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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고 | 원동석 / 우리미학의 길 찾기

김종길

원동석론을 위하여
- 우리미학의 길 찾기


민족은 영혼이며 정신원리이다.
_ 조제프 르낭(1823~1883)
(원동석이 그의 첫 평론집  『민족미술의 논리와 전망』(풀빛, 1985)의 17쪽 「민족주의와 예술의 이념」에 인용한 것을 재인용한 것임. 첫 평론집에 실린 첫 번째 평론의 머리글에 인용한 이 문구는 그의 미학적 화두가 무엇이었는지를 명확하게 보여준다. 그가 평생을 추구한 ‘민족’과 ‘민중’이라는 미학적 개념은 편협한 민족주의나 이념이 아니었다. 그 증좌가 마지막 평론집인 『우리예술의 미학』(2016)이다.) 


2017년 3월 28일 『광주일보』는 “민중미술 평론가 원동석(본명 원갑희) 전 목포대 미술학과 교수가 26일 오후 3시 노환으로 별세”했다는 기사를 타전했다. 향년 79세의 나이였다. 그리고 “원 전 교수는 고려대 철학과와 대학원을 졸업하고 1969년 서울신문 신춘문예 미술평론 부문에 당선되면서 미술계로 들어섰다. 민족 문화 독립을 강조한 원 교수는 1970년대부터 민족 정서 회복과 미술계의 외세 추종주의를 비판하는 글들을 썼다. 1980년대에는 미술동인 ‘현실과 발언’, 민족미술인협회 결성을 주도했고 1990년대 이후에는 코리아통일미술전 등에 참여하며 북한 미술을 알리기도 했다.”는 아주 짧은 행장(行狀)을 덧붙였다.


나는 그 행장의 건조함에 참혹했다. 여든 살의 삶이 단 몇 줄로 드러나서 놀랐고, 그가 남긴 평론의 무게를 알기에 그의 부재가 일으키는 ‘민중미술론’의 과제에 당혹스러웠다. 한 평론가 또는 이론가의 죽음은 그 죽음 이후의 시간을 ‘이론의 부활’로 다시 사는 숙명을 얻는다. 물론 모든 이론가들이 그런 숙명을 얻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원동석은 백색의 단색화가 주류를 이뤘던 1970년대에 ‘민중’과 ‘민중예술’을 호명하며 ‘민중예술론’을 주창했고, 그것은 1979년의 ‘현실과 발언’(‘현발’)으로 구체화 되었다. 그뿐만 아니라 ‘광주자유미술인협의회’(‘광자협’)와 미술동인 ‘두렁’에까지 영향을 미쳐 사실상 1980년대 전반기 민중미술론의 기원이 되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민족미술로서의 민중미술론


미술평론가 최열은 1975년 원동석이 발표한 「민족주의와 예술의 이념」[원동석, 「민족주의와 예술의 이념」, 『원광문화』제2집, 1975. 이 글은 『민족미술의 논리와 전망』(풀빛, 1985)에 재수록 됨]은 사회성 회복을 제창하는 수준을 훌쩍 뛰어넘어 미술의 민중성과 민족성을 제창하는 단계로 나아간 문헌이라고 평가했다. 원동석은 이 글에서 민중예술이란 미술가가 “민중 속에서 진실을 찾고 확인하는 예술”이며, “민중이 자발적으로 참여”하는 미술이라고 규정하는 가운데 그 민중과 민족을 유기체로 인식하고서 민중주체의 민족문화를 주장하고 있다. 그러니까 그는 “민족의 실체는 민중이며 문화의 주체자도 역시 민중이다. 살아 있는 민족문화의 발현은 주체자가 스스로 민중이 되는 창조적 활동에 의해서만이 현실적으로 가능하다”고 이야기하고 있는 것이다(원동석, 위의 글. 최열, 『한국현대미술비평사』(청년사, 2012), 296~297쪽 참조).

 
원동석은 10년 뒤인 1984년에 발표한 「민족미술의 특질론」[원동석, 위의 글. 최열, 『한국현대미술비평사』(청년사, 2012), 296~297쪽 참조]에서는 한국미술의 기층적 사상으로 샤머니즘을 다룬다. 그는 “나쁜 인과의 매듭은 오직 샤먼의 주술력에 의해 풀 수 있으며 이러한 해소기능을 ‘살풀이’, ‘한풀이’, ‘해원(解寃)’이라고 한다. 삶의 과정은 매듭짓고 풀어내고 하는 반복의 리듬으로 순환”이며, “샤먼의 예언과 상상력, 그의 몸짓과 노래(巫歌), 의상 장식, 도구 등에서 최초의 예술가적 원형”을 찾아낼 수 있다고 주장한다. 그는 이 글에서 음양오행, 『주역』, 풍수사상, 불교, 유교, 도교, 고구려 벽화, 고려 불화, 야나기 무네요시, 고유섭, 윤희순, 최순우 등을 인용하고 열거하고, 호명하면서 민족미술의 특질이 무엇인지 정치하게 따져 묻는다. 그가 이 글에서 확인하고 싶었던 것은 “한국미가 역사적 변화 속에 구체적으로 어떻게 대응하며 전개되”었가를 살피기 위해서였다. 그는 민중미술의 대두는 민족미술을 발전적으로 변모시키면서 보편적 특성으로 한국미를 드러낼 것이라고 보았기 때문이다.


그가 깊게 탐색한 ‘보편적 특성’으로서의 한국미는 「민중그림은 가능한가-옛 민화와의 접속을 위한 제언」(원동석, 「민중그림은 가능한가-옛 민화와의 접속을 위한 제언」, 『일과 놀이』제1집, 1984년)에서 살필 수 있다. 그는 이 글에서 “민중은 깨어 있는, 의식화된 시민이며 자기의 권리를 주장할 줄 아는 공중”이기도 하며, “민중의식은 좀더 전통적인 민속예술에서 자기 뿌리를 찾아서 대중문화나 고급문화의 소외현상으로부터 탈출하려는 추제적 공동노력에서 마당굿, 탈춤, 시민그림이라는 새로운 민중예술의 탄생을 시도하고 있다”고 얘기한다. 흥미로운 것은 글의 부제에서 이미 밝혔듯이 ‘민화’를 새롭게 주목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민화는 정통화와 달리 묘사그림이 아니며 공동체적 관념(상상이나 현실욕망)을 도해적으로 전달하는 집단그림이다. 이 집단적 성격이 작가의 익명을 요구하며 개성적 창의성을 배제한다. 정통화의 기법은 대상과의 미적 관조를 유지함으로써 대상파악의 개성이 표현과 연결되고, 그것은 작가의 유명성을 지향하는 창의성을 요구한다. 정통화의 창의성에는 그것을 이해하는 세련된 감상안이 필요하다는 것은 이 때문이다. 그럼에도 민화의 수용영역이 넓은 것은, 민속을 공동효용성-주술성, 제식성, 실행활성, 장식성-에 있어 어느 계층이든 수요의 필요가 있기 때문이다.


그는 민족예술의 특성이 항상 민중예술에 숨어 있다는 사실이 진실이라고 했다. 또한 민중예술은 민족예술의 토양이며 광맥이나 다름없다고도 했다. 그렇기 때문에 이데올로기나 사회체제의 변동에 따른 새 미술의 등장은 민중예술의 광맥을 재발굴하는 것이고 에너지를 충원하는 것이라고도 주장했다. 그런 관점에서 그의 「민족미술의 정립문제-일제잔재 미술 시비론」(원동석, 「민족미술의 정립문제-일제잔재 미술 시비론」, 『마당』, 1983년 6월호)과 「한국 추상미술의 외세주의」(원동석, 「한국 추상미술의 외세주의」, 『대화』, 1977년 1월호)를 읽어 볼 필요가 있다.


 
실천운동으로서의 민중미술론


원동석은 이론만을 내세우지 않았다. 1979년 9월 25일, 그의 발의로 4월 혁명 20주년 기념 전시를 조직하기 위한 모임이 시작되었고 그것은 ‘현발’을 결성하는 동기가 되었다. 12월부터 1월 사이 창립취지문이 작성되었는데 그것의 초안을 잡은 것도 그였다.


취지문은 저희가 만든 최초의 문서이기도 한데, 텍스트로 만드는 그 과정에 퍽 신경을 썼습니다. 아마도 그것에만도 3~4주의 시간이 흐른 것으로 기억합니다. 그 과정을 좀 더 설명하면, 취지문에 담길 내용이 그룹 내에서 자유토론으로 어느 정도 세워졌고, 그 다음에 취지문을 기초할 몇 인물이 선출되었습니다. 아무래도 글쟁이이거나 글과 가깝게 지내는 원동석, 최민, 윤범모 그리고 저, 이렇게 네 사람이 그 일을 주도했지요. 그렇지만 원동석씨가 추진력이 빠르기 때문에 토의된 내용을 기초해 문장을 만들었고, 저와 최민씨가 약간의 수정과 추고를 하고 다시 그룹내에서 첨삭이 있은 후 그것이 완료되어 나오게 됐습니다.
_ 「좌담회-현실의식과 미술로서의 실천: ‘현실과 발언’을 중심으로 본 80년대 미술의 전개와 전망」, 『현실과 발언-1980년대의 새로운 미술을 위하여』, 열화당, 1985, 187~188쪽 성완경의 발언 중.


‘현발’에 참여함으로써 그는 ‘80년대 미술운동’에 참여했다. 심지어 1980년 10월 ‘현발’ 창립전에는 작품을 출품하기도 했다. 「80년대 미술의 새 흐름-70년대 미술을 넘어서면서」(원동석, 「80년대 미술의 새 흐름-70년대 미술을 넘어서면서」, 한양대 교지 『행림』, 1984년 겨울호)는 그렇게 출발한 미술운동의 새 흐름을 되짚은 글이다. 그는 70년대가 “현실의식과 소통할 수 있는 새로운 시각언어를 개발, 창조하지 못하고, 미술 내부의 매체기능 싸움으로 한정시켜 문제를 남기게 한 것”으로 판단했다. 그런 맥락에서 80년대의 미술운동은 “미술의 문제를 근본적으로 반성하고 비판하면서 본래적 기능을 회복, 정립하는 동시에 삶의 양식까지 변혁하려는 문화운동의 성격 양상을 포함하고 있다. 따라서 이들 미술 내부의 변화는 삶의 의식과 행동양식을 바꿔나가는 강력한 힘-사회적 환원의 실천력을 지향하고 발휘한다”고 주장하고 있다. 그가 이 글에서 80년대의 새로운 동인으로 꼽은 그룹전은 <현실과 발언전>, <임술년전>, <제3그룹전>, <12월전>, <젊은 의식전>, <횡단전>, <83인간전>, <사실과 현실전>, <실천그룹전>, <두렁전>, 광주의 <2000년전>등이며, 작가전으로는 <이만익전>(77), <오경환전>(78), <이상국전>(79), <노원희전>(80), <권순철전>(80), <홍성담전>(80), <심정수전>(81), <임옥상전>(81), <김경인전>(81), <박한진전>(81), <손장섭전>(81), <이철수전>(81), <이청운전>(81), <오해창전>(81), <신학철전>(82), <박부찬전>(82), <민정기전>(83), <손상기전>(83) 등이다.


1984년 『마당』 2월호에 원동석은 「미술의 민중화 운동-소집단운동으로서의 시민미술학교」를 기고했다. 그는 이 글에서 “바야흐로 민중예술은 ‘민중을 위한’ 단계로부터 ‘민중에 의한 민중의 예술’로 접합되는 80년대의 방향”에 주목한다. “‘민중을 위한’ 전문적 예술과 ‘민중에 의한’ 비전문적 예술 사이에서 접합할 수 없는 간극의 불신이나 상호의 소외지대가 없는가”라는 질문을 던지면서 ‘두렁’의 ‘산 미술’을 살피고 있다.


두렁동인이 『산 미술』 책자에서 민속화(민화)의 현대적 가능성을 모색한 좌담기사는 매우 의의 있는 선발적 논의이다. 그들 동인이 민중미술을 시도한 것이나 광주에서 시작한 ‘자유미술인협회’의 시민미술학교의 개설과 시민미술운동은 대단히 성공적이다. 홍성담, 최열 등 지방 출신 작가들이 지방미술의 80년대 발전의 일환으로 민중화 운동을 스스로 일으키고, 또한 이에 고무 받은 목포의 ‘민예’팀과 이리의 ‘땅’ 그룹이 연달아 시민미술운동을 개최한 것은 민중미술의 초석으로서 연대감의 응집력을 실현한 것이다.


그는 시민예술의 동인들은 대등한 관계에서 문제의식을 토론하며, 주제표현의 합의적 해결과정을 통하여 민주화의 훈련을 터득하며 공동의 연대식을 강화한다고 밝히면서, 판화 익히기부터 시작하여 탈 만들기, 카드 만들기, 만화, 조각, 공예, 공작물, 공동벽화, 포스터 등 최소한의 경비로 공동제작의 즐거움을 나눌 수 있는 기량을 습득하고, 또한 그것들은 종교계의 교육 프로그램으로 더없이 환영받고 있다고 적고 있다. 이러한 시민예술의 관심은 「삶의 미술 ․ 삶의 난장」 (원동석, 「삶의 미술 ․ 삶의 난장」, 『마당』, 1984년 7월호)에서 이미 정리된 바 있었다. 105인의 <삶의 미술전>을 리뷰한 이 글에서 그는 “미술이 삶이어야 한다는 그들은 삶의 난장을 트고 있었던 것이다. ‘난장(亂場)’이라는 의미는 무질서한 혼란을 연상하게 하지만, 우리네 민속에서는 살아 있는 삶들의 실상을 떠벌이는 시끌벅적한 축제이기도 하다. 어디 삶의 난장에 질서와 형식이 소중할 것인가? 떠들썩한 열기와 싱싱한 생명들의 용트림, 온갖 잡스런 욕망이 분출하는 자유야말로 삶의 참모습”이라고 얘기하고 있는 것이다.


그의 부고(訃告)와 장례를 듣고 얼마 뒤 나는 작년에 그가 마지막 평론집으로 묶어 낸 『우리예술의 미학』을 유족으로부터 받아서 읽었다. 이 책의 제1부는 「어미신화로 풀이한 우리미학」이다. 30여 년 동안 강단에 서면서 그가 민중미술을 더 깊게 사유한, 한 흔적으로서의 이 미학적 사유는 최근 내가 유라시아의 미학적 뿌리를 찾아가는 공부와 크게 다르지 않았다. 그는 1980년대의 역사적 민중미술론을 뛰어넘어 근본적이고 본질적인 시원의 민중미술론을 탐색하고 있었고, 그것은 21세기 다시 새로운 미술의 항로에서 우리 미술가들이 알아야 할 어떤 지혜의 샘이라 생각되었다. 그러므로 이제 우리는 ‘원동석론’을 총론에서 다시 시작해야 하지 않을까!


연도별 원동석 평론 목록 1973~1994

1973.04. 『신동아』, 「김은호」
1974.    『원광미술』, 「한국 근대미술 60년의 좌표-근대미술 60년전을 중심으로 한 반성」
1975.    『원광문화』 제2집, 「민족주의와 예술의 이념」
1976.    『고대문화』 18호, 「근대미술에 있어서 의식의 갈등-외부와 내부의 사이에서」
1977.01.  『대화』, 「한국 추상미술의 외세주의」
1977.08.  『미술과 생활』, 「의제 허백련의 작품 세계」
1977.09.  『대화』, 「미술의 사회적 기능」
1977.09.  『대화』, 「미술의 민중적 정서 회복」
1977.11.  『미술과 생활』, 「산수화의 미학」
1977.     『계간미술』 여름호, 「어디서 무엇이 되어 만났는가-수화 김환기론」
1977.     『계간미술』 가을호, 「심선산수와 이상미」 
1978.10.  『미술과 생활』, 「누구를 위해 무엇을 보여주는가」
1978.11.  『미술과 생활』, 「전통미술의 의미와 과제」
1978.12.  『미술과 생활』, 「민족주의 예술의 이념과 방향」
1979.03.  『미술춘추』, 「추상과 사의의 예술영역-동서양의 미학의 차이」
1979.04.  『신동아』, 「이당 김은호론-세필 채색화의 특성과 한계」
1979.     『계간미술』 가을호, 「국전 30년의 실태와 공과」
1980.     『실천문학』 봄호, 「누구의, 누구를 위한 길인가」
1980.     『시각과 언어Ⅰ-산업사회에 미술』 , 「수용의 현실과 소외-제도미술의 극복을 위하여」
1981.     목포대 교지 『道林』 창간호, 「지방미술의 육성과 발전의 방향」
1982.     『시각과 언어』, 「수용의 현실과 소외」
1982.01.  《81문제작가전》, 이청운 추천비평
1983.     『한국문학의 현단계』, 「한국미술의 새단계」
1983.     『일과놀이』, 「오늘의 민중화는 가능한가」
1983.09   『예술평론』, 「미술의 진실과 허위의식-어느 쪽이 사이비 예술인가」
1983.06   『마당』, 「민족미술의 정립문제-일제잔재 미술 시비론」
1983.01.  《82문제작가전》, 노원희 추천비평
1983.09.  『마당』, 「비판적 형상주의의 실험」
1983.12.  『마당』, 「임술년」
1983.     『계간미술』 가을호, 「한국 아카데미즘과 관전의 허상」
1984.     『시대정신』, 「민족미술과 민중미술」
1984.     한양대 교지 『행림』  겨울호, 「80년대 미술의 새 흐름-70년대 미술을 넘어서면서」
1984.     『오늘의책』, 「민중미술의 논리와 전망」
1984.     『예술과 비평』 가을호, 「민족미술의 특질론-미술사학의 논의점과 관련하여」
1984.     『홍익미술』, 「새로운 현대미술을 위하여」
1984.     『행림』, 「한국 현대미술의 반성」
1984.     『일과 놀이』 제1집, 「민중그림은 가능한가-옛 민화와의 접속을 위한 제언」
1984.02.  『마당』, 「미술의 민중화 운동-소집단운동으로서의 시민미술학교」
1984.05.  『학원』, 「한국화의 문제점과 전망-그 이념과 표현기법」
1984.07.  『마당』, 「삶의 미술·삶의 난장」
1984.10.  『공간』, 「한국 모더니즘의 허상과 맹점-이우환론」
1985.     『공간』, 「민중의 생활에 뿌리를 둔 전방적 시야의 형성」
1985.     『예술과 비평』 봄호, 「도전과 소외 극복의 비평사-해방 40년 비평의 흐름」
1985.     『시대정신』, 「미술비평의 논리와 수용」
1985.     『현실과 발언』, 「현실과 미술의 만남」
1985.     『이청운전』, 「이청운」
1985.03.  『아주대학보』, 「민중판화는 주체적 표현력의 구가」
1985.03.  『외대학보』, 「민중미술로서의 판화운동」
1985.05.  『한대신문』, 「다변화된 민중문화의 입체적 표출」
1985.05.  『성심여대학보』, 「민중 속에 파고든 실천예술로서의 미술」
1985.06.  『건대신문』, 「문화적 빈자와 민중미술」
1985.10.  『성대신문』, 「제도적 이념 넘어선 민족미술」
1985.10.  『공간』, 「미술과 역사」
1985.11.  『고대신문』, 「미술에 있어서 해방의 의미」
1985.11.  『단대신문』, 「열린 삶을 지향하는 미술운동
1985.     『계간미술』 여름호, 「지방미술과 지방주의」
1985.     『계간미술』 여름호, 「비평과 저널리즘의 전개」
1986.     『중앙예술』, 「정치와 미술」
1986.     『칼노래』, 「오윤 그림의 민중정서와 힘」
1986.05.  『외대학보』, 「현단계 벽화운동의 모순과 올바른 방향성」
1986.05.  『한대신문』, 「삶에의 회귀와 문화혁명의 디딤돌」
1986.07.  『민족미술』, 「민중미술운동의 점검」
1986.09.  『민족미술』, 「故 오윤 선생 영전에」
1986.     『계간미술』 봄호, 「권순철-서민상을 통한 자아의 발견」
1986.     『계간미술』 가을호, 「처음 참가한 제3세계전에서의 성과」
1987.     『실천문학』, 「민족민중미술의 지평」
1987.03.  『인하』, 「민중과 미술」
1988.05/06.  『가나아트』, 「상처와 고난의 두 작가」
1988.09/10.  『가나아트』, 「민전의 새로운 방향」
1988.10.   『미대학보』, 「대학미술교육의 병폐를 진단한다」
1988.     『계간미술』 여름호, 「김봉준 송창 심광현 원동석 장경호 임옥상-민중 민족미술 그룹운동은 무엇을 추구해 왔는가」
1988.     『계간미술』 여름호, 「한국화의 성공과 실패」
1989.01.  『월간미술』, 「치열한 의식, 부드러운 시선」
1989.01/02.  『가나아트』, 「80년대 미술의 평가와 전망」
1989.05/06.  『가나아트』, 「북한미술의 이념적 토양」
1989.08.  『월간미술』, 「한국 현대미술 속의 민화」
1989.09/10.  『가나아트』, 「노동의 삶으로 뛰어든 투철한 작가정신」
1989.10.  『월간미술』, 「민중미술의 좌표에서 본 작가들의 특성」
1989.11.  『월간미술』, 「민중미술의 한계와 가능성」
1989.12.  『민족미술소식』, 「80년대 미술의 결산과 과제」
1989.     『실천문학』 여름호, 「북한의 주체미술 이론과 창작」
1990.08.  『민족미술』, 「80년대 미술운동의 반성과 90년도의 과제」
1992.03.  『미술세계』, 「민족문화의 동질성 회복의 문제」
1992.04.  『미술세계』, 「자본주의 사회에서 수용의 현실과 소외의 양태」
1992.06.  『미술세계』, 「지역미술과 지역주의」
1992.09.  『미술세계』, 「JALLA 비엔날레 제8회전에서 만난 작가 세계에 대한 인상기」
1993.     『땅의 길, 흙의 길』, 「우리 삶의 뿌리를 위하여-김정헌」
1993.03.  『미술세계』, 「새로운 질적 전환을 향하여」
1993.08.  『민족미술』, 「민중미술의 길 다지기와 넓히기」
1993.11.  『민족미술』, 「코리아 통일미술전에서 본 남북 미술의 성향」
1994.      『민족미술』, 「코리아 통일미술전에서 본 북쪽 작가들의 세계」


미술세계_2017년 6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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