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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재 | 스스로 도는 힘 - 박찬경의 <안녕>읽기

김종길



스스로 도는 힘
- 박찬경의 《안녕 安寧 Farewell》 읽기


김종길 | 미술평론가



팽이는 지금 數千年前의 聖人과 같이
내 앞에서 돈다.
생각하면 서러운 것인데
너도 나도 스스로 도는 힘을 위하여
공통된 그 무엇을 위하여 울어서는 아니된다는 듯이
_ 김수영, 〈달나라의 장난〉중에서



전시의 구조


2017년 5월 25일부터 7월 2일까지 국제갤러리 2관에서 박찬경의 개인전이 열렸다. 그는 5년 만에 열린 이 개인전에 13점의 신작을 선보였다. 세월호 사건을 비롯해 격변의 한국 근․현대사를 환기시키며 무명의 희생자를 애도하는 3채널 비디오­오디오 작업인 <시민의 숲>(2016), 한국의 제도권 미술이 노정해 온 자생적 미술사 서술의 한계를 절감하고 잠재적이며 창조적인 판형들의 예시로 새로운 미술사를 제안하는 <작은 미술사>(2014/2017), 그리고 이 두 작품의 후속 작업인 <승가사 가는 길>(2017)을 슬라이드 프로젝션으로 보여주었다. 이 외에도 김상돈과의 협업으로 제작한 <밝은 별>(2017), <칠성도>(2017)이 <시민의 숲>과 <승가사 가는 길> 사이에 설치되어 있었다.


이 전시에서 관객의 동선은 하나의 선을 그으며 입구와 출구로 이어지는 단선구조처럼 보인다. 그런데 1층에서 2층으로 다시 2층에서 1층으로 내려오는 사이클 구조는 생각처럼 단순해 보이지 않았다. 1층이 입구면서 출구인 구조인데다, 그 출입구에 작가의 아카이브를 펼쳐놓았기 때문에 보기에 따라서는 거기서 다시 출발해야 하는 묘한 ‘꼬임’이 발생했던 것이다. 서로 어긋매낀 동선이라고 해야 할까? 관객은 작가의 아카이브-이 전시에서 아카이브는 작품의 영감을 촉발시킨 증거들이고, 그의 작품들이 어떤 과정들 속에 놓여 있는지를 살필 수 있는 리트머스다. 그뿐만 아니라 기획자이자 비평가이기도 한 그의 사유체계의 알고리즘을 엿볼 수 있는 창이기도 하다-를 먼저 보거나 지나칠 수 있다. 누군가 다른 관객이 아카이브를 살펴보고 있다면, 한쪽 벽에 붙여놓은 그리 익숙하지 않은 도판들을 흥미롭게 ‘감상’(感想)할 수도 있을 것이다. 감상의 본래 뜻이 “마음에 느끼어 일어나는 생각”인데, 그가 제시한 이미지들은 충분히 감상을 유도하고 남음이 있다.
박찬경이 써 내려간 <작은 미술사>는 한국과 아시아의 식민적인 미술제도에 대한 착잡하고도 해학적인 이야기다. 그는 연대기적인 서술과 동서양을 구분하는 미술사 대신 수평과 수직, 숭고미학, 미술관, 미술과 글, 동아시아 문화와 정치 등을 횡단하며 동서고금의 주요 미술작품을 주관적인 관점과 방식으로 재배열을 시도한다. 그의 주관적 미술사는 한국의 식민지적 근대성으로 미술사 서술이 불가능하다는 한계에서 비롯되었다. 하지만 그는 그것에 대한 비판을 내려놓고 “그렇다면 각자 쓰자. 허술하고 문제가 있고 미약하지만 그것을 정설로 제시하는 게 아닌 주관적이고 이단적인 형태로 각자 쓰는 게 재미있는 미술사를 만들 수 있는 것이 아닌가?”라고 되묻는다. 이것은 또 다른 미술사의 제안이 아닌, 여러 가지 방식으로 무한하게 전개될 수 있는 주관적 미술사에 대한 상상하기다. 그는 말한다.1)




“근대성의 잘잘못이나 오류를 따지기 전에 근대성 자체를 상대화 하는 게 필요해요. 거리를 두고 보는 것. 그 속에 매몰돼서 보지 않고 빠져 나와서 근대성 자체를 낯설게 보지 않으면 새로운 사회나 예술에 대한 상상이 어렵겠죠.”


<작은 미술사>를 이루는 몇 개의 도판 및 도판의 출처는 다음과 같다. 벽에 붙여진 순서는 아니다. 이 글의 본문에서 다뤄지는 이미지들이다.


- 김홍도, <염불서승도>, 20.8×28.7cm, 18세기 후반~19세기 초반경, 간송미술관
- 김홍도, <지단관월>, 98.2×48.5cm, 18세기, 국립중앙박물관
- 김홍도, <군선도>, 수묵채색화, 26.2×48.8cm, 18세기, 국립중앙박물관
- Hieronymus Bosch, Ascent of the Blessed, Oil on panel, 80.5×30.5cm, 1490, Palazzo Ducale, Venezia
- 마창의 지음, 조현주 옮김, 《고본산해경도설 下》, 다른생각, 2013, 854쪽, 〈권6-6:관흉국〉편
- 민정기, <금강산 만물상>, 캔버스에 유채, 324×333cm, 1999
- 민정기, <포옹>, 캔버스에 유채, 112×145cm, 1981
- 서울대학교 규장각 서대석 해제, 《무당내력》, 민속원, 2005. 이 책 맨 뒤에 실린 ‘뒷젼’ 도판
- 전상국, 이호철, 문순태, 김원일 저, 《나를 우린 한국전쟁 100장면》, 눈빛, 2006(초판), 89쪽 사진
- 오윤, <원귀도>, 캔버스에 유채, 69×462cm, 1984. 작가는 이 그림 밑에 “귀신의 행렬 위로 공중을 떠도는 원귀들이 있다. 귀신이 되어서도 귀신 사회에 끼지 못하는 영혼이다.”고 적었다.
- <신도안>, 이 흑백사진의 출처는 밝혀놓지 않았다. 그는 “신도안, 1978, 박정희 정권의 미신타파 운동-한 무속인이 산신도를 불태우고 있다.”고만 적었다.
- 《감모여재도(感慕如在圖)》(출처 없음), 민화로 많이 그려진 이 그림은 조상에게 제사를 지낼 때 지방을 붙일 수 있는 사당을 화폭에 단 그림이다. 그래서 사당도(祠堂圖)라고도 한다. 그는 19세기에 그려진 작자 불명의 한 감모여재도를 붙였고, 설명에 ‘조상과 만나기 위한 창문’이란 말을 넣었다.
- 채용신, <송호도>, 90×49cm, 연대미상(20세기 초), 개인소장




1층 전시장 안쪽 끝 우측에 텔렉스(telex)가 좌대 위에 놓여 있었는데, 좌대는 호피무늬 천을 둘렀고, 텔렉스는 슬라이드 트레이와 사슴뿔을 머리에 달았다. 누가 보아도 이것은 텔렉스의 변태(metamorphosis)이다. 그렇다면 이 변태적 상황의 ‘몸’은 무엇일까? 동선은 텔렉스에서 유턴해서 <작은 미술사>를 다시 훑어본 뒤 입구 쪽으로 가 아카이브를 보거나, <작은 미술사>가 붙은 벽의 뒤쪽 공간으로 가서 <시민의 숲>을 볼 수 있다. <시민의 숲>에서 나오면 다시 아카이브가 보이고, 2층으로 올라갈 수 있다. 2층은 <밝은 별>, <칠성도>, <문워크(MoonWalk)>, <승가사 가는 길>을 차례로 보게 되어 있다.



마음에 느껴 일어난 생각들


갤러리는 술수의 미학이 교호(交互)하는 굿당이요, 사바세계에서 피안의 극락정토로 건너가는 반야바라밀의 배였다.2) 난리에 천하와 백성이 안녕치 못하면 미안(未安)이어서 굿을 펼쳐야 하고,3) 안녕해지면 안락(安樂)해질 것이니 그곳이 청정한 국토일 것이다.4) 그러나 1층에서 2층으로, 다시 2층에서 1층으로 휘감아 도는 ‘걷기’의 참례(參禮) 혹은 ‘뒷젼’ 마당에의 동참은 미안하였다. 굿당과 반야바라밀의 배에 올라 탄 귀신들이 안녕치 못하였으므로.


굿당의 큰 사슴뿔 샤먼(美/佛)은 슬라이드 TV였다. 석가가 깨우쳐 사슴동산(鹿野苑)에서 첫 설법을 했다하나, 달리 말하면 사슴샤먼이 설교를 한 곳이어서 녹야원일 터. 사슴샤먼의 메시지는 미디어다. 가람(伽藍)에 없었던 산신(山神)․산령(山靈)․삼성(三聖)․칠성(七星)이 끼어들었으니 그 샤먼은 호피를 입고 포효하듯, 사자후의 설법을 터트렸다.5) 그 설법의 미디어가 벽에 투사되어서 ‘하늘의 소리’[신의 말(공수)/신탁]를 전한다. 실상, <작은 미술사>(2014/2017)나 <시민의 숲>(2016)도 그 설법의 언어일 터!


미술사는 이미지 연대기다. 연대기는 시간의 서술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그 시간의 서술에 이미지 알고리즘을 끼워 넣거나, 아니면 시간을 분절시킨 뒤 이미지 알고리즘의 확장성을 시방(十方)으로 열어야 새로워진다. 시간을 부정해야만 이단의 언어가 탄생한다. 이단의 언어는 술수다. ‘미술’(美術)이 본래 “술수 부리는 큰 사슴샤먼”의 뜻에서 유래된 것을 잊지 말자.6) 시방으로 열어 ‘뜻’의 술수를 펼치고 연결한 이미지들이 1층에서 ‘말’을 이뤘다. 그 말은 갤러리를 찾은 관람객과 즉석에서 교감할 수 있었다. 슬라이드 TV는 텔렉스(telex)였고, 기계적 맥락에서 텔렉스는 가입자와 직접 다이얼로 접속해 데이터를 송수신하는 전신 서비스다. 텔렉스는 수신자가 없어도 텔레프린터가 자동으로 수신해 종이테이프에 인쇄하기도 한다. 갤러리 입구 책상의 박찬경 아카이브와 사슴샤먼의 텔렉스가 감흥신령으로 인쇄한 듯한 이미지 알고리즘의 작은 미술사가 벽에 붙었다.


<작은 미술사>의 한 무리 ‘그림말’(畵語)은 전경과 후경을 잇는 우물신화에 기댔다. 전후경이 맞붙어서 이승저승이 한통으로 열리는 시간은 “그녀는 인경전의 종소리가 울리면 장안의/ 남자들이 모조리 사라지고 갑자기 부녀자의 세계로/ 화하는 극적인” 해질녘의 시간이다.7) 프랑스에선 개와 늑대의 시간이요, 우리에겐 도깨비가 출몰하는 그 시간은 우물에서 그림자가 사라지는 시간이다. 우물에서 그림자가 사라지면 그 밑이 훤하다. 심연이 물 밖과 이어져 훤하니 이쪽저쪽 없이 우물이 한 구멍이다. 한 구멍의 우물에서 알이 솟은 이야기는 《삼국유사》에 전하나, 박찬경은 김홍도, 에드 루샤(Ed Ruscha), 히에로니무스 보스(Hieronymus Bosch), 중국 신화집《산해경》의 그림에 빗대어 염불왕생(念佛往生), 동서의 전후경(前後景), 하늘로 오르는 문(天宮), 불로장생의 ‘오직 한마음’을 잇는다. 민정기의 <금강산 만물상>(1999)은 그것들의 종교적이고 신화적인 우물관을 현실계로 회통시킨 명장면이다. 민정기는 관념의 서사를 실재적 미학으로 바꿨을 뿐 아니라 풍경(風景)이 곧 ‘밝은 회오리’ 이미지라는 것을 보여준다. 그리고 그 회오리 풍경은 신도안의 풍수로서 자미원국(紫微垣局: 최상의 길지)의 둥근 형상과 다르지 않다. 노자가 《도덕경》에서 말한 ‘중묘지문’(衆妙之門)이 또한 바로 그것일 터이다. 우주 삼라만상과 모든 묘리(妙理)가 터져 나오는 근원으로서.


<뒷젼>, <나를 울린 한국전쟁 100장면>, <원귀도>, <군선도>, <신도안>, <감모여재도>, <송호도>, <포옹>을 비롯한 나머지 도판들은 전후경의 우물면에 어린, 이승과 저승이 교접하는 순간의 이미지 환(幻)이다. 그 환의 이미지가 오윤의 <원귀도> 속 몽타주 장면과 한 갈래로 펼쳐진 것이 <시민의 숲>일 것이다. 진창은 아무리 더러운 진창이라도 좋다, 전통은 아무리 더러운 전통이라도 좋다, 역사는 아무리 더러운 역사라도 좋다고 말한 김수영의 그 진창과 전통과 역사가 오윤의 이미지를 입고 기이하게 펼쳐지는 영상은 ‘무수한 반동’의 분절적 서사다. 서구 근대미학의 ‘한국화’(-化)가 절정으로 치닫던 1970~80년대에 오윤은, 이성과 과학과 인간을 믿었던 낙관론의 시대 르네상스를 구시대적 비관주의로 비꼬았던 보스의 회화들처럼8), ‘고딕 미학’의 한 표상으로 읽히는 <원귀도>를 한국미술계에 상제한다. 박찬경은 그것을 이미 ‘아시아 고딕’이라 이야기한 바 있다. 예컨대 그는 2014년 <미디어시티서울2014>의 강연에서 세계와 아시아를 ‘민족-국가’의 틀에서 볼 수 없다는 것을 강조하면서, 아시아를 넘어서는 지방과 지방 사이의 의외의 관계들을 보도록 제안하면서 다음과 같이 덧붙인바 있다. “레비스트로스의 ‘브리콜라주’ 방법처럼, 아시아는 시간과 시점의 변화에 따라 재구성되는 변형의 과정 그 자체이다. 중국의 사상가 왕후이는 전후 일본의 사상가 다케우치 요시미의 ‘서구의 되감기’ 개념을 되살려, 아시아가 민주주의나 평등과 같은 서구 근대의 긍정적 가치를 오히려 완성해야 한다고 말한다. 왕후이는 이를 ‘근대성에 맞서는 근대성’이라는 형용모순으로 표현한다. 근대성의 프레임에서 벗어날 때 아시아는 ‘기이한 근대성들’로 넘쳐나는 복잡성을 획득하게 될 것이다.”9)




전통, 실재로 미끄러지기


한국만이 아니라, 아시아 근대성의 기저에는 한국이 겪었던 식민, 새마을운동, 미신타파, 전통, 이데올로기 투쟁, 적군/국군, 서구/근대, 가짜현실/실제 삶, 판타지, 근대화/도시화, 현대사, 나들(개인/주체)-너들(타자), 근대주의, 자본주의 등의 개념들이 혼재한다. (근대, 근대화를 포함한) 그 모든 근대성의 개념들은 그 자체로 이데올로기일 수밖에 없을 것이다. 남근적이고 폭력적인 이데올로기의 슬픈 그림자가 짙게 새겨진 것이 <원귀도>다. 그리고 끊어지듯 이어지는 장면들이 <시민의 숲>에서 부활한다. 구천을 떠도는 원귀, 영혼들을 천도(薦度)시키기 위한 영화적 장치로서 그 넋굿은 진오귀굿이자 씻김굿에 다름 아니다. 긴 두루마리 시간으로서의 영상은 시작과 끝을 반복한다. 해원의 결말은 우주 허공에 띄운, 김수영이 무수한 반동이라 얘기한 것들의 상징(요강, 망건, 장죽, 종묘상, 장전, 구리개 약방, 신전, 피혁점, 곰보, 애꾸, 애 못 낳는 여자, 무식쟁이)을 대체하는, 박찬경식 오브제들의 은하수다. 그런데 <원귀도>와 <시민의 숲>은 큰 차이가 있다. 오윤의 그림은 미학의 고딕적 형식을 몇 개의 장면으로 나열하듯 펼쳐냄으로써 근대성의 참혹을 감정이입의 상태로 관객의 마음을 적신다는 점이다. 그것이 감동이든 감응이든, 관객은 그림에 빨려들어 간 이상 쉽게 빠져나오지 못한다. 반면, 박찬경의 영상은 영화적 서사의 감동이나 몰입을 요구하지 않는다. 관객은 몰입과 ‘소외’를 겪으며 불편함을 호소할 수도 있을 것이다. 영상과 관객의 심리적 거리두기를 요구하는 이 ‘낯설게 하기’는 베르톨트 브레히트(Bertolt Brecht)가 관객에 끼얹는 찬물만큼이나 냉소적이므로. 그러나 그 냉소의 거리두기 없이는 ‘근대’를 똑바로 응시하기 어려울 것이다.


김상돈과 협업한 <밝은 별> 연작과 <칠성도>는 무구(巫具)인 ‘명두’(明斗/明圖)에서 비롯한다. 놋쇠로 만든 명두의 상징은 앞뒤가 다르다. 배가 불룩한 앞면은 거울이다. 우툴두툴한 뒷면에는 해, 달, 칠성(七星)․범자(梵字)가 양각되어 있다. 보통은 가운데 고리가 있어서 무명끈을 맨다. 작품은 자작나무 판에 단청을 입히고 명두의 앞면과 뒷면을 각각 3개씩 보여주는 것과, 인조호피를 명두가 있어야 할 자리에 넣어서 만든 것들, 그리고 앞뒤를 다 보여주는 것들이다. 뒷면에 적힌 글씨들 ; 북두(北斗)는 성명두(星明斗), 칠성명두(七星明斗), 북두칠성명두(北斗七星明斗). 국립중앙박물관에는 고려시대에 제작한 ‘용과 구름무늬 청동거울’이 소장되어 있다. 용과 구름은 비를 관장하는 샤먼의 상징과 이어진다. 제주 칠성신이 뱀(용)이다. 칠성은 또한 바리공주의 일곱 아들이 죽어 별이 된 것인데, 그것은 진오귀굿과 씻김굿에서 유래하는 저승신의 본풀이로 이어진다. 밝은 별, 칠성도의 공간은 1층의 사슴뿔 샤먼 텔렉스의 접신(미디어 교신)과 이어지는 하늘계로 보인다. 시베리아 퉁구스샤먼은 고축굿을 할 때 머리에 거대한 사슴뿔을 단 관을 썼고, 그가 입은 옷에는 청동거울을 매달았다. 칠성님께 명을 빌듯이, 샤먼은 칠성신의 신령이요, 그래서 칠성신의 신체인 명두에서 신의 얼굴을 살폈던 것이다. <시민의 숲>을 보고 2층으로 올라  온 관객은 이 ‘밝은 별’들에서 씻김 받은 원귀들의 밝은 영혼들과 만날 수도 있을 것이다.


<승가사 가는 길>은 밝은 별을 마음에 심은 관객이 생불(生佛)의 고행을 걷는, 그 과정의 낱낱처럼 읽힌다. 승가사는 생불로 불리는 승가대사를 봉안한 절이니까. 파라솔 아래의 파란 의자, 빨간 의자에 앉아 슬라이드로 돌아가는 이미지들을 보는 ‘나’. 이미지를 좇는 ‘나’는 그 길을 걷는 이들과 어느 사이 눈이 맞는다. 현실과 비현실이 교호하는 순간이다. 그리고 ‘뒷젼’인양 차려진 파라솔 밑 명두바릿대에서 막걸리로 축원을 빌고, 명두를 뽑아 쌀알의 수로 점괘를 푼다. 순간, ‘나’는 그들이고, 관객이며 승가이고 샤먼이 되는 기묘한 순간을 체험한다. 그러고 보니 마이클 잭슨의 ‘문워크’(MoonWalk)를 잊었다. 박찬경은 왜 뜬금없게도 문워크를 슬쩍 끼워 넣었을까? 어쩌면 그 기묘한 체험 뒤의 시간은 미래가 아니라 ‘전통’이라는 보이지 않는 실재로의 미끄러짐(문워크)이라는 것을 말하고 싶었던 것은 아닐까?      






*** 2017년 황해문화 가을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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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국제 갤러리에서 배포한 보도자료를 참조했다.
2) 반야바라밀의 배를 반야용선(般若龍船)이라 한다. 불교 가람(伽藍)의 대웅전이 반야용선이다.
3) ‘안녕’이란 말은 《詩經》에 “난리가 평정되어 안녕해지면”, 《莊子》에 “천하의 안녕을 바라며 백성의 목숨을 살린다.”는 말로 등장한다. 인사말이 아니라 ‘평화’를 뜻하는 말이었다.
4) 안녕하지 못한 것이 미안(未安)이다. 안락은 안양정토(安養淨土)와 같은 말이고, 정토는 ‘청정한 국토’를 뜻한다. 박찬경은 2010년 <다시 태어나고 싶어요, 안양에>를 안양공공예술프로젝트에 출품한 바 있다. 안양시의 ‘안양’(安養)은 불교의 안양정토를 그대로 차용한 것이다. 그는 여자가 집에 있고, 갓을 쓰고, 또 거꾸로 보면 여자가 매달린 형상으로서의 ‘안’(安)과 정토로서의 안양, 그리고 그런 상징이 멜랑꼴리하게 들러붙어서 미안의 근대화 도시가 된 안양을 살폈다. 안양은 안녕하지 못했다.   
5) 한국불교의 토착화 과정에서 가람에 산신각, 산령각이 끼어들었다. 전각에 봉안된 산신은 호랑이와 함께 그려진다.
6) ‘美’의 뜻은 ‘큰 사슴뿔’에서 왔고 그것은 고대의 샤먼을 뜻한다. ‘術’은 술수에서 왔고, 옛 뜻은 술수 부리는 사람으로서의 방사, 진인(眞人)라 했다.
7) 김수영, 〈거대한 뿌리〉(1964), 《거대한 뿌리》, 민음사, 1974.
8) 보스는 르네상인들로부터 고딕 부흥가(Gothic Revivalist), 중세주의자(Medievalist)라고 비판 받았다.
9) 박찬경, “귀신 간첩 할머니-‘무늬’로서의 주제”, 기조강연 배포자료, <서울미디어시티2014>, 20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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