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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달래의 바람드로잉 퍼포먼스 ‘바람의 협주곡’

변종필

배달래의 바람드로잉 퍼포먼스

바람의 협주곡

 

바람은 그 자체로 추상이다. 눈에 보이지도 손에 잡히지도 않는다. 그러나 우리 모두는 바람의 존재를 안다. 상황에 따라서는 바람의 마음 또는 감정까지 느끼기도 한다. 그 마음과 감정이 바람의 것인지, 사람의 것인지는 분간하기 어렵다. 화가들은 보통 바람이 생명체나 사물에 부딪혀 생겨나는 변화를 통해 바람을 표현한다. 이때 화가들은 관찰자의 시점을 갖는다.

그런데 배달래는 다르다. 바람을 관찰하기보다는 바람과 동화한다. 그리고 바람의 이야기를 행위로 옮긴다. 그는 화폭이나 동작, 붓이나 물감을 바람의 이야기를 전하는 도구로 삼는다. 그런 배달래가 제주에 왔다. 제주 바람의 이야기를 듣고 전하기 위해. 제주 바람이 배달래에게 전한 이야기는 아물지 않는 아픈 상처에 관한 이야기다. 배달래는 퍼포먼스와 바람드로잉’, 그리고 바람의 협주곡연작으로, 특히 알뜨르 비행장 격납고, 곤을동마을, 아부오름 등 세 곳에서 펼친 액션페인팅 퍼포먼스를 통해 자신에게 전해진 제주의 바람이야기를 들려준다.

 

1.

알뜨르 비행장의 격납고에서 시작한 첫 퍼포먼‘Where are we going?’은 제주 퍼포먼스 프로젝트의 시작을 알리는 의식 같다. 한 마리 하얀 새를 연상케 하는 퍼포머가 서서히 날갯짓하며 아픔의 땅을 떠나지 못하는 영혼을 달래듯 제의적 몸짓을 펼친다. 격렬한 붓질로 시작한 행위는 물감을 뿌리고, 흘리는 행위로 이어진다. 광목천에 뿌려진 물감을 손으로 섞고, 문지르고, 비비는 행위 반복으로 역사의 아픈 상처를 어루만진다. 검푸른 색 위로 붉은 물감은 마음 깊이 응어리졌던 한을 토해내듯 양손 가득 넘치고, 어느 순간 손끝의 붉은 물감이 꽃잎처럼 흩어지며 검게 변해버린 죽은 땅에 생혈이 돌게 한다. 견고한 격납고 안에서 시작한 기운을 바람에 실어 녹색 들판을 지나, 푸른 바다와 하늘이 맞닿은 곳으로 보내며 우리가 가야 할 곳을 묻는다.

잃어버린 마을 곤을동역시 제주 4.3의 아픈 상처를 간직한 장소이다. 곤을동은 늘 물이 고여 있는() 마을()’이라는 의미를 갖고 있다. 그러나 4.3 당시 이유도 영문도 모른 채 토벌대에 의해서 30여 명이 학살되고 70여 채의 집들이 전소된 후 지금까지 복원되지 않은 채 잃어버린 마을이 되었다. 누구도 기억하고 싶지 않은 땅이 되어버린 그곳은 울타리 돌담 등 집터의 흔적만 당시의 아픈 역사를 기억하고 있을 뿐이다. 제주의 숱한 아픔은 자연의 아름다움에 가려 비극의 세월이 감춰졌을 뿐 조금만 들춰도 아픈 뿌리는 여전하다. 제주 4·3은 제주인의 마음에 깊은 상흔으로 남아 여전히 치유되지 않은 채 소환되는 우리의 역사이다. 집터만 남은 곳에서 배달래는 다시 한번 영혼을 달래는 제의적 행위를 펼친다. 동백꽃을 하나둘씩 놓으며 억울한 희생의 한()을 달랜다.

두 번의 퍼포먼스가 제주 비극사의 희생자를 위로하고 영혼을 달래는 제의적 행위였다면, ‘Wind of life’ 퍼포먼스는 새로운 삶의 바람을 기원하는 희망의 메시지를 담고 있다.

아부오름은 위에서 내려다보면 여성의 자궁처럼 분화구가 숲을 둥글게 감싸고 있는 형상이다. 배달래는 그 모습에서 생명의 잉태를 보았다. 이어 생명의 탄생은 새 역사의 시작으로 삶의 환희임을 몸으로 표현했다. 궁극에 배달래의 퍼포먼스는 제주 4.3의 아픈 역사의 땅에서 죽은 자의 영혼을 달래고, 살아남은 자의 슬픔을 감싸고, 제주의 땅에 새롭게 탄생하는 모든 생명에 희망을 주는 삶의 바람을 기원하는 춤의 제의였다.

강렬한 퍼포먼스에 이은 바람일기연작 역시 제주의 아픔과 희망이 담긴 제주 곳곳의 이야기를 바람의 소리와 향기로 드로잉한 퍼포먼스다. 비교적 이동이 편한 10호 크기의 캔버스에 퍼포먼스를 펼친 장소는 물론 곶자왈, 마을, 오름 등 여러 곳에서 느낀 제주 바람의 감정을 즉흥적으로 60여 화폭에 담았다. 손으로 감정을 표현하여 바람을 마주한 순간의 느낌들이 촉각적으로 전해진다. 매서운 겨울바람 끝이 여전히 살을 파고드는 날씨 속에서 굽어진 손에 입김을 불어대며 표현한 흔적들이 보인다. 어떤 드로잉은 신과 흥으로 가득하고, 또 어떤 드로잉에서는 흐느낌과 아픔이 느껴진다. 그렇게 바람일기에는 제주 곳곳의 바람과 마주하며 몸과 마음으로 전해진 제주의 이야기가 일기처럼 기록되어 있다. 캔버스에 담긴 제주 바람은 날씨, 장소, 시간에 따라 제주가 품은 자연의 다채로움과 변화무쌍함을 보여준다. 수십 점에 기록된 제주의 모습을 한 눈으로 대할 때면 제주 그 자체가 거대한 자연임을, 아픈 역사조차 제주가 품은 자연의 역사 안에 있었음을 깨닫게 된다.

 

2.

제주의 바람드로잉은 제주를 떠난 후 아틀리에에서 작업한 바람의 협주곡연작을 통해서 완성된다. 제주에서 몸과 마음으로 느꼈던 모든 감정을 작업실로 옮겨와 회화로 표현했다. 제주에서의 감정을 기억하는 몸과 손끝에서 표출되는 느낌을 대형 캔버스에 또 한 번의 퍼포먼스로 분출했다. 다분히 표현주의적이다. 바람의 협주곡은 액션페인팅 퍼포먼스와 바람일기에 비해 제주에서 느꼈던 촉각, 향기, 생각 등 내면에 내재된 작가만의 감정을 객관적 대상의 회화로 표현하기에 훨씬 자유롭다. 그만큼 지적 작용이 더해지기 때문이다. 바람의 협주곡이 액션페인팅 퍼포먼스나 바람일기와는 결이 다른 지점이다. 표면의 물감층, 즉 두께와 결이 확연히 드러나고, 손의 자국, 몸짓은 물론 물감의 흘림 정도 등 화면에 표현된 모든 행위의 흔적에서 시간과 환경에 구애받지 않은 표현의 자유로움이 감지된다. 몸과 손은 여전히 제주의 바람을 기억하기만, 가슴으로 온전히 받아들이지 못했던 여러 감정을 바람협주곡에 한껏 쏟아냈다. 제주에서 마주하고, 느꼈던 바람의 모든 감정(제주의 모든 아픔)을 다양한 색과 선으로 할퀴고, 긋고, 때론 휘몰아치는 듯 표현했다. 바람이 품은 온갖 향기는 물론 생명의 탄생과 죽음까지 건드렸다. 동시에 제주의 자연이 역사의 아픔을 달래고 감싸 안은 것처럼 그는 바람협주곡을 통해 슬픔을 위로하고 상처를 어루만지며 새 생명의 탄생을 기원하는 염원도 잊지 않았다. 바람협주곡 연작은 이 같은 작가의 내밀성이 총체적으로 집약된 작품이다.

작가는 작품을 통해 자신을 발견한다. 모두가 삶을 통해 자신의 존재가치를 알아가듯 예술가는 예술을 통해 자신의 존재가치를 자각한다. 배달래 작가는 제주프로젝트를 통해 광목천에 남겨진 흔적을 작업실에 재설치하고, 그 흔적을 보면서 자신의 행위 결과를 돌아봤다. 형태는 없지만, 거칠고, 때론 부드러운 바람결이 자신이 온몸으로 펼쳤던 광목천에 고스란히 남아있음을 확인한다. 그리고 행위의 복기를 통해 자신의 예술적 행위를 자각한다. 사실상 배달래 의 제주프로젝트에 대한 객관적 평가가 이뤄지는 지점이다.

퍼포먼스의 결과물 중 잃어버린 마을 곤을동삶의 바람설치에 가미한 의도적 구성은 결과물에 대한 2차 해석이다. 처음 광목천에 표현한 작품을 그대로 설치하지 않고, 구기고, 겹치고, 포개는 방식으로 입체감을 부여했다. 애초의 평면들이 서로 밀착되어, 색과 이미지의 밀도와 회화적 설치작품으로서 완성도를 높여주는 효과를 낸다. 부분 입체감을 통해 4.3의 아픈 상처의 흔적을 부각시키거나 단색조의 뭉침으로 아부오름을 생명력의 발화점으로 강조하려는 시도가 엿보인다. 평면회화에 머물렀던 작품에 제주에서 퍼포먼스를 하면서 느꼈던 감정을 이입하여 제주의 상흔을 좀더 입체적으로 보여주려는 의도로 읽힌다.

궁극에 배달래가 제주프로젝트를 통해 성취한 결과물들은 그동안 타인의 고통과 슬픔에 대한 주제로 인간 삶의 가치 찾기를 지속해온 이력들과 같은 갈래에 있음을 보여준다.

 

3.

작가는 누구나 자신만의 예술적 특성을 내세우며 차별화를 시도한다. 배달래의 작가로서의 차별성은 탁월한 신체성, 배우적 기질(연극배우 같은 분위기)에서 뿜어내는 연극성, 그리고 회화전공자로서 지닌 표현확장성을 꼽을 수 있다. 내면의 감정 표출이 좀 더 직접적으로 전해지는 퍼포먼스의 매력에 이끌린 시간(13)은 작가 배달래가 행위예술분야에서 자신의 목소리와 퍼포머로서 역량을 발휘하는 바탕이 되었다. 무엇보다 예술가로서의 정신적 성장과 다양한 매체를 활용한 표현력을 확장했다.

이번 배달래의 제주 바람드로잉 프로젝트는 그 완성도나 작품성에서 기존의 회화작품과 굳이 견줄 필요가 없다. 그의 회화와 퍼포먼스를 결합한 창작활동은 회화와 퍼포먼스 둘 중 어디에 방점을 두느냐에 따라 그 해석과 가치가 달라지기 때문이다. 예컨대 회화 자체만 떼어놓고 보면 추상표현주의적 경향으로 사실상 특별한 독자성을 피력하기 어렵다. 퍼포먼스 또한 마찬가지이다. 퍼포먼스 자체만으로 한국 행위미술사의 한 지점을 차지하기에는 유사한 프레임의 반복성이 짙다. 보다 극적인 설득력과 표현방식의 차별화가 필요하다. 말보다 몸으로 보여주는 행위가 그 어떤 설명보다 명료할 때가 있다.

결국, 배달래의 예술세계는 지금 그가 추구하는 방식, 즉 회화와 퍼포먼스를 결합한 형식으로 자신만의 프로세스아트를 얼마나 논리적인 체계로 구축해 가느냐에 달렸다. 우연성, 신체성, 장소성은 퍼포먼스의 변함없는 특성이지만, 기획성, 지속성, 일관성은 퍼포머 개인의 몫이다. 이번 제주프로젝트가 하나의 프로세스아트로 기록되는 방식부터 소통되고 소장되는 전 과정에 대한 고민이 필요한 이유이다. 제주프로젝트를 기획하고, 제주에 입도하여 특정장소의 선택, 퍼포먼스와 회화, 매일 같이 드로잉으로 남긴 작품들, 작업실로 돌아와 전시를 구성하고 프로젝트 완성을 위한 2차 행위(음악, 영상과 사진촬영 등 퍼포먼스의 완성도를 결정짓는 요소들)까지. 모든 것이 그의 예술 행위에서 중요한 프로세스아트로 기록될 수 있다. 예술가의 성공과 실패의 판단기준은 작가와 미술계의 시선에 따라 다르지만, 기왕에 회화와 퍼포먼스 결합이라는 예술방식을 놓고 볼 때 배달래식 프로세스아트의 성공 여부는 작가신념과 체계적 향후 활동에 따라 명확해질 것이다.

 

어느 시인이 말했다. “몸이 닿아 느끼는 모든 감각이 곧 세상이다라고. 몸은 퍼포머에게 모든 행위의 감각과 사유의 시작과 끝이다. 액션페인팅 퍼포머 배달래가 제주의 자연에서 마주한 바람은 그가 온몸의 감각세포로 받아들인 자연의 숨결이며, 소리며, 색이다. 그리고 그 바람은 제주의 아픈 역사를 달래는 손길이다. 제주의 바람이 전해준 모든 감정을 프로세스아트로 표현한 배달래의 바람의 협주곡이 울리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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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의 협주곡은 로버트 모리스가 죤 케이지에게 보낸 퍼포먼스 계획서에서 따온 이름이다. 배달래는 모리스가 죤 케이지에게 자신의 회화에서의 표현적인 의도나 자신의 자의적인 의사 결정의 과정을 제거할 수 없음을 암시하며 우연성, 시간성, 신체성을 강조한 작업과정을 설명한 것을 차용하여, 자신의 퍼포먼스 역시 모리스가 강조한 세 가지 특성과 맞닿아 있다고 부연했다. 작가의 말대로 배달래의 바람의 협주곡은 우연성, 시간성, 신체성이란 공통된 특성을 갖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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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가, 행위예술가로 불리는 배달래 작가에 대해 이번 글에서는 액션페인팅 퍼포머란 단어를 차용했다. 제주프로젝트는 현장에서 이뤄진 회화와 퍼포먼스가 결합된 프로젝트와 10호 드로잉연작, 그리고 장흥에서 표현한 바람의 협주곡까지 모든 행위가 큰 틀에서 액션페인팅에 포함된다고 해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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