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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시 리뷰 | 최라윤 / 문래우주 오디세이아

김종길

문래우주 오디세이아
- 최라윤의 <메․타․스․크․랩METASCRAP>을 읽는 코드



이미지를 이해한다는 것은, 이미지를 간접적으로 이해하는 것이고, 이미지의 심층으로 침투하는 것이며, 그 의미의 여러 차원을 해석하는 것이다. 이미지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이미지의 의미를 속단하기보다는 그것이 가지고 있는 잠재적 의미를 포착해내야 한다.
_ 홍명희, 『상상력과 가스통 바슐라르』, ㈜살림출판사, 2005.



누군가를 진정으로 ‘안다’는 것은 때때로 얼마나 허술한 일일 수 있을까! 문래예술공장에서 보내온 최라윤 작가의 포트폴리오(PPT)를 받아서 보다가 불현 듯 내가 아는 그가 누구인지 퍼뜩 궁금해졌다. 2018년 10월 25일에 이메일로 받은 PPT 18쪽의 <생不, 예不, 돈不>(5×33cm, 3점, 유화, 2014)과 <不_씨앗>(116×73cm, 아마 섬유(linen)에 유화, 2017. <2017아시아와 쌀전>(전북예술회관) 출품작)이란 두 작품이 가장 먼저 예사롭지 않았다. 두 작품과 마주한 순간, 시각 이미지를 인지하는 내 의식의 지층이 즉각적으로 반응하는 것을 느꼈다. 뒷목에서 오소소 소름이 쏟아졌다. 그 이미지들이 타전하는 예스러운 색채와 상형(象形)이, 또 샤머니즘의 미학적 구조가 상상계를 뒤흔들었다[샤머니즘은 3수 체계(그가 그린 세발소반), 시루깃대를 연상케 하는 <不_씨앗>, 제의적 형식에서 두드러졌다].
두 작품 사이에 그는 “不 물음과 부정에서 다시 만나는 세상”이라 적었는데, 그것이 접두사 ‘부’로 쓰일 때는 ‘아님/어긋남’ 등의 뜻이나, 명사 ‘불’로 쓰일 때도 ‘부’의 의미와 큰 차이는 없다. 다만, ‘~말라’는 금지의 뜻이 추가될 뿐이다. 그런데 그는 그런 의미보다 ‘不’이라는 한자 형상에서 ‘세발그릇’[세발 달린 상(床)]을 연상한 듯하다. 실제로 <생不>은 세발소반(小盤)을 그렸고, <不_씨앗>은 ‘不’의 모습을 변용한 상(床)위에 벼를 그린 것이다.


세발그릇은 고대 세발토기를 연상케 하는데, 그 상징의 원형은 동정(銅鼎/세발솥)에 있을 것이다. 동(銅)으로 만든 세발솥은 예기(禮器)의 하나로 정치적 권위와 권력을 상징했다. 정(鼎)을 잃는 것은 국가를 잃는 것과 다르지 않게 여겼다[구정(九鼎)은 고대 중국에서 왕권의 상징이었다. 전설에 따르면 하나라의 시조 우왕(禹王)이 구주(九州, 고대 중국의 전역)에 명해 모으게 한 청동을 가지고 주조한 것이라 한다. 구정은 하나라, 은나라, 주나라에 걸쳐서 보관, 유지되었다. 이로써 이를 소유한 자가 곧 천자라 여겨졌다. 진이 주를 멸하고 구정을 가지고자 했으나 운반도중 사수(泗水)에 가라앉아 없어졌다 한다]. 그러니 그의 작품에서 세발소반은 “~을 잃는 것과 다르지 않다”는 뜻으로 해석해야 하지 않을까, 생각한다. <不_씨앗>은 <2017아시아와 쌀전>에 출품한 것인데 이때 상실의 주제어는 ‘쌀’이 될 것이다. 이렇게 보았을 때 그가 사용한 ‘不’는 ‘불’이되, ‘~말라’의 뜻이란 생각이다. 그러니 <생不, 예不, 돈不>과 <不_씨앗>은 생을 잃지 말 것이며, 예를 잃지 말 것이며, 돈을 잃지 말 것이며, 씨앗(쌀)을 잃지 말 것이란 뜻일 터.



#1. 가만히 가까이 가서 보면 문래의 요소들은 삶과 도시생태의 이야기이며, 추상적이고 상징적인 요소로 가득 차 있다.


한 이미지와 그 이미지 속 사물과 그 사물의 역사와 뜻과 상징을 서로 꿰고 엮어서 새로운 미학적 상상계를 엿보이는 그의 작업은 일찍이 생각지 못한 일이었다. 그의 작업이 이렇게 ‘비단실 꿰기’의 상징체계로 터닝을 이룬 시기는 2014년 4월부터 12월까지 ‘문래부작’을 주제로 한 작품들이 탄생하던 시기로 보인다. ‘문래부작’에서 ‘문래’는 문래동을 뜻하고, 부작은 ‘부작(符作)’으로 “불가(佛家)나 도가(道家)에서 악귀나 잡귀를 쫓고 재앙을 물리치기 위해 붉은 먹이나 주사(朱砂)로 글자 모양을 그려 붙인 종이”를 말한다. 달리말해 그것은 부적(符籍)이요 신부(神符)다.


이번 전시에는 그때 제작된 <호백(虎魄:호랑이의 넋)>과 <귀면부작동경>을 비롯해 여러 점을 함께 출품했는데 그것 모두 샤머니즘과 관련이 깊었다. 예컨대 <귀면부작동경>은 목공소에서 폐기한 목형(木型)에 귀면(鬼面)을 그리고 둥글게 뚫린 구멍에 볼록한 구리거울을 단 것이다. 귀면은 귀신이 아니라 용의 얼굴이다. 사악한 무리나 나쁜 기운을 막은 벽사(辟邪)의 의미다. 구리거울(銅鏡)은 동북아시아 샤먼들이 현실너머를 보는 창(窓)이요, 우물의 상징이다. 작가는 부작 작업을 “터널처럼 과거와 현재를 잇는 문래지역의 지형을 ‘시간의 열대림’이라 명명. 목형에 문래골목 블록 틈에서 자생하는 잡초로 열대림을 새기고, 부와 장수, 평안과 복을 기원하는 의미를 가진 상징기호를 넣어 ‘문래부작’으로 다시 부활하는 작업”이라 했다. 그에게 문래동은 그 자체로 하나의 거울이요, 우물이란 얘기다.


2018년의 작업들은 목형은 물론이요, 컷팅철판, 용접똥, 용접비드 등의 찌꺼기를 회화적 상상으로 재창조한 세계를 보여준다. 그는 이 작업의 의미를 “본래의 사물을 만들기 위해 깎인 작은 탈피의 부산물들이 기억하는 본래의 몸, 본래의 몸을 기억하는 것은 탈피된 존재들이 현재를 살아가는 치유의 과정”이라 했으나, 그가 회화로 창조한 이미지들은 ‘찌꺼기’나 ‘탈피’의 모습과는 사뭇 다르다. 그의 고백은 문래동이라는 낡고 쇠락한 현실계에 대한 애잔한 풍자일 뿐이다. 상상계는 역설적으로 문래라는 거울 속(우물 속) 너머로 훌쩍 차원이동을 한다. 땅 지(地), 누를 황(黃)의 지구와 하늘 천(天), 검을 현(玄)의 우주다.  


그러므로 그의 문래동 상상계는 “하늘은 위에 있어 그 빛이 검고 땅은 아래 있어서 그 빛이 누렇다(天地玄黃), 하늘과 땅 사이는 넓고 커서 끝이 없다(宇宙洪荒)”는 동아시아 우주의 이치를 반영한다고 할 수 있다. 티끌과 먼지에서 우주적 상상력을 펼친 것!   
    


#2. 오랜 시간 그 균형을 갖고 살아있는 도시, 문래의 삶터에서 나온 부산물과 예술적 기호들에서 상상되어지는 자유로움, 유휴공간으로서의 대지와 새로운 시공간을 제안한다.


<원형기리꾸>를 보자. ‘기리꾸’는 철판을 잘라낼 때 자투리로 나오는 찌꺼기의 속칭이다. 그는 둥글게 말려서 떨어져 나온 자투리 형상에서 은하계의 행성(Planet)을 연상했다. 그의 작품은 여러 개의 행성, 유성, 혜성과 소행성에서 떨어져 나온 티끌, 우주를 떠도는 먼지를 그렸다. 둥글게 말린 자투리들에서 거대한 코스모스를 본 것이리라.


오래된 시간이 축적한 장소는 샤먼의 눈이 우물처럼 확장되는 통로일 수 있다. 옛 마을에 신목(神木)인 당산나무가 있고, 마을 어귀에 돌무더기와 장승과 솟대가 서 있는 것처럼, 그에게 문래동은 어느 순간 하늘과 땅을 잇는 우주적 상상계가 증폭되는 미학적 수직 통로였다. 철공소가 많은 문래동은 대장장이 샤먼의 후예가 사는 동네이지 않은가. <파쇄된 흔적_space>, <파쇄된 흔적_history>(이상 2017)에서 볼 수 있듯이, 그의 작품들은 잉여의 찌꺼기들이 드러내는 형상에서 우주로 상승하는 기운의 신목을 엿보고, 숱한 대장장이가 ‘본래의 몸’을 달구질 한 뒤의 자투리에서 ‘역사’를 들추지 않는가.


흥미롭게도 그는 사업계획서에서 문래동의 부산물들이 쏟아내는 예술적 기호들은 “세계에 내놔도 손색이 없는 도시의 자산이기에 회화작업을 통하여 문래동의 고유성과 정체성을 알리는 계기”가 될 것이며, 또 그의 작업은 “상상력과 유휴공간으로서의 도시생태에 대한 인식을 바꾸는데 보탬”이 될 것이란 주장을 펼쳤다. 길 옆에 우후죽순으로 싹 틔운 잡풀 같은 찌꺼기가 ‘예술기호’라고 말하는 것이나, 한 지역의 고유성과 정체성을 운운하는 것도 모자라 상상력과 유휴공간이라는 발상은 뜬금없기 짝이 없다. 그러나 그 말과 발상이 하나의 미학적 세계를 이룰 때, 문래동은 충분히 우주적 공간이 될 수 있을 것이다. 

  
그는 쇳밥 구조, 쇳밥 그림자, 쇳밥 공간, 쇳밥 가능성, 쇳밥 질감, 쇳밥 춤, 쇳밥 패턴을 상상할 수 있는 다양한 자투리를 드로잉하면서 그것이 회화적 공간에서 어떻게 재탄생할 수 있는지를 궁구했다. 또 용접할 때 철판에 어리는 불색과 용접똥 이미지를 스케치했다. 자투리일 때, 불색일 때, 용접똥일 때 그 이미지는 단순했으나, 회화로 그려질 때는 상상이 더해져 복잡계가 되었다. <철판위의 무지개>는 철판의 불색이 회오리치는 오로라로 변신한 것이다. 2017년 작품이 극지에서 볼 수 있는 오로라 형상이라면, 2018년 작품은 상상의 차원을 넘나드는 ‘무지개 블루홀’이다. 지구의 눈이라 불리는 ‘그레이트 블루 홀’이 그것이요, 구리거울의 우물면이라 불리는 초현실계의 샤먼아이(Shaman-Eye)가 또한 그것이다. 
      


#3. 문래의 패턴이 이룬 삶은 예술가에게는 또 다른 예술적인 상상력을 불어 넣어주는 살아 숨 쉬는 요소(Element)가 되고 있다.


전시공간은 위아래로 음양(陰陽)의 개념을 적용한 듯했다. 아래는 밝고 위는 어두웠다. 밝은 공간에서 눈의 띄는 작품들은 용접똥과 용접비드를 그린 것들이었는데, 그 상상계는 지구와 우주를 잇는 용의 몸과 다르지 않았다. TIG(알곤) 용접의 비드는 현란한 색상과 용 비늘 같은 문양으로 참 아름답다. 그런 상상이 작품에서도 그대로 드러났다. 야생의 들풀이 자란 거친 대지를 흐르듯 기어가는 기이한 형상이 그랬다. 


문래동의 철흙을 수차례 종이에 발라 녹을 낸 작업들과 쇳밥(기리꾸)의 형상을 그린 작품들도 강렬했다. 철흙을 발라서 바탕을 이룬 종이에 쇳밥을 모던하면서도 미니멀하게 그린 형상들은 리드미컬했고, 때때로 그것들은 기하학적 초현실과 헤아릴 수 없는 시간의 흔적을 가진 고생물로 등장했다. 먼 미래의 건축적 구조물처럼 읽히는 작품들도 있었다.


단지 문래동의 사물만이 아니라, 문래동의 흙에서 상상하는 작품은 태초의 대지가 가졌을 원초적인 생명성을 드러내기도 하고, 그 흙에 그려진 용접똥의 이미지는 우주가 빅뱅하는 순간의 거대한 에너지를 엿보인다. 검은 대지에서 푸른 하늘로 치솟는 쇳밥은 작은 사물 하나가 얼마나 무한한 상상력을 제공하는지를 여실히 보여준다.


밝음[陽]의 공간은 그렇게 회화적 공간으로서의 ‘전시’를 충실하게 기획했다. 그가 구상한 작품들은 그곳에서 새로운 미학언어를 획득하고 있었다. 위는 ‘어둠’이 아니라 검을 ‘현(玄)’으로서의 우주였다. 그리고 그 우주는 예술가의 창조적 술수가 재현한 샤먼의 공간이기도 했다. 아래의 용접똥이 이곳에서는 새로 잉태하는 별의 불꽃이었고, 여전히 창조되는 순간의 퍼포먼스가 펼쳐지는 ‘확장성’의 우주였다.


이 우주적 공간에서 그는 문래동의 오래된 서사와 신화와 역사가 한데로 뭉쳐서 빅뱅하기를 바란 듯했다. 그곳을 오가는 다른 예술가들과 관객과 시민들이 그 상상계에서 문래동의 가치를 재발견하기를 소망했다. 그곳은 최라윤이 새긴 문래동 암각화였고, 문래우주 오디세이아였다. 전시는 작았으나 그가 그린 오디세이아의 서사는 끝이 없는 장편과 같았다.


2019년 1월_문래예술공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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