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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쉬움 남긴 천재화가, 이인성

김달진

한국 근대미술의 대가를 찾아서 (8)

아쉬움 남긴 천재화가, 이인성


일제 식민기간중 1930년대 우리 서양화단은 가장 활발한 그룹활동과 다양한 조형사상이 대두되었다. 그러나 야수파, 표현파, 추상미술 등의 서구 모더니즘에 대한 이해 전반이 없는 상태에서 필연적으로 상이한 유파의 혼재현상이 일어났다. 당시 시대상황에 걸맞는 적절한 창조란 거의 불가능했다. 이 가운데 이인성은 17세때 선전에서 수채화를 첫 출품하여 입선하고 1935년 최고상을 받았고 일본 제전에서도 준특선을 하면서 당대 최고의 화가로 세인의 주목을 받았다. 


이인성(李仁星)은 대구 출생으로 일본태평양미술학교를 졸업하였다. 1931년-36년 조선미술전람회에서 수상 및 연특선을 거쳐 추천작가까지 역임하였고 당대 천재화가로 각광받았다. 해방후 이화여대 강사로 1948년 개인전(동화화랑)을 가졌고 국화회화연구소를 개설하였다. 1949년 1회 국전에 심사위원을 역임했지만 6.35때 39세로 타계하였다. 수복후 혼란 중에 순경과 사소한 시비 끝에 총탄을 맞았다. 화가로서 영광을 누렸지만 개인적으로는 불행하여 부인과 사별하고 재혼하였으며 죽음마저 애석하게도 비명에 갔다. 사후에는 1972년 유작전(서울화랑)과 77년 미발표작전(문화화랑)이 있었다. 최근에 이르러 그에 대한 본격적인 연구로 논문들이 나오고 새롭게 평가가 이루어지고 있다.





이인성의 형성은 선천적인 자질과 후천적인 노력에 의해 이룩되었다. 일찍 비범한 재능의 소유자로 인정받았고 후천적인 교육은 주로 도쿄화단 주변에서 받았다. 보통학교를 졸업했으나 가정 형편상 진학하지 못하고 서동진이 경영하는 대구미술사에 들어가 일하며 그림을 배웠다. 1931년 그를 아끼는 사람들의 도움을 받아 도일하여 태평양미술학교에서 본격적인 미술수업을 받았다. 학비와 생활비 마련을 위하여 크레용 회사에 취직하기도 하였다. 그러면서도 선전에 꾸준히 출품하면서 작가의 위치를 높여갔다.


이인성이 정립한 한국미는 향토성의 주제에 형태적인 것과 색감적인 것으로 나눌 수 있다. 원형적 구심감각에 도달한 그의 조형은 가벼우면서도 무겁게 느껴진다. 색감은 건조된 감각의 조화를 바탕으로 다색의 묘미를 느끼게 한다. 이 역시 향토적인 색감의 조화에서 오는 것이었다. 그의 그림에서 두드러지는 붉은 색은 우리의 향토성을 표현하기에 적잡했던 것 같다. 그의 향토적 서정주의 한국적인 특징을 양식화 시켰으며 국전을 중심으로 후배작가들에게 큰 영향을 끼쳤다. 또한 수채화에도 뛰어나 수채화만이 표현할 수 있는 유동적인 속도감과 세련된 감각을 여지없이 나타낸 좋은 작품들을 많이 남겼다. 




대표작으로는 <창가1934년>,<가을 어느 날 1934년>,<경주의 산곡에서 1935년>, <사과나무 1939년>등이 있다. 자유분방하고 개성이 강하며 풍부한 감성의 소유자로 인상주의 회화에 경도하여 감각적인 면에서 수용하였다. 자기 주변의 풍경 정물 인물에서 주제를 택하며 풍부한 색채와 예리한 터치로 감수성이 많은 재기 발랄함을 보였다.


- 포스틸갤러리 1997년 10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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