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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국주의 정책에 따른 향토색과 몽상가들_김윤수 외 57인『한국 미술 100년 ❶ - 4. 모던에서 황민으로 1937~1945』

윤지수

『한국 미술 100년 ❶ - 4. 모던에서 황민으로 1937~1945』-김윤수 외 57인, 한길사』

 

 

제국주의 정책에 따른 향토색과 몽상가들

 

역사, 그리고 우리 삶에 자리 잡은 제국주의의 영향
역사학자 에드워드 카(Edward Hallett Carr, 1892~1982)는 그의 책에서 역사에 대해 이렇게 이야기 한다. “역사란 역사가와 사실 사이의 부단한 상호작용 과정이며, 현재와 과거 사이의 끊임없는 대화다1).” 그는 레오폴트 폰 랑케(Leopold von Ranke, 1795~1886)를 중심으로 한 기존의 사료중심의 역사관에 반박했으며 현재 역사학자의 행동을 중요시했다.
  광복 70주년을 맞이한 올해 마무리되는 강제노동자 유골귀환사업은 그가 말하는 ‘역사적’ 사건일 것이다. 그들은 70년 전, 홋카이도 지역의 노동현장에 강제로 징용되어 타국에서 쓸쓸히 죽음을 맞이한 분들이다. 유골은 1980년대부터 일본시민과 종교인에 의해 발굴되기 시작하여 1997년부터는 한일 민간 전문가들과 청년들에 의해 수습되었다. 희생자의 넋을 기리고 고향으로 돌려보내주자는 명목으로 진행된 지난 30여 년간의 노력은 <70년 만의 귀향>이라는 이름의 사업으로 구체화되었다. 그리고 올해 9월, 드디어 유골이 고국으로 귀향하고 안장됨으로써 끝을 맺는다.
  이번 사업은 일본제국주의의 역사가 아직 우리 삶에 자리하고 있음을 시사해주는 사건이 다. 또한 과거의 사건에 대해 우리가 능동적으로 행동할 때 주체적인 역사를 만들 수 있음을 알려준다. 일본 제국주의는 아직도 삶의 많은 영역에 깊이 침투해있다. 우리 미술계 또한 마찬가지이다. 이번 글에서 1937년 중일전쟁 이후 일본이 시행한 제국주의 정책이 우리 화단에 어떠한 영향을 끼쳤는지 살펴보고자 한다. 또한 이러한 강제적 상황 안에서도 올바른 방향성을 가지고 역사를 만들었던 작가들에 대해 이야기하고자 한다.

 

일본 제국주의 정책에 대하여
1937년 중일전쟁이 전면전으로 발전함에 따라 일본 내에 천황제 파시즘이 성립된다. 일본은 전쟁 수행을 위해 조선에 국민총동원체제를 구축하여 통치강도를 더욱 높인다2). 제국주의 정책을 통해 조선의 경제, 정치, 문화에 힘을 행사하기 시작한 것이다. 미술계도 그들의 정책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었다.
  일본의 제국주의는 유럽으로부터 기원한다. 18세기후반 유럽 전역에 계몽주의가 일어났고 이는 이성에 기초를 둔 자연법을 이끌었다. 또한 유물론적 인간을 만들어냈다. 계몽주의 사상 안에서 인간은 물적인 자연을 필요로 했다. 그런데 필요로 하는 자원을 자국에서 충분히 얻지 못하자 비유럽으로 향하게 된다. 서구와 마주하게 된 동아시아 국가들은 그 사이에서 그들의 위치를 설정한다. 중국의 경우 자국이 동아시아문화를 대표한다고 생각하고 중국만이 서구 문명에 대항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 일본의 경우 서구문명에 대항하기 위해 동아시아국가들이 화합을 이루어야 한다고 주창한다. 그런데 이러한 일본의 초기 아시아주의는 청일전쟁 이후 변질된다. 청일전쟁에서 승리한 일본은 아시아 내에서 중국과 권력을 다투기 시작한다. 그리고 러일전쟁 이후에는 조선을 지배하려는 야욕을 드러낸다. 급기야 일본은 자국을 서구열강과 동등한 위치에 놓으려는 목적으로 탈아시아한다3).

 

제국주의 정책에 따른 향토색의 요구
1938년 일본은 중일전쟁에서 승리한다. 그리고 그 해에 덕수궁에 이왕가미술관이 신축 개관한다. 그 다음해인 1939년에는 경복궁에 조선총독부 미술관이 신축 개관하여 조선미술전람회의 전시장으로 이용된다. 일본의 제국주의 정책은 미술을 전시체제라는 이름하에 통제했으며 국가가 원하는 정신을 조선인들에게 심기 위해 종용되었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일본은 우리 화단에 조선향토색朝鮮鄕土色이 드러난 작품을 출품할 것을 요구한다4). 1930년대에 들어 조선미전에는 향토색 계열 작품의 입선 비율이 전에 비해 증가했고 심사위원들은  조선향토색의 구현 유무를 중점으로 하여 작품을 평가한다.
  향토색은 사전적으로 ‘어떤 지방의 특유한 자연, 풍속 따위의 정취나 특색’이라는 뜻을 가진다. 그런데 일본은 이러한 맥락의 ‘향토색’을 요구한 것이 아니었다. 그들의 향토색에는 조선을 미개하게 여긴다는 의미가 담겨있다. 자신을 서양과 동급 화하던 일본은 철저히 ‘서구의 눈’으로 조선을 바라본다. 조선을 시골로 설정하여 작품에 이국적인 정취가 담길 것을 요구한다. 그들은 조선의 특색이 잘 드러난 작품을 좋은 작품이라 평하지 않았다. 단지 미개한 식민지 국가의 세련되지 못한 풍경을 보고자 했을 뿐이었다. 


 

 

조선색, 반도색, 지방색이라 불렸던 향토색은 주로 조선 여성이나, 아이들, 목가적인 시골 풍경으로 표현되었다. 또한 기생의 이미지는 식민지 조선의 여성 이미지를 대변하는 소재로 쓰였다. 이인성李仁星(1912~1950)의「가을의 어느 날」과 이영일李英一(1904~1984)의「시골 소녀」는 향토색을 나타내는 대표적인 작품이다.「가을의 어느 날」에는 젖가슴을 드러낸 여성과 소년의 뒤로 이국적인 풍경이 펼쳐있다. 까맣게 그을린 피부와 강렬한 배경색 이 고갱이 그린 타히티 풍경을 떠올리게 한다.「시골 소녀」에는 농촌에서 동생들을 돌보고 있는 어린 소녀의 모습이 보인다. 작품의 소재나 배경으로 보아 ‘향토색’을 드러내는 전형적인 작품이라고 이야기 할 수 있다5).  

 

신미술가협회와 향토색
이렇게 일본에 의해 ‘향토색’이 왜곡되어 사용되는 동안 화단에는 향토색을 궁구하는 움직임이 있었다. 조선신미술가협회가 대표적이다. 미술평론가이자 서양화가였던 윤희순尹喜淳 (1902~1947)은 19회 조선미전 비평에 향토색에 대해 이렇게 말한다. “향토색은 향토의 자연급 인생과 친애하고 그 속에서 생장하는 자신의 마음을 자각할 때에 스며 나오는 감정의 발로이다6).” 향토색에 대해 이렇게 정의내린 그녀는 신미술가협회의 집단 성격을 ‘미술의 향토화’로 파악했다. 아래 글에서 조선신미술가협회의 회원이었던 이쾌대, 문학수, 이중섭, 진환의 그림을 통해 그들이 추구하였던 향토색에 대해 살펴보려고 한다.
 
1)이쾌대李快大(1913~1965)와 향토색

 


 

이쾌대는 작품에 향토적 색감을 사용하였으며 더 나아가 자신의 현대적인 해석을 통해 향토색에 세련미를 곁들였다.「부인도」와 「두루마리를 입은 자화상」에는 조선적 색감에 대한 작가의 관심이 잘 드러난다. 먼저「부인도」부터 살펴보자. 이쾌대는 미인도의 화풍을 연구하여 이 작품을 그렸다. 또한 유화를 향토화하였는데 이는 작품에서 드러나는 동양화적 필선과 향토적 색감을 통해 알 수 있다. 그는 채색을 엷게 처리하였으며 가는 선을 이용하여 동양화적 기법을 작품에 구현해냈다. 또한 저고리의 장밋빛 색과 치마의 옥빛 색을 대비하여 전통적인 복식에 현대적인 미감을 더했다. 
  「두루마리를 입은 자화상」은 이쾌대의 자의식이 잘 드러난 작품이다. 우리 조선의 이상적인 모습을 배경으로 하는데 이는 그의 이상향을 의미한다. 배경의 색감과 화가가 입은 두루마리의 색은 전통색을 띄고 있으며 절묘하게 어우러진다. 화면은 전체적으로 평면적이고 단순하게 처리되었다. 그런데 이와 대조적으로 두루마리와 손의 윤곽선이 입체적으로 처리되어 그림에 생기를 불러일으킨다.   

 

2) 문학수文學洙(1916~1988)와 향토색

 

 

문학수는 몽골말을 소재로 하여 초현실주의풍의 그림을 그렸다. 소와 말은 동양주의 미술의 소재이면서 동시에 일제 말 전쟁 상황을 드러내는 소재였다. 대게 말이 그려진 작품들은 전시미술적인 성격을 띄었다. 그러나 그의 작품은 시국미술로써의 기능을 했다기보다는 오히려 잔혹한 전쟁의 공포를 드러내는 기능을 했다.「춘향단죄지도」는 춘향이 풀려나는 순간의 장면을 각색하여 향토적인 미감을 드러낸다. 조선의 고전소설인 춘향전을 초현실주의풍의 배경을 통해 몽환적으로 풀어낸다. 그가 취한 몽환적 분위기는 샤갈(Marc Chagall, 1887~1985)로부터 영향을 받았다고 추정된다.

 

3)진환陳瓛(1913~1951)과 이중섭李仲燮(1916~1956) 그리고 향토색

 


 

진환과 이중섭은 소를 많이 그린 작가이다. 당시 소는 전쟁을 위해 목축을 장려한 일본의 정책과 맞물리면서 시국미술적인 소재로 그 의미가 변질되었다. 그러나 진환과 이중섭은 인간과 교감을 나누는 순박한 존재로 소를 묘사했다. 또한 그들은 소의 우직한 성품에 망국의 세월을 지내는 우리 민족을 대입하였다. 진환은 대게 한 작품에 가족 단위의 소를 그렸다. 「牛記」에는 엄마소와 아기소가 정을 나누는 모습이 표현되었다. 황토색의 단일 색을 사용하여 선 위주로 표현한 것이 그 특징이다. 단순하고 소박한 그림에서 우직하고 온순한 소에 대한 애정이 묻어나온다.
  진환이 가족단위의 소를 그린 것과는 달리 이중섭은 단독의 소를 그렸다. 이중섭의「흰 소」에는 소의 강인함과 공격성이 잘 표현되었다. 어두운 바탕색 위로 굵고 짧게 사용된 흰 선은 그림 속 소의 생동감을 느끼게 해준다. 소는 거친 숨을 내뱉으며 분노하는 듯 하는데 그 힘은 머리에서부터 시작하여 꼬리와 생식기로 분산된다. 그는 일제의 강압적인 통치에 대항하는 우리 민족의 모습을 투영하여 강하고 거친 소의 모습으로 표현했다7).      

 

몽상가, 역사의 마침표를 옮기는 자.

 


 

현재와 과거사이의 끊임없는 대화가 역사라면 현재와 미래의 끊임없는 대화란 몽상을 통해 꿈을 몰아가는 행위일 것이다. 그런데 역사란 또한 동시에 꿈을 이끄는 행동이다. 과거와 현재, 미래는 연속된 시간이기 때문이다. 이처럼 과거의 사건은 현재에 영향을 미치고 동시에 현재 우리의 선택과 행동은 과거에 영향을 끼친다. 미래 또한 마찬가지이다. 그래서 역사에는 늘 완성이라는 것이 없다. 최선의 선택만이 있을 뿐이다.
  그런데 이런 역사를 쓰는 자는 몽상가다. 일상의 강제적 상황에 굴복하지 않고 몽상하는 자. 자신의 생각을 따르고 옳은 선택을 하려는 자. 역사의 마침표는 이러한 몽상가에 의해 옮겨진다. 강제징용자들의 유골을 고국에 귀환하기 위해 오랜 기간 노력을 아끼지 않은 자들과 일제의 제국주의에 대항하여 우리의 향토색을 발현하기 위해 힘쓴 자들은 몽상가들이다. 그들이 옳은 선택을 통해 역사의 마침표를 옮긴 것처럼 우리도 매 순간 최선의 선택을 위해 부단히 대화해야 할 것이다. 대화하고 저항하여 생각을 이끌어나갈 때 비로소 역사의 마침표는 이동할 수 있다.
 

jisu(yoosart21@hanmail.net)


 

 

주석)

1) 에드워드 H. 카, 『역사란 무엇인가』, 까치(까치글방), 2015년 
2) 황종연, 「황국 신민으로 거듭나기」,『한국미술 100년 ❶』p.332참조, (주)도서출판 한길사, 2006년
3) 이철승, 「'동아시아 담론'과 중심주의의 문제-」,『中國學報.제52집』pp.507~516, 韓國中國學會, 2005년
4) 김현숙, 「1937~45년, 전시체제하의 미술」, 『한국미술 100년 ❶』pp.346~351참조, (주)도서출판 한길사, 2006년
5) 박석태, 「조선미술전람회를 통해 본 '향토성' 개념 연구-」,『인천학연구.제3호』pp.259~277, 인천대학교 인천학연구원, 2004년
6) 각주 4) pp.354~355 참조
7) 金鉉淑, 「新美術家協會 작가 연구-」,『한국근대미술사학. 제15집 (2005. 특별호)』pp.118~137, 한국근대미술사학회, 2005년
8) 이성복, 『불화하는 말들』p.63, 문학과 지성사, 2006-2007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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