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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어느 금융회사 사옥에 걸린 무서운 표어

박영택

최근 한국의 대기업 오너와 그 일가들이 저지르는 온갖 갑질에 대한 사회적 공분이 이슈가 되고 있다. 이른바 한국식 천민자본주의가 양산한 재벌과 그들의 천박한 의식이 비어져 나온 결과일 것이다. 그리고 이는 대기업뿐만 아니라 여타 중소기업 등도 결코 예외가 아니라고 생각된다. 내가 대학원을 마치고 얻은 첫 직장은 아주 작은 잡지사의 말단 기자 생활이었다. 영세하기 이루 말할 수 없는 조그마한 잡지사에서 몇 달간 기자라는 직함을 달고 취재와 기사작성 등을 하다 미술관의 큐레이터로 옮겨갔다.

물론 처음에는 보조큐레이터 일을 하는 수습이었다. 그런데 그 수습이 무려 6개월간이나 되었다. 모그룹의 문화재단 소속으로 입사해서 그렇게 6개월이나 되는 시간을 보낸 후에야 겨우 정식 직원이 될 수 있었다. 그런데 대학원 인정을 해주지 않고 대학 졸업 초봉으로 임금이 책정되었다는 사실을 뒤늦게 알게 되어 물으니 그룹에서는 대학원 출신을 채용하는 전례가 없어서 대학원 졸업 인정을 해줄 수 없다는 답변이 왔다. 당연히 대학 졸업 초봉을 받았고 이후 꼬박 8년을 근무하고 퇴사했다. 큐레이터라고는 하지만 카운터를 지키는 여직원과 교대로 나가서 앉아 있기도 하고 주말에는 번갈아 미술관을 지켰다. 전시를 기획하고 글을 쓰고 연구를 하는 일이라기보다는 작품을 나르고 그것들을 벽에 걸었다 떼기를 반복하는가 하면 사다리를 타고 올라가 조명을 맞추는 일로 그 많은 세월을 보냈던 것 같다. 제목만 큐레이터이지 실은 전시장의 모든 일을 맡아서 하는 ‘노가다’ 일꾼이었던 셈이다.


회사 사내에 붙여진 표어


물론 그런 일도 당연히 할 수 있고 직원들과 서로 나눠서 해야한다고 생각은 하지만 그 당시 기업의 오너나 미술관의 관장들 대부분은 미술관의 일과 큐레이터의 업무 등에 대한 기본적인 인식조차 없었으며 전시기획의 중요성에 대한 의미 역시 거의 부재했다고 본다. 그러니 그들에게 큐레이터는 그저 그룹의 직원이고 자신이 시키는 모든 일을 감당하는 회사원에 불과했다. 가끔 본사에 가서 업무를 볼 때가 있었는데 그 당시 느낀 점은 모든 그룹의 직원들이 오로지 오너와 그 가족들을 위해 헌신하고 아부하는 시종들과도 같다는 것이었다. 물론 먹고 살기 위해 어쩔 수 없는 일이었겠지만 조금은 비참하다는 굴욕감을 느낀 점이 한두 번이 아니었던 기억이 난다. 당시 내가 본사에 가서 했던 일은 이른바 회장과 임원실의 그림들을 정기적으로 바꿔 거는 일이었다. 이른바 인테리어를 담당하는 것이었다. 미술관의 관장 역시 그룹 회장의 여동생이었는데 1985년 관장으로 취임한 아래 지금까지 관장으로 앉아있다. 이른바 종신제인 셈이다. 이는 대다수 그룹의 미술관 관장들의 경우와 거의 동일하다. 따라서 미술관의 전문성이나 미술관의 전망 내지 발전적인 취지 등을 찾기는 애초에 참으로 난망한 일이다. 그저 그룹 오너들의 친인척들이 저마다 계열사 수장의 자리를 하나씩 차지하고 앉아서 대를 이어 지키고 있는 꼴이다.

몇 년 전 한 금융회사에 간 적이 있었다. 미술 관련 심사에 참여할 일이 있어서였는데 사옥을 둘러보다가 문득 벽에 걸린 문구가 눈에 들어왔다. 직원들에게 보내는 메시지이자 이 회사의 모토를 그대로 반영하는 핵심적인 문장이었는데 너무 인상적(?)이어서 쉽게 눈을 뗄 수가 없었다. 그 글자를 오랫동안 읽고 또 읽었다. 저 메시지를 보고 받아들여야만 하는 회사 직원들의 심경 또한 생각해보았다. 사실 이는 이 회사만의 경우는 분명 아닐 것이다. 대한민국의 모든 기업이 저러한 성과주의의 강력하고 조금은 폭력적일 수 있는 문구를 직원들에게 강요하고 압박할 것이다. 무한경쟁 시대에 살고 있는 오늘날 우리는 모두 저마다 자신들이 소속해있는 조직이 요구하는 성과 및 할당되는 목표치를 달성해야 하는 부담감과 함께 이를 충족하지 못할 경우 밀려날까 조급해하고 전전긍긍하면서 살아간다. 대학사회도 마찬가지다. 대학도 평가대상이 되고 있으며 교수들의 경우도 연구업적관리와 함께 강의평가, 학생상담 및 취업기여 등에 관한 다양한 지표를 만들어놓고 이를 수치화해서 호봉에 반영하고 있는 실정이다. 교수들도 학교에서, 교수직에서 밀려나지 않기 위해 기를 쓰고 요구하는 할당량의 수치를 채워야 하는 것이다. 자본주의 제도 안에서 사는 우리는 모두 이러한 경쟁 구도 안에서 결코 자유롭지 못한 존재인 것이다. 그래서인지 저 금융회사 사옥에 내걸린 살벌한(?) 문구를 오랫동안 응시하게 되었다. 순간 무서우면서도 서글픈 감정이 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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