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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론 | 굿춤의 눈물, 환희, 그 소리들 - 조습 사진미학

김종길



굿춤의 눈물, 환희, 그 소리들
- 조습의 해학적 카오스와 사진미학


김종길 미술평론가



1. 조습 사진의 시간 ; 아수라의 후경


“나는 이성과 폭력, 논리와 비약, 비탄과 명랑, 상충되는 개념들을 충돌시키면서 현실의 이데올로기에 구멍을 내고 있다.”

_ 조습


눈앞의 현실을 전경(全景/이승), 눈 뒤의 현실을 후경(後景/저승)이라 해보자. 전경은 생생한 삶의 현실이고, 후경은 그 현실에 맞붙은 현실 너머의 비현실/초현실의 세계라는 뜻. 쉽게 말해 우리 눈앞에 펼쳐진 현실이 전경이라면 후경은 현실 너머에 있는 현실의 배꼽과 같은 그 무엇이다. 후경은 전경의 그림자와 같아서 보이지 않고 들리지 않으며 만져지지도 않는다. 신체의 감각을 내려놓은 자리에 영혼의 감각을 불 틔워야만 느낄 수 있는 그 무엇이라 할 수 있다.


시간이 흐르는 것은, 사건이 ‘터지는’ 아수라의 전경이 사건으로 ‘기억되는’ 후경이 되는 것과 다르지 않다. 전경의 현실이 쉼 없이 현실 너머로 흘러들어가 후경의 기억과 역사를 이루고 판타지를 이루며 초현실의 상상계를 이룬 것 곧 시간이다. 전경과 후경을 그러나 두부 자르듯 뚝 잘라서 ‘삶’(의 형상성)과 ‘죽음’(의 형상성)의 세계라 단정할 수 없는 이유는, 죽음에 이르기 전의 ‘삶의 지속’이라는 시간성이 마음에 영구히 축적되기 때문일 것이다.


삶의 지속과 영구적인 마음의 축적으로 구체적인 현실의 형상성은 지워지지 않는 벽화처럼 남아서 ‘마음의 항상성’이 된 뒤 한 인간의 기억으로 구조화 된다. 그러니까 ‘마음의 형상성’(形像性)이 누구나 체험 가능한 구체적 진실로서 삶의 총체적 리얼리티라면, ‘마음의 항상성’(homeostasis, 恒常性)은 한 인간의 개체적 상실 또는 죽음과 상관없이 서로에게 전이된 ‘지속적 삶’의 형태라 할 수 있다. 어떤 대상이 사라진 뒤에도 그 대상을 둘러싼 수많은 대상들 속에서 ‘그’는 후경의 연속성을 이루며 살아남는 것이다. ‘그’의 실체를 엿볼 수 있는 곳이 조습의 사진 속이다.


후경의 시간은 직선도, 회귀를 반복하는 나선형도 아니다. 하나의 후경에는 몇 개의 직선과 곡선과 나선형이 몽타주처럼 펼쳐질 수밖에 없다. 고구려벽화에 보듯이 후경의 여러 장면들은 불일치하고 나날이 연속되지 않으며 사건들만 남아서 무질서의 파계를 이루기 때문이다.


현실이 일관성이나 통일성, 장면 구성의 치밀함, 사건의 기승전결 따위로 존재하지 않듯이 후경 또한 애당초 단일한 시간성으로 존재하지 않는다. 그것은 바꿔 말하면 전경의 삶이 일관되지 않았고 삐죽거리듯 튕겨나갔으며 예고 없이 불쑥거리는 사건들로 진창이었다는 것을 증명하는 것이기도 하다. 사람과 동물과 하늘과 나무와 새들의 시간이 분절되고 끊어져서 탱자나무 가지가 엉기듯 엉기고 또 그 가지에서 자란 가시들처럼 웃자라서 날이 선다.


오직 샤먼 예술가들만이 그 끊어진 시간들의 틈에서 삶의 진리를 엿볼 수 있다. 그들만이 후경의 아수라를 볼 수 있다. 아수라판의 후경은 카오스로 가득하나 그 가득함에 코스모스가 있을 것이다. 후경이 전경으로 잠시 건너올 때는, 후경의 힘이 전경으로 뻗칠 때는 샤먼 예술가들의 몸을 통해서만 가능하다. 알아들을 수 없는 말들과 소름을 몰고 오는 노래와 접신의 공유 속으로 밀어 넣는 흥얼거림. 그 흥얼거림의 샤먼적 공수를 우리는 조습의 사진 언어에서 들을 수 있다. 




2. 함축적 연대기 ; 해학적 카오스의 이콘화(ICON)


“나의 작업은 후기자본주의의 현실 속에서 주체의 이성적 응전이 불투명해지는 지점에서 출발한다.”

_ 조습


조습은 20년 전 어느 길거리에서 한 건물위의 ‘018 OneShot’ 옥외광고물을 손가락질하며 사진을 박았다. 검지로 ‘1’과 ‘8’을 가리키는 두 개의 사진은 <1818444>(1999)이고, 그것은 작가 ‘조습’의 탄생을 알리는 첫 ‘발신작’이기도 할 것이다. 숫자 ‘1818’은 ‘십팔십팔’로 말할 때 욕설이고 조롱이다. 그는 사진 속에서 알쏭달쏭한 표정으로 웃고 찡그린다. ‘444’는 사달라고 윽박지르는 ‘사사사’나 죽음을 뜻하는 ‘死死死’를 모두 함의할 것이다. 그러니 ‘1818444’는 현실 자본주의의 욕망을 꼬집는 것이면서 그 너머의 그림자를 동시에 까발리는 작품이지 않을까.


첫 발신작이 터진 그 해 1999년은 IMF경제로 실업자가 180여만 명이나 되었고 그만큼의 가정이 파탄 났으며 자살률도 크게 증가했다. 이후, 그는 수많은 우리 근현대사 속의 사건들로 파고들어 휘모리장단으로 몰아가듯 뒤집고 까발리고 흩으렷다. 우스꽝스런 익살과 왜곡과 재미와 웃음이 거기에 난무했다. 미학적 엄숙주의 따위가 사라진 사진들에서, 그의 분장술과 (즉흥적) 해프닝과 (서사적) 퍼포먼스는 민낯의 대한민국을 실오라기 없이 들춰냈다. 신파적 현실주의 미학은 그렇게 탄생했다.   


그의 작품은 2012년에 공개한 <달타령>을 기준으로 크게 바뀌었다. 2008년에 기획연출로 제작된 13점의 <누가 영원히 살기를 원하는가>(<누가 영원히>)에서 그 전조가 엿보이기는 하나, <누가 영원히>는 신화․역사․종교․서사는 물론, 이콘화(ICON/聖畵)와 미학적 장치들이 한데로 섞여서 ‘장엄’이 되었을 뿐 ‘조습-스러움’의 해학적 카오스는 잘 드러나지 않았다. 그 작품들은 그야 말로 ‘품’(品)이 되는 놀라운 기획의 결과였으나, 그것을 ‘작’(作)으로서의 신파적 배꼽을 짓고 일으키는 ‘발화(發話)적 사건’이라 부르기에는 지나치게 미학적이었다. 전시는 ‘작품’이 공개되면서 새로운 발화를 연속적으로 일으키는 또 다른 사건이 될 때 살아있는 전시가 될 수 있다. 그럼에도 <누가 영원히>는 그에게 미학으로서의 상징적 ‘미장센’을 실험해 볼 수 있는 대규모 프로젝트였을 것이다. 하나로 연결된 서사구조와 그것의 장면성이 전시 공간 전체를 입체적으로 구성해 낸, 그 자체로는 훌륭한 역작임에 틀림없었으니까. 


<달타령>연작 이후, 그러니까 <일식>(2013)연작에서 최근의 <사극>(2017)연작까지를 주목하는 것은, 그의 작업들이 기획된 프로젝트로서 역사적 사건의 현장이었던 장소들을 로케이션하면서 촬영되었기 때문이다. 첫 시기의 작업들은 대부분 현실의 어떤 곳들이었으나 그것을 로케이션 촬영이라 부르기는 어려운 점이 있었다. 그 ‘어떤 곳’은 장면을 위한 장소/공간으로서만 읽히기 때문이다. 예컨대 거리, 노래방, 목욕탕, 당구장, 대문 앞, 다방, 공사장, 병원을 비롯해 사진의 서사에 적합한 어느 장소/공간들이다.


그러다가 2009년과 2010년, 그는 스튜디오를 대체하는 ‘콘테이너’(정확히는 조립식 공장)에서 좀 더 밀도 높은 ‘미장센’을 탐색하기에 이른다. 하나의 주제에 하나의 장면을 연출해서 촬영한 사진들은 조습의 미술세계가 크게 변화하고 있음을 보여주는, 그러니까 그 이전의 것을 ‘완결’하고 그 이후로 나아가기 위한 어떤 ‘촉발’의 모멘텀이 엿보인다. <누가 영원히>에서 콘테이너 시리즈로 이어지는 이 3년간의 작업이 끝난 곳에서 <일식>은 시작되었다. <일식>연작은 그가 실험했던 그 모든 미장센과 분장술과 퍼포먼스와 미학적 사진개념은 물론, 해학적 카오스까지 더해져 거대한 장편서사를 이뤄냈다.




3. 굿춤 추는 트릭스터 ; 샤먼 예술가의 둔갑술


“정작 내가 말하고자 하는 것은 그 충돌지점에서 뜻밖의 만나게 되는 아이러니한 주체에 대한 이야기이다.” _ 조습


조습의 변신술은 이승저승 사이의 계면(界面)에서 줄타기하는 트릭스터의 굿춤이다. 시시때때로 이놈저년 저놈이년이 되어서 사건의 본질을 비틀고 비꼬기 하는 행태는 단순한 재연이나 재현이 아니다. 그 이면으로 파고들어서 어떤 응어리들, 어떤 권력들, 어떤 망각들, 어떤 상실, 환상, 분노, 체념, 기념, 황홀, 희생 따위의 ‘장면성’을 희화화(戲畫化)하면서 살풀이하는 전략이다. 그에게 있어 관형사 ‘어떤’은 이현령비현령이라기보다는 아무(개) 혹은 누구(나)를 가리킨다. 그 ‘아무’와 ‘누구’에서 갑돌이와 갑순이는 탄생했을 것이다.


변신은 변태이고 둔갑이며 변화이다. 이것이 저것으로 변태하는 것은, 상(像)의 본성은 물론 껍질(形)까지 완전히 뒤바뀌는 것이고, 둔갑하는 것은 상(像)의 몸과 껍질을 수시로 바꾸는 것이며, 변화하는 것은 상(像)의 성질과 껍질이 조금씩 달라지는 것이다. 그의 아무와 누구는 그가 다루는 주제에 따라, 사건에 따라, 상황에 따라, 서사에 따라 ‘특정인’으로 변태했고 둔갑했으며 변화했다. 그런데 흥미로운 것은 그가 아무와 누구로 변신할 때 ‘그’는 그 아무와 누구라는 3인칭의 주체가 되어야 하는데, 실제로는 늘 그 자신을 노출함으로써 3인칭인 ‘그’를 1인칭인 ‘나’로 되돌려 버린다는 사실이다. 그 되돌림의 노출(‘조습’이라는 것을 쉽게 알아차리게 되는 분장술)을 의도하는 과정에서 풍자가 터지고 해학이 그 뒤를 따랐다. <일식>연작 이후의 작업들은 그런 변신술의 사진미학이 새롭게 길을 트면서 탄생한 수작들이다.


2012년 무렵 박찬경은 ‘아시아 고딕’이라는 개념을 유포시켰다. 그가 말하기를 “우리는 근현대를 겪으면서 죽은 사람도 많고 원귀도 많고, ‘상처’ 관념이 널리 퍼져있는 나라예요”라고 했다. 아시아 고딕의 밑개념에 원귀와 상처 따위가 널리 퍼져있는 것은, 우리 삶의 후경이 온통 뒤죽박죽으로 망가져 있다는 것을 뜻한다. 후경이 병들었으니 그 후경의 표상현실인 전경 또한 온전할 리 없을 터.


식민지와 전쟁을 겪은 뒤에도 군부독재와 살인적인 근대화를 겪어야 했던 자본주의 현실을 생각해 보면, 그것이 단지 현실의 문제가 아니라 현실 너머의 문제일 수 있다는 생각을 하지 않을 수 없다. 삶의 사회적 환경은 물론이요, 그 삶의 주체인 민중의 의식과 태도조차도 깡그리 지우고 주입하고 다시 부수고 세우기를 반복하는 동안, 우리는 완전히 다른 세계로 몰아쳐 왔으니까. 그것은 프로이트의 ‘운하임리히’(unheimlich/두려운 낯섦) 개념과 다르지 않을 것이다. 친숙하기도 하지만 뭔가 두렵고, 체험에 남아 있지만 여전히 뭔가 이질적인 대상들.


우리가 살고 있는 지금 이곳의 세계는 그래서 공간만 동일할 뿐 결코 동일적 장소성의 역사를 갖지 못하고 있다는 이야기가 된다. 역사 부재의 상실공간에 살고 있는 우리는 그러므로 어쩌면 유령일지도 모른다. 바로 그것이 두렵고 낯선 이유라면 이유이다. 죽어서 환생하지 못하고 영계를 떠도는 중음신(中陰神)들이 현실의 이면에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 삶에 깊게 침윤되어 있어서 자주 사건의 주체로 부상하는 것도 그런 문제이다. 살아있는 우리나 죽어있는 그들이나, 현실과 비현실을 가리지 않고 존재하는 양상이라고 할까. 억압된 것, 즉 트라우마로 되돌아 온 부재와 상실의 상처를 그러므로 어떻게 치유할 것인가에 대한 의문에서 조습의 작품들을 재사유할 수 있을 것이다. <일식>연작 이후를 기획하면서 그는 그래서 그것이 단지 ‘사진’으로서가 아니라 ‘굿춤’의 신명이요, 신명의 감흥이 일어나는 것이어야 한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현실은 응어리진 사건들로 넘쳐나는 아수라판이다. 아수라판의 현실계는 온갖 상징이 유예되지 않은 채 그 자체로서 ‘돌상징’[굳어서 관념이 되는 상징]이 되는 사건의 연속이다. 아수라판은 전후경이 맞붙은 세계이다. 그 세계를 주관할 수 있는 자는 오직 샤먼 예술가밖에 없다. 조습은 전후경이 맞붙은 세계로 들어가기 위해 스스로 샤먼이 되는 기획을 연출한다.




4. 해를 품은 달 ; 흩어지고 출현하는 귀신들


“상호 이해의 저편으로 건너가기 위해 가로 질러야만 하는 어떤 불모성에 대한 것이며, 그 불모성 속에서도 꿈꿔야 하는 새로운 주체이행과 공동체에 대한 것이다.”

_ 조습


조습의 사진들은 지금 여기의 현실적 모순과 부조리가 후경의 어딘가와 긴밀하게 이어져있을 것이란 ‘확고한 신념’에서 비롯되었고, 그래서 그는 전경에서 이어지는 배꼽을 따라 후경으로 들어가 후경을 떠도는 중음신들을 불러냈다. 


사회학자 김홍중은 『마음의 사회학』에서 “‘대상을 ‘물리적으로’ 부정해야만 그 대상을 점유할 수 있는 유아와 마찬가지로 우울자 역시 자신이 상실한 것과 자기 자신을 구분하지 못하는 일종의 식인증적 단계로 퇴행한 자들이다. 대상이 이처럼 주체의 내부로 전이되어 생존하는 한에서 리비도는 새로운 대상으로 전이되지 못하며, 따라서 과거는 과거로서 정리되지 못하고, 주체 내부에 파괴된 채로 살아남은 이 대상은 죽은 것도 아니고 산 것도 아닌 상태로 항존하게 된다.”고 말하고 있는데, 조습의 작품 속 인물들도 그와 다르지 않다.


김홍중의 ‘우울자’는 멜랑콜리로서 권태, 슬픔, 무기력, 허무함, 피로감의 정서가 ‘우울질’이라는 체액적 감정형식, 즉 열정의 결여, 감정을 느낄 수 있는 능력의 쇠락, 감정의 불가능성을 가진 자로 해석할 수 있다. 줄리아 크리스테바에 따르면, 상실, 사별, 부재가 상상적 행위를 계속 유발시키고, 위협하고, 강화시킬 경우 멜랑콜리가 작품이라는 물신(fetish)을 만들어낸다고 말했다.


조습의 작품 속 시간들은 전경이 온전히 후경이 되지 못할 뿐만 아니라, 전경 속에 후경이 파괴된 채 존재하거나 전경이 후경으로 빨려 들어가 ‘전경의 상실’을 이룬다는 점이다. 그가 ‘해를 품을 달’이라고 역설했을 때 그 의미는 ‘전경과 후경’의 구분이 아니라 두 세계가 ‘전후경’으로 맞붙어 있다는데 있다. 달이 해를 가리는 ‘일식’(solar eclipse, 日蝕)으로. 우리가 이 ‘일식’의 시간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시간-교체’가 발생했던 근대로 넘어가야 한다. 


20세기 동아시아의 미학이 서구와 충돌하면서 크게 상실한 것은 화법이나 화구, 화인과 같은 형식적 틀거리가 아니라 석도가 말했듯이 일획(一劃)에서 발생하는 한 번의 흩어짐, 즉 태박일산(太朴一散)의 미학정신이었다고 할 수 있다. 20세기 초반, 서구미학이 물밀어들자 수백 수천의 역사를 견뎠던 그 미학정신은 일순간에 무너져 버렸다. 그것은 과거가 되었고 옛것이 되었으며, ‘근대’를 표상하는 그 어떤 미학 속에서도 거론되지 않았다. 아시아 근대인들은 어두운 중세의 그림자 속으로 그것을 밀어 넣은 뒤 돌상징으로 만들어 버렸다.


그런데 흥미로운 것은 우리가 생각했던 그 서구 근대의 미학이 결코 돌상징의 그런 고루한 것이 아니었다는데 문제가 있다. 다다(Dada)의 미학이 추궁했고 플럭서스(Fluxus) 미학이 또한 현실과 초월의 경계에서 가 닿고자 했던 그 미학들을 생각해보라. 그들은 동아시아가 상실했던 샤먼 예술가들의 영혼을 불러들여서 온갖 ‘흩어짐’의 전위적 미학을 터트렸다. 요셉보이스는 물론이요, 백남준의 네오 샤먼적 리얼리즘을 우리는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돌상징의 미를 파탄지경으로 몰고 가서 새 칼을 담금질하듯 시퍼렇게 벼렸던 자, 그 시퍼런 칼날 위에 서서 새로운 미의 황홀과 우주를 집전하는 자의 원시적이고 근원적인 정체성은 오직 샤먼에게 있었다. 샤먼은 최초의 미학자였고 미의 담지자였으며 미의 대리자였다고 할 수 있는 것이다. 그는 시의 운율로 최초의 텍스트가 된 공수의 신화를 터트렸고, 그 텍스트를 바람에 흩트리면서 춤을 추었으며 청동거울과 북소리로 이 현실과 현실 너머의 영계를 맞붙여 불렀다. 문학이, 연극이, 미술이 자유자재로 미분하고 적분하는(微積分學, calculus) 이 카오스모스적 판타지의 세계야 말로 가장 순수한 미의 대학이었다. 조습은 그가 고백했듯이 “상호 이해의 저편으로 건너가기 위해 가로 질러야만 하는 어떤 불모성에 대한 것”과 “그 불모성 속에서도 꿈꿔야 하는 새로운 주체이행과 공동체에 대한 것”을 궁구하기 위해 스스로 샤먼이 되는 길을 선택할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그는 ‘일식’의 공간으로 들어가 그곳에서 흩어졌다. 그 흩어짐의 낱낱이 <일식>연작 이후의 장면들에서 등장하고 있다.   


그에게 미는 굿춤의 부산물이 아니라 굿춤의 응결로서의 눈물이여 환희이며 소리일 것이다. 고대의 샤먼이 말과 춤으로서 육화 접신의 경지에 들었다면, 그는 창조적 미의 형상으로서 육화 접신의 경지에 들고자 했으니까. 미의 육화, 미의 접신, 미의 경지는 서로 다른 것들이 아니라 한 몸이지 않은가.  




5. 역설 ; 빛나는 후경, 우울한 전경
  
“유쾌하면서 불온한 상상력을 통해 내가 연출하고 있는 것은, 이성적 주체의 안락한 유토피아가 아니다.”

 _ 조습


1894년 동학이후 한국 사회는 근대화․서구화․도시화․신자본주의․신자유주의․초자본주의로의 이행을 급진적으로 살았다. 급진적 근대화였고 급진적 도시화였으며, 급진적 초자본주의화였다. 식민의 급진성, 전쟁의 급진성, 정치의 급진성, 문명의 급진성은 자주, 아니 일상으로 부재와 상실, 해체를 밥 먹듯 했다. 우리 시대는 우울자로 넘친다. 그래서 더 현대미술이 폭증하는지도 모르겠다.


조습은 우울로 가득한 그런 급진적 현대사의 후경에 주목했다. 어쩌면 ‘식인증적 단계로 퇴행한 자’들의 이 현실은 전경과 후경이 어긋난 상태의 부조리에서 비롯된 것이 아닐까 생각했던 것이다.


그는 경기도의 접경지역과 강원도 양구, 전라도와 경상도의 지리산 일대를 누비며 암흑으로 둘러싼 후경의 실체를 직조했다. 봄여름, 가을겨울의 시간성을 대련으로 붙여서 연출한 사진들에는 전쟁이 끝난 지 60여년이 되었는데도 구천을 헤매는 중음신들이 엿보인다.


그런데 암흑천지에서 빛을 발하는 비경처럼 중음신들의 모습에서 해학과 익살이 넘친다. 전경과 후경의 상징이 뒤바뀐 듯한 기이한 역설이다. 우울한 전경과 달리 후경은 해맑다. 그 역설이 지금 한국사회의 실체일지 모른다.


그는 늘 현재로서 이곳을 살았으나 그의 삶은 작품 속에서 고스란히 과거였고 또한 후경이었다. 1999년의 ‘조습’과 2018년의 ‘조습’은 쉼 없이 변이를 거듭했던 육체의 껍질 외에는 사실 달라진 것이 거의 없다. 그래서 어쩌면 그의 작품들은 전경과 후경 따위로 구분할 수 없는 무시간성을 가지고 있는지도 모를 일이다. 불교의 연기론과 윤회, 회귀의 시간성이 번데기 고치집의 시간성이라면, 그의 작품들은 피었다 지기를 반복하는 회귀의 수레바퀴처럼 보이니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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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평문은 조습의 사진미학을 리뷰했던 글과, 포스트 민중미술 작가들을 사유하며 작성했던 샤먼 예술가론, 그리고 필자가 오랫동안 궁구하고 있는 샤먼 리얼리즘의 개념들을 뒤섞어서 작성한 것이다. 이 글을 위해 그의 전 작품을 다시 살폈고, 다른 필자들의 글도 구해서 읽었다. ‘조습론’을 재구성하는 데에는 역설적으로 그의 짧은 글 하나가 방향타가 되었다. 그의 글을 다섯 개의 문장으로 쪼개서 내 글도 재배치했다. 재배치하는 과정에서 나는 완전히 새로운 조습론을 작성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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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로이트는 운하임리히에 대해 “사람들로 하여금 완전히 방향을 잃게 하는 것”이라면서 “어떤 한 존재가 겉으로 보아서는 꼭 살아있는 것만 같아 혹시 영혼을 갖고 있지 않나 의심이 드는 경우, 혹은 반대로 어떤 사물이 결코 살아있는 생물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우연히 영혼을 잃어버려서 영혼을 갖고 있지 않은 것이 아닌가 하는 의심이 드는 경우”라고 했다. 유명자, 「정신분석에서 본 운하임리히(unheimlich)」, 『한국영미어문학회 학술대회 발표논문집』, 한국영미어문학회 2016년 추계학술대회, 한국영미어문학회, 2016. 9~16쪽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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