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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근대사를 통해 보는 권력과 이미지의 관계, 그리고 현대사회에 남기는 메시지 _권행가 『이미지와 권력』

윤지수

 

우리 근대사를 통해 보는 권력과 이미지의 관계, 그리고 현대사회에 남기는 메시지

 

이미지와 권력의 관계
“이미지의 본질은 어떤 것을 보게 함이다.” 라고 하이데거Martin Heidegger(1889~1976)는 말했다. 즉, 하이데거는 이미지를 그 자체로 보이는 어떤 것이 아니라, 그것을 통해 무엇인가를 볼 수 있게 하는 작은 구멍이라고 이야기 하는 것이다. 우리는 이미지에 대한 그의 말을 통해 카메라 옵스쿠라의 구멍이나 스크린에 빛을 투사하는 영사기를 떠올리게 된다. 카메라의 구멍과 스크린의 영사기는 자신을 매개체로 사진과 영상이라는 이미지를 보여주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미지를 어떤 명사적 대상으로 정의내리기는 어려울 것이다. 왜냐하면 이미지는 본질적으로 움직임을 의미하며, 그 자체로 존재하기 보단 다른 대상과 얽혀 관계를 형성하는 특성을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그 대표적인 대상은 권력이다. 이미지는 시각적이기 때문에 주목을 필요로 한다. 따라서 주목을 필요로 하는 권력과 화합한다.1) 그리고 권력과 상생할 때 이미지의 특성은 크게 부각된다. 역사상 이미지를 활용하여 국가의 체제와 이념을 홍보한 사례는 빈번해왔다. 더 나아가 근대화가 진행되어 사진기술이 도입되면서부터는 이미지가 생산과 더불어 유통되고 소비되기 시작했다.
  그 대표적인 예가 책에 나오는 ‘러일전쟁露日戰爭 이후 한·중·일 삼국의 국가적 이미지 재고’이다. 1905년 미국의 아시아 순방단은 루즈벨트(Franklin Delano Roosevelt, 1882~1945) 대통령의 딸 엘리스 루즈벨트(Alice Roosebelt Longworth, 1858~1919)와 함께 대한제국, 일본, 청나라를 방문했다. 삼국의 황제는 엘리스에게 자신의 사진을 전했다. 사진의 이미지에는 각 군주들이 대외적으로 알리고 싶어 하는 점과 원하는 군주상이 드러난다. 우리는 사진을 통해 당시 정치적 상황 또한 읽을 수 있다.



 

1)사진 속에 고종황제는 황룡포 위에 서양식 훈장을 패용하고 있다. 이는 자신이 근대화를 수용하는 군주임을 드러내는 이미지이다.2) 또한 새로운 시각매체인 사진을 적극적으로 수용했다는 것을 이야기한다. 또한 자신의 사진을 미국 대통령 딸에게 건낸 행위는 조선의 독립을 위해 미국의 도움을 받길 원한다는 바램이 내포된 것이었다.  




2)청나라의 서태후西太后(1835~1908)의 경우, 반외세운동인 의화단 사건으로 생긴 본인의 부정적인 인상을 지우기 위해 사진을 이용했다. 사진 속 그녀는 병풍을 배경으로 전통복식을 입고 있다. 이는 청나라와 본인 스스로에 대해 정통성과 권위성을 드높이는 상징이다. 사진에는 당시 서양인들의 인식 속에 박힌 자신의 악랄한 이미지를 쇄신하고자 하는 목적과 더불어 의화단 사건을 통해 물게 된 배상금을 줄이고자 한 정치적 의도 또한 깔려있다.   




3)일본의 메이지 천황明治天皇(1852~1912)은 서구식 제복을 입고 측면을 바라보고 있다. 이는 전형적인 서양의 도상을 따름으로써 근대화된 자국을 홍보하기 위함이다. 대외적으로는 러일전쟁을 승리로 이끈 일본의 자신감을 드러내는 것인 동시에 서구 열강들과 어깨를 나란히 하겠다는 국가적 의지를 표상한다.3) 
 
근대화와 권력, 이미지의 왜곡


한 장의 사진은 보는 이에 따라 얼마나 모호하게 나타날 수 있는지를 강조한다. 한 장의 사진은 사진 찍는 사람, 찍히는 사람, 바라보는 사람의 관심이 제각기 어우러져서 때로는 모순을 빚어내기도 하는 만남의 자리이다. -존 버거, 『말하기의 다른 방법 中』

 

사진은 찍는 이, 찍히는 이, 바라보는 이의 시선이 개입되어 생성된 이미지이다. 이 세 시선은 보는 이에 따라 때로는 균형을 이루기도 하고 불균형을 이루기도 한다. 그래서 소설가이자 미술평론가인 존 버거(John Berger, 1926~)는 그의 책 『말하기의 다른 방법』에서 사진에 대해 ‘모순을 빚어내기도 하는 만남의 자리’ 라고 표현했다. 그런데 사진이라는 이미지가 생산, 유통, 소비되는 과정에서는 권력이 지속적으로 개입하게 되는데, 권력은 ‘시선의 자유’ 라는 사진의 특성을 없애버린다. 그리고 자신의 시각을 입혀 포장한다. 이 때문에 보는 이는 권력이 만든 이미지를 한 치의 의문 없이 사실로 받아들이게 되는 것이다.
  우리 근대사를 보면 근대화에 따른 권력관계, 그리고 권력에 따른 이미지의 왜곡이 드러난다. 19세기 중반 일본은 메이지유신明治維新의 성공과 함께 근대화의 길을 걷게 되었다. 그리고 조선은 1894년 청일전쟁淸日戰爭, 1895년 을미사변乙未事變 , 1896년 아관파천俄館播遷이라는 국제적인 사건 속에서 늘 약자의 위치였고 이를 타개하기 위해서는 근대화에 동참할 수밖에 없었다. 고종은 1884년 처음으로 지운영池雲英(1852~1935)과 퍼시벌 로웰(Percival Lowell, 1855~1916)에게 사진 촬영을 맡겼고 이를 외국에 전달하는 것을 승인했다. 당시에는 국제관계를 위해 왕의 사진이 국가의 표상으로 요구되었는데 고종의 사진 촬영은 이러한 요구에 동참한 행위였다. 그리고 이와 함께 적극적으로 자신이 원하는 황제상과 조선의 이미지를 사진으로 보여주고자 한다. 그러나 강자였던 일본과 서구에게는 식민지 종주국의 힘없는 왕의 모습으로 비춰질 뿐이었다. 조선은 이처럼 근대화라는 이름 아래 늘 약자로, 또한 타자로 비춰졌음에도 불구하고 그 나름대로 주체가 되어 노력했다. 그래서 필자는 앞으로의 글에서 이미지 왜곡의 대표적 예인 일본 니시키에錦絵와 만국박람회萬國博覽會에 대해 살펴보고자 한다. 그리고 이러한 상황에도 불구하고 주체적으로 이미지를 만들고자 노력한 고종에 대해 이야기하고자 한다.

 

근대화 속 강자로서의 이미지 왜곡_ 니시키에와 만국박람회


1. 니시키에
니시키에는 에도시대 확립한 우키요에 판화의 최종 형태이다.4) 19세기 후반에 우키요에는 사라졌지만 니시키에는 살아남아 글을 모르는 대중에게 정보를 전달하는 매체로서 활용되었다. 니시키에는 판화의 발행소인 한모토와 판화를 만드는 직인들의 협업으로 제작된다. 한모토가 출판할 내용을 결정하면 에시가 밑그림을 제작하고 호리시가 밑그림을 받아 조각을 한다. 그리고 조각이 완성되면 스리시가 조각된 판을 찍는다. 이렇게 많은 과정이 필요한 까닭에 니시키에는 신문과 달리 신속하지 않았다. 그리고 정확성 또한 떨어졌는데 일본 내의 여론을 반영한 저널리즘적 성격이 강하기 때문이었다. 니시키에는 일본국민들에게 조선에 대한 부정적인 여론을 형성하는데 큰 역할을 했고 조선통치를 정당화시켰다. 니시키에를 통해 조선의 이미지는 만들어졌고 점차 타자화 된 약자의 이미지로써 자리 잡게 된다.5)

 


 

임오군란壬午軍亂 관련 니시키에는 강자였던 일본에 의해 조선의 이미지가 왜곡된 대표적인 예이다. 1882년 임오군란이 발발하고 조선인과 청나라 군대에 의해 일본인들이 살해되었다는 사실이 니시키에를 통해 알려졌다. 니시키에에는 조선 군대에 맞서 싸우는 일본 공사가 영웅적인 모습으로 표현되었기 때문에 일본 내에는 조선에 대한 부정적인 여론이 들끓었다. 또한 사건의 진실과는 상관없이 조선은 중국에 예속된 약자로, 일본은 그런 조선을 중국으로부터 해방시켜야 할 문명국으로 그려졌다.    
    
2. 만국박람회
1899년 6월 휴벗 보스(Hubert vos, 1855~1935)는 고종의 유화 초상을 그렸다. 이는 대한제국기에 가장 먼저 제작된 어진이었다. 휴벗 보스를 고종에게 소개한 사람은 민영환閔泳煥(1861~1905), 민상호閔商鎬(1970~1933) 형제였다. 민영환은 1899년부터 1902년까지 고종의 어진 제작에 모두 참여한 인물로 유럽 니콜라이 2세(1868~1918)의 대관식과 영국 빅토리아 여왕 즉위 60주년 축하식에 참석하기 위해 유럽을 몇 차례 방문한 경험이 있다. 민상호는 미국 워싱턴 유학생 출신으로 민영환의 두 번째 유럽 여행에 동행하였다. 민영환과 민상호는 유럽 여행에서 역대 황제의 유화 초상을 보았고 왕의 정통성을 후대에 전달하기 위해 유화 초상이 필요함을 인식했다.6) 그래서 고종에게 당시 유명한 초상화가였던 휴벗 보스를 소개한다. 고종은 보스에게 황룡포를 입은 자신의 초상을 그리게 했으며 궁 밖으로 초상화를 유출하는 것을 허락했다. 이는 보스를 통해 조선이 파리 만국박람회에 참여하기 위함이었다. 당시에 만국박람회에 참여하는 것은 문명화된 국가임을 상징하는 행위였기 때문이었다.

 


 

고종은 자신의 초상을 통해 조선이 근대국가를 지향하고 있다는 점을 보여주려 했다. 고종이 황제의 모습을 보여주려고 했던 것과는 달리 보스는 고종을 조선인의 표준형으로써 표현했다. 보스는 인물의 지위나 신분을 의미하는 배경이나 지물을 뺐고 배경을 생략했으며 골상이 잘 드러나도록 묘사했는데 이는 사라져가는 인종을 기록하고자 한 서양인의 시각이 개입한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고종의 초상은 그가 일전에 그렸던 일본·인도네시아·자바·중국의 인종초상과 함께 만국박람회에 전시되어 서양인들의 조롱을 샀다.              

 

주체가 되기 위한 노력_고종의 이미지 만들기

1899년 대한국국제를 반포한 고종은 외세에 의해 지속적으로 황제권의 위협을 받고 있었다. 고종은 이를 타개하고자 황제권 강화 사업을 추진한다. 고종은 전통적인 방식을 통해 황실의 위상을 높이려했다. 그 일례에는 국가의례의 재정비, 황실계보의 수정, 선조들의 무덤 정비 등 다양한 것들이 있었다. 그런데 이 글에서는 ‘정통성을 갖춘 동시에 근대화를 받아들인 문명화된 군주’라는 고종이 바라던 이미지를 만드는 데에 있어 가장 중요한 역할을 했던 어진 제작 사업에 대해 이야기하려고 한다. 고종은 1900년에 왕실 진전과 어진의 재정비를 명했다. 그리고 1902년까지 공식적으로 네 차례의 어진 제작을 지시했다. 이는 태조를 포함한 전왕조의 어진묘사와 더불어 고종 자신의 어진 제작까지를 포괄하는 것이었다.7)  당시 근대 국가에서 왕의 초상을 친근한 이미지로 묘사하고 또 이를 대중적으로 유포시켰던 것과는 달리 고종은 전통적인 방식을 따라 어진을 제작하고 봉안함으로써 어진에 왕의 상징성을 부여했다. 그런데 고종은 전통성과 더불어 근대성 또한 따르고자 했다. 그는 사진의 재현성을 인식했던 군주였고 사진처럼 사실적인 어진 묘사를 원했다. 채용신蔡龍臣(1850~1941)은 이러한 고종의 뜻을 받들어 어진을 제작했다.

 

전통성과 근대성의 합일_ 채용신의 초상
채용신은 조선 말기에 어진화가로서 고종의 명을 받들어 왕의 초상을 그렸다. 그는 조선시대 전통 초상화법을 계승했고 이와 더불어 서양화법과 사진기술을 자기화하여 전통성과 근대성을 갖춘 초상화를 그렸다.

 

1. 전통화법의 계승
채용신은 기존 어진에서 사용되던 전통화법을 계승했다. 대표적으로 배채법背彩法이 있다. 배채법은 그림을 그리는 천이나 뒷면에 물감을 발라 초상화의 은은한 색 표현을 가능하도록 한 전통적인 방법이다.8)  전통적인 화법에서 배채법은 얼굴과 옷의 특징적인 부분을 살리기 위해 사용되었던 것인데 채용신은 뒷면 전체를 진채하여 강한 색채표현을 했다. 이는 입체감 있는 인물 표현을 위해 그가 의도한 방법이다.

 

2. 근대화법의 수용과 응용
채용신은 당시 국내에 유입되고 수용되었던 명암법과 원근법을 따랐던 화가 중 한명이다. 그런데 그는 빛에 근원을 두어 명암을 표현하는 서양화와는 달리 자신의 생각과 시선을 반영하여 명암처리를 했다. 그의 명암처리는 얼굴에 드러난 굴곡을 대비한 표현으로써 인물의 사실성 부각에 초점을 맞춘 것이었다. 그리고 그는 선이 아닌 면으로 명암차를 표현했으며 극세필법을 적절히 사용했는데 이는 얼굴과 몸을 사실적, 입체적으로 표현하고자 한 기법이었다. 이런 회화적 기술과 함께 그는 사진이라는 매체를 활용하여 초상화를 그렸다. 그런데 그는 사진을 단순히 모방하기 보단 초상화를 구성하는 데에 있어서 필요한 부분만을 사진에서 참조했다. 9)




책 「이미지와 권력」에 대하여
인류의 근현대사는 서양 중심적인 사고에 의해 쓰여졌다. 서구의 근대만이 전 지구화되었고 다양성이 파괴되면서 문화는 획일화되었다. 그런데 많은 이들은 아직도 이러한 근대화의 시각적 불균형과 편향을 인지하지 못한다. 또한 인지하고 있는 자라 하더라도 서구라는 권력적 강자가 무엇을 이용해서 이토록 강력한 근대사를 써나갔는지 대게는 알지 못한다. 「이미지와 권력」은 근대사에서 서구 중심적인 역사를 쓸 수 있도록 중점적인 역할을 한 ‘이미지’에 대해 인지하도록 한다. 이 책은 이처럼 근대사의 바탕에 깔려있던 편향된 시각을 인지하게 하고 평소 간과해왔던 이미지의 힘에 대해 의식하게 하는 점에서 고마운 책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필자는 아쉬운 점 또한 발견할 수 있었다.
  서구중심적인 근대화 속에서 비록 조선은 타자로써, 그리고 약자로써 비춰졌던 약소국이었으나 주체적인 이미지를 만들고자 노력했고 일본의 외압으로부터 벗어나기 위해 노력했다. 그런데 이러한 노력이 책에서 덜 부각된 점이 아쉽다. 필자는 책이 ‘이미지’와 ‘권력’에만 초점이 맞추어져있는 것은 아닌가하는 생각을 하게 된다. 당시 국제적인 권력관계 속에 조선을 비롯한 동양의 국가들은 서양이라는 강자 아래 약자로서 존재했고 따라서 어쩔 수 없이 그 이미지 또한 서양의 시각으로 만들어질 수밖에 없었다. 저자는 책에서 이러한 역사적인 흐름 속에 위치한 조선의 유약함에 대해 이야기 하고 고종의 이미지 만들기가 실패했다고 이야기 한다. 필자는 저자가 고종의 노력을 실패로 치부하기보단 고종의 노력에 더 초점을 맞추어 이야기를 풀어냈으면 좋은 글이 나왔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이미지와 권력」이 현대사회를 사는 우리에게 남기는 메시지
독일의 물리학자이자 생리학자인 헬름홀츠(Helmholtz, Hermann Von, 1821~1894)는 눈의 기술적 생리학적 분석을 통해 다음과 같은 결론을 이끌어냈다. ‘눈이란 우리가 감탄할 정도로 신뢰하고 정확한 인식을 얻어내는 감각기관의 기술적 완성이 아니다. 인상의 정확성은 광학적 전제가 아니라 인지적 전제에서 생겨난다.’ 10) 그의 말처럼 시각은 정확한 것이 아니다. 그런데 그가 신뢰할만하다고 이야기 한 ‘인지적 전제’ 또한 우리는 의심해야 한다. 우리가 사는 이 현대사회는 이미지의 필터링 없이 어떠한 대상을 직접적으로 체험할 수 있는 시대가 아니기 때문이다. 어쩌면 우리가 의심 없이 믿었던 대부분의 현상은 이미지에 의해 조작된 것일지 모른다. 그리고 그 인공의 이미지가 우리 몸에 꼭 맞도록 접착제의 역할을 한 권력에 대해서도 우리는 늘 주시해야 할 것이다.
  우리는 「이미지와 권력」을 통해 이미지가 가하는 힘과 그에 따라 발생한 근대사의 다양한 사건들을 보았다. 그리고 약소국으로써 실패할 수밖에 없었던 상황임에도 주체적으로 이미지를 만들기 위해 노력한 고종에 대해서도 살펴보았다. 우리가 사는 현대 사회는 근대보다 정보화되었고 이미지가 가하는 힘의 범위가 넓어졌다. 따라서 우리는 어떤 공간에서는 강자로 혹은 약자로 존재하며 이미지를 이용하고 있을 것이다. 강자의 위치에 있을 때는 힘없는 자에 대해서 이미지를 남용하거나 오용하지 말아야 할 것이며 약자의 위치에 있을 때는 주체적으로 자신의 이미지를 만들기 위해 노력해야 할 것이다. 이 책은 우리에게 이러한 메시지를 남겨주는 것 같다.                   



jisu(yoonsart21@hanmail.net)




<주석>

1) 조선대학교 인문학연구원 이미지연구소, 『몸 이미지 권력』, pp.84-85, 앨피, 2010년
2) 이사빈, 「근대기 초상 사진의 외교적 기능 : 스미소니언 미술관 소장 고종 초상을 중심으로」, 『국립현대미술관 연구논문 = Journal of the national museum of contemporary art, Korea. 제4집 (2012년) pp.25-34』, p.32, 국립현대미술관, 2012년
3) 각주2) pp.31-32 참조
4) 위키백과 ‘니시키에’ (https://ko.wikipedia.org/wiki/%EB%8B%88%EC%8B%9C%ED%82%A4%EC%97%90)참조
5) 권행가, 『이미지와 권력』, pp.92-99, 돌베게, 2015년
6) 각주5) pp.204-211 참조
7) 각주5) pp.145~150 참조
8) 위키피디아 '어진’ (https://ko.wikipedia.org/wiki/%EC%96%B4%EC%A7%84)참조

9) 변종필, 「채용신 초상화의 리얼리티」, 『동양예술. 제23호 (2013년 12월) pp.205-234』 PP.208-225, 한국동양예술학회, 2013년
10) 마리우스 리멜레, 베른트 슈티글러, 『보는 눈의 여덟 가지 얼굴』, pp.106-107, 글항아리, 2015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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