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효천 엄재권의 민화 40년 화업, 자연-생명의 아름다운 순리를 따르고, 나누다

변종필



효천 엄재권의 민화 40년 화업
자연-생명의 아름다운 순리를 따르고, 나누다 



민화작가 효천(曉泉) 엄재권은 한국 현대민화를 대표하는 화가이자, 민화계의 발전에 중추적 역할을 해온 작가이다. 1980년부터 민화를 시작한 이래 올해로 41년을 맞이한 엄재권 작가가 2001년 첫 개인전을 가졌던 동일한 장소(인사아트센터)에서 20년 만에 다시 개인전을 갖는다. 스승 송규대 화백의 문화에서 20여 년 만에 독립하여 가졌던 첫 개인전의 시점으로 회귀하듯 이번 전시는 엄재권 작가 개인에게는 매우 뜻깊은 전시이다. 무엇보다 이번 전시는 2001년 개인전 당시 관람객으로 전시장을 찾았던 사람들이 주축이 되어 만들어진 엄재권 작가 문하생 모임인 효문회(曉門會)가 주최·주관을 맡아 진행한 점이 특별하다. 오랜 시간 지속한 스승과 제자의 관계가 스승의 회갑과 더불어 40년의 화업을 축하하는 전시로 이어진 것은 의미를 둘만 하다. 

이번 전시는 1980~2021년까지의 작품을 기준으로 크게 4기로 나누어 각각 해당하는 대표 작품들을 선보인다. 엄재권이 성취한 40년의 화업을 한 눈에 되돌아볼 수 있도록 한 의도로 읽힌다. 그러나 사실상 엄재권 작가의 시기별 분류 기준은 명확히 제시하기 쉽지 않다. 이는 이번 전시에 출품된(도록 수록 작품기준) 작품들은 장르와 주제는 물론 작품성과 완성도에서 특별한 등차를 두기 어렵기 때문이다. 굳이 시기별 분류를 한다면, 2014년 기점으로 1980~2013년과 2014~2021년으로 양분할 수 있을 듯 하다. 이는 조형적 변화에 따른 분류로 전통 민화의 계승이라 할 만큼 기법과 채색 등에서 기본적 조형을 탐미했던 전반기와 전통 민화의 변화와 발전에 따라 자신의 조형세계를 구축하며, ‘전통과 현대의 융합을 통한 현대민화의 새로운 시도와 가능성을 모색하는 후반기로 구분할 수 있다. 엄재권의 40년 화업은 한국 민화사(미술사)적으로 한국 현대 민화의 발전과 변화의 궤를 함께 한 역사이기도 하다. 따라서 엄재권의 작품세계를 시기별 구분에 따라 살펴보는 것도 의미 있지만, 본 글은 화제(주제)별로 나타난 조형적 특징과 엄재권 작가의 작품세계와 관련하여 모작과 창작의 경계와 의미에 초점을 두고 살펴보았다. 


엄재권 작가의 작품세계는 ‘화조도, 일월오봉도, 십장생도, 문자도, 책가도, 호작도, 평생도’ 등 민화의 핵심 장르와 주제가 주를 이룬다. 기실 민화는 무병장수, 부귀영화, 백년해로 등 인간의 기본욕망을 담는 세계인만큼 특정한 소재에 국한하지 않고, 민화의 단골 화제를 작품화했다는 것은 민화계의 보편적 표현방식과 크게 다르지 않다. 다만, 일반적으로 주로 다루는 주제와 소재 때문에 ‘00화가라’는 별칭으로 불리는 작가들에 견주어 엄재권은 한두 가지로 국한할 수 없는 민화의 넓고 다양한 주제와 소재를 두루 탐미해왔음을 알 수 있다. 수십 년간 한두 가지 소재를 집중적으로 다루어 표현할 경우 그 표현소재에 관한 전문가적 깊이와 숙련된 기능은 쌓이겠지만, 상대적으로 폭넓은 민화세계 전반을 심층적으로 이해하는 수준에는 이르지 못하는 한계에 부딪히기도 한다. 민화세계를 이루는 온갖 소재를 자신만의 조형언어로 품격을 유지하면서 누구나와 공감할 수 있는 내러티브를 이어가는 일이 쉽지 않기 때문이다.
  

엄재권의 40년 민화 화업에서 주목할만 성취는 뛰어난 묘사와 아름다운 채색을 지닌 조형성이다. 이러한 조형적 특징이 부각되는 소재는 동물과 식물, 좀더 세분화하면 꽃과 곤충, 꽃과 새, 꽃과 동물을 주제로 삼은 작품에서 나타난다. 전시 작품 중 1992년<화접도>를 시작으로 <화훼도>(1999년), <연화도>(2000년), <화조도>(2000년), <연화도>(2013년), <동하군봉초충화조도>(2014년), <화조도>(2020년) 등의 주요 작품에서 작가의 매우 뛰어난 사실적 표현을 마주할 수 있다. 디테일만 놓고 보면 극사실화로 손색없을 만큼 정교한 묘사의 기예를 볼 수 있다. 무릇 거칠고 호방한 터치의 거침보다 작품을 대하는 관람객 한 사람 한 사람의 마음을 조심스레 어루만지는 부드럽고 섬세한 필치가 압권이다. 유난히 세밀하고, 정교한 표현을 구사하는 그의 화필을 통해 민화에 내재된 상징성과 내러티브에 어울리는 장식성(색채)이 조화를 이루며 아름다운 조형세계를 이뤄내고 있다. 색채는 밝고 화려한 색을 주로 사용했는데 이는 각박하고 어려운 시대와는 역설적으로 행복을 꿈꾸며, 소원하는 바를 희망적으로 표현한 전통 민화의 조형성에 기반한 선택이라고 생각한다. 


엄재권은 한 인터뷰에서 민화에 심취한 민화만의 매력을 ‘빙그레 웃는 마음'이라 했다. 자연스럽게 미소를 머금게 하는 그림으로 무엇보다 민화가 길상의 의미를 지녔고, 행복의 메시지 전달이 쉽고 친절한 것을 민화만의 매력으로 꼽았다. 실재 그의 민화를 보면 미소를 머금게 하는 작품들이 많고, 행복한 메시지를 전하는 그림들이 많다. 예를 들어 ‘호랑이’를 소재로 한 그림들로 예로부터 호작도에 담았던 민화가들의 메시지를 충분히 함유하면서도 자신만의 유머와 위트가 넘치는 화면구성으로 보는 이를 미소 짓게 만드는 조형성을 지녔다. 

까치호랑이와 더불어 그가 즐겨 그리는 또 다른 소재와 주제로 ‘매화’와 ‘십장생도’도 중요하다. ‘매화’는 고향에서 마주했던 고귀함에 빠진 이후 각별히 여기는 소재이고, ‘십장생도’는 젊은 시절 문화재 복원 일을 하면서 다작하게 된 주제로 작가에는 특별하다. 

십장생도(또는 백록도) 등과 같은 작품을 보고 있노라면, 그림을 그릴 때 화가는 어떤 마음이었을지 궁금해진다. 어쩌면, 신선 같은 마음은 아니었을까? ‘하루라도 마음이 맑고 한가로우면 하루 동안 신선이 된 것이다’(一日淸閑一日仙) 말처럼. 십장생도 대작을 그림 속에 앉아 그림을 그리고 있는 옛 사진을 보면 적어도 그림을 그리는 동안만큼은 그림 속에 자신이 있고, 자신이 유토피아를 그리며, 그림과 동화되어 행복에 흠뻑 취했을 것 같다. 그래서인지 그의 작품이 품고 있는 초현실적 세상은 각박한 현대사회를 벗어나 한번쯤 유람하고 싶은 마음이 들게 한다.(이상세계를 그린 대작들의 작품을 한 전시장의 사방에 배치한 공간 속에 서 있는 모습을 상상해보면, 그 자체가 현실을 초월한 세상을 유람하는 느낌을 줄 것 같다.) 

1999년 작품 <화훼도>에 개나리(3-4월), 진달래(3-4월), 산벚꽃(4월), 금낭화(5월~6월), 치자나무(6-7월), 월계화(5월), 해당화(5월-7월), 백목련(4-5월), 원추리(5-6월) 등 개화의 시기가 다른 마흔 가지의 꽃들을 한 화면에 표현한 것처럼 현실에서는 마주할 수 없는 세계를 담고 있는 것이 민화이다. 계절을 초월한 꽃을 동시에 감상하고 싶었던 바람처럼 민화는 대부분 현실을 뛰어넘는 초월성을 지녔다. 이것이 민화의 특징이며, 다른 주제(예: 연화도, 십장생도, 백록도 등)에서도 공통으로 드러나는 민화의 초현실성이다. 엄재권의 민화 역시 시공간을 뛰어넘는 초현실적 세계를 담은 전통민화를 표본으로 삼아 아름다운 이상세계 표현에 노력했다. 


한편, 엄재권의 40년 민화세계를 보면 모작과 임작이 많은 비중을 차지한다. 본 글에서는 굳이 민화의 정의나 전통민화와 창작민화의 특성에 관한 논쟁은 생략하지만, 옛 민화를 모본으로 모작하는 부분과 창조의 관계성은 언급하지 않을 수 없다. 모작과 창작은 엄재권 작가의 작품세계와 직접적으로 관련 있기 때문이다.

예술사에서 모방과 창조는 불가분의 관계다. 모방과 창조는 그 경계가 모호한 경우가 많지만, 한 가지 불변은 ‘모방은 창조의 근원’이다. 고미술품을 보면 모작, 방작, 임작은 회화에서 매우 흔한 것이었다. 실재 시대를 대표하는 특정한 작품은 시대를 초월하여 임모의 대상이 되어왔다. 예컨대 엄재권의 작품 중 2012년에 오원 장승업의 홍백매의 매료되어 매화를 다시 그리고, 그것을 화제로 밝힌 <매화>라는 작품처럼 작가에게 명작은 흠모의 대상을 넘어 모사를 통해 그 깊이와 감정을 느껴보고 싶은 표현적 욕구가 발동하기 마련이다. 임모작이 ‘옛것을 익히고 그것을 미루어서 새것을 앎’(溫故知新)을 강조한 것처럼 모작, 임모, 방작은 작가의 창작의 과정에서 필수적인 표현 방식이었다. 그러나 간과해서는 않될 부분이 작가가 모방에만 머물고, 자신의 창작품을 만들어내지 못한 경우이다. 진정한 작가라면, 모방을 통해 옛것의 아름다움을 뛰어넘는 새로운 작품을 창출해야 한다. 이는 창작자의 사명이자 숙명이다. 일반사람에게는 특별한 의미가 없던 대상이 작가를 통해 의미의 대상으로 바뀔 때 작가가 선택하고 시도한 표현들은 새로운 상징이자, 소통 기호로써 작동하기 시작한다. 이러한 시도를 일관성 있게 유지하는 작가의 작품세계는 언제나 흥미롭고 유의미하다. 이 점에서 이번 전시작품 중 <향수(사슴의 사랑, 즐거운 호랑이)>, <까치와 드론>, <벗과 함께>, < 新십장생도>, <여전히 행복한 동행>, <드론과 초대장>, <그리움 A>, <벗Ⅰ> 등 처럼 조형적으로 색다른 작품들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거론한 작품들은 이른바 민화계에서 회자되는 ‘창작민화(적절한 용어는 아니지만)’로 분류될 정도로 기존의 작품들과 견주어 확연한 차이를 지녔다. 심지어 동일 작가의 작품인지 의구심을 가질 정도로 독창적이다. 그러나 이 작품들을 유심히 보면 오방색을 근간으로 한 채색, 간결하고 위트 있는 화면구성, 시대성을 반영한 소재의 도입, 누구나 쉽게 이해할 수 있는 함축적인 상징성 등 작품의 근원이 전통민화에 있으며, 기존작품과 맥락적으로 다르지 않음을 알 수 있다. 오히려 전통민화에 뿌리를 두면서 동시대의 미감을 가미한 조형성으로 자신만의 현대성을 획득하려는 시도가 보인다. <벗과 함께>, <벗Ⅰ> 의 작품은 분명 독창성이 짙은 그림이다. 2021년 작인 <벗Ⅰ>은 엄재권 작가의 자화상(호랑이)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민화를 사랑하고 관심 있는 모든 이를 벗 삼아 ‘빙그레 웃는 마음'을 나눌 수 있는 유쾌한 삶을 지향하는 민화가의 꿈이 엿보인다. 

전통민화가 시대정감을 대변했듯이 창작민화 또한 오늘날 현대인의 삶과 연결 지어 과거와 현재, 미래가 융합된 민화가 등장하는 것은 긍정적이다. 다만, 전통민화가 지닌 정통성과 작품성의 미적가치만큼 창작민화 역시 대중들과 소통하는 새로운 내러티브와 상징이미지로 이해와 설득이 가능한 작품이어야 한다. 이 부분은 한국 민화의 발전을 위해 작가이자 행정가로 중추적인 역할을 해온 엄재권 작가의 선도적 해결 할 과제라 여겨진다. 

이상 살펴본 대로 엄재권의 작품은 ‘자연과 생명의 아름다운 순리(順理)를 담은 생태성’, ‘민화의 다양한 상징성과 내러티브’, ‘상상의 세계에서만 가능한 초현실성’, ‘뛰어난 묘사력과 색채감각이 돋보이는 회화성’, ‘전통성에 독자적 조형미를 가미한 현대성’ 등 민화의 기본 조형적 특징 위에 자신만의 민화풍을 시도한 근작까지 40년의 화업을 집약적으로 살펴보기에 충분하다. 무엇보다 민화가 시대의 산물로 대중들의 삶과 생각을 진솔하게 표현한 대표 예술이라는 것을 견지하며 민화의 예술과 정신을 40년 동안 따르고, 나누고자 했던 작가의지를 들여다 볼 수 있는 기회로써 이번 전시는 각별하다.  

디지털시대로 불리는 현대사회에 여전히 아날로그(회화) 방식을 통해 인간의 정신을 고양시키는 예술가의 행위는 그 자체로 고유한 가치와 미적 의미가 있다. 코로나19로 전 세계가 유례없는 혼돈과 두려움에 휩싸이며, 타인과의 관계나 사회적 유대를 지칭하는 수많은 개념들이 흔들리는 위기의 상황에서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희망과 긍정의 힘을 잃지 않는 것이다. 궁극에 ‘생활경험’과 ‘가상경험’이 융합된 비교불가한 한국 전통 민화 독자성이 길상적 내러티브를 통해 행복과 희망을 안겨줄 것으로 믿었던 바람처럼 옛 사람들의 심화(心畫)를 계승하고 발전시키는데 심혈을 기울여 온 엄재권의 40년 민화세계는 많은 사람이 공유하며 나눌 만한 미적가치가 충분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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