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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유림의 ‘내면의 잠재된 흔적을 통한 자아 회복’

변종필

최유림의 내면의 잠재된 흔적을 통한 자아 회복

 

모든 화가가 예술의 성취와 사회적 성공을 창작활동의 목적으로 삼지는 않는다. 화가에 따라 무의식에 자리 잡은 내적 트라우마를 작품으로 표출하면서 자신을 치유하기도 한다. 탁월한 조형 감각과 철학적 사유를 내재한 작품을 예술의 가치대상으로 거론하는 것이 일반적이지만, 자기 작품을 이해하는 사람들과 느낌의 공동체를 형성하고, 작은 그림 한 점으로 삶의 가치를 회복하는 기회로 삼기도 한다.

흔히 화가들은 자신의 작품을 작가의 내면 표출’, ‘내적 자기반성 혹은 성찰’, ‘정신 사유의 표출등의 수사를 빌어 표현한다. 이러한 표현은 다분히 추상적이며 진부하게 들리지만, 여전히 많은 화가에 의해서 사용되고 있다. 젊은 작가 최유림도 다르지 않다. <름다운 흔적, 나를 만나다>라는 타이틀로 개인전을 갖는 최유림의 작품은 한마디로 내면의 잠재된 흔적을 통한 자아 회복으로 수사할 수 있다. 이번 전시는 2020 제주문화예술지원사업예술창작활동지원에 선정되어 갖는 개인전으로 존재의 고유성과 시간의 필연성을 작품으로 표현하고, 치유와 회복을 위한 위로와 격려를 해주고 싶다는 작가의 기획 의도가 명확한 전시이다. 그러나 엄밀하게 보면 오랜 공백을 깨고 새롭게 시작한 창작활동으로 자기 삶과 작품세계를 냉정하게 돌아보는 자아 성찰적 전시이다.

최유림의 작업은 우연한 행위가 남긴 흔적-얼룩에서 어떤 이미지를 연상하고, 상상력을 발휘해 디자인적 감각으로 조형화하는 작업이 주를 이룬다. 그의 작품을 상징과 인상으로 구분하면 다분히 인상적 회화에 가깝다. 뜻을 강조한 상징적 그림보다는 직관적 느낌이 강한 그림이다. 느낌을 중시하는 인상적 회화는 특정 상황이나 호응 관계에 따라 새로운 의미가 생성될 가능성이 높다. 그만큼 우연성과 가변성이 크게 작용한다.

그의 작품은 여백의 활용이 큰 편이다. 여백을 작품의 일부분으로 구성한다. 이는 그가 주재료로 사용한 먹과 잉크의 효과를 극대화하는 기법과도 연결된다. 먹은 형태를 결정짓고, 면과 면을 구분하거나 잇는 등 선적 표현에 효과적으로 사용한다. 잉크는 면과 면을 채우거나 겹쳐 커다란 흔적을 만들거나 형태를 이루는 효과를 낸다. 이러한 표면효과로 최유림의 작품은 동양화의 여백과 스며듦의 조형적 특징을 지녔다.

 

최유림은 현재까지의 작업량이나 작품활동 이력으로 미루어 자신만의 뚜렷한 조형 언어를 구축했다고 말하기는 어렵다. 삶에서 숱하게 경험한 우연과 필연의 관계성을 그림으로 표출하는 데 집중하고 있지만, 아직 미완의 단계(non-finito)이다. 하지만 그가 직관적으로 표출하고 있는 세계는 충분히 흥미롭다. 그의 작품은 표현기법상 선적 표현이 주를 이루는 드로잉적이며, 판화와 같은 인상을 준다. 작은 화면에서 이루어지는 번짐의 우연 효과를 선으로 연결하여 다양한 크기와 형태의 면으로 구축해가는 조형 탐구가 핵심이다. ‘Trace the traces’라는 작품명처럼 우연에 따른 흔적을 추적한다. 천위에 떨어뜨린 잉크의 우연적 번짐이 만들어낸 얼룩에서 특정한 이미지가 떠오르면 먹선으로 그 형상을 구체화 시킨다. 작가는 이 순간 무의식의 발현을 내면의 표출이라 말한다. 결국자신의 본성을 자극한 내면의 표출(얼룩)을 필연적 이미지로 형상화하는 작업이다.

 

최유림 작품의 얼룩과 흔적들은 노자가 말한 모양이 없는 모양이며, 구체적인 사물이 없는 상”(無狀之狀, 無物之象)(老子,14) 가깝다. 특정한 모양이 없지만, 상상되는 모양이 그려지고, 구체적인 사물은 없지만 연상되는 상이 있다. 대지를 덮은 꽃이기도 하고, 물고기, 나무, 얼굴, 혹은 자연의 일부를 클로즈업한 느낌도 있다. 최근작 역시 유사한 맥락이다. 리좀처럼 줄기와 뿌리가 무한 증식하는 땅속줄기 식물로 보이는 형상, 수많은 선과 면이 서로 연결되어 아름다운 내면의 꽃으로 피어나는 듯한 구성 등이 시선을 끈다. 결국에는 내면의 잠재된 무의식의 실타래가 화면에서 서로 선으로 연결되고, 우연히 형성된 추상에서 의미 있는 형상 찾기를 반복하며 얻은 회화적 인상이다. 최유림은 번지고, 얼룩져 남은 흔적들에서 우연의 본질, 즉 자신의 본질을 찾는 직관적 드로잉의 행위를 이어가고 있다.

최근 작품 중 내러티브를 가미하여 자신의 내면세계를 한층 직접적으로 드러낸 바다 풍경 작품들도 주목할 만하다. 사실 바다는 수많은 화가가 주제로 표현해온 만큼 낯익은 표현 대상이다. 획일화된 감성의 표현에 머물거나 신선한 독창적 조형 언어가 보이지 않을 경우 진부한 표현이 되기 쉽다. 바다와 파란색이 매우 매혹적인 주제이면서도 대중의 마음을 크게 얻지 못하는 이유이다.

그렇다면, 최유림의 바다는 어떨까? 우선, 최유림의 바다가 사실적 재현의 대상이 아니라는 것은 쉽게 인지된다. 그림 속 바다는 작가의 내면세계의 상징이다. 암청색은 깊은 바닷속을 떠오르게 하며, 동시에 작가의 마음 상태를 암시한다. 현재 자신이 사는 세상이며, 때때로 벗어나고 싶은 세상이다. 거대한 암석이 겹겹이 쌓인 듯한 심연은 작가의 내면 상태를 말해준다. 바다를 단순히 시각적 아름다움의 대상이 아닌 현재 자신의 심리와 현실적 상황의 암시로 표현했다. 망망대해에 위태롭게 떠 있는 작은 어선은 분명 불안하지만, 동시에 희망을 포기하지 않은(어쩌면 포기하고 싶지 않은) 작가의 마음을 대변한다. 배 안의 작은 불빛이나 어두운 밤하늘에 떠 있는 작은 달이 희망을 품고 있다.

 

예술은 늘 의미와 무의미의 경계 짓기를 반복한다. 의미 체계의 안과 밖은 작가의 창작과정에서 모호하다가도 타자에 의해 그 경계가 결정되기도 한다. 완성과 미완성의 경계 또한 일차적으로 작가의 몫이지만, 의미의 완성은 결국 타자와 공감대가 형성될 때 이루어진다.

최유림은 <름다운 흔적, 나를 만나다> 전시를 통해 잊고 지낸 꿈과 희망을 다시 찾는 항해를 시작했다. 쉽지 않은 항해지만, 오히려 왜 그림을 그려야 하는지는 과거보다 훨씬 뚜렷해진 듯 보인다. 전시를 준비하면서 내면에 잠재된 작가적 욕망이 깨어났다고 말하며, “나를 발견하여 자기다운 삶을 자신에게 선물하겠다라는 다짐을 한 최유림. 그는 지금 한층 자유롭고, 당당한 자신감으로 오롯이 작가로서 새로운 출발점에 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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