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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미경의 회귀, 그 자연스러움

변종필



주미경의 회귀, 그 자연스러움



도예작가 주미경의 <회귀(回歸, reversion)>展은 전작에 견주어 확연한 변화가 보이는 ‘판성형-도판작업’ 형식의 새로운 작품들(35점)을 선보이는 전시이다. 

전시는 <회귀>라는 타이틀부터 여러 생각을 갖게 한다. 회귀(回歸)는 인간사에서 빈번하게 사용되는 단어로 ‘본래의 자리로 돌아오거나 돌아감’이란 뜻을 갖고 있다. 이때 중요한 것은 ‘본래의 자리’이다. 본래는 어떤 사물의 처음, 즉 사물이나 현상이 만들어지거나 생겨난 시작의 때를 말한다. 그런데 한자 ‘回’(물이 소용돌이쳐 빙빙 도는 모양을 본뜬 상형문자)가 지닌 ‘돌다. 돌아오다’의 뜻에 집중하면 본래의 자리는 현재의 자리까지 포함하고 있음을 알게 된다. 다시 말해 원시적(혹은 원초적) 상태를 향하는 직선적 회귀가 아닌 현재까지 아우르는 원심적 회귀라는 해석이 가능하다. 

그렇다면 주미경에게 본래의 자리는 어디(무엇)일까? 그에게 본래의 자리는 과거 어느 특정한 지점에 국한하지 않는다. 지금까지 살아오며 역할이 시작된 그 모든 자리, 역할 하나 하나가 시작되던 그 모든 순간들이다. 작가, 교육자, 딸, 아내, 엄마 등 ‘자리’라는 개념 자체가 ‘관계’를 전제하듯, 주미경의 본래 자리는 모든 대상과의 관계를 함축하고 있다. 

그래서인지 <회귀>전의 작품들은 하나같이 짙은 갈색(흙의 색) 위에서 다양한 관계로써 펼쳐지고 있다. 생명을 잉태하고 성장하는 토대 위에 생명이 나고 자라 묻히거나 흩어져 흙과 하나임을 보여준다. 그 뿐만이 아니다. 주미경의 <회귀> 작품들은 처음부터 지금까지 삶에서 펼쳐진 모든 관계는 분리할 수 없는 하나(혹은 바로 자신)였음을 드러낸다. 이는 <㠊-큰산>, <旻-하늘>, <颾-바람소리>, <雰-안개>처럼 자연을 마주할 때나, <穆-화목하다>, <貹-넉넉하다>, <緊-얽히다>, <潽-끊다>, <舋-틈>처럼 삶에 스며들 때나, <爹-아버지>, <顧-돌아보다>, <眊-눈이 흐리다>, <瞑-눈을 감다>처럼 인생을 반추할 때나 항상 비슷한 톤, 같은 느낌 위에서 작품이 펼쳐지고 있다는 점에서 확인된다. 그의 작품은 자연성을 지녔지만, 어떤 형상이나 이미지로 특화되지 않은 추상성을 지향한다. 이는 자신의 고유한 자아를 반추하는 대상으로 자연을 표본으로 삼아, 범속한 현실성을 넘어선 초연한 세계를 표현하고 싶은 예술의지의 반영으로 해석된다. 

놀라운 것은 초월적 세계를 견지하면서도 표면에 펼쳐진 풍경은 역동적이고 단호하면서도 고요하며, 응시할수록 시(詩)의 각운(脚韻)처럼 작품마다 그 속에 품고 있는 자연성과 생명성이 선명하게 드러나고 있다는 점이다. 막연한 아련함에 기댄 회상이 아니라 분명한 기억으로부터 소환된 회귀를 이야기하면서 작품마다 작품명 그대로의 깊이와 긴장감을 유지하고 있다. 들고 나며 평면을 경계 짓거나 혹은 덮어버리는 다양한 형태의 도판 위에 얇은 선, 두터운 터치, 힘찬 붓질, 크고 작은 점 등 욕심을 비운 직관적 드로잉이 인위성 없는 자연처럼 펼쳐졌다. 그리고 수묵의 깊은 색감이 생명의 땅 속에 자연스럽게 스며든 것처럼 지극하고 깊은 느낌을 발산한다. 

여기서 또 한 가지 주목할 대목은 주미경의 ‘회귀의 순간’들이 어떤 한 지점으로 향하는 것이 아니라 사방에 펼쳐져 있다는 점이다. 그의 작품은 시작과 끝이 명확하게 드러나지 않는다. 마치 광활한 대지(大地), 처음과 마지막을 구분할 수 없는 자연 순환처럼 시작과 끝을 알 수 없는 연속성을 지녔다. 명상적 의미가 강한 작품명이 어떤 시작과 끝을 지시하지 않는 것도 같은 맥락이다. 수십 점의 도판 위에 펼쳐진 선들이 끝날 것 같지 않은 운동감을 갖는 것처럼. 주미경의 ‘회귀의 순간’은 ‘자연의 영겁’을 닮은 듯 보인다. 그렇게 주미경의 회귀는 자연에서 출발하여 초연한 세계를 지향하고, 자연스럽게 이어지다 다시 자연을 향해 있다. 


작가는 누구나 변화의 시기를 겪는다. 육체적이든 정신적이든 작품세계에 큰 변곡점을 맞이하기 마련이다. 주미경 작가도 다르지 않다. 이번 <회귀>전에서 선보인 ‘판성형-도판작업’은 지금까지 물레를 사용하던 제작방식을 벗어난 새로운 작업형식이다. 이 형식은 조형이 매우 힘들다. 1250도의 고온에서 소성되는 동안 뒤틀리거나 깨지는 경우도 흔하다. 물레나 원형 작업과 달리 판성형 작품이 어려운 지점이다. 이번 신작들은 도판 작업에서 성형한대로 초벌에서 나오면 재유로 2차 소성을 하고, 안료 페인팅작업으로 중성소성을 하는 과정을 거쳤다. 이렇듯 ‘판성형-도판작업’ 조형은 힘들고, 과정은 번거롭고 까다롭다. 

인터뷰에 따르면, 그는 “판성형-도판작업’을 시도한 이유는 ‘작업과정에 많은 것을 내려놓고 허물을 벗고 싶어 지난 작업들을 전부 부쉈다. (중략) 무엇보다 판형작업의 선택은 물레작업 과정에서 안 된다고 하는 고정관념을 탈피하고 싶은 욕망이 컸다”고 말했다.
주미경 작가에게 ‘판성형-도판작업’이라는 새로운 형식은 도예작품에서만 마주할 수 있는 고유성을 유지하면서 물성의 장점을 최대한 느낄 수 있도록 하는 과정자체가 하나의 도전이었다. 결과적으로 주미경 작가의 ‘판성형-도판작업’은 예전처럼 물레를 사용할 수 없는 상황에서 흙을 처음 만졌던 초심으로 회귀하여 물성(物性)을 재탐구해 찾은 새로운 조형세계이다. 

‘판성형-도판작업’ 형식은 육체적 어려움을 극복하는 과정에서 찾은 필연적 변화였지만, 오히려 오래전부터 시도해보고 싶었던 실험적 작업을 하게 된 정직한 변화였고, 그 만큼의 작가 성장을 이끌었다. 어떤 형태를 고집하거나 특별히 격식을 차려 꾸미지 않은 소탈함이 투박한 질감과 더불어 담담한 세계를 얻을 수 있게 했다. 무심한 듯 휘저은 붓질 속 비백처럼 작품 전반에서 여유와 비움의 의지를 드러내고. 이런 의지는 최대한 순수의 시점(본연의 마음)으로 회귀하려 했던 작가의 일심(一心)이었다.

‘회귀는 어려서 젊어서 가고자 했던 마음과 생각을 갖고자 함이며, 여분의 삶에 대한 작고 소박한 꿈이다.’
작가의 말

결론적으로 <회귀>전에서 선보인 주미경의 ‘판성형-도판작업’들은 30여 년간 꾸준하게 이어온 작가의 창작활동의 근원인 정신적 배경이 바탕이 된 독자성이 강한 작품이다. 특히 주미경이 복귀하고 싶었던 회귀성은 갑작스런 욕심이 아닌 이미 내면과 전작들의 면면에 내재해 있었다. 오랜 시간 흙을 반죽하고, 쳐대고, 만지고, 다듬는 과정은 인생 여정에서 경험한 숱한 관계들이고, 그 관계들의 소중함을 다시 깨닫는 과정의 산물이 <회귀>전이다. 

도예작가 주미경의 ‘판성형-도판작업’은 앞으로 작품규모, 제작과정, 밀도와 조형 등에서 또 다른 한계의 벽에 부딪치겠지만, 그가 도달하고자 하는 회귀의 순도에 근접할수록 예술적 진정성은 한층 깊어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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