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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론 | 세계의 우물 속 생명신화 - 이억배 그림책

김종길


 

세계의 우물 속 생명 신화
- 이억배의 ‘산 미술’ 미학과 그림책 운동

 

김종길 | 미술평론가

 

그림책은 문학도 아니고 미술도 아니다. 그림책은 서사도 아니고 이미지도 아니다. 그림책은 어린이도 아니고 어른도 아니다. 그림책은 이것도 아니고 저것도 아니다. 그림책은
그것들을 모두 포함하거나 또 다른 독자적인 그 무엇이다. 그림책은 그냥 그림책이다.
_ 이억배, 『이억배』, 2016년 순천시립그림책도서관 도록에서

 

이억배는 1980년대에 미술운동과 문화운동을 했고, 1990년대 중반 이후부터는 그림책 작가로 살고 있다. 운동의 시대와 작가의 시대를 구분할 수는 있어도 그의 미술세계가 성취하고 있는 미학은 구분할 수 없을 것이다. 미술동인 ‘두렁’에서 출발한 그의 미술은 그 활동이 짧았다고는 하나, 그 이후에 그가 주도적으로 참여했던 ‘우리그림’, ‘안양문화운동연합’, ‘우리들의 땅’의 정신이 ‘두렁’이 추구했던 미학과 완전히 다르다고는 할 수 없기 때문이다. ‘두렁’은 민족적 형식과 민중적 미의식을 추구했고 이억배의 작품들은 그 연장선에 있다고 해도 무방하다. 이 글은 그가 살았던 시대를 함축적으로 정리한 것에 불과하며, 뒤에 붙인 작품론도 하나의 얼개를 제시했을 뿐이다. 차후, 본격적인 연구를 다짐하며 수원시립아이파크미술관의 전시회 평문에 붙인다.

 


 

Ⅰ. 들어가며

 

1986년 2월 민족미술인협의회(이하 ‘민미협’)는 서울 인사동에 민미협의 시각예술 활동공간인 ‘그림마당․민’을 개관하고 80년대 후반부터 목판화 전시를 다수 기획했다. 1986년 5월 <오윤 초대전>을 시작으로 1988년 <중국현대목판화전>, 그 해 9월 “80년대 목판화 자리매김 마당”을 주제로 <한국민중판화 모음전>, 1989년 12월 <홍성담 판화전>, 1990년 중국현대목판화의 대가 장망(張望)의 목판화전, 그리고 1992년 3월 <92목판화신작초대전>이 기획되었다. 이 전시에는 김문주, 김봉준, 김준권, 남궁산, 박찬응, 박진원, 유연복, 이기정, 이상호, 이억배, 이인철, 이준석, 정진석, 조범진, 최경태, 홍선웅 등이 참여했다. 그들은 1980년대 중후반부터 민중미술의 새로운 미적 형식으로 목판화를 실험했던 주요 작가들이었다. 이억배는 이 전시에 <가지치기>를 출품했다. 작가 개인으로 초대받은 첫 전시였다.


1992년 이른 봄에 제작한 목판화 <가지치기>는 이억배 미술세계의 한 전환점에 서 있는 작품이라 할 수 있다. 그는 이 작품 이전에 한 예술가로서의 ‘이억배’를 소환한 적이 거의 없었다. 그의 20대 청년기는 온통 시대와 역사와 운동의 한 복판에서 ‘민주화’라는 거대한 물결 속에서 ‘서로-삶’의 공동체적 신명을 위해 요동쳤을 뿐, 스스로 예술가 주체가 되는 ‘홀로-삶’의 고독과 소외를 갖지 못했던 것이다. 예술가에게 ‘홀로-삶’의 소외는 고립무원의 닫힌 세계가 아니라 ‘서로-삶’의 공동체를 향한 고치(cocoon) 속의 완전한 어둠이요, 절대적 고독일 수 있다. 예술가는 그 고치를 벗어야만 다시 ‘서로-삶’의 열린 신명으로 나아갈 수 있는 것이다.


그는 1979년 대학에 입학해서 군 생활을 제외한 대부분의 시간을 미술운동에 헌신했다. 그가 본격적으로 뛰어들었던 1980년대 후반의 미술운동은 그것이 또한 사회운동이고 정치운동이어서 엄청난 내적 에너지를 소진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나’를 깨우치고 채우는 시간으로서의 ‘홀로-삶’이 없이 ‘나’를 투쟁적으로 소진해야 하는 ‘서로-삶’의 신명은 시나브로 꺼져가는 촛불과 다르지 않을 것이다. 그에게 촛불의 임계점이 되었던 것은 1991년 5월 6일 오후 4시 45분경, 안양시 안양7동 안양병원 2층 중환자실에 입원 중이던 한진중공업 박창수 노조위원장의 투신 사망 사건이었다. 그는 당시 안양에서 문화운동을 하고 있었고 그래서 박 위원장의 죽음은 가장 근거리의 투쟁이 되었다.


그 해 4월 26일 학원자주화 투쟁에 가담했던 명지대 강경대(20살, 경제학과 1년) 학생이 백골단에 맞아 숨지고, 얼마 후 박창수 노조위원장마저 의문사 하자 전국의 노동조합이 들끓었다. 게다가 검찰과 경찰이 박 위원장이 숨진 그 다음날 주검에 대한 부검을 강행하면서 강제해산과 강경 진압작전을 펴 부상자가 잇따랐고, 결국 영안실 분향소의 두께 25cm 시멘트벽을 쇠망치로 부수고 들어가 부검하는 시대의 참혹을 저질렀다. 그 날 강제부검에 항의하는 노동자․학생 2천여 명은 안양시내 벽산쇼핑 앞에서 비를 맞으며 심야시위를 벌였다. 이억배는 그 자리에 있었다.


김지하는 5월 5일, 강경대의 타살에 항의하며 한 달 사이에 열 한 명의 학생들이 분신하자, ‘시체 선호증’, ‘싹쓸이 충동’, ‘자살 특공대’, ‘테러리즘과 파시즘의 시작’이고 심지어 인민사원의 집단학살에 비유하며 「죽음의 굿판 당장 걷어 치워라」를 조선일보에 기고했다. 그러나 박 위원장의 주검과 검찰, 경찰의 몰(沒)인간적 만행은 그 ‘죽음의 굿판’을 선동하는 세력이 누구인지를 똑똑히 보여주었다. 두 달 후, 박 위원장의 장례식을 위해 경기남부 수원 및 안양 지역의 미술조직, 서울의 노동미술위원회 등 여러 문예조직이 참여했다. 그도 노래패, 연극패, 미술패 등이 결합한 통합 문예팀에서 영결식을 준비하고 진행했다. 그러나 그 시간은 그에게 수많은 의문과 절망과 분노와 논쟁의 시간이기도 했다.


그 일이 있고 얼마 뒤, 그는 박 위원장 장례를 조문했던 한 후배의 주검과 다시 마주한다. 군인이었던 후배는 조문이 시비가 되어서 선임 병한테 맞아 죽었던 것이다. 박 위원장의 장례를 끝내고 다시 원광대 병원 영안실에서 두 달을 보내는 동안 그는 “미칠 것만 같았다”고 한다. 군산 격포 앞바다에 후배의 주검을 뿌리고 그는 그의 시간을 정지시켰다. “나는 하지 않겠다. 그만하겠다.”는 마음으로. 1991년 겨울이었다.      


그 겨울이 지나고 새 봄이 되자 그는 뒷산 약수터를 찾기 시작했다. 멈추지 않으면 볼 수 없는 것들이 있듯이, 그는 뜻밖에 찾게 된 뒷산 약수터에서 마음의 위안을 받았다. 그러던 어느 날 그곳에서 봄의 새싹을 발견한다. 아주머니들이 약수터 근방에서 봄나물을 캐고 있었던 것이다. 긴 겨울을 견디고 싹을 틔운 그 작은 생명들을 보면서 ‘아, 봄이구나!’를 속으로 외쳤다. 그리고 늘 가지고 다니던 스케치북을 꺼내 그것들을 그리기 시작했다. 그의 내부에서 새로운 미술의 언어가 술렁이기 시작했다. <가지치기>는 그 술렁임의 결과였다. 사다리를 타고 올라가 큰 감나무 가지에 걸터앉은 뒤 전기톱으로 가지치기를 하는 사람과 그 아래에서 잘린 가지를 묶고 있는 사람들을 보면서 그는 ‘다시 살아야겠다.’는 생(生)의 느낌을 얻었던 것이다. 감나무 가치치기는 새봄에 해야 가을에 맛 좋은 감을 생산할 수 있다. 그는 <92목판화신작초대전>을 마치고 새 가지를 틔우기 위해 불교미술 공부에 들어갔다.


불교미술은 그가 처음 미술동인 ‘두렁’에 참여했을 때부터 보았던 것이고, 또 1987년 안양에서 ‘그림사랑 동우회 우리그림’(이하 ‘우리그림’)을 결성했을 때 ‘우리그림’ 초대 회장이었던 홍대봉 불교미술연구회장의 영향도 적지 않았다. 그는 3년여 시간 동안 불교미술로 마음을 정화했다. 그리고 1993년 그는 그림책 작업에 전념하기로 결정한다.

 


 

Ⅱ. 미술동인 ‘두렁’ 활동과 ‘산 미술’에의 자각

 

홍익대 조소과에 입학하게 된 것은 고등학교 은사였던 조각가 김인겸의 영향이 컸다. 그가 1학년을 마칠 무렵 10.26사건이 터졌고 그날부터 1980년 5월 17일까지 ‘서울의 봄’이 계속되었다. 그러나 그날 5월 17일은 이른바 ‘서울역 회군’으로 불리는 대학생들의 집회 해산이 있던 날이기도 했다. 그는 그들과 함께 서울역에 있었다.


그는 수원에서 “의식적인 활동을 전개했던” 미술그룹 ‘포인트’의 제2회 <포인트>(1980)에 고교 동창이었던 박찬응과 함께 참여했다. 그리고 그 이듬해 군에 입대했다. 그의 짧지만 강렬했던 시대적 체험과 전시 참여는 이후 그가 미술동인 ‘두렁’의 회원으로 현장에 나갈 수 있었던 큰 힘이 아니었을까 생각한다.
1984년 제대 후 복학해서 그는 민화반 동아리에 가입해 활동을 시작한다. 그리고 그곳에서 ‘두렁’의 라원식, 양은희 등을 만났다. ‘두렁’은 1983년에 이미 애오개소극장에서 창립예행전을 치렀고, 84년에는 경인미술관에서 창립전을 했던 터라 동아리 활동을 하면서 자연스럽게 ‘두렁’을 알게 되었으나 그가 본격적으로 참여하게 된 것은 1년 선배였던 성효숙과의 인연이었다고 한다.

이듬해 그는 졸업 작품으로 동학군의 이미지를 형상화 한 그림을 출품했는데, 그는 이 작품에 대해 “아마 ‘두렁’의 선배들을 만나면서, 그리고 민화반 활동을 하게 되면서 학생운동의 기운들, 그 시대를 예감하고, 한 예술가로서, 그리고 또 한 인간으로써, 어떤 지식인으로써, 어떤 정신적 각성이랄까… 그 당시의 제 태도는 내가 뭔가 이 사회를 위해서 기여를 해야 한다, 역사를 위해 예술이 이바지해야 한다, 라는 태도가 있었던 것” 같다고 말한 바 있다. 그리고 그 해 늦가을 무렵 그는 ‘밭두렁’ 활동을 위해 인천 지역팀에 합류하게 된다.


그가 군에 있을 때 창립된 ‘두렁’은 1983년 그림책 1집 『산 그림』에서 “생활현장의 사실성(리얼리즘)과 문화적 역량을 가장 귀중한 작업 기반으로 삼는다. 따라서 자신이 움직이지 않으면 대상도 움직이지 않는 것으로 보는 데서 벗어나 끊임없이 움직이면서 일하고, 놀며, 생활하는 실상을 그린다.”고 하면서 “지금은 자폐적 허무의식으로 죽어있는 그림, 상품문화가 된 병든 그림에서 ‘산 그림’으로 나아갈 때”라고 선언하고 있다. 그런 다음 “‘산 그림’을 위한 몇 가지 다짐”을 적고 있는데, “3. 아름다움의 뜻은 늘 새롭다. 인간의 의식(思)과 행동(行)의 고양 일뿐 아니라 힘의 본질인 생명(氣)과, 위 세 요소를 집단 속으로 밝게 틔우는 흥(興)을 모두 포괄하는 ‘신명’이야말로 아름다움의 본성이다.”와 “4. 민속미술에서 순박한 자연성, 역동적 여유, 공경적 웃음, 객관적 자기폭로, 공동적 신명 등을 몸으로 받고 서구미술에서 현대사회에 대한 과학적 인식을 배우면서 이 양자를 오늘의 민중적 사실성의 기반위에서 상생적으로 통일시키는 새로운 민족미술로 나아간다.”가 눈에 띈다. 33년이 지난 지금 이들의 ‘다짐’은 민중미술의 미학적 고갱이를 함축하고 있기 때문이다. 1984년 창립전 기념으로 펴낸 그림책 제2집 『산 미술』에서는 “민화, 무속화, 탱화, 풍속화, 탈, 민속조각 등 민속미술의 수련과정을 통해 조상들의 장인적 작업태도와 세계관을 순화적 경험으로 몸으로 익히며 전통시대의 민속미술의 기반을 조성하고 대중 주체문화의 창조를 모색하려고” 한다고 말하며 살아있는 미술로서의 ‘산 미술’을 주창하고 있다.


1985년에 ‘두렁’은 민중미술을 지향하는 미술동호인 모임에서 민중미술 가운데 노동미술을 특별히 주목하여 이를 진흥하는 미술소집단으로 스스로를 재규정하고 활동방향과 조직을 재정비한다. 즉 밭두렁(현장조직), 논두렁(지원조직)으로 조직을 이원화 한 것이다. 이억배는 현장조직이었다. 그는 인천에서 86년에 부평 지역으로 다시 활동지를 옮겼다. 그러나 그는 이 시기에 지역현장 활동을 하면서 많은 고민을 하게 되었다. 노동운동 조직의 교재에 만평을 그리는 등의 작업만으로는 그의 예술적 고민을 충족시킬 수 없었던 것이다. 그는 아쉬움을 채우기 위해 그의 정신적 고향이었던 수원으로 내려왔다. 그리고 목판모임 ‘판’에 참여한다. 1986년에 결성된 ‘판’에는 최춘일, 이주영, 이억배, 손문상, 김영기, 이득현, 유동일, 황호경 등이 참여했고, 이 모임은 1988년 수원의 민중미술 계열의 미술동인 ‘새벽’으로 이어졌다. 그 무렵 그는 박찬응의 제안으로 다시 안양 지역으로 이동하게 되었다.     


1987년 이억배와 박찬응은 안양에서 권윤덕, 정유정과 함께 그림사랑 동우회 ‘우리그림’을 결성한다. 그들은 12월 5일 안양근로자회관 대강당에서 창립전과 창립대회를 가졌다. ‘우리그림’에는 홍대봉(초대 회장), 홍선웅(초대 부회장), 박경원, 박찬응(초대 사무국장), 이억배, 주완수, 정승각, 권윤덕, 정유정, 권애숙, 김한일, 정도용, 황용훈 등이 참여했다. 이 시기에 이억배는 박찬응, 권윤덕, 정유정과 함께 디자인 사무실 ‘산 그라픽스’를 열고 지역 노동운동 조직과 연계해 유인물 제작 등의 활동을 했는데 당시에는 광고물, 책 표지, 삽화 등의 수요가 많았다. ‘산 그라픽스’의 결성 초기에는 수원에서 활동했던 손문상과 최춘일이 참여했으나 이후 빠지고 안양 지역 작가들만 활동하게 되었다. ‘산 그라픽스’는 ‘두렁’의 ‘산 미술’에서 영향을 받은 것으로 ‘두렁’의 정신이 ‘산 그라픽스’ 활동에서도 드러난 것이라 할 수 있다.  

 
안양에서 그는 ‘우리그림’ 동료들과 함께 <열사해원도>(1987)를 창립대회에 걸기도 했고, 노동자 미술패 ‘까막고무신’을 지원해 결성시켰으며, 안양민요연구회, 안양독서회와 함께 안양문화운동연합에 연대조직으로 참여했다. ‘까막고무신’은 노동문화 큰잔치의 걸개그림 <우리들 이야기>를 제작해 화제가 되었었다. ‘우리그림’은 노조에 문화부를 활성화 시키는 작업의 일환으로 노조 스스로 제작할 수 있는 방법론을 가르치고 지원했다. 1988년에는 제1회 안양 시민미술학교를 기획하고 운영했다. 그런 던 중 그린힐 봉제공장 화재사건이 터졌다. 기숙사에서 잠을 자던 22명의 여성노동자들이 불에 타 숨진 것이다. ‘우리그림’ 회원들은 공동으로 영정도를 제작해 ‘그린힐 노동참사 합동 위령제’에 걸었다. 또 그들은 미술신문 「우리그림」을 만들어 89년까지 7호를 냈고, 다양한 시민미술강좌를 운영했다. 미술신문이 지향하는 정신은 “⚫신바람 나는 그림, ⚫함께 누리는 그림, ⚫참 삶을 지향하는 그림”이었다. 그것은 ‘두렁’이 지향하는 정신과 다르지 않았다. 이억배는 그 와중에도 「안양 문화통신」의 편집장으로도 활동했고, 「안문연 신문」에도 참여했으며, 「전국노동자 신문」에 만평을 연재했다. 이 시기 가장 주목할 만한 기획으로는 <노동의 햇볕전>이 있다. 금성전선 파업 기간 중에 회사 구내식장에서 기금 마련전 성격으로 기획된 이 전시는 판화전이 주를 이뤘는데, 안양의 ‘우리그림’ 외에도 광주 시민판화, 노동자 판화, 기타 작가들의 판화까지 참가한 다양한 주체들의 연합전이었다. 그리고 1989년 그는 안양의 많은 동료들과 함께 미술동인 ‘우리들의 땅’을 결성했다. “참 삶을 지향하는 안양지역 젊은 미술인들”을 모토로 시작된 이 전시에는 권성택, 권윤덕, 류봉현, 류충렬, 박신자, 박찬응, 유미선, 이억배, 이정아, 인효경, 정승각, 정유정, 주완수, 홍대봉이 참여했는데 1999년까지 이어졌다. 10년 간 지속된 <우리들의 땅> 주제전은 지역적 의제를 미술 담론으로 확장하면서 동시에 창작 형식과 방법론을 고민한 민중미술 진영의 첫 기획전이라고 할 수 있다. 이억배는 1991년 겨울, 미술운동의 시대를 끝내고 1992년부터 개인 예술가로서의 정체성을 찾는 작업에 들어갔으나, 예술이 어떻게 사회와 만날 수 있으며, 또 그것을 어떻게 지역적으로 실천할 것인가의 고민을 멈추지 않았다. 나는 그 결과가 결국 그림책 운동으로 표출되었다고 본다.  
 


 

Ⅲ. 이억배의 생명 신화와 ‘산 미술’ 미학

 

미술동인 ‘두렁’과 안양에서 ‘우리그림’, ‘우리들의 땅’의 회원으로 활동 하면서 걸개그림, 판화, 만평, 포스터, 출판미술, 시민미술학교, 노동자 판화강습 등의 현장미술에 참여했던 그의 다양한 미적 체험들은 ‘두렁’이 주창했던 ‘산 그림’과 ‘산 미술’의 미학과 어우러져 독특한 그림책 세계를 형성시켰다. 1991년, 민중미술의 시대령(時代嶺)을 넘어 온 그가 죽음의 비극적 시간들을 견디고 처음 발견한 것이 약수터 근방의 ‘새싹’이고 <가지치기>의 새 생명이었듯이, 그는 그의 내부에서 밝게 샘솟는 ‘생명의 신화’를 발견한 것으로 보이기 때문이다. 그것은 『산 그림』에서 이야기하는 “밝게 틔우는 흥”의 ‘신명’일 수 있고, 『산 미술』속 「이야기 그림」에서 말하는 “민화의 신명성과 이야기성을 배워 익혀 새로운 ‘이야기 그림’으로의 창조적인 발전”일 수도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그런 ‘생명 신화’의 구체적 주제들은 그림책에서 어떻게 구현되고 있을까? 나는 그 첫 번째가 “토템-신성/영성(神性/靈性)”이고, 두 번째가 “자연-일원론(一元論)”이며, 세 번째가 “가족-공동체(共同體)”라고 생각한다.
  


1. 토템-신성/영성(神性/靈性)


토템은 『솔이의 추석 이야기』(1995)에서 가장 먼저 등장한다. 색동옷을 입은 솔이와 솔이네 가족이 해질 무렵의 황혼녘에 도착한 곳은 고향의 당산나무와 돌무더기가 있는 곳이다. 수백 년은 족히 되었을 당산나무 앞에서 솔이 아빠는 입을 벌린 채 감탄하고, 솔이 엄마는 아기를 등에 업고 흐뭇한 감흥에 젖었으며, 솔이는 나무 밑동에 쌓아 놓은 세 개의 돌단을 보며 호기심 어린 눈으로 웃고 있다. 신령한 당산나무와 (솔이) 가족이 마주하는 이 장면은 이억배 정신세계의 큰 축이라 할 수 있다. 그래서였을까? 그는 책 한 쪽에 불과한 이 작은 공간에 거대한 나무의 신성함을 보여주기 위해 나무의 색과 결과 두께와 옹이와 가지들과 수천수만 개의 잎을 정성들여 묘사한다. 이 나무 뒤로 저 멀리 산들이 낮게 엎드렸다. 대지가 잉태했으되, 그 대지의 숭고를 응결한 나무만이 가지는 위엄이 여기에 있다!       


당산나무는 신수(神樹)이고 신단수(神壇樹)이다. 그 나무는 단군신화에서도 살필 수 있다. 신성을 가진 나무로 그것은 세계수이면서 또 우주수(宇宙樹)이기도 하다. 이러한 나무의 신화는 세계 곳곳의 신화적 모티프에서 찾아볼 수 있다. 몽골에서는 ‘어머니나무’ 신앙이 전해져 오기도 하는데 몽골어로 그 이름은 ‘오드강 모드’이다. 그런데 ‘오드강’은 여자 무당을 가리키는 말이면서 ‘오드’ 즉 버드나무를 뜻하기도 한다. 그러니까 ‘어머니나무’는 버드나무 신목인 것이다.


이억배는 “고목나무를 생각하면 기분이 좋아지고 나무가 내 안에서도 자라고 있는 느낌”이라며 “고목나무는 나에게 생명, 고향, 자연, 사회, 역사의 상징”이 된다고 말한다. 그런 그의 작품 중에는 <슬픈 근대>도 있다. 이 작품 속 고목나무는 세상 온갖 것으로 변신하고, 말도 안 되는 것들로 열매를 맺는다. <슬픈 근대>는 라틴아메리카의 마술적 리얼리즘을 엿보이지만, 나는 동아시아의 오래된 삶의 서사와 이미지들의 함축으로 읽혔다. 『산해경』에 등장하는 이미지들처럼 말이다. 그렇다면 그것은 샤먼적 리얼리즘일 수도 있을 것이다.  


복잡한 도시의 삶을 살다가 명절을 맞아 긴 행렬을 감수하며 고향을 찾는 모습에서 나는, 그러니까 『솔이네 추석 이야기』의 그 장면들에서, ‘이억배’라는 예술가가 <가지치기>의 미학을 들고 드디어 그림책 세계에 도착한 ‘감흥의 원형’ 같은 것을 발견했다. 그는 고향집 풍경과 그 동네 풍경이 자아내는 깊고 고즈넉한 삶의 정서를 그려내고 있을 뿐만 아니라, 우리 민족이 품었던 따듯한 온정을 그리고 있기 때문이다. 이때 토템의 영성은 아궁이에 불을 피워 구들을 데우고 굴뚝으로 연기를 피워 올린 ‘살아있는’ 고향집에서도 엿볼 수 있다. 그가 찾고자 했던 마음의 고향, 이억배 미술의 출발이 바로 여기에 있을 것이다.
그 외에도 『개구쟁이 ㄱㄴㄷ』(2005)에 등장하는 오래된 나무와 『이야기 주머니 이야기』(2008) 속 아주머니가 앉은 밑동이 굵은 나무에서도 신성한 당산나무를 찾을 수 있다. 토템의 상상력은 『손 큰 할머니의 만두 만들기』(1998)에서 완연해 진다. 이 그림책은 주인공 할머니를 제외하고는 모두 의인화된 동물들이다. 민화 풍의 동물들이 펼치는 장면들에서는 해학이 만연하다. 흥미로운 것은 단지 곰과 호랑이 토템만이 아니라 우리 옛 이야기에 등장하는 토끼, 너구리, 여우, 다람쥐, 개, 돼지, 새가 등장해서 서사를 펼치는데 종종 그 모습에는 그 옛 이야기 속 동물들의 캐릭터 표정이 담겨있다는 점이다.

 


 

2. 자연-일원론(一元論)


인간과 자연이 하나의 근원을 이룬다는 세계관은 이억배 그림책의 전체에 깔려있는 하나의 사상이다. 『솔이의 추석 이야기』, 『손 큰 할머니의 만두 만들기』는 물론, 『갈매기에게 나는 법을 가르쳐 준 고양이』(2000), 『이야기 주머니 이야기』, 『차령이 뽀뽀』(2011)에서 어렵지 않게 찾아 볼 수 있다. 그렇다면 이러한 일원론적 자연관은 어디에서 비롯되는 것일까? 그가 그린 풍경과 인물과 동물들의 세목에서 찾아보자.


『솔이의 추석 이야기』에서 이야기는 도시에서 고향집이 있는 농촌으로 전개되는데 이때 도시는 나무와 사람과 건물이 각기 분절적인 개별화의 방식으로 그려져서 산만하고 색감도 다채롭다. 그런데 뒤로 가면서 풍경은 그것이 무엇이든 하나의 세계 속에 놓여 있다. 심지의 한 장면의 색감조차 통일감을 부여해서 튀지 않는다. 사람이 풍경의 작은 일부가 되어 가는 그 과정은 다분히 의도적이다. 『솔이의 추석 이야기』가 길을 가듯이 한 방향으로 걷다가 ‘고향집’이라는 둥지에 다다른 것이라면, 『손 큰 할머니의 만두 만들기』에서는 그런 방향성 없이 일종의 ‘동일체’로서의 일원론을 보여준다. 캐릭터들은 그림 속에서 ‘서로-삶’의 공동체 신명을 스스럼없이 시방세계로 구현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들은 함께 빚고 놀고 장난치고 불을 쬔다. 이것은 ‘산 그림’에서 말했듯이 “끊임없이 움직이면서 일하고, 놀며, 생활하는 실상”이면서 “순박한 자연성, 역동적 여유, 공경적 웃음, 객관적 자기폭로, 공동적 신명 등을 몸으로 받”는 표정들이다.


『이야기 주머니 이야기』의 장면에 오방낭 주머니에서 신랑과 사내가 이야기를 꺼내 올리는 장면이 있다. 뭉게뭉게 피어오른 이야기들은 모두 그가 그렸던 장면들의 연속이다. 이야기 안에서 그의 이야기는 마치 ‘끝이 없는 이야기’처럼 서로 꼬리를 물고 맴돌 듯이 돌아가고 있는 셈이다. 그리고 “자연-일원론”의 가장 아름다운 상징은 『5대 가족』에서 볼 수 있다. 티베트의 대자연을 어머니 삼아 살아가는 유목민의 삶을 다룬 이 그림책은 자연이 그들에게 무엇인지, 아니 자연은 그들의 삶과 완전히 하나의 일체된 그 무엇이라는 것을 두 개의 명장면으로 구현하고 있다. 하나는 양떼들 사이에서 텐진이 어린 양을 들고 서 있는 장면이다. 또 하나는 티베트의 흰 설산 위로 두둥실 떠다니는 꿈의 장면이다. 이 장면들은 동물과 사람이, 그 모든 자연의 생명들이 하나로 이어져 있다는 것을 말해준다.    

‘자연-일원론’의 세계를 옛 선인들은 ‘생생화화’(生生化化)라 해서 ‘낳고낳고 되고되다’의 풀이로 해석했다. 그런 자연철학은 다시 ‘생의’(生意)라 해서 ‘만물을 낳는 이치’로 보았으며, 그것들이 하나로 이어지는 것을 ‘생생지리’(生生之理)라 했다. 즉, 만물이 서로 낳고 번식하는 자연의 이치라는 것이다. 자연은 한 몸이고, 그 몸이 우주의 살아있는 기운이요 변화다. 이억배의 그림들은 문학적 서사에 기댄 ‘삽화’가 아니라 그 자체로 충실한 회화적 언어를 담고 있는 ‘문장’이며, 그 문장의 뜻은 일원론을 향해 있다. 그림들의 세밀한 부분들에서 그 일원론의 생생화화가 마치 새싹을 피우듯 샘솟는 이유다. 『모기와 황소』에 등장하는 모기와 황소는 얼핏 꼼꼼함의 그림체에 탄성이 먼저 나오기도 하지만, 서사가 사라진 원화에서는 오롯이 자연의 이치가 곧 있는 그대로의 서사라는 것을 그림으로 웅변하고 있다.

 


 

3. 가족-공동체(共同體)


일원론의 사상은 그가 ‘가족’을 등장시킬 때 더 뚜렷해지는 듯하다. 이억배는 첫 그림책에서 가장 나중 그린 『5대 가족』(2014)에 이르기까지 ‘가족’을 주 모티프로 활용했다. 가족이라는 주제는 그가 살아오면서 깨달은 가장 강력한 공동체적 구심력이 아닐까 한다. 『솔이의 추석 이야기』가 떨어져 살고 있는 가족을 향해 가는 여정인데 반해 『손 큰 할머니의 만두 만들기』는 사람과 신화가 하나의 이야기를 이룬 ‘가족 공동체’라는 것을 보여주고, 『5대 가족』에서는 온 우주가 가족이라는 것으로까지 나아간다. 게르(천막)에 잠든 가족만이 가족이 아니라 야크와 양떼와 그곳 티베트에 살고 있는 온 생명들이 한 가족이라는 것을.


그리고 『비무장지대에 봄이 오면』(2010)에서 이억배는 분단의 실체인 비무장지대에서 가족이 무엇인지를 우리에게 묻는다. 그는 “이제 늙고 병든 비무장지대를 해방시켜 주어야 합니다. 철조망을 걷어내고 지뢰를 없애고 끊어진 철도를 다시 이어서 헤어진 가족들이 다시 만나야 합니다.”라고 ‘간절히’ 소망하고 있다.


가족에 관한 슬프고 감동적인 서사는 사실 『갈매기에게 나는 법을 가르쳐 준 고양이』(2011)다. 이 그림책은 “낯선 존재들이 약속을 지켜나가는 과정을 통해 하나의 존재로 화합해가는 여정을 감동적으로 그렸다.”는 평가를 받았는데, 그 이야기는 오염된 바닷물 때문에 온몸에 기름을 뒤집어쓰고 죽게 된 갈매기가 우연히 만난 고양이에게 알을 부탁하면서 벌어지는 내용이다. 새끼가 태어나면 나는 법을 가르쳐달라고 했던 것. 갈매기와의 약속을 지키기 위한 고양이의 여정이 펼쳐지고, 그 여정을 통해 인간과 자연, 인간과 인간 사이의 관계 회복이라는 주제가 드러난다. 어쩌면 이 이야기는 우리가 겪고 있는 다국적 사회에서의 가족에 대한 새로운 질문일 수도 있을 것이다. 어쨌든 그림책 작가 이억배는 그의 그림책에서 늘 가족을 화두로 삼아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사회공동체의 모순에 대해 성찰하게 만든다.


『세상에서 제일 힘센 수탉』(1997)도 가족에 관한 이야기다. 그는 이 그림책의 의미를 “어른이 어린이를 좀 더 진지하고 따뜻한 배려로 대한다면 어떤 어렵고 심오한 삶의 문제라도 어린이들은 진지하게 받아들이고 포용할 수 있는 비범한 인격과 재능을 갖고 있다. 삶을 대하는 어린이들의 진지한 태도와 순수한 정신은 대부분의 어른들이 잃어버린 세계이며 어린이에게서 다시 배워 회복해야 할 그 무엇이다.”라고 적고 있다. 이 책에서 ‘가족’은 ‘사회’라는 더 큰 울타리로 확장 해석된다. 사실 가족과 사회는 따로 떼어서 해석할 수 없다. 나아가 그것은 국가와도 연결될 것이다. 그런 맥락에서 그가 그려온 작품들은 ‘공동체주의’(Communitarianism)를 지향한다고 볼 수 있다.

 


 

Ⅳ. 마치며

 

작가 이억배의 삶은 1992년 이전과 이후로 나뉘는 듯하다. 그 이전의 삶이 민중미술운동에 참여하면서 우리 미술의 미학적 본령은 무엇인지, 그것은 어떻게 사회화 될 수 있는지, 그리고 그 사회화의 과정에서 예술은 무엇인지를 고민하며 ‘공동체 예술론’을 실천했다면, 그 이후의 삶은 이전의 삶을 성찰하면서 불교미술을 배우고 그림책 운동에 전념한 시간들이라 할 수 있다.


홍익대 민화반 동아리에 가입하고 활동하면서 ‘두렁’에 참여하게 된 그의 미술세계는 ‘두렁’의 작품들과 현장미술로부터 영향 받은 바 크지만, 그것이 단지 형식으로만 침윤된 것이 아니라 그가 치열한 삶에서 마주쳐야 했던 수많은 주검들과, 그 주검이 다시 살아 싹 틔우는 생명 살림으로의 대전환이 형성한 ‘산 미술’의 미학일 것이다. 그리고 그 ‘산 미술’의 미학에서 서사를 함축하는 생명 신화의 이미지를 창조한 것이리라.


『반쪽이』(1997)에는 우물이 하나 등장한다. 우물은 고대 삼국시대부터 신화가 탄생하는 성스러운 모궁(母宮)이었다. 우리 민족의 시조 신화에서 우물이 등장하지 않는 것은 거의 없다. 또 우물은 변신술이 벌어지는 판타지의 공간이다. 『삼국유사』에서 어떤 왕은 갑갑함을 견디지 못해 우물 속으로 들어가 용으로 변신한 뒤 바깥세상으로 나가 놀았다. 제주에서 세 시조가 삼성혈이라는 구멍에서 솟았고, 시인 윤동주의 고향은 용두레 마을이었다. 용이 사는 우물, 용정(龍井)이 그 마을이다. 최근 연구에 따르면 첨성대가 ‘하늘 우물’이라는 설도 제기 되었다. 은하수(미리내)의 별 밭을 보는 우물이라는 것이다. 이렇듯 우물은 그것이 한 세계요, 생명 신화의 큰 상징이다. 나는 이 우물이야말로 그의 그림책이 터지는 거대한 이야기 주머니라고 생각한다. 물론 그의 그림책에서 우물이 등장하는 것은 이것 하나 밖에 없지만, 달리 생각해 보면 그것은 당산나무에도 있고 이야기 주머니에도 있으며, 텐진이 꿈꾸는 밤하늘에도 있고 비무장지대를 흐르는 강물에도 있다. 끊임없이 샘솟는 창조적 술수(術數)의 우물로서 말이다. 

 



참고문헌
-  순천시립그림책도서관, 『이억배』도록, 2016
-  김진, 『퓌지스와 존재사유-자연철학과 존재론의 문제들』, 문예출판사, 2003
-  민미협, 『민미협 20년사』, (사)민족미술인협회, 2005
-  경기문화재단, 『경기 근현대소집단 미술흐름연구』, 경기문화재단, 2005
-  미술동인 ‘두렁’ 그림책 제1집 『산 그림』, 1983
-  미술동인 ‘두렁’ 그림책 제2집 『산 미술』, 1984
-  미술신문「우리그림」
-  『우리들의 땅』10주년 도록
-  이억배 인터뷰 녹취록(김종길, 2016년 11월 26일)
-  한겨레신문 아카이브
          

*** 수원시립아이파크미술관, 이억배 그림책 원화전 <이야기 주머니 이야기>전 평론

+++ 2016. 11. 15 ~ 2017. 2. 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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