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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중섭_우발적 마주침, 그리고 앵프라맹스라는 주제를 통해 살펴본 그의 회화세계(下)_최석태『이중섭 평전』

윤지수

이중섭_우발적 마주침, 그리고 앵프라맹스라는 주제를 통해 살펴본 그의 회화세계(下) 

 

2. 이중섭의 우발적 마주침, 조선신미술가협회朝鮮新美術家協會


다음으로 이중섭의 작품세계에 큰 영향을 준 만남은 조선신미술가협회다. 조선신미술가협회는 1940년대에 유일하게 존재했던 조선인 미술가 단체이다. 1940년대 전반, 일제는 전쟁을 준비하면서 조선에 전시통제를 실시한다. 조선인의 민족성 말살을 위해 힘썼으며 강제 징용을 위한 계획을 수립하였다1). 이와 같은 분위기 아래 일제는 미술계를 활용하여 전시체제를 더욱 확고히 한다. 극렬 친일 미술가였던 김은호金殷鎬(1892~1979)를 포함하여 지성열池成烈(1909~?), 심형구沈亨求(1908~1962)와 같은 친일 미술가들은 침략전쟁 참여를 독려하는 작품을 제작한다. 1941년 2월에는 일본인 미술가와 조선인 친일 미술가가 모여 전쟁을 독려하는 단체인 조선미술가협회朝鮮美術家協會가 결성되었다. 이렇게 당시의 사회 분위기 속 모든 미술 활동은 전시체제에 부응하는 것이었다. 이에 반하는 활동은 거의 불가능하였다.
  1941년 1월, 이쾌대李快大(1913~1965)의 주동으로 민족미술을 펼치는 단체인 조선신미술가협회가 조직된다. 당시 소속되어있던 회원으로는 김종찬金宗燦(연대미상), 김학준金學俊(1911~?), 문학수文學洙(1916~1988), 이중섭, 진환陳瓛(1913~1951) 등이 있다. 협회의 활동 방향과 방법에 대해서는 미술이론가이자 사화가인 이여성李如星(1901~?)이 깊게 관여하였다. 그리고 협회의 회원 모두 조선에선 유일하게 조선 미술사를 공부하고 미술사학자의 길을 걸었던 고유섭高裕燮(1905~1944)으로부터 영향을 받아 그림의 민족성과 정체성을 확립하였다. 



조선신미술가협회는 ‘조선의 민족적인 미감을 어떻게 살려낼 것인가?’라는 단 하나의 질문에서 시작된 단체다. 이 질문에 올바른 답을 내리기 위하여 회원들은 자신만의 노력을 기울였다. 회원들은 이여성의 지도와 고유섭의 정신적 가르침 아래 민족색을 구현해 나갔다.

 

이여성과 고유섭에 관하여
이여성과 고유섭은 우리 미술에 대해 깊은 고민을 한 당대의 지식인들이다. 이들의 성찰과 방향성을 양분삼아 협회의 회원들은 우리의 색채를 띤 작품세계를 확립해 나간다.
이여성과 고유섭은 “우리 미술의 특징은 무엇이며 또 앞으로 살려가지 않으면 안 될 점은 무엇인가?”라는 질문에 대해 다음과 같이 대답하였다. 우리미술에 대한 그들의 열정과 고민이 아래 대답에 고스란히 드러난다. 

 

 

이여성과 고유섭에 대해 살펴보려고 한다. 이여성은 민족 운동가이자 학자였다. 또한 그는 화가로서 활동하였다. 1923년에는 대구미술전람회에 유화를 출품했고 1933년부터 1935년까지 서화협회전書畵協會展에 작품을 출품했다. 그는 30년대 후반에 역사화를 그리기 시작하여 사화가史畵家라는 직함을 얻었다. 이외에도 그는 미술에 관한 글을 다수 쓰기도 했다2). 그가 저술한 책에는『조선복식고朝鮮服飾考』(1947),『조선미술사개요』(1955),『조선건축미술의 연구』(1955)등 다수가 있다3).


 

이여성의 화풍을 알려주는 작품으로「격구도」가 있다. 그는 역사에서 사라진 중요 무예인 격구를 형상화시켜 작품을 통해 재현하였다. 민족문화 창달을 목적으로 작품을 제작했다는 것에 그 의의가 있다. 그는 이 작품을 그리기 위하여『어정무예통지御定武藝通誌』,『용비어천가』,『경국대전』을 고증하였으며 구도를 잡기 위하여 이왕직 아악부雅樂部 뒤뜰에 있던 옛 태복사太僕司의 신당벽화를 참조하는 등의 노력을 하였다. 작품에는 투시원근법이 사용되었고 말과 사람이 입체적으로 표현되었다4).
  고유섭은 1925년 경성제국대학에서 조선인 최초로 조선 미술사를 전공했다. 1924년부터 1927년까지 독일의 베를린 대학에서 유학한 다나까와 동경제국대학에서 동양미술사를 연구한 우에노에게 수학하였다. 미학에 직접적으로 관련된 그의 저술로는「예술적 활동의 본질과 의의」(1930),「미학의 사적 개관」(1932),「미학 개론」이 있다5). 대학 졸업 후 그는 조교로서 연구를 계속했으며 1933년 개성박물관장에 임명되었다6).

      
이쾌대, 문학수, 최재덕과 이중섭의 작품세계


이중섭은 조선신미술가협회에서 활동하면서부터 작품에 민족색을 온전히 구현해낼 수 있었다. 그와 함께 활동했던 회원들 중에서도 특히 그의 회화세계에 영향을 준 화가들이 있다. 이쾌대, 문학수, 최재덕이 바로 이들이다. 그래서 이들에 대해 살펴보려고 한다. 더불어 이중섭의 작품에서 드러나는 세 작가의 영향을 이야기하려 한다.  

 

이쾌대
이쾌대는 조선신미술가협회의 주도자였다. 그는 경성의 휘문고등학교에 입학하여 도화교사인 유화가 장발張勃(1901~2001)에게 지도를 받았다. 결혼 후 일본으로 건너가 제국미술학교에서 유학을 했으며 입학 후에는 한국미술학생 단체인 백우회白牛會에 가담한다. 1938년에 그는 일본의 반관전 재야단체인 이과전二科展에 출품하여 25회에는 <운명>, 27회에는 <그네>작품이 입선하였다7). 그는 1941년 결성한 신미술가협회에서 가장 활발한 활동을 하였다8).

 

문학수
문학수는 이중섭과 동년배다. 그러나 오산학교에서부터 분카까지 이중섭보다 많은 것을 앞서 체험하고 실험했으며 이중섭에게 많은 영향을 끼쳤다. 그는 이중섭과 더불어 지유텐에서 촉망받는 신예였다. 분카가쿠잉을 다니던 1937년에 그는 자유미술가협회自由美術家協會에 제1회부터 작품을 출품하기 시작했다. 2회 때는 협회상을 받았으며 6회전 이후 회원으로 추대되었다. 협회의 회원으로 추대된 것은 조선인으로서 드문 일이었다9). 그는 문예계에서도 주목을 받았으며『문장』지에 작업 유래에 관한 글을 적어 발표하기도 했다10).

 

최재덕
최재덕崔載德(1916~?)은 경성의 보성고등보통학교를 거쳐 도쿄의 다이헤이요미술학교를 졸업했다. 그는 1936년에 조선미술전람회에 입선한 후 니카텐에서도 입선한 적이 있다. 그는 이중섭과 매우 친밀한 관계였던 것으로 알려진다. 그는 8.15해방 직후 서울의 미도파백화점 지하벽에 이중섭과 공동으로 벽화작업을 했으며 이중섭처럼 한글 서명을 애호했다.

  이중섭과 함께 같은 단체에서 활동했던 이쾌대, 문학수, 최재덕이 이중섭에게 어떤 영향을 주었는지는 다음을 통해 알 수 있다.

 



1)이중섭 작품의 선과 표현기법

 




나는 이중섭의 작품을 통해 조선신미술가협회가 이중섭에게 어떠한 영향을 주었는지 살펴보려고  한다. 먼저 선과 표현기법에 대한 이쾌대의 영향을 알아보고자 한다. 이쾌대의 「부인도」와「두루마리를 입은 자화상」에는 윤곽선이 도드라진다. 그리고 양감이 느껴지지 않는데 이는 조선의 초상화법과 일치한다. 또 한 가지 더 주목해서 보아야 하는 것은 인물의 표정이다. 그는 우리가 인물의 생각을 읽을 수 있게끔 주인공을 그렸다. 인물의 성격묘사에 신경을 쓴 것이다. 이는 우리 전통의 초상화에서 중요하게 드러나는 특징이다.「부인도」에서 주인공은 굳게 다문 입을 하고 시선을 정면으로부터 피하고 있다. 우리는 그녀가 어떠한 근심에 잠겨있음을 알 수 있다. 그리고 그녀의 굳게 다문 입과 한곳으로 모은 손을 통해 그녀가 결심에 차있음을 읽을 수 있다.「두루마리를 입은 자화상」에서 인물은 도도하리만큼 당당하게 정면을 응시한다. 입은 굳게 다물고 있어 의지에 찬 자화상적인 모습을 보여준다. 한 손에는 서양의 팔레트를 들고 있고 다른 한 손에는 동양의 모필을 들고 있다. 그리고 중절모에 두루마리를 입고 있다11). 우리는 그의 표정과 그가 입은 옷, 그가 들고 있는 미술재료를 통해 어떤 강한 메시지를 읽을 수 있다. 서양화를 한국 회화로써 실현시키겠다는 메시지를. 그의 강한 의지가 작품으로부터 드러난다.
  이쾌대가 동양의 초상화에서 차용하여 사용한 선과 기법은 이중섭에게 영향을 끼쳤다. 이중섭은 이쾌대처럼 전통적인 선을 구사하였다.「야수를 탄 여자」에는 구륵법鉤勒法이 보인다. 구륵법은 동양의 전통회화에서 사용된 기법 중 하나로 대상의 윤곽선을 선묘로 마무리 한 뒤에 그 내면을 선명한 채색으로 메우는 기법이다. 그는 선으로 대상을 그린 후 나머지 배경만을 파란색 잉크로 메워 작품을 완성시켰다. 그리고「부부2」에서는 강렬한 필선에 의한 역동성이 드러난다. 우리는 그가 동양의 모필을 사용하여 특유의 획을 구성했음을 알 수 있다. 그는 작품의 바탕에 안료를 칠한 후 적당히 말랐을 때 나이프를 이용하여 긁어냈다. 이 바탕 위에 그려진 닭은 아주 간단한 선만으로 표현되었다. 마치 하나의 필선으로 대상을 마무리하는 문인화가 연상된다12). 

 

2) 이중섭 작품에서의 소




 

다음으로, 소와 말이라는 소재의 사용에 대한 문학수의 영향을 살펴보려고 한다. 문학수는 말과 소에 대한 애착이 남달랐다. 그가 말에게 각별한 애정이 생긴 까닭에는 두 가지 추측이 있다. 어렸을 때 부모님께 말을 선물 받고 생겼을 것이라는 추측과 문화학원을 다닐 때부터 좋아했던 들라크루아로부터 영향을 받아 생겼을 것이라는 추측이 그것이다. 그는 자유미술가협회전에 동물과 사람이 어우러지는 양식을 한 다수의 작품을 출품했다. 그 중 한 작품이「춘향단죄지도」다. 이 작품은 춘향전으로부터 주제를 가져왔으나 한국적인 미감을 구현하고 있지는 않다. 동물과 소의 배치는 샤갈의 화풍을 띠고 있어 환상적인 느낌을 준다. 그리고 현재는 흑백사진으로만 남아있어 원작에 대해 확실히 말할 수는 없으나 색채나 분위기가 프랑스의 바르비종파 화가인 밀레의 작품과 가까웠다는 증언이 있다13).     
  이중섭이 소와 말이라는 소재에 몰두하게 된 것은 문학수의 영향이 크다. 소 그림은 그가 오산학교에 재학하던 시절부터 그렸다. 그러나 더욱 집중적으로 그리게 된 것은 조선신미술가협회에서 활동하면서부터이다. 소는 민족적 정서에 가장 어울리는 소재이다. 순박하고 착하며 어질고 부지런한 대상으로써 우리 민족과 함께 한 동물이기 때문이다. 그는 소에 우리 민족을 대입시켰다. 또한 그는 소에 자신을 동일시하기도 했다. 전쟁 이전에 그는 소를 민족적 상징체로 여겼다. 그러나 전쟁 이후 피난시절을 겪으면서 성실하고 선하지만 결국 희생의 대상이 되는 소에 점차 자신을 대입하게 된다.

 

3) 이중섭 작품에서 한국적 미감의 구현

 




마지막으로,「소, 비둘기, 게」를 통해 한국적 미감을 구현하는 것에 대한 최재덕의 영향을 알 수 있다. 최재덕의「뜰」에 대해 유화가 김만형은 이조백자의 구수하고 소박한 건질미를 느낄 수 있다고 평하였다. 그리고 여백의 미가 보이는 화면구성이 다른 작가의 작품과는 다른 특징이라고 평한다14). 작품의 촉각적인 화면 처리는 화강암처럼 거칠게 바탕처리를 한 박수근의 작품을 연상시키기도 한다.
  최재덕과 이중섭은 아주 친한 관계였다고 한다. 둘은 광복 이후에 서울 미도파 백화점에서 함께 벽화작업을 했다. 그리고 둘 다 한글 서명을 애호하는 작가였다. 우리는 이중섭이 최재덕의 영향을 받아 한국적인 미감을 구현하는 것의 중요성을 느꼈으리라 예상할 수 있다. 그래서 그는 작품에 우리의 색채를 더하기 위해 더욱 정진했을 것이다.「소, 비둘기, 게」에는 우리 미술의 특성이 드러난다. 이중섭은 밑바탕에 유화물감을 바른 후 연필로 선을 마무리한다. 회색, 황토색의 바탕은 분청사기의 색감를 떠올리게 한다. 바탕색 위에 더해진 연필선은 우리 도자기를 장식한 음각기법을 연상시킨다. 작품에는 소와 비둘기, 그리고 게가 등장한다. 소재와 내용적인 면에서 이 작품은 익살스러움을 선사한다. 소와 비둘기 게라는 동물들이 한 곳에서 만난다는 것은 우리의 상식을 벗어난다. 따라서 신선함을 준다. 그리고 덩치가 훨씬 큰 소가 게에게 혼쭐이 난다는 내용은 재치와 통쾌감을 준다. 이 작품에는 이중섭이 평소 즐겨 모으던 우리 골동품의 해학미와 그의 타고난 낙천성이 고스란히 담겨있다15).

 

조선신미술가협회 그리고 이중섭의 앵프라맹스
우리는 위에서 조선신미술가협회에서 이중섭이 받은 영향을 살펴보았다. 이와 더불어 앵프라맹스를 살피려고 한다.

 

1)고구려 고분벽화로부터 파생된 애니미즘과 도교적 사상


이중섭 회화의 바탕을 이루고 있는 사상은 애니미즘과 도교적 유토피아관이다. 그는 사람과 동물이 자연에서 함께 노니는 장면을 대표적인 모티브로 설정하여 많은 작품을 남긴다.「야수를 탄 여자」와「소와 여인」도 이러한 모티브로 탄생했다. 그런데 이러한 애니미즘 사상과 도교관은 고구려 후기 고분벽화로부터 기원한다. 고구려의 후기 고분벽화에는 청룡, 백호, 주작, 현무 등의 사신이 등장한다. 이 시기는 고구려의 보장왕寶藏王(재위 642~668년)이 재위하던 시기로 . 도교가 적극 권장되었다고 한다. 때문에 벽화에도 도교적 사상이 돋보임을 알 수 있다16).「현무도」에서 현무를 타고 노니는 신선의 모습이나「수렵도」에서 말을 타고 사냥을 하는 모습은 당시 고구려인들의 사상과 그들이 바라는 이상적인 삶을 담고 있다.
  「부부2」는 소재와 선묘의 사용에서「양수지조」와 매우 비슷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둘 다 새가 사용되었고 선의 필치가 역동적이며 율동미를 갖춘다.「양수지조」는 덕흥리 벽화고분 전실의 천정에 그려져 태양을 상징하는 역할을 한다17). 따라서 우리는 이중섭이 작품을 제작함에 있어서 소재에 상징성을 담았을 것이라고 유추할 수 있다.

 

2) 민화로부터 파생된 해학미






우리 민족은 예로부터 고달픈 현실을 극복하기 위하여 해학성을 발휘해왔다. 이러한 기질은 민화에서 드러난다. 김홍도가 그린「송화맹호도」와 위의 민화에는 모두 호랑이가 등장한다. 그러나 다른 주제와 느낌을 띤다.「송화맹호도」에서 김홍도는 호랑이의 털 한 올 한 올을 정성껏 묘사했다. 단 한 가닥의 털도 흐트러짐이 없다. 또한 호랑이의 네 발과 꼬리에는 그의 강한 힘이 느껴진다. 두 눈에는 상대를 제압하는 강한 기운이 담겨있다. 「송화맹호도」에서의 호랑이는 위엄이 느껴지는 맹수이다. 그러나 민화의 호랑이는 해학미가 넘친다. 우스꽝스러운 표정과 움츠린 자세를 한 호랑이는 위엄이 있지 않다. 오히려 치졸함과 소박함이 느껴진다18). 이중섭은 민족적 정서로써 해학미를 작품에 구현한다. 해학미가 잘 느껴지는 작품이「소, 비둘기, 게」다. 작품 속 소는 자신보다 덩치가 훨씬 작은 게에게 물려 어쩔 줄 몰라 한다. 소의 놀란 눈과 정신없이 휘두르는 꼬리는 게에게 완전히 항복했음을 시사한다. 이중섭은 이 작품으로부터 우리에게 통쾌감과 함께 큰 웃음을 선사한다. 더불어 보는 우리로 하여금 감정을 이입하게 한다. 그래서 우리는 작품을 감상하는 행위로부터 불만이나 반발심을 해결하게 된다.

 

이중섭이라는 이름의 구축


지금까지는 배반의 순간들이 그녀를 들뜨게 했고, 그녀 앞에 새로운 길을 열어 주고, 그 끝에는 여전히 또 다른 배반의 모험이 펼쳐지는 즐거움을 그녀의 가슴에 가득 채워 조곤 했다. 그러나 여행이 끝나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 부모, 남편, 사랑, 조국까지 배신할 수 있지만 더 이상 부모도 남편도 사랑도 조국도 없을 때 배반할 만한 그 무엇이 남아 있을까? 사비나는 그녀를 둘러싼 공허를 느꼈다.

그리고 바로 이 공허가 그녀가 벌인 모든 배신의 목표였다면?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 中

 

우리는 외적인 것으로 자신을 정의 내린다. 이름, 나이, 하는 일 따위로 말이다. 그러나 때때로 정의내리는 과정에서 우리는 배반의 충동을 느낀다. 이러한 요소들은 나를 설명할 수 없다고 말이다. 그런데 우리는 우리가 딛고 있는 환경, 그리고 우리의 이름과 나이를 완전히 배신할 수 없다. 왜냐하면 배신은 또 다른 배신을 야기하며 B를 위하여 A와 배신하고 또 다시 B를 배신했다고 하여 A와 화해를 할 수 있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렇게 끊임없는 배신의 끝은 무이며 공허이다. 존재를 존재할 수 있게 해주는 환경이 없다면 존재는 존재를 정의하지 못하고 끊임없이 방황하게 된다. 또한 존재가 받쳐주는 이 견고함을 뿌리친다면 존재가 존재하는 것은 무의미하다. 따라서 우리는 우리가 존재하는 환경과 우리의 만남들을 결코 배신할 수 없다. 그래서 들뢰즈는 우리가 딛고 있는 세계와 우발적인 마주침들의 결과물을 우리의 존재라고 말한 것이다. 그런데 들뢰즈가 말한 이 존재는 완벽한 결과물이 아니다. 그 이외에 파생된 것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필자는 이것을 앵프라맹스라 칭했다.
  이중섭은 그에게 다가온 우발적 마주침들을 소화했다. 그리고 그 사이에 파생된 것들이 더해져 그의 작품세계는 이중섭이라는 이름 세 글자로 구축되었다. 자신의 세계를 구축하는 것은 엄청난 일이다. 이것은 마치 퍼즐을 맞춰 그림을 완성하는 것과 같다. 그런데 일반적인 퍼즐 맞추기와는 다르다. 퍼즐을 맞추는 과정에서 퍼즐의 모양이 계속해서 변화하고 또 기존에 없던 퍼즐이 추가되고 퍼즐과 퍼즐이 만나는 순간 또 다른 조각이 탄생한다. 현실에서는 존재하지 않는 퍼즐 맞추기를 하는 것이다. 한 존재가 생을 다할 때까지 퍼즐 맞추기를 통해 그림을 완성한다는 것은 자신을 온전히 소모했다는 것이다. 이는 몹시 고통스러운 과정이 아닐 수 없다. 이중섭은 이 고통을 감내해냈다. 그래서 그는 지금까지 주목을 받는 것이 아닐까. 
     
 

 

주석) 

1)  김용철, 「일제의 침략전쟁에 협력한 미술가들」,『한국미술 100년 ❶』p.372참조, (주)도서출판 한길사, 2006년
2) 최석태, 「이중섭 평전」, pp.112~136참조, 돌베개, 2000년
3) 이중희, 「민족주의 화가 이여성, 이쾌대 형제의 예술」,『한국학논집 제51집(2013.6). pp. 219~260』, p.224참조, 계명대학교한국학연구원, 2013년
4) 각주 3) pp.229~230참조
5) 목수현, 「한국 고미술 연구에 나타난 고유섭의 예술관 고찰」pp.11~12참조, 서울대학교 대학원 미학전공 석사논문, 1990년
6) 각주 2) pp.136~137참조
7) 각주 3) pp.232~233참조
8) 각주 2) p.124참조
9  안혜정, 「문학수의 생애와 회화연구」, pp.36~37참조, 전남대학교 대학원, 미술학(이론)전공 석사논문, 2006년
10) 각주 2) p.125참조
11) 각주3) pp.237~238참조
12) 김선숙, 「이중섭 회화에 나타난 한국 전통미술의 특질에 관한 연구」, pp.47~53참조, 홍익대학교 교육대학원 교육학과 미술교육전공 석사논문, 2007년
13) 각주 9) pp.38~39참조
14) 각주2) p.128참조
15) 각주12) p.72참조
16) 안휘준, 「한국 회화사 연구」, pp.21~22참조, 시공사, 2000년
17) 각주 16) p.118
18)  네이버 캐스트 -위대한 문화유산 ‘민화’참조
(http://navercast.naver.com/contents.nhn?rid=92&contents_id=3088)
 

 

 

 

윤지수(yoonsart21@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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