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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가의 숲, 곶자왈의 공생과 상생에 관한 탐구

변종필



화가의 숲, 
곶자왈의 공생과 상생에 관한 탐구



화가는 작품에 자기 생각을 담는다. 대상을 그리는 이유가 명확해질수록 그림에 관한 생각도 확고해진다. 그 생각은 작품을 통해 감상자에게 전이된다. ‘어떤 대상을 표현하느냐?’는 화가의 생각과 관심이 현재 어디에 머물러 있는지를 말해준다. 화가의 작품에 등장하는 소재나 주제에 주목하게 되는 이유이다.

프랑스에서 활동 중인 화가 홍일화는 오랜 시간 인물화를 그렸다. 프랑스 유학 시절 신고전주의 화가 앵그르의 인물화에 자극받은 이후 10년 이상 많은 인물화를 그렸다. 그러다 2019년을 기점으로 관심 대상이 자연으로 바뀌었다. 인물화에서는 느껴보지 못한 자연의 새로운 세계에 매료되면서부터이다. 자연은 닮음을 비교당하거나 때로는 모델의 요구를 충족해야 하는 초상화와는 근본적으로 다르다. 자연은 일상적으로 대할 때에도 훌륭한 표현대상이지만, 일상의 경계 너머 존재하는 미지의 자연을 마주한 화가는 숭고함을 느끼고 표현 욕구에 사로잡힌다. 많은 화가가 표현 대상으로 자연을 사랑하는 이유이다.

현재 홍일화의 예술적 관심은 자연의 숲에 쏠려있다. 꼭 집어 말하면 제주의 곶자왈에 꽂혀있다. 그가 제주의 곶자왈에 관심을 가지기 시작한 때는 2019년 제주의 레지던시에 참여하면서부터이다. 이 글은 그가 머물며 작업했던 제주 및 파주의 레지던시, 그리고 36회 개인전 《가시숲》과 37회 개인전 《가시덤불》에 발표한 작품을 주 대상으로 삼고 있다. 글의 논점은 왜 제주의 곶자왈인지, 화가에게 숲은 어떤 의미인지, 그리고 그림으로 표현하려는 세상은 무엇인지에 두었다. 

1. 제주의 숲_곶자왈
인적이 드문 깊은 숲은 심해(深海) 같다. 사람의 발길이 닿지 않은 숲은 평안하게 자연을 감상하는 수목원 같은 곳과는 애초부터 다르다. 생명을 위협하는 동·식물이 가득할 수도, 길을 잃을 수도 있다. 미지의 숲은 그대로 두려움의 대상이다. 그러나 삶이 깊어질수록 세상의 이치를 깨닫는 깊이가 달라지듯 숲도 친숙해지면 마주하는 마음부터 달라진다. 걷고, 또 걸으며, 피부로 느끼고, 마음으로 받아들일수록 두려움은 사라지고 신비로움이 마음 한 곳으로부터 차오른다. 그리고 설화와 신화, 동화의 근원이었던 잊혀진 숲의 이야기들이 하나둘씩 살아나기도 한다. 그러나 21세기로 접어들면서 도시개발과 함께 숲이 파헤쳐지면서 숲들이 사라졌다. 그리고 숲 이야기도 함께 잊혀졌다. 이러한 변화의 물결 속에서 특별한 숲의 모습을 유지하고 있는 곳이 제주의 숲 곶자왈이다. 곶자왈(Gotjawal)은 ‘숲을 뜻하는 제주어 ‘곶’과 가시덤불을 뜻하는 ‘자왈’을 합쳐 만든 글자이다. 제주의 숲 역시 개발과 보존이란 갈등 속에서 위협받고 있지만, 인간의 발길을 쉽게 허락하지 않는 곶자왈은 여전히 미지의 숲이다. 다양한 동·식물이 공존하며 독특한 생태계를 유지하고 있는 곶자왈은 그 자체로 원시림을 이루고 있다. 800여 종에 이르는 식생이 평지 대신 울퉁불퉁한 용암석에 제멋대로 자리를 틀고 뒤섞인 채 공생하는 곶자왈은 제주도 자연생태의 허파로 불린다. ‘덤불과 용암석이 어수선하게 뒤섞인 숲’을 일컫는 곶자왈답게 무수한 생태적 특성으로 가득하다. 넓은 숲은 얽히고설킨 가시덤불로 뒤덮여 신비감보다는 공포감이 앞선다. 애초에 숲에 들어서는 것을 막는 기운 혹은 경고랄까. 먼발치에서 내뿜는 기운이 몸을 사리게 만든다. 그러한 숲을 헤치며 곶자왈을 탐구하고 싶은 호기심이 커지면 미지의 세계를 경험하도록 마음이 움직인다. 바람, 돌, 오름, 숲, 곶자왈, 나무 등 제주에 특별함을 갖게 하는 요인 중 곶자왈은 창작활동을 하는 예술가라면 누구나 한 번쯤은 빠져들게 하는 매력을 지녔다. 곶자왈의 신비로운 매력에 흠뻑 젖어 들면 그때부터 곶자왈의 진짜 모습을 만나기 위한 행동이 뒤따른다. 화가 홍일화가 그렇다. 

2. 화가의 숲-‘가시숲’과 ‘가시덤불’
홍일화는 제주의 숲에 관심을 두기 시작하면서 일상의 대부분을 곶자왈과 연결했다. 그는 제주도에서 머문 기간 동안 곶자왈을 몸과 마음으로 온전히 느끼기 위해 길잡이까지 앞세워 여러 숲과 곶자왈을 탐험했다. 그리고 새로운 곶자왈을 찾아 걷고, 느끼고, 쓰고, 그리는 행위를 반복했다. 동백동산, 제주 조각공원, 화순 곶자왈, 제주도립 곶자왈, 환상숲 곶자왈, 금산공원, 돌문화공원 그 외 머체왓 숲, 삼다수 숲, 한라생태숲, 절물자연휴양림 등이 그가 걸었던 숲과 곶자왈이다. 그가 ‘절물의 숲’에서 ‘장승 숲’까지 걸으며 곶자왈을 몸과 마음으로 받아들이는 영상을 보면 숲을 바라보는 시선, 시간, 속도 등 자연을 응시하는 그만의 시선을 느낄 수 있다.

홍일화는 제주의 숲에서 느낀 여러 복잡한 감정을 그림으로만 표현하지 않았다. 숲을 소재로 소설을 쓰고 도록이나 리플릿에 소설형식으로 발표했다. 그리고 개인전 개최 때마다 소설을 이어갈 계획도 세웠다. 그의 ‘이야기 본능’에는 숲의 공존은 식생들의 보이지 않은 싸움과 화해 속에서 유지된다는 사실을 알리고 싶은 의도가 깔려있다. 실제 그의 숲 이야기를 읽고, 그림을 보면 숲을 다시 보게 된다. 홍일화가 작품으로 표현한 특정한 곶자왈은 그 자체로 제주의 숲을 의미한다.

씨앗들은 빠른 속도로 성장하며 나무에 꼭 붙어 오른쪽으로 왼쪽으로 다양한 방향으로 서로서로 엇갈려 나무를 감아 올라갔다. 나무를 타고 올라가다 갈 길을 잃고 떨어진 가지들은 살길을 찾아 가장 가까운 다른 나무를 찾거나 자신이 붙어있던 나무로 다시 돌아가려 힘썼다. 그렇게 나무들은 굽이굽이 다양하게 휘어지고 뒤틀어지며 그전에 숲에서 볼 수 없던 모양새를 만들어냈다. 나물에 서로 다른 형태로 엉겨붙어 자란 식물들과 어느새 얇은 나무의 형태를 띤 가지들은 서로 얽히고 설켜 덤불이 되었다. 몸속의 가시들을 밖으로 꺼내었다. 
-가시숲 중에서-

덤불 속에 있는 식물과 동물들은 활기차고 기분 좋은 나날을 보내며 더는 사람에 대한 두려움과 공포를 덜어낼 수 있었다. 하지만 이도 그리 오래가지 못했다. 섬에 점점 가시덤불이 많아지자 사람들의 터전이 위협을 받는다 생각했다. 덤불과 사람의 싸움이 시작됐다. 
-가시덤불 중에서-

홍일화는 자연이 살아있음을 느낄 수 있는 아침(숲에 햇살이 들어오기 시작하는 7시 전후)에 주로 숲을 찾는다. 해뜨기 직전의 숲은 자연의 생명과 기운을 몸과 마음으로 체감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인지 그의 숲 그림은 자연의 생명을 느낄 수 있는 시간으로 채워져 있다. 그림 속이 온전히 자연의 시간이다. 사람의 발길이 아직 들리지 않은, 아직 밤의 어둠이 남아있는, 햇살이 나무 사이를 비집고 들어서는, 생명이 꿈틀대며 호흡하는 순간들로 채워졌다. 숲에서 찰나의 순간마다 느낀 감정은 시간이 지날수록 그리움으로 남는다. 강렬한 인상으로 남은 풍경은 그만큼 기억이 깊다. 그렇게 곶자왈에서 느낀 감정을 떠올리며 직설적으로 표현한 산물이 《가시숲》과 《가시덤불》의 개인전 작품들이다. 이 작품들은 2020년 『숲으로』 도록에 수록된 임시풍경 시리즈보다 제주의 숲, 제주만의 곶자왈에 한층 가까워졌다. 전작에서 주를 이룬 정체불명의 모호한 형상들이나 초현실주의 같은 초자연적 분위기가 사라졌다. 대신 제주의 속살, 즉 곶자왈의 진면목을 직접 들여다본 깊이 있는 탐구가 내면의 축적된 힘으로 자연스럽게 표출되었다. 


홍일화의 숲 그림은 크게 세 가지 유형으로 나뉜다. ‘거대한 숲 전체의 풍경을 최대한 담으려한 대작’과 ‘숲의 한 부분을 집중 포착한 풍경’, 그리고 ‘근접 없이는 마주할 수 없는 가시덩굴을 클로즈업한 소품들’로 구분된다

대작은 숲 전체 분위기를 감지할 수 있는 규모이다. 8곡 병풍처럼 연이어 그린 그림이나 7점을 연작으로 표현한 그림들은 마치 숲을 옮긴 느낌이랄까. 그 자체로 끝없는 숲의 세계에 들어선 느낌을 준다. 여기에는 화가 자신은 물론 관람자에게 숲속에 머물고 있다는 착각(느낌)을 주기 위한 의도가 깔려있다. 

몇몇 그림을 살펴보자. <Meochewat P.E 0412>은 ‘돌무더기(머체)와 밭(왓)’의 뜻을 가진 숲으로 편백나무 숲이 울창하게 우거진 공간적 특징이 잘 드러난다. 그림 속 풍경처럼 인적이 드문 시간의 숲은 그 자체로 신비로운 기운을 발산한다. 화가는 즐비하게 늘어선 나무들을 마치 나무 정령들이 모여 서 있는 모습처럼 표현했다. 우뚝 선 나무들 깊숙한 곳으로부터 밝음이 찾아들고, 바닥을 덮은 풀들은 숲의 생명이 깨어있음을 느끼게 한다. 이는 생기 넘치는 색채와 자유로운 붓질이 만들어낸 회화적 감각의 효과이다. 

<Gotjawal P.E 0507>는 제주에서 쉽게 마주할 수 있는 전형적인 곶자왈 풍경이다. 쓰러진 나무 옆으로 새로운 나무가 자라고, 척박한 돌밭과 부엽토에 의지해 뿌리를 내리고 살아가는 곶자왈의 생태를 묘사했다. 나무덩굴과 가시덩굴이 나무들을 감싸고, 많은 풀이 하층 식생을 이루고 공존하는 곶자왈 풍경 그대로이다. <Meochewat P.E 0412> 의 올곧게 수직으로 자란 나무들에 비해 <Gotjawal P.E 0507>의 나무들은 곡선 형태이다. 좌우 가리지 않고 자유롭게 뻗어 나간 모습은 생존을 위한 자기방어적 선택이다. 그림처럼 곶자왈만의 자연생태는 자유로운 곡선 형태의 나무에 의해서 부각된다. 대작 중 유난히 화려한 색채가 돋보이는 <Epine. P.E 1012> 작품은 숲이 새로운 생명의 씨앗이 싹트고 이상이 현실로 실현되는 장소임을 보여준다. 가시박이 씨 뿌리는 포자를 문양처럼 그려 화면 가득 아름다운 생명체로 표현한 시도가 눈에 띈다. 붉은 토양 같은 바닥의 벌레 표현은 보는 이에게는 이름 모를 빨간 꽃들의 향연 같다. 생명이 꿈틀대는 듯 화면을 지배한다. 숲을 체험하면서 보고 겪었던 풍경을 상상하며, 몸과 마음에 담아 두었던 내면의 여러 감정을 끌어올려 즉흥 환상곡처럼 그려냈다. 


홍일화의 그림은 직접 몸과 마음의 체험을 바탕으로 그린 그림이기에 그만큼 실재감이 크다. 제주의 숲을 그린 2년의 작업량은 생성과 성장을 거듭하는 숲의 자연 생리에 보조를 맞춘 느낌이다. 인물화를 그리던 작법이나 초기 숲 그림을 그릴 때 사진을 바탕으로 숲의 사실 표현에 집중했던 기법과 달리 밑그림 없이 마음에 담긴 감정이 붓끝으로 뿜어져 나오는 대로 표현했다. 내재한 감정을 즉흥적으로 표현하면서 추상성이 강해졌다. 이는 <S. angulatus P.E 0423>, <S. angulatus P.E 0524>, <S. angulatus P.E 0528> 등의 작품에서 드러난다. 각각의 작품은 서로 뒤섞여 있어도 어색하지 않을 만큼 곶자왈의 생태와 비슷하다. 어떤 특정한 형태로 획일화되지 않은 그 자체로 자유롭고 무한정 뻗어 나갈 수 있는 가시덤불(가시박)의 특성이 잘 표현되었다. 세 작품은 가시박으로 둘러쌓인 곶자왈을 표현한 그림으로 다른 숲 그림에 비해 유난히 추상성이 강하다. <S. angulatus P.E 0528>은 마치 액션페인팅처럼 즉흥적 필치와 직관에 따른 본능적인 표현이 돋보인다. 이 같은 표현은 가시박이란 덩굴의 특성과 관련 있다. 사실 가시박 덩굴은 북아메리카 원산의 1년생 귀화식물인 덩굴로 작물과 식물을 덮어 광합성을 못하게 만들어 고사시키는 생태교란종으로 지정된 식물이다. 가시덩굴은 잡초처럼 항상 인간으로부터 천대받고 제거되어야 할 대상으로 간주되었다. 하지만 홍일화는 자연생태의 질서를 무너뜨리는 교란식물의 생태적 특성을 부정적으로만 보지 않았다. 오히려 쉽게 죽지 않는 강한 번식력으로 버티며 스스로 생존경쟁에서 살아남은 가시덩굴의 생존본능에 끌렸다. 그는 비호감인 가시덩굴의 적자생존(適者生存)에 주목하고, 척박한 환경에 적응하며 살아남은 강한 생명력을 오히려 아름답게 표현했다. 그리고 이러한 자연생태를 제주 숲 곶자왈의 특징으로 삼아 표현했다. 이는 그의 소설에서도 드러난다.

바람은 나무들의 요청을 기꺼이 받아들였고 유연하면서 얇고 질기고 눈에 잘 보이지 않는 넝쿨 씨앗들을 땅에 마구마구 뿌려 주었다. 나무들이 최대한 많이 가져다 달라고 했기 때문이다. 가시박, 돼지풀, 꺼끄랭이풀, 애기수영, 양미역취, 털불참새피, 물참새리, 도깨비가지들은 엄청나게 빠른 속도로 성장해갔고 나무들에 기대어 하늘로 하늘로 계속 올라갔다. 이 중에 제일 으뜸은 가시박이었다. 가을이 되면 흰 가시로 뒤덮인 별사탕 모양의 열매가 1그루다 2만 5천개 이상 달려있기 때문이다. 이 별사탕은 정말 좋은 무기였다. 
-가시덤불 중에서-

추상성은 <Epine P.E 0324>, <Epine P.E 0623>, <Epine P.E 0628> 등과 같은 작품에서도 확인된다. 빠른 번식력의 가시덩굴이 나무와 식물을 덮어 형태를 구분하기 어렵게 만든 자연생태를 직관적으로 표현했다. 가시덤불에 덮인 곶자왈 자연생태는 비정형이다. 이런 비정형의 곶자왈 숲은 사실적으로 표현할수록 추상성에 가까워진다. 

애초에 곶자왈 숲은 완벽한 사실적 묘사가 불가능한 대상이다. 곶자왈은 쉼 없는 생태적 변화를 겪기 때문이다. 그가 사진을 바탕으로 한 재현 대신 내면의 감정에 충실한 즉흥 표현방식으로 전환한 것은 자연스러운 변화이다. 지금 표현하는 모든 숲은 영원히 지속할 수 없다는 진실에서 출발한다. 실제 홍일화는 작품마다 ‘하루살이 풍경, 임시풍경, 찰나의 순간’이란 뜻의 ‘P.E(Paysage Éphémères)’을 표기하여 그림 속 풍경은 현실에서 그가 잠시 마주한 임시풍경임을 인지시키고 있다. 제목의 표기처럼 찰나의 순간에 본 자연은 모두 임시풍경에 지나지 않는다. 결국 자연은 변한다. 그러나 자연 변화의 과정에는 아름다운 절정의 순간이 있다. 홍일화는 그러한 찰나의 순간을 그린 임시풍경을 통해 곶자왈 숲의 아름다운 상생과 공생의 자연을 기록하고 있다.

홍일화가 소설과 그림을 통해 말하고 싶은 숲 이야기는 언급한 대작시리즈에서 충분히 인지되지만, 가시덩굴이나 가시를 집중해서 표현한 소품들에서 좀더 구체적으로 드러난다. 그의 소품들을 처음 접하면 화려한 색과 특이한 형태를 지닌 이름 없는 꽃으로 여기기 쉽다. <Epine P.E 0103>, <Epine P.E 0110>, <Epine P.E 0213>, <Epine P.E 0226>, <Epine P.E 0621>, <Epine P.E 0917>, <Epine P.E 0918> 등의 연작을 보면 종류만큼 색도, 모양도 각기 다른 특징을 지녔다. 연작시리즈는 작품제작 날짜만 다를 뿐, 계절마다 그가 마주했던 가시덩굴의 진면목들이다. 하나씩 자세히 보면 헤아릴 수 없는 솜털 같은 작은 가시들이 꽃과 줄기를 감싸며 화면 가득 차지하고 있다. 온몸을 감싸듯 돋아난 가시는 자신을 지키기 위한 보호 장치이다. 홍일화는 가시덩굴 연작을 통해 가시들의 존재를 불꽃 향연처럼 화려한 색채로 표현하여 그 자체로 충분히 아름답다는 것을 보여준다. 개별적으로 보면 모두가 아름다운 존재이다. 날카롭고 뾰족하게 돋친 가시 부분을 걷어내고 덩굴의 아름다운 모습을 발견할 수 있다. 이는 우리가 세상을 바라보는 편견을 버릴 때 진실에 다가갈 수 있음을 의미한다. 홍일화의 ‘Epine’ 시리즈는 숨겨진 가시의 면면을 들여다볼 수 있는 가시덩굴의 포트폴리오인 셈이다. 

3. 곶자왈의 자연섭리-공생과 상생

인간의 눈에 침묵의 숲으로 다가올 뿐, 숲에서는 매일매일 전쟁이 벌어지고 있다. 나무와 풀이 자신의 영역을 지키려는 거친 싸움을 전개하고 있기 때문이다. 식생이 안정적으로 갖추어진 숲에서는 일종의 휴전협정이 맺어져 있다. 비교적 안정적 조건에서 서로의 자리를 인정하며(차마 서로의 영역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는 상황이리라!) 숲의 공동체를 이끌어나가고 있다. 
-펠릭스(Felix R.Paturi),《숲》

숲은 인간이 헤아릴 수 없는 다양하고 수많은 생명체가 끝없는 공존과 공생을 이루어내는 공간이다. 숲에서의 공존공생은 인간과 자연, 동물과 식물, 식물과 식물 간의 끊임없는 생존 전쟁에서 살아남은 결과이다. 홍일화는 우리에게 숲은 무한한 자연생명이 어우러져 공존과 공생을 넘어 상생하는 곳임을 일깨워준다. 그는 곶자왈의 생태계를 ‘좋고 나쁨’이나 ‘옳고 그름’의 판단이 아닌 ‘유무상생(有無相生)’의 자연운행 원리로 곶자왈의 생태계가 유지되는 자연섭리 그대로 바라보기를 원한다. 
제주의 많은 곶자왈은 수많은 식생이 생존을 놓고 싸우는 전쟁터지만, 동시에 각자의 방식으로 살아남아 숲의 공동체를 이루는 평화의 장소이다. 그렇게 숲은 각기 다른 형태와 모습으로 공존공생한다. 이러한 자연섭리가 유지되는 곳이 제주의 숲-곶자왈이다. 그런데 곶자왈의 자연섭리는 치열한 삶의 정글에서 살아남아야 하는 인간 세상과 닮았다. 이 점에서 《가시숲》과 《가시덤불》은 화가로서 자신의 삶이 투영된 대상이기도 하다. 직접 곶자왈을 체험하고, 글을 쓰고, 매년 개인 도록까지 제작하는 등 작가로서 자신의 작품세계를 구축하는 데 부단한 노력을 기울이는 과정이 마치 곶자왈에서 스스로 생존력을 키우는 식생들의 모습과 오버랩된다. 

‘적자생존(適者生存), 상생상극(相生相剋), 공존공생(共存共生)’으로 이뤄진 곶자왈은 그 자체가 하나의 자연질서를 담은 숲이다. 화가 홍일화는 그러한 숲의 생태를 그리며 자신도 동화되었다. 그리고 오랜 세월 동안 숲을 파헤쳤던 인간의 그릇된 행태를 꾸짖고, 인간이 남긴 깊은 상처를 대신하여 자연을 달래고 위로하는 마음도 더해 제주의 숲을 캔버스에 옮겼다. 그의 숲 그림은 있는 그대로 모든 것을 포용하는 자연생태를 닮아가고 있다. 홍일화에게 숲은 어떤 존재 의미인지, 그리고 숲을 바라보는 시선은 무엇인지 「자연결핍증」이란 작가 노트에서 집약적으로 확인된다.

모든 생명체에는 존재의 이유가 있다. 심지어 썩어버린 고목에게도 살아있는 초목에 양분을 제공하기 위한 존재가치가 있다. 하지만 환경보호를 위해 꽃꽂이하듯 눈에 보기좋은 것만 수집하고 그 외의 것들을 쓰레기 취급하며 불태우고 버리는 숲의 조경은 자연생태계를 파괴하는 일과 마찬가지이다. 
-「자연결핍증」중에서-

 “나무와 숲은 저마다의 생태계를 이루고 살아갈 능력이 충분하므로 지켜보기만 하면 된다”라는 홍일화가 인용한 페터볼레벤의 말처럼 숲은 있는 그대로 아름다운 존재이다. 그 존재가 얼마만큼 성장하고 어떻게 변화하는지 지켜보는 관심만으로도 의미 있다. 이 점에서 홍일화의 숲 그림은 자연의 생존 가치를 되짚어보며 무엇이 가치 있는 삶인지를 되돌아보게 하는 시각적 거울이다.

어떤 것도 홀로는 아름답지 못하다. 자연도 하나의 생명체로만 아름다움을 유지할 수 없다. 나무, 곤충, 돌, 덩굴 등 자연을 이루는 모든 요소가 함께 공존할 때 아름답다. 자연은 상생을 위해 공존한다. 진정한 아름다움은 전체 속에서 빛난다. 화폭에 담긴 숲이 미적 가치를 발현할 때는 화면 속의 자연 요소들이 유기적 관계성을 드러낼 때이다. 홍일화의 작품은 제주의 숲-곶자왈의 공생과 상생에 대한 이야기를 통해 이러한 관계성을 드러낸다. 

화가의 숲은 말한다. 함께하면 외롭거나 힘들지 않다고. 힘들고, 외로운 사람은 자신을 찾아오라고. 화가의 숲은 모든 것을 포용하고, 위로하고, 함께 나눌 수 있는 공동체의 공간임을 기억하게 한다. 궁극에 2020년부터 지속해온 홍일화의 화가의 숲은 그가 20여 년간 표현대상으로 삼았던 인간과 맥락적으로 닿아있다. 자연은 인간과 공존공생하며 살아가는 가장 가까운 친구이자, 보호자이다. 홍일화의 ‘화가의 숲’은 공생을 넘어 상생의 의미를 품은 숲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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