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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문 | 꽃그늘, 비극의 날풍경 - 송창 회화

김종길


 

꽃그늘, 비극의 날풍경
- 송창 회화의 미학적 고투(苦鬪)

김종길 | 미술평론가


‘꽃그늘’은 꽃과 그늘이 아니다. 꽃의 그늘도 아니다. 꽃그늘은 ‘해그늘’(日影)처럼 밝고 어두운 것이 한데로 뭉쳐서 카오스가 된 ‘하나’의 말이다. 그것이 둘이 아닌 것은 꽃이 그늘이요, 그늘이 곧 꽃이라는 얘기. 밝은 어둠이거나 어두운 밝음처럼 음양(陰陽)이 한 덩어리이니 꽃그늘은 잉태의 언어요, 창조의 말일 것이다. 꽃이 그늘을 품고 또 그늘이 꽃을 품었으니, 그 둘의 교합은 감흥일 것이다. 송창의 꽃그늘은 그런 감흥의 슬픈 흥취가 ‘날풍경’으로 새겨진 곳에서 피어났다.

 

 

날풍경의 진실

 

그에게 그늘은 오랫동안 비극이었고 절망이었으며 저승으로 넘어간 자들의 그림자였다. 꽃은 그렇게 넘어간 그림자의 길을 쫓아 이승으로 건너 온 환생이었다. 저승으로 졌으나 이승으로 건너와 핀 ‘그림자꽃’의 풍경이 송창의 회화다. 그 회화의 육체는 비무장지대 남쪽에서 단단했으나, 북쪽으로 쉽게 부서졌다.


송창은 그림자를 쫓지 않았다. 어린 시절 전남 장성에서의 삶은 이미 온통 그림자의 나날이었으므로. 전쟁이 끝난 뒤에도 이데올로기는 낮과 밤을 가리며 침투했고, 그의 가족은 그런 낮밤의 참혹과 공포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었다. 그의 기억에 뿌리 깊게 각인된 그림자의 나날은 짙은 그늘을 남겼다. 어쩌면 그런 그의 그림자 그늘은 그의 회화 미학을 창조하는 어떤 원형일 것이다.


1980년 광주에서 대학을 졸업하고 서울로 올라온 뒤, 그가 그늘로부터 꽃의 형상을 채굴하기 시작한 것은 <임술년, “구만팔천구백구십이”에서>(‘임술년’, 1982)에 참여하면서부터다. 그늘에서 움튼 새 잎들이 불쑥 꽃으로 솟아났다. 한 번 꽃들이 솟아나니 걷잡을 수 없이 터졌다. 그는 꽃들이 솟아나는 구체적 삶의 현실을 응시했다. 그곳은 도시 쓰레기가 쌓이는 매립지였고, 날마다 심리적 전쟁을 치루는 접경지였으며, 그림자들의 이데올로기가 살아서 낮밤으로 싸우는 비무장지대였다. 그곳의 꽃들은 떠 밀려서 부유하는 비루한 민중들이었고, 그런 민중들과 구분할 수 없는 찢긴 대지였으며, 전쟁이 할퀴고 간 땅의 역사였고 그 역사의 풍경이었다.


풍경의 정체성은 그 풍경이 자리한 곳의 역사적 층위에서 발생할 것이다. 사건으로서의 층위가 갖는 세목들은 현실의 풍경에 은유와 상징을 모심기하는 순간들을 탄생시킬 것이고, 바로 그 순간부터 풍경은 풍경 너머의 세계와 교접하면서 정의와 윤리와 미학을 질문하게 될 것이다. 남한과 북한 사이의 비무장지대는 그런 풍경들 속에서도 가장 날 것의 상징을 전유해 온 분단의 실체이다.


분단, 이것은 참으로 압도적인 불가해성의 한국적 현실일 것이다. “동강이 나게 끊어 가름”을 뜻하는 이 말의 역사는 1945년 3·8선과 함께 발화되었다가, 1953년 휴전협정과 동시에 도저히 매듭질 수 없는 논쟁의 ‘선’(線)으로 고착되었다. 그리고 그 선의 색채는 늘 비극을 몰고 오는 날카로운 ‘갈등’ 이데올로기로 이 현실을 물들였다. 송창 회화의 윤리적 뼈대는 어쩌면 그런 파국적 현실에 물든 분단의 ‘날풍경’들에서 비롯된다고 할 수 있다.


식민과 전쟁과 독재와 산업화의 숱한 그늘이 쌓이고 쌓인 거름자리에서 싹틔운 분단의 풍경들은 꽃과 그늘을 나눌 수 없어서 ‘꽃그늘’이고, 그래서 그것은 더 강렬한 ‘날풍경’일 수밖에 없다. 그의 회화 속 공간들이 잉여를 갖지 못한 채 덕지덕지 엉겨 붙듯 상징의 색들로 가득 채워진 이유다. 그 색과 풍경의 사건들 사이에서 발생하는 의미구조가 또한 그의 회화를 윤리적 아름다움으로 상승시키는 긴장의 에너지일 것이다.


풍경에도 정의가 있을까? <굴절된 시간>(1996)은 20년 전의 작품이지만 최근 사드배치 문제와 직결되면서 그런 문제의식을 첨예하게 묻고 있다. 중단거리 탄도미사일 방어체계라지만 그것은 곧 유사시 그 풍경의 자리에 집중 포화로 쏟아질 포탄과 포탄의 화염을 예지적 감각으로 보여주기 때문이다. 전쟁에는 정의가 없다. 전쟁의 시간들이 썩어서 역사가 될 때 죽은 정의는 풍경으로 자랄 뿐이다.


그 시간의 역사는 굶주린 늑대와 같아서 칼 같은 눈빛으로 풍경 속을 잠입하고 내달리고 물어뜯는다. 노을 진 하늘의 수만 마리 새떼들의 난무(亂舞)를 거대한 화폭에 새긴 <나는 새는 경계가 없다>(2015)의 풍경은 황홀경이 아니다. 그것은 경계의 속경(俗境)이요, 눈빛들의 영경(靈境)이며, 없는 현실의 비현실이 있는 현실로 굽이쳐 넘어 온 ‘통일’이다. 틀림없이 바람은 북쪽으로 흐르는 방법을 잊었다. 김대중과 노무현을 제외한 이 땅의 권력들은 그 방법을 잊었고 지우려 애썼다. 미셸 우엘벡(Michel Houellebecq)은 『지도와 영토』에서 “오직 바람에 풀들만이 하늘거릴 뿐. 식물의 압승이다”라고 마지막 문장을 적었는데, 송창의 회화는 오롯이 그런 마지막 문장들로만 채워져 있다. 민통선 접경지를 횡단하는 그의 발과 눈과 손은 임술년의 선언 미학을 끝까지 추구해 온 것이다.


그는 ‘노출된 현실/풍경’을 쫓는 여행자이자 역사가이며, ‘감춰진 진실/풍경’에 직핍(直逼)해 들어가는 관찰자다. 그가 쫓는 풍경들은 예외 없이 현실이어서 미신이나 전설 따위가 간섭하거나 침윤될 수 없다. 때때로 어떤 풍경들에서 판타지를 엿보기도 하고 그 판타지의 환(幻)을 꿈의 풍경으로 드러내기도 했지만 꿈에서조차 그는 풍경의 뿌리를 더듬었다. <꿈>(2013)은 이쪽과 저쪽을 잇는 다리를 그린 것이지만, 꿈에서 그것은 ‘잇기’의 통일이 아니라 ‘끊어 가름’의 분단을 악몽처럼 펼쳐낸다. 예기치 않게, 풍경의 긍정이 이처럼 결정적 파국의 장면 앞에서 중단될 때마다, 그 환각적인 분위기는 현기증 나는 공포와 종말론적 징후가 뒤섞여서 일종의 초현실적 상황을 초래하기도 한다. 오래전에는 실크로드였고 연행길이었으나 일제 때는 탈취를 위한 1번국도로 변신해야 했던 접경지 내의 의주로를 그린 <섬광>(2015)은 또 어떤가! 길의 흔적은 군사훈련으로 진창이 되어 남아 있을 뿐이다. 그 진창의 저 너머의 붉은 노을 속으로 노오란 섬광이 솟는다. 저 섬광의 불빛은 도깨비불처럼 매혹적이다. 진창 길 너머에 저 ‘홀림’이 있으니 저것은 현실이 아닐 것이다. 진창이라는 현실과 섬광이라는 비현실, 어쩌면 그것이 우리가 넘지 못하는 이데올로기의 초현실일지 모른다.  


‘임술년’에의 참여는 이렇듯 꽃그늘의 미학을 궁구했던 그의 회화가 ‘회화적 육체’를 얻게 된 사건이었고 동기였다. ‘임술년’의 작가들은 ‘노출된 현실’과 ‘감춰진 진실’을 묻고자 했다. 그 시대는 아무나 혼자서 그런 싸움을 할 수 없었다. 그들은 가장 낮고 치열한 회화적 현장을 찾아 나섰고 그곳에서 새로운 리얼리즘의 미학적 형상과 만났다.   

 


 

임술년(壬戌年)

 

1982년 10월 20일, 서울의 관훈동 덕수미술관에서 ‘임술년’이 동명의 창립전을 열었다. 광주의 조선대와 서울의 중앙대 출신들로 구성된 박흥순, 송창, 이명복, 이종구, 전준엽, 천광호, 황재형 등 7인의 동인이 참여한 이 전시는, 1979년에 결성되었고 1980년에 창립한 <광자자유미술인회>(‘광자협’)와 <현실과 발언>(‘현발’)의 뒤를 잇는 매우 중요한 민중미술전으로 기록되고 있다. 


‘광자협’과 ‘현발’이, 1969년 ‘현실동인’이 우리미술계에 제출한 「현실동인 제1선언문」으로부터 직접적인 영향을 받아 탄생한 비판적 현실주의 그룹이라면, ‘임술년’은 ‘지금, 여기에서’라는 매우 실존적이고 현실적인 테제로부터 출발한 회화 동인이었다. 그들은 창립선언문에서 “<임술년, ”구만팔천구백구십이“에서>는 ‘임술년’(1982년)이란 시간성과 ‘구만팔천구백구십이’(우리나라의 총면적수치)란 장소성, 그리고 ‘~에서’란 출발의 의미를 동시에 포함한다. 즉, ‘지금, 여기서’라는 소박한 발언인 것”이라고 밝히고 있다.


‘지금, 여기에서’의 이론적 근거가 얼마나 쉽고 간결한가! 그 쉬움과 간결함에 깃들어 있는 삶의 무게는 얼마나 무거울 것인가! 그들이 서 있는 그 시간과 장소의 현실성은 얼마나 실존적인가! 그럼에도 그것이 ‘소박한 발언’이라고 주장하는 그들의 태도는 또 얼마나 치기어린가! 그들은 ‘소박한 발언’으로서의 회화적 구현을 위해 다음과 같이 덧붙였다.   

 

우리가 갖고져 하는 시각은 이 시대의 노출된 현실이거나, 감춰진 진실이다. 그것은 ‘인간’ ‘사물’ 또는 우리들 스스로가 간직해야 할 아픔이며, 종적으로는 역사의식의 성찰, 횡적으로는 공존하는 토양의 형성이다. 우리는 다원적인 이 시대의 모든 산물을 수용하지만, 문화의 오류를 구체적이고 명료한 언어로서 얻고져 하며, 현실에 드러난 불확실한 과도적 상황을 솔직하게 형상화 할 것이다.1)

 

‘임술년’이 추구하고자 한 미학적 실천 개념들은 선언문의 이 마지막 두 문장에 드러나 있다. 예컨대 ‘노출된 현실’, ‘감춰진 진실’, ‘역사의식의 성찰’, ‘공존하는 토양의 형성’, ‘현실에 드러난 불확실한 과도적 상황을 솔직하게 형상화’ 등이 그것들이다. 송창의 ‘꽃그늘’에 비유하면, 노출된 현실이 ‘꽃’이요, 감춰진 진실은 ‘그늘’일 것이다. 성찰과 공존이 또한 ‘꽃’이라면 문화의 오류는 ‘그늘’이고, 그것들의 불확실한 과도적 상황이 솔직한 형상화로 탄생한 것이 하나의 ‘꽃그늘’일 것이다. ‘임술년’의 첫 전시에서 송창과 그의 동료들이 고민했던 문제의식들은 200호의 대형 캔버스에 표출되었다. 극사실주의와 리얼리즘과 표현주의와 초현실주의가 섞이고 뭉쳐서 섬뜩하게 재현된 회화는 한국의 현실이었고 민낯이었다.


1987년 8월 부산 해인화랑에서의 전시를 끝으로 ‘임술년’이 해체되자, 그는 1988년 2월에 광주의 가든미술관에서 <삼인記行>(2.21~26)을 열었다.2) 초대 엽서장 뒷면에 ‘기행’(記行)의 참뜻이 무엇인지를 알 수 있는 문장이 있다. “삼인記行은 「송창/분단상황과 군사문화, 조진호/광주사람들, 무등산이야기, 황재형/쥘흙과 뉠땅」으로 시작합니다.”를 상단에 고딕으로 크게 적고 하단에는 “송창은 경기도 성남에서, 조진호는 전라도 광주에서, 황재형은 강원도 태백에서 처자식과 함께 살고 있습니다.”라고 썼다. 임술년의 정신을 이어가겠다는 각오가 엿보인다. 삶의 현장과 결코 유리되지 않는 미술을 하겠다는 ‘소박한’ 결의도 보이고. 그런데 <삼인記行>은 더 이어지지 않았다. 오히려 그해 6월에 그림ᄆᆞᄃᆞᆼ 민에서 이명복, 이종구, 황재형과 함께 <4인의 우리땅 동행>(‘동행’, 1988)을 새로 시작하게 되는데, <삼인記行>이 가고자 했던 길을 ‘동행’이 완성한 느낌이다. 그들은 1993년까지 네 번의 전시를 기획했다.


‘동행’을 통해 송창이 우리 땅에서 분단의 풍경을 목격했다면, 이명복은 미군과 기지촌의 풍경을 목격했고, 이종구는 그의 고향인 충남 서산의 오지리에서, 그리고 황재형은 강원도 태백의 탄광촌에서 삶의 진실성을 목격했다. 그들은 ‘우리땅’을 띄어쓰기 하지 않았다. 내 땅 네 땅 없이 ‘우리땅’일 수밖에 없는 국토에서 그들은 그때까지 한국 현대회화가 제대로 응시하지 못한 부조리한 현실을, 모순에 찬 현실을, 들끓는 삶의 현실을 본격적으로 목격하고 그것을 캔버스에 새겼다. 그것은 시대의 음각화이기도 했다. 그들이 추구했던 민중미술은 현실의 부조리와 모순과 그 들끓음의 실체를 드러내는 것이었다.   

 
이후 그의 작품들이 초대받아 출품되는 전시들은 예외 없이 한국현실의 전경(前景/노출된 현실)과 후경(後景/감춰진 진실)이 하나의 장면에서 뒤엉켜 만들어 내는 실체들이었고, 그 실체의 진실성을 위해 고투하는 ‘정신전’(精神展)이었다. 1993년의 <코리아통일미술전>, 1994년의 <민중미술 15년: 1980-1994>, <동학 100주년 기념전>, <사실정신전>, 1995년의 <비무장지대 작업전>, <광주비엔날레-광주 5월 정신전>, <해방 50주년 역사미술전>, 1998년의 <5.18 18주기 기념전-새로운 千年 앞에서>, 2004년의 <아시아의 미술전-아시아는 지금>, 2005년의 <땅의 기억전-경기 평택 대추리>, <조국의 산하전: 평택-평화의 씨를 뿌리고>, 2007년의 <민중의 고동-한국미술의 리얼리즘 1945-2005> … 2016년의 <2016 DMZ-사람풍경전>까지.3)

 


 

‘임술년’에서 출발한 그의 회화적 주제가 ‘분단’에 가 닿았을 때 그는 다만 풍경으로서의 육체만을 그리고 싶지 않았다. 풍경의 세목들이 드러나지 않는 회화는 자칫 ‘풍경화’의 일반론에 갇힐 수 있기 때문이었다. 그는 풍경의 껍질을 걷어낸 자리에서 그 풍경에 그늘져 있는 역사의 장면들을 화면에 호명하기 시작했다. 1996년의 작업은 그가 그동안 시도해 보지 않았던 것들이다. 그것은 6.25의 흑백 사진들 중에서 몇 개의 이미지를 출력한 뒤 그 위에 다시 실크스크린으로 소나무 이미지를 오버랩 시킨 작업들이었다. 1997년 동아갤러리 개인전 <기억의 숲-소나무:송창>전이 끝난 뒤 다른 곳에 소개된 적이 없는 그 작품들의 이번 전시 출품 목록은 다음과 같다. <판문점-휴전선 긋기>(1996), <서울역 앞 미군의 첫 입성행군>(1996), <일본군 부산 도착 시가행군>(1996), <돌아오지 않는 다리>(1996), <흐르는 물처럼-광주>(1997), <임진벌에서-광주>(1997). 그리고 이 작품들과 함께 <빗속에서>(1996)가 서 있을 것이다.


<기억의 숲-소나무:송창>전은 송창 미술세계에서 하나의 분기를 이루는 전시였다. 1991년의 <송창-분단시대의 풍경화>전이 보여주었던 풍경은 그것이 리얼한 사실로부터 탄생한 풍경화임에도 불구하고 분단 혹은 분단시대라는 주제가 다소 추상적으로 읽혔다. 비무장지대의 풍경이라고는 하나, 그것이 어떻게 분단의 상황과 직면하고 있는지가 보이지 않기 때문이다. 분단을 인식하기 위해서는 그 상황의 역사적 실체에 접근하지 않고서는 거의 불가능할 것이다. 그래서 송창은 풍경을 잠시 내려놓고 역사의 층위에 분절적으로 각인되어 있는 사진 속 장면들을 호명했던 것이다. 그 장면들은 인간이 기억하고 있는 게 아니었다. 그것을 기억하는 것은 대기를 흐르는 공기의 자취였고 그 자취로 호흡하는 나무였으며, 나무들의 기억이 공존하는 숲이었다. 숲은 역사의 기억을 몽타주하듯 펼쳐낼 수 있는 영사기였다. 그는 비로소 풍경이라는 ‘장면’을 획득하기 이른다.     

 


 

들끓는 풍경

 

송창은 처음 서울의 매립지에 주목했다. 난지도는 1978년 서울의 쓰레기 매립장으로 지정되었고 불과 15년 만에 9,200만톤의 산업폐기물과 건설 폐자재와 생활 쓰레기로 100여 미터의 산이 된 곳이다. 그가 매립지를 그릴 때는 구의동, 장안동, 상계동, 방배동, 압구정동의 소규모 매립지가 사라지면서 난지도가 빠르게 쌓여갈 때였다. 그것은 거대한 쓰레기 산이 되었다.


창립전을 비롯해 ‘임술년’ 정기전에 출품한 그의 <매립지> 연작은 그렇게 도시가 토해내고 밀어내는 쓰레기의 ‘더러운’ 풍경들이다. 서울의 위성도시들에서 배출되는 쓰레기들도 그곳에 매립되었다. 그의 회화는 용광로처럼 활활 거리는 검붉은 쓰레기 더미와 그 더미 너머의 신도시를 신기루로 보여준다. 개포3지구처럼 구체적인 지역도 등장한다.


그가 매립지에 주목했던 것은 그곳에 사람이 살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매립지> 연작의 전면에는 매립지를 삶터로 살아야 했던 사람들의 군상이 그려져 있다. <난지도-매립지>(1984), <난지도-매립지>(1985)는 아름다웠던 난지도의 풍경은 온데간데없고 검붉은 하늘과 검붉은 대지와 그 하늘땅을 벗어나지 못한 채 살고 있는 검붉은 가족들이 있을 뿐이다. 하늘과 땅과 사람과 나무와 물과 산이 시커멓게 타들어가는 이 풍경은 그러므로 ‘꽃그늘’일 것이다.


꽃그늘의 꽃술처럼 새겨진 인물들의 초상은 인물의 사실적 재현 따위와는 어울리지 않는다. 미학적 표현 양식들을 뒤섞듯이, 그의 회화는, 그의 인물들은 그 형상을 표현하는 물감을 짓이기고 흘리고 쳐 발라서, 그 대지가 직면한 처참한 오염과 살육과 구토와 현기증의 즉물적 상태를 비릿한 날것으로 쏟아 놓았다. 그런 상태에서 붉은 불도저와 붉은 대지와 붉은 색들의 난무는 구분되지 않는다. 매립지에 속한 사람들은 이 뜨거운 대지에서 이제 막 형상을 입고 솟아난 땅의 사람들처럼 보인다. 흙덩이가 머리가 되고 팔이 되고 발이 되어서 만들어진 그 몸은 그래서 어떤 동세를 취하고 있는데, 그 형상들의 언어는 절규다.
절규, 그 비극의 언어가 접경지의 풍경을 이룬 곳이 비무장지대일 것이다. 그는 1984년, 85년, 86년으로 이어지는 3년의 시간동안 주제를 ‘매립지’에서 ‘비무장지대’로 옮긴다. <상사리고개(무명용사의 고지)>(1986)는 매립지에서 밀어올린 풍경의 북쪽지대가 비무장지대의 철책에 가 닿았음을 증거 한다. 비(피) 흘리는 철책의 현실(노출된 현실)과 흰 해골의 형상(감춰진 진실)을 어떤 징후적 풍경으로 표출한 이 그림은 남한의 현실이 얼마나 큰 모순과 망각에 처해 있는지를 까발린다. 

 


 

매립지가 삶의 근경이라면 비무장지대는 원경일 것이다. 매립지는 보이는 현실이고, 비무장지대는 보이지 않는 비현실이요, 초현실일 것이다. 매립지가 노출된 현실이라면, 비무장지대는 감춰진 진실일 것이다. 송창은 보이지 않는 비현실로서의 비무장지대에 다시 주목했다. 그 감춰진 진실이야 말로 그가 추궁해야 할 미학적 리얼리티일 것이라고 생각했다. 감춰진 것을 미학적으로 노출시키겠다고 생각하자, 그동안 보이지 않았던 풍경이 보이기 시작했다. 그는 그 원경 속으로 걸어 들어갔다. 봄여름가을겨울 낮밤도 없이 그는 걸었다. 풍경들에는 모두 이름이 있었다. 그의 회화는 그 지점에서 이전과는 다른 모습을 갖추기 시작했다. 시간과 세월이 쌓여서 역사가 된 그림자들의 겹은 화면에서 두툼한 마티에르를 형성시키며 눌러 붙었고, 그림자의 세목들이 다시 층층이로 쌓여서 이룰 수 없는 어떤 풍경들이 되기 시작했다. 그것은 구체적이었으나, 화면을 이룰 때는 그것이 물감인지 풍경인지를 구분할 수 없었다.

그는 대학을 졸업한 지 10년이 되는 1990년에 경원대 대학원에서 석사학위를 취득했다. 논문은 「독일 표현주의 미술운동에 관한 연구」이다. 1990년에 그는 그림ᄆᆞᄃᆞᆼ 민 개관 4주년 기념 초대전으로 <우리시대의 표정-인간과 자연>전과 <조국의 산하Ⅱ-민통선 부근>전을 치렀으나 논문과 무관하다. 그가 독일의 표현주의 미술운동에 관심을 가진 이유는 무엇보다 <매립지>와 비무장지대 연작과 관련이 깊다는 생각이다. 물론 <매립지> 연작의 회화적 형식은 비무장지대 작업들에서 더 강렬해졌다. 논문을 준비하던 1988년 89년, 그의 작업들은 ‘민중’과 ‘분단’, ‘통일’이라는 화두에 휩싸여 있었고 그 즈음 베를린 장벽이 붕괴하고 사회주의가 몰락했다.


그는 논문 초록의 첫 문단에서 “미술은 사회역사적 현실을 반영한다는 측면에서 바라볼 때 단순히 기계적 묘사 복제가 아니라 나름대로의 특수한 형식적 구성과정을 통해 굴절된 반영으로서, 때로는 추상적 형태로 드러나는가 하면, 때로는 사회적 삶을 심층적으로 반영해 내기도 한다. 따라서 미술운동이란 현존하는 미술문화의 여러 모순을 포괄적으로 해결하고 새로운 미술문화를 이룩해 나가는 것”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그런 다음 서론에서 표현주의의 개념을 다음과 같이 적시한다.

 

표현주의란 물체의 표면적인 현상을 중요하게 다루는 인상파에 대한 반동으로써 기만적인 표면적 자극을 묘사하길 거부하고 인간의 정신적이고 내면적인 감동을 그림으로 표현하려고 했다. 따라서 표현주의 미술은 간혹 종교적인 황홀경으로서 또는 내부적인 사회질서에 대한 깊은 정신적인 관심과 감동적인 환상으로서 미래를 나타내려고 했다.4)

 

그는 그의 회화적 특질이 어디에서 연유하는지를 찾고 싶었을 것이다. 그의 작품들은 현실의 들끓는 모순과 부조리에 더 깊이 다가갈수록 강렬해졌기 때문이다. 리얼리즘의 미학을 따르나, 그 미학적 형식은 표현주의에 가까웠다. 아니 신즉물주의 회화의 느낌도 적지 않았다. 구체적 형상보다 먼저 늘 그의 내부에서 끓고 있는 정신적인 어떤 것이 화면을 압도하며 치고 나왔으므로. 그 압도함의 거친 터치와 색채는 시간이 갈수록 더 두터워지고 있다. 그러니 그의 회화 미학을 ‘표현적 리얼리즘’이라고 해야 하지 않을까?    
 


 

조화(弔花), 잊힌 것들에의 애도

 

그는 분단이라는 강밀도의 선에 다른 하나의 미학적 선을 덧대어 긋는다. 통일대교, 주상절리, 덕진산성, 임진강 초평도, 의주로, DMZ, 노동당사, 장단…. 그가 발로 누볐던 풍경들과 그 숱한 풍경의 잔상들이 기억 속에서 엉겨 붙어 나타나는 ‘겹풍경’ 사이의 선을. 그 선에 전쟁으로 죽은 군인/사람들과 죽은 풍경들에서 자란 산 사람들이 있고, 산 풍경들에 깃들어 있는 죽은 침묵이 있다. 그의 회화는 분단이 내재화 된 풍경으로서의 분단을 동시에 드러내고 있는 것이다. 


그는 풍경의 사실(史實)로 ‘분단’이라는 실재를 그려온 화가인지 모른다. 회화로 써 내려간 역사화로서의 ‘내셔널 지오그래픽’일 수 있고, 분단 풍경의 보고서를 망각의 주체들에게 제출해 온 샤먼 예술가일 수도 있다. 그 날풍경의 이미지를 문자화 하는 것은 두려운 일이다. 그것을 있는 그대로 서술할 수 없을뿐더러 설령 그대로 서술한다고 할지라도 그것은 실체를 드러내지 않는 서사다. 그가 마주한 풍경들은 그가 원하는 방식으로 배열되고 각색될 수도 없을 것이다. 실재하는 풍경과 역사와 사건들을 회화로 전유하기 위해 작가의 내면이라는 소화기관을 통과시키는 모더니즘적인 방법 이후의 미래를 아직 누구도 발견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낙화>(2014), <그 곳의 봄>(2014), <등록문화재 408호>(2014)는 유엔군 화장장을 주제로 한 연작이다. 1952년 유엔군 전사자를 화장하기 위해 경기도 연천군 미산면 동이리 610번지에 지었으나 전쟁이 끝나고 완전히 폐기되었다. 6.25전쟁 당시 서부전선의 고지쟁탈전이 치열했고 그만큼 희생자의 수도 많았다. 1952년, 벨기에군과 영국군이 이곳 금굴산에서 중공군과 맞서 싸운 것이 결정적이었다. 화장은 짧은 장례의식 후 실행되었고 유해는 본국으로 송환되었다. <낙화>에서 그는 거의 유일하게 남아있는 이 화장장의 불구덩이를 그리고 있다. 그가 할 수 있는 일이란 싸늘하게 식은 불구덩이에 회화적 각색을 가미해 여전히 활활 타고 있는 불을 그리는 일이다. 그러나 그런 각색을 창조적 각색이라고 치켜세울 수는 없을 것이다. 깜깜한 우주공간 속에서 빠른 속도로 회전하는 얼음과 달의 파편의 이미지에는 아무런 인간적인 것이 없는데도 불구하고 인류는 늘 탈역사적 아우라를 덧씌웠듯이, 산에 갇혀서 잡풀에 잠식당해 있었던 화장장에 불씨를 새김으로써 그는 마치 영원히 하늘에서 빛나는 별과 같은, 탈역사적 상징을 덧씌웠기 때문이다. 김사과, “소설에서 ‘윤리’를 찾는 나르시스트에게 고함”, 《프레시안》, 2011. 11. 11. 참조.


 <그 곳의 봄>은 죽음을 상징하는 꽃(망초)과 죽음을 애도하는 꽃[조화(弔花], 그 두 개의 장면을 지켜보는 영국군의 개(래브라도 리트리버종)를 세 개의 장면으로 그렸다. 화장장에 서 있는 돌비석에 덕지덕지 붙은 꽃과 흘러내리는 붉은 꽃비들, 그 꽃들의 불꽃 상징어로 작품에 등장하는 오브제가 무덤가에 꽂았다가 버려진 ‘조화’(弔花)다.

 



송창의 ‘날풍경’ 회화가 가진 윤리는 이 조화에 의해서 최근 한 층 더 깊어지고 있다. 이번 전시의 의미는 그의 ‘꽃그늘’이 조화와 조응하면서 새로운 국면의 상징계를 만들고 있다는 점이다. 그런데 여기서 주장되는 회화적인 윤리란 무엇일까? W. G. 제발트(Sebald)의 『토성의 고리』를 통해 유추하면 그것은 잊힌 것들을 애도하는 것이다. 파국의 풍경에서 통증을 느끼고, 결국 여행의 끝에서 진짜로 몸에 마비를 일으키는, 신음하는 마음이다. 그러니까 이 윤리는, 엄청난 예민함에서 비롯된, 마비시키는 윤리다. 중단시키는 윤리다. 위의 김사과 글에서 인용했다. 참고로 나는 송창의 회화를 깊게 사유해 들어가면서 불현듯 ‘날생명’의 회화론을 생각해 냈고, 그 과정에서 최원호와 김사과의 위 글들을 만나게 되었다. 이 글의 문장들에는 그들의 글을 읽으면서 발아시킨 사유의 흔적들이 적지 않게 배어있다.


 조화는 향이 없는 꽃이요, 향이 없는 색이다. 그러나 그 꽃과 색은 지지 않는다. 날풍경의 회화는 조화의 육체와 만나서 귀신이 되고, 제의가 되고, 시각적 부유물에서 통각적 실체로 환생한다. 제주의 신화에 나오는 자청비는 서천 꽃밭에서 환생꽃을 얻어다 자신의 연인 문도령을 살렸다. 자청비는 그 꽃밭을 다녀온 뒤에야 스스로 파국을 결정하게 된다. 그것은 스스로의 애도였을 것이다. 스스로를 중단시키는 윤리였을 것이다. <연천발 원산행>(2013), <의주로Ⅱ>(2017), <기적소리>(2013)를 비롯한 최근 작품들에서 그는 그렇듯 애도하는 회화적 윤리를 조화를 통해 심화시키고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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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임술년, “구만팔천구백구십이”에서》 창립전 포스터 겸 리플릿, 1982.
2) 가든미술관은 당시 광주직할시 동구 충장로 3가 가든백화점 내에 있었던 미술관이다.
3) 송창의 전시들은 이 책 뒤의 전시연혁을 살펴보기 바란다.
4) 송창, 『독일 표현주의 미술운동에 관한 연구』, 경원대학교 대학원, 1990. 4쪽.
5) 김사과, “소설에서 ‘윤리’를 찾는 나르시스트에게 고함”, 《프레시안》, 2011. 11. 11. 참조.
6) 위의 김사과 글에서 인용했다. 참고로 나는 송창의 회화를 깊게 사유해 들어가면서 불현듯 ‘날생명’의 회화론을 생각해 냈고, 그 과정에서 최원호와 김사과의 위 글들을 만나게 되었다. 이 글의 문장들에는 그들의 글을 읽으면서 발아시킨 사유의 흔적들이 적지 않게 배어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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