. 

<허공에 뿌리내린> 작품은 수많은 나뭇가지에 달린 물체가 빛을 받는 순간 그 존재성을 더 확실히 드러낸다. 나뭇가지에 크고 작은 크리스털이 열매처럼 매달려 보는 각도에 따라, 혹은 흔들릴 때마다 오묘한 무지개색 빛의 아름다움을 발산한다. 불빛이든 자연 빛이든 빛을 받을 때마다 생명이 꿈틀대듯 반짝인다. 이번 신작들에 사용한 크리스털은 자연의 생명이 피워낸 결실이자 결정체로 하나하나 다른 빛을 발산하며 생명의 무궁함을 상징한다. 

궁극에 <허공에 뿌리내린>은 생존을 위협하는 환경과 성장이 제한된 모든 조건을 뛰어넘는 꿈의 실현으로 인간의 마음에서 영원히 죽지 않는 생명의 나무로 뿌리내리고 싶은 의지이며 희망이다. 끝없이 순환하는 자연, 그 생명의 무한성을 강조한 상징성은 ‘말라죽은, 혹은 시든 저 너머의 새로운 희망’이란 개념으로 사용한 <Beyond the Withered> 전시 타이틀과도 닿아있다. 

생명의 무궁함을 상징하는 의미는 ‘레퓨지아’ 시리즈에서도 감지된다. 레퓨지아는 ‘과거에 광범위하게 분포했던 생물체가 소규모 집단으로 생존하는 지역 또는 거주지’를 지칭한다. 즉 과거에는 어느 곳에서나 쉽게 마주할 수 있었던 생물체가 주변 환경의 변화로 제한적 공간(지역)에서 생존하게 된 것을 말한다. 가로길이가 약 3m에 이르는 대형 작품인 <레퓨지아-움트다Ⅰ>는 애초에 몸통이나 뿌리조차 없는 고목의 껍질에서 또 다른 생명이 피어나는 형상이다. 더는 자랄 수 없는 환경에서 새 생명이 피어나는 희망의 모습을 표현했다. 상징 내용은 맥락적으로 <허공에 뿌리내린>과 연결되지만, 표현방식은 반대이다. 레퓨지아 시리즈는 나무 속살 대신 속을 비워낸 껍질을 사용했다. 나무껍질의 본래 질감이 그대로 드러나도록 특별한 제작방식으로 유일성을 추구했다. 이 작품은 거친 듯 다듬어지지 않은 표면 질감이 특징이지만, 작품의 본질은 나무껍질의 내부와 거칠고 투박한 고목에서 피어난 청매화에 있다. 껍질의 내부는 나무가 살아낸 세월의 깊이만큼 깊다. 현실에서는 쉽게 들여다보기 힘든 나무껍질 속은 생명의 비밀을 간직한 터널처럼 길고 은밀하기까지 하다. 간간이 나뭇결 사이로 파고드는 빛은 생명을 자극하는 희망의 기운처럼 전해진다. 시간에 따라 빛과 어둠이 뒤바뀌는 발광장치(야광색 도칠)는 숭고한 자연 순환의 영원성을 표현한 듯하다. 결국, 고목의 껍질에서 피어난 청매화는 어떤 제한적 장소나 상황에서도 삶을 포기하지 않은 생명의 존귀한 가치 증명이다. 특히 죽음의 물질(장소)이 또 다른 생명의 근원이 되는 자연생태의 순환을 상징한다. 이는 어둠에서 발광하며 꽃을 피우는 청매화를 통해 한 번 더 확인된다. 

이러한 특징은 <레퓨지아Ⅱ>에서 매료성 강한 함축미로 드러난다. 청매화가 고목 껍질을 뚫고 나와 꽃을 피운 모습이 마치 한 폭의 문인화를 마주하는 느낌을 준다. 시적이며, 문인적 정서가 짙고, 조각이지만 회화적 분위기를 풍긴다. 근접해서 보면, 실재 청매화가 단단한 나무껍질을 뚫고 나온 듯 표현했다. 섬세함과 간결한 조형미를 함축시킨 숙련된 표현기법이 마치 절정에 이른 화가의 손끝에서 표현된 그림 같다. 고매함과 기품이 있다. ‘매화는 추운 겨울에 꽃을 피우면서도 자신의 향기를 아무에게나 팔지 않는다(梅一生寒香不賣)’라는 말이 있다. 송필의 청매화는 향기를 뿜어내진 않지만, 생명의 소중함을 일깨운다. 그의 매화는 절개, 혹은 희망의 상징이나 봄의 전령이란 일반적 해석보다, 죽은 나무에서 피어나는 생명의 소생이자 불멸의 꽃이란 의미가 더 강하다. 그의 매화는 생명에 대한 희망이다.

한편, 이번 전시 작품 중 동물의 형상을 지닌 <나르시시즘(2020년)>은 전작(동물형상)과 신작을 연결하는 하나의 매개체적 작품으로 주목할 만하다. 해부학적으로 분해한 동물의 몸체와 불꽃처럼 묘사된 나뭇가지들이 자연스럽게 연결된 독특한 형상이다. 슬픔을 품은 아름다운 형상이 시선을 빼앗는다. ‘나르시시즘’란 제목에서 자연스럽게 물에 비친 자신의 모습에 반해서 물에 빠져 죽은 그리스 신화가 떠오른다. 그러나 송필의 <나르시시즘>은 신화와 달리 깊은 물  속에 자신을 던지기 직전 불꽃처럼 타올라 산화되는 형상이다. 여기에 어두워지면 작품 전체가 발광하며 자신의 형상을 드러내는 반전이 있다. 결국에 <나르시시즘>은 나무 형상의 불꽃으로 변해가는 동물 모습과 어둠 속에 사라지지 않은 존재로 자신을 드러내는 효과를 통해 영원히 자신을 기억하고 싶은(혹은 잊지 말라는) 작가의 내면적 욕망으로 읽힌다. 모든 것이 사라지는 절체절명(絶體絶命)의 순간에 오히려 삶의 의지가 불꽃처럼 타오른다는 역설을 담고 있다. 이 같은 역설은 검게 죽어가는 예술가의 심장, 타다 남은 장작 나무, 시커멓게 타들어 간 종잇조각 등 절망이나 소멸의 순간에 결코 삶의 끈을 포기하지 않고, 생명의 존재 의지를 드러낸 작품들과 궤를 같이한다. 이는 작가의 전작에서부터 변함없이 작품 전반에 담긴 역설적 희망이다. 

   모든 작품은 내가 걸어가고 있는 그 길, 인간이 가고 있는 그 길 위에 서 있다. 그 길은 돌덩이같이 무겁고 과도한 욕망이 남긴 발자국이며 긴 여정이 남긴 거대한 기억의 창고이며 그 와중에 살아보고자 하는 인간의 희망에 기댄 길이다.
 -작가노트-

작가의 창조적 충동은 변화를 낳는다. 작가에게 변화는 본질이다. 이 점에서 <Beyond the Withered>는 조각가 송필이 스스로 짊어졌던 삶의 무게를 내려놓으며, 찾고 싶었던 예술의 새로운 희망이며, 돌파구라 할 수 있다. 불완전한 현실을 직시하면서도 자신의 나아갈 길을 한 걸음씩 당당하게 내딛는 그의 행보는 느릿해 보이지만, 확고한 신념으로 가득 차 있다. 조각가로서 사유와 의지를 담은 창작의 욕망을 변함없는 진솔한 작가 태도와 실천의 행위로 이어간다. 생명의 숭고한 가치를 동물, 나무와 같은 자연소재로 작품화하는 과정을 반복해온 고집스러운 여정이 어느덧 마디마디를 거치면서 명증한 자신만의 세계를 만들어내고 있다. 

좋은 작가의 작품은 감동을 준다. 늘 좋은 작가였던 송필은 그렇게 자신만의 고집스러움으로 독창적인 작품 세계를 이어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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