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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진뱀이 섬의 신화 거제민속박물관 옥미조

윤태석

  

좌) 옥미조 교원자격시험 수험표, 1962
우) 옥미조 저 『문화산업과 박물관』, 타임비 출판, 2014

옥미조는 일본에서 태어났다. 대학생이던 아버지가 운동(유도)를 하다 다쳐 불행하게도 작고함에 따라 1946년 귀국해 거제의
편조모 슬하에서 누나랑 자랐다. 생활이 곤궁해 초등학교 4학년 때에는 머슴살이를 했으며, 교과서 한 권 없이 중학교에 다니면서도 타고난 근면함과 명석함으로 늘 우수한 성적을 유지했다. 부산사범학교에 입학해서는 어느 부유한 집과 인연이 되어 가정교사를 하며 학업을 마칠 수 있었다.


우수한 성적으로 초등학교 교원으로 임용된 미조는 다독을 통해 습득한 글솜씨로 동화와 동시를 썼고 우리나라 최초의 글짓기 이론서를 펴내기도 했다. 또한, 독학으로 의학, 신학 등을 공부하는 등 여러 방면에서 연구자적 기질을 발휘하였다. 1970년에는 그의 종교관과 적극적인 생활태도에 뜻을 같이하기로 한평생의 반려자 김옥순과 결혼해 슬하에 1남 2녀를 두고 있다.


1976년에는 수년간의 과로와 스트레스가 겹친 간경화로 생사의 기로에 내몰리게 된다. 삶에 대한 끈질긴 노력과 실천을 통해 회생한 후에는 순리치료법을 개발했다. 건강과 삶에 대한 애착이 커지자 점차 더는 교단에 머물 수 없다는 생각이 강하게 들기 시작했다. 교편을 잡으면서도 아동문학가로도 활동해오던 옥미조는 마침내 정년을 9년 앞두고 퇴임하기로 결심했다. 이후 박물관을 설립하고 출판사도 세워 지금까지 400권에 가까운 책을 직접 써내는 등 다양한 문고를 출판하고 있다.


한편, 그는 교직 생활을 할 때부터 아동 관련 서적을 시작으로 수많은 책을 수집하였다. 이후 민속관련 자료로 폭과 범위를 넓
혀 맷돌, 장독, 장롱, 가마니틀, 지게 등 다양한 자료를 수집하기에 이른다. 그리고 마침내 폐교된 명동초등학교(거제시 연초면 소재)를 전시공간으로 개조하여 그의 수집 자료로 2000년에 거제민속박물관을 설립했다.



부산사범14회 동기생의 박물관 방문, 2001


그의 수집은 책에서 시작되었다. 평소에 책을 워낙 좋아했던 미조는, 읽고 싶은 책은 어떠한 경우에도 구입해 읽어야 직성이 풀려서, 이런 책들이 쌓여갔다. 수집증은 고미술품으로 그대로 옮겨갔다. 그러는 사이 훼손되고 사라지는 귀중한 문화유산인 책과 고미술품을 수집해 보존하고 관리하는 일이 사명처럼 여겨지게 되었다.


그것이 운명이었다면 더욱 그 사명에 충실했어야 했는데 그렇지 못할 때도 많았다고 옥미조는 회한하기도 한다. 그러면서도 지금처럼 방대한 자료를 수집할 수 있었던 것을 하느님의 은혜로 돌렸다. 독실한 기독교 신자다운 표현이다. 수집에 큰 도움을 준 것은 기증자들에 의해서였다. 돈이 있더라도 구입할 수 없는 자료들은 먼저 수집을 시작하고 있던 기증자들에게 가있는 경우가 있어 이들의 기증을 통해 입수되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옥미조도 이런 과정을 통해 방대한 기독교자료를 수집할 수 있었다. 특히 평소 친분이 깊던 여러 목사의 기증은 보존가치가 큰 희귀자료가 포함된 값진 자료들이었다.


박물관에는 교육 자료와 아동문학관련 자료도 매우 방대하다. 이 역시 옥미조의 박물관 운동을 보아오던 교육계의 여러 지인의 기증으로 수집되었다. 옥미조는 우리나라에 국립교육박물관, 국립기독교박물관, 아동문학박물관과 아동문학인이 중심이 된 아동문학관이 없음을 매우 안타깝게 생각한다. 그의 관심이 어디에 있는지를 잘 보여주는 대목이다. 이러한 박물관은 꼭 세워져야 하며 이를 위해 준비를 게을리하지 않고 있다고 그는 피력했다.



옥미조관장과 부인 김옥순여사, 2011


“나는 기독교와 교육 및 아동문학관련 자료, 민속자료를 수집하는데 천운의 때를 만났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내가 9년을
앞당겨 명예퇴직할 무렵 IMF 경제위기가 왔는데 이때 골동품시장에 낮은 가격의 많은 자료가 쏟아져 나왔습니다. 천운이 아니고 뭐겠습니까?” 당시를 회상하던 옥관장의 눈빛은 박물관에 대한 특유의 열정까지 더해 더욱 빛나는 듯했다. 이어진 몇몇 지역의 댐 건설로 인해 수몰지역에서 쏟아진 많은 민속자료, 전자책의 출현과 독서분위기 저하에서 이어진 출판사와 서점들의 폐업에 따른 시장의 많은 책. 이러한 분위기와 현상은 옥미조에게 큰 호기를 주기에 충분했다. 몇십 년을 수집한 자료를 몽땅 구입하기도 했다. 명예퇴직에 의한 인센티브까지 덤으로 받은 퇴직금은 자료수집에 절대적인 힘이 되었으며, 시간도 많아 입수된 자료의 분류와 정리, 목록화도 미루지 않고 그때그때 할 수 있었다.


미리 구입한 폐교는 더 할 수 없이 좋은 수장고가 되었고, 연구실이 되어주었다. 지금의 거제민속박물관은 박물관이라기보다는 수장고와 자료실에 가깝다고 할 만큼 자료가 산재해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비교적 체계적인 분류가 되어있음을 알 수 있다. 옥관장은 여건이 허락된다면 박물관을 증축하여 이를 체계화하겠다는 당찬 계획을 70대 중반에 와 있는 나이에도 당차게 꾸고 있다.


“옥미조는 보통사람으로서는 생각할 수 없는 초인적인 삶을 살고 있습니다. 교육자로서, 문학인 그리고 종교인으로서 또 박물관인으로서 삶 자체가 독특합니다.” 4세 때부터 함께 자라 그를 가장 잘 안다는 친구 옥정호의 술회다. 교육가로서, 아동문학가로서, 출판인으로서, 박물관장으로 지내는 동안 방대한 자료 수집은 물론 다방면의 활동으로 수많은 상도 받았다. 이러한 인생 여정과 족적이 신문, 잡지, TV 등에 수없이 보도되기도 했다. 저축추진중앙회공모 ‘새마을 저축 수기’ 최우수당선작인 <진뱀이 섬의 신화>는 <낙도의 메아리>라는 영화로 제작되어 내용의 주인공이 되기도 했다.


“국민들의 삶의 질을 향상하겠다는 다양한 조치에도 박물관을 찾는 사람은 늘어나지 않았다. 각 지방자치단체가 벌이는 축제에는 국가 예산만 낭비했고 거둬들인 효과는 타락과 회의뿐이다. 이런 현상들을 보면서 우리나라의 문화산업이 바른길을 가고 있는 가는 의심스럽다. 문화정책과 방향은 교육과 마찬가지로 백년대계여야 한다. 주5일제가 시행되었고 국립박물관은 무료입장까지 진행하면서도 근본적인 문제는 대단히 홀대하고 있다는 느낌이다.” 옥관장은 그의 저서 『문화산업과 박물관(2014)』 첫머리에서 이렇게 피력하고 있다. 문화와 박물관에 대한 깊은 안목을 보여주고 있어 책의 다음 페이지가 궁금해진다.


옥미조에게는 삶의 법칙이 있다. “일하면서 쉰다. 일하면서 일한다. 쉬면서 일한다.” 그리고 즐거움도 있다. “일하는 즐거움, 절제하는 즐거움, 글 쓰는 즐거움” 좌표도 있다. 낮은 자의 자리에서, 나의 유익을 구하지 않으며 희생과 봉사하며, 하느님의 영광을 가지지 않는다. 박물관인다운 면모의 철학을 간직하고 있어 더욱 청청할 산수(傘壽)가 기다려진다



- 옥미조(玉米造, 1942- ) 일본 시마나껭 출생, 해방 후 귀국. 연초초(1954), 연초중(1957), 부산사범학교(1961) 졸, 초등교사(-1998) 역임. 『글짓기 지도의 이론과 실제』펴냄. 전국새마을·저축 수기 공모〈 진뱀이 섬의 신화〉최우수 당선(1973), 제10회 저축의 날 철탑산업훈장 수상. 순리치료법 창원 및 순리원 개설(1987), 제2회 교육자대상 수상(한국일보, 1983) 및 국민훈장 석류장, 국민훈장 모장 수훈(1998). 거제민속박물관 설립(2000), 총 저서 365권으로 특별전 개최(20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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