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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시 리뷰 | 안상수 / '글꼴' 인문학자

김종길

안상수 '글꼴' 인문학자


“저는 ‘어울림의 멋짓, 삶의 멋짓’이라는 표현을 해요. 평화를 순 우리말로 번역 할 때 가장 가까운 말이 어울림이라고 생각하거든요. 어울림이라는 것은 아름다움의 본질이자 삶의 본질이에요. 또 삶을 배제한 어울림은 있을 수 없죠. 이 어울림과 삶을 멋지어가는 과정, 멋지게 만들어내는 과정, 이것이 저는 ‘어울림의 멋짓, 삶의 멋짓’ 곧 디자인이라고 생각합니다.”
_ 날개 안상수


일러두기

안상수의 호는 ‘날개’다. 이 글에는 오롯이 그의 ‘호’로만 등장한다. 날개의 말글 쓰기를 존중하기 위해 그가 되살려 쓰는 글말들을 자주 인용했다. ‘말글’은 말로 쓴 글이고 ‘글말’은 글로 쓴 말이다. 그것이 ‘문자’다. 그는 타이포그래피를 ‘글꼴’이라 하고, 디자인은 ‘멋짓’(혹은 멋지음/멋짓기)이라 한다. 풀어서 ‘어울림의 멋짓, 삶의 멋짓’이라 말한다. 그가 세운 파주타이포그라피학교는 즐여서 ‘파티’(PaTI)라 하고 또 ‘배곳’[주시경의 ‘(한글)배곧’을 지금 말로 바꿈]이라 부른다. 편의에 따라 ‘이미지’와 ‘그림’을 번갈아 썼으나 같은 뜻이다. ‘한 눈 감기’의 사진작업을 그는 ‘한 눈 빛박이’라 한다. 또 다석(多夕) 류영모와 함석헌의 사상이 깃든 말들인 바탈[本性], 씨알, 얼/몸맘얼, 참나(眞我), 한 긋 등을 내용의 취지에 맞게 사용했다. 날개는 다석과 함석헌을 사상적 은사로, 시인 이상을 글꼴 멋짓기의 개척자로 본다.      

    


날개는 세계 곳곳의 문자가 탄생한 나라, 지역, 장소들을 발로 누볐다. 몽골 초원의 바위에 새겨진 옛날 옛적의 암각화를 찾고, 중국 윈난성 리장의 둥바문자를 보러 가기도 했다. 또 ‘멋짓’이 새로 움트는 곳이라면 대학이든 사람이든, 그 무엇이든 직접 만나야 했다. 그 만남, 곧 인드라망의 생명공동체에서 날개는 너나를 구분하지 않고 다투지 않는 ‘평화’로서의 어울림의 멋짓, 삶의 멋짓을 구현하고자 한다.


2011년 그는 두 번째 시베리아 횡단여행을 갔고 그 여행에서 ‘파티’의 설립을 결심했다. 그가 이 여행을 기록한 절첩식 스케치북을 보면 그의 사유가 광활한 초원의 능선과 그 능선의 주름을 닮았구나, 하는 생각을 갖게 한다.  



이미지 인문학자


그는 ‘한글 얼’을 창제한 세종과 그 얼을 다시 밝힌 한힌샘(白泉) 주시경을 시조와 중시조로 숭상하고, 우리말로 쓰기와 말하기와 생각하기를 실천하며 문학과 철학을 일군 시인 이상과 다석 류영모, 함석헌을 흠모(欽慕)한다. 그 기쁨과 사모함이 사무쳐 글꼴 멋짓기에 빠졌고, 그 실험으로 탈네모틀 글꼴의 ‘안상수체’(1985)를, 우리문화의 상징 무늬를 엮은 《한국전통문양집》(1986)를, 그 글꼴로 그림을 그린 <한글만다라>(1988)를, 그 글꼴과 멋짓기의 예술학을 금누리와 살핀 《보고서/보고서》(1988)를, 그리고 한글 자음과 모음의 신화․생태학적 그림인 <문자도>(1996)를 멋지었다.


날개의 멋짓기는 글꼴체의 ‘탈네모틀’이 보여주듯 ‘脫’(탈)이 뜻하는 ‘(옷․껍질을) 벗기다’의 파격을 놀이로 펼쳐내는 것이었다. 놀이하는 아이로서의 ‘장난기’는 가장 제다운 사람의 표현일지 모른다. 함돈균은 파티학교 선언문에서 “‘멋’은 단순히 예쁜 것이 아니라 슬기롭고 너그러우며 유연하고 전복적이고 유쾌하며 불온하고 훌륭”한 것이며, “지배적인 것을 타 넘고 비틀고 극복하는 새로움이요 자유요 놀이요 홀림이요 생생하게 살아 있음”이라고도 했다. 생생히 살아 있는 얼은 ‘생각하는 손’으로 발현될 것이다. 날개의 멋짓은 그 얼과 손에서 쉼 없이 움트는 것이다.


《보고서/보고서》에 이미 담겼듯이 날개는 장르 예술의 경계를 타 넘는 통합적 ‘멋짓기’를 자주 실험했다. 무용가 홍신자와 ‘웃는 돌 무용단’이 1995년에 시작한 죽산아트페스티벌(1996년부터는 ‘죽산국제예술제’)의 로고와 포스터를 멋짓고, 미술가 이반이 주도한 ‘비무장지대예술문화운동’의 포스터를 멋짓고 또 작가로도 참여했다. 그가 멋지은 <비무장지대.예술문화운동.작업전을.위한.“해변의.폭탄고기”.포스터>(1991)는 그것으로 포스터이면서 동시에 미학적 ‘외침’과 평화를 상징한다. 그렇듯 스스로 ‘작가다움’의 꿈언덕은 자음과 모음을 잇대어 만든 대문 <한글.문>(2001)과 한글이름으로 그린 ‘글자얼굴’, 그리고 사물들의 탁본에서 ‘발견’하는 한글 등에서 ‘다움’의 멋짓으로 싱싱하게 실현되었다.      


날개 안상수는 글꼴(typography) 디자이너고 글꼴의 미학을 연결하는 온누리 연결자이며, 이 시대 글꼴 인문주의를 깊고 넓게 확장시키는 문화적 한 현상이라 할 수 있다. 또한 글씨의 꼴과 그 꼴의 뜻과 그 뜻의 숭엄한 상징과 신화를 쫓는 미학자이며, 글꼴의 상상계와 현실계를 그네 타듯 오가는, 그 진자운동의 속도와 선에 굿을 지피는 샤먼이기도 하다. 다석은 “‘나’란 이 우주의 끄트머리인 한 긋(點)”이라고 했고, “사람에게는 하느님의 생명인 얼의 한 긋이 있다”고도 했다. 날개는 글꼴 샤먼으로서 그 한 긋의 우주 가장자리에 한글 얼의 깃대를 세운이다. 그러니 날개는 스스로 글꼴의 얼일 아닐까. 아마도 날개는 그 얼의 한 긋이요, 그 얼과 긋이 곧 날개일 터이다.    



홀림의 말꼴과 멋


그림(image/뜻) 말글은 글씨(소리) 말글에 앞섰다. 그림과 상형(象形)의 표의문자가 음절․음소 구조의 표음문자보다 이르다는 뜻. 그렇다고 그림 말글이 글씨 말글의 옹알이라고 할 수는 없다. 그림은 상상계(혹은 신화)의 구조를 뒤흔들어 말의 실재를 드러냈고, 글씨는 그 말의 실재로 다시 상상계를 구조화했으니까. 그림 말글과 글씨 말글의 탄생은 앞뒤가 있으나 말글이 완성된 뒤에 둘은 서로 갈마들어 어긋매꼈다. 그림은 말의 실재로 응고되면서 글씨가 되기도 했고 글씨는 다시 은유와 상징을 담아서 화상(畵像)이 되었기 때문이다.


날개 안상수의 ‘멋짓기’는 그렇게 말의 실재를 직접 가리키는 그림(뜻)과 글씨(소리) 사이의 말글, 그 말글의 ‘홀림’에서 비롯된다. 홀림은 스스로의 미혹(迷惑:홀로 홀림)일 수도 있으나, 《훈민정음 해례본》에서 밝히듯이 “어린 백셩이 니르고져 홀배이셔도” ‘니르지’ 못하였고, 또 “서로 사맛디 아니”하였으므로 그것은 ‘매혹’(魅惑:서로 홀림)이어야 했다. 홀로주체가 아닌 서로주체로서 백성이 사람다움의 얼을 담기 위해서는 상호 간의 홀림이 필요한 것이다. 그러므로 말의 실재를 직접 가리키는 말글로서의 홀림은 그에게 선(禪)이요, 선으로서 ‘얼’이며, 얼다움으로서 ‘참나’(眞我)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홀림은 어떤 꼬임에 홀려서 정신을 차리지 못하는 것을 뜻한다. 가다듬어 되찾지 못하니 홀림은 무언가에 깊이 빠진 것이요, 골몰하고 몰두하는 것이며 오롯이 생각에만 잠긴 것이다. 생각하는 것은 사랑하는 것과 같은 어원이다. 사랑하는 것은 불사르는 마음과 또한 같은 어원이다[《능엄경언해》(1462), 《월인석보》(1459)에서 ‘覺’ ‘燒’의 옛말 해제 참조]. 문자도와 부적과 한글의 자음을 뒤섞어서 멋 지은 <홀려라>(2017)는 안상수의 ‘멋지음’ 미학의 고갱이를 여실히 보여준다. 자음이 서로 흘레붙어서 말글 본래의 뜻과 상징을 해체하고 조합(montage)한 곳에 말글이 될 수 없는 말의 소리를 ‘그림말글’로 새겨 놓은 이 작품들은 ‘멋 지음’이 곧 ‘홀림의 미학’이라는 것을 드러낸다. 자음 밑으로 초서체의 흘림 인양 혹은 강물인양, 여우 꼬리인양 알아채기 힘든 상형 문자가 서 있는데, 그 기립의 문자가 발산하는 것은 뜻보다 먼저 기기묘묘한 기운(氣韻)이었다.


잡귀를 쫓고 재앙을 물리치는 부적 따위가 아니라 그것은 그것을 보는 이를 홀려서 신명(神明)에 들도록 하는, 한 얼을 모시도록 하는(侍天主), 궁궁을을(弓弓乙乙)을 찾도록 하는 ‘제다움’의 기묘한 멋이었던 것이다. 신명은 얼이 깨어서 밝은 몸이요, 시천주는 얼을 크게 지펴서 뜨거운 몸이요, 궁궁을을은 얼이 하나의 조화로 이뤄져 이로운 몸이다. 그러니 가장 제다운 사람은 밝고 뜨겁고 이로운 ‘도깨비’(魅)에 홀린 사람이다. ‘도깨비 홀림’ 바로 그것이 매혹의 진의가 아닌가! 그러므로 <홀려라>는 매혹의 글꼴이다.


<도자기타일>(2017)은 그런 홀림을 위한 주문이리라. 안상수체의 자음과 모음을 흩뿌리듯 펼쳐내서 ‘홀려라’ ‘놀아라’ ‘생생하라’ ‘당당하라’ 다시 ‘홀려라’의 지시형 동사를 알아채도록 하면서 동시에 ‘파티’ ‘놀뿐’ ‘마침표’ ‘자음’ ‘모음’을 사이에 넣어 그림과 글씨의 차이를 비운 곳에 주문의 어떤 ‘음성학’을 완성해 낸다. 접신의 공수처럼 그것은 마치 행과 연과 문장의 구조가 뒤틀린 비선형의 소리 암각화를 상상케 한다. 선형적인 말의 시간성과 말글의 체계가 해체되어 비선형의 체계로 드러난 이 장면성은 모든 것이 일순간에 창조되는 카오스를 엿보이고, 또 중국과 달랐던 민족어가 말글로 탄생하던 첫 순간을 동시에 떠올린다. 드니 빌뇌브 감독의 영화 <컨텍트>(2017)에서 언어학자 루이스가 헵타포드의 표의문자를 보았던 순간과 비슷하지 않을까? 그런 맥락에서 날개의 소리 문자학은, 그 말글의 소리학은, 아니 글꼴의 불꽃 신명은 역설적으로 확성(擴聲)의 파편이 아닌 게슈탈트(Gestalt) 지향적이다.



탈구조의 빛박이 눈


1889년에 발간된 『신간반절(新刊反切)』은 초성, 중성, 종성을 모아 글자 만드는 방식을 익히는 한 장짜리 인쇄물이다. 한글 대중화에 큰 도움을 주었던 이 표에는 위쪽에 ㄱ 개, ㄴ 나비, ㄷ 닭, ㄹ 라팔, ㅁ 말, ㅂ 배, ㅅ 사슴, ㅇ 아이, ㅈ 자, ㅊ 채, ㅋ 칼, ㅌ 탑, ㅍ 파, ㅎ 해 등 발음을 암시하는 그림이 그려져 있다. 그림과 글씨가 서로 홀려야 비로소 한 사람의 마음에서 말글이 터득된다는 것을 재치 있게 보여준다. 말글로서 한글을 익히면 그 안에서 새로운 그림이 피어오르고 또 글월이 샘솟을 것이다.


한말, 배달말글, 한글 얼의 창조는 세종이었으나, 한 나라 한 백성으로 말글을 배워 사람이 사람으로 대접 받도록 한 이는 한힌샘이었다. 그는 사람마다 말과 글의 쓰임이 다름을 알고 말글을 바로 세우는 ‘문법’을 체계화했고, 순우리말 쓰기로 구조언어학적인 이론을 구체적으로 창안한《말의 소리》(1914)을 저술했다. 그리고 말과 글에 사람의 ‘생각씨’가 있고 그 씨알이 사유하기의 철학이며 사상이라는 것을 알아차린 이는 다석이었다. 사람이 곧 씨알이라는 것도 그런 사유의 큰 바탈[本性]에서 비롯한다.


안상수의 글꼴이 한 홀림의 미학으로 생성되고 성장한 한데는 은연 중 한힌샘의 구조언어학과 다석의 우리말 사유가 깊게 스몄기 때문일 것이다. 글자의 꼴과 그림말글, 상형말글이 자유자재로 흘레붙어서 뜻이 되고 상징이 되고 소원성취의 기원이 되는 상황은 그의 내부에서 그런 말글들이 쉼 없이 만유(漫遊)하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안상수체는 글꼴의 네모 틀을 벗어나 형태적 특징이 도드라져 보이도록 받침을 홀자의 정 중앙 아래에 배치시켰다. 닿자, 홀자, 받침의 모양, 크기, 위치가 모두 일정하되 탈네모틀을 제시함으로서 한글 글꼴에 혁명을 불러온 것이다. 1985년의 첫 글꼴 시도는 이후 글꼴에만 집착하지 않고 글자의 이미지와 멋 지음에 매료되는 상황이 연속되면서 구조언어학이 서로 공통적이며 본질적인 것의 특징 바깥으로 밀어낸 “개체적이며 가변적이고 우연적인 것, 따라서 비본질적인 것”(《한국민족문화대백과》의 ‘구조언어학’ 개념 내용 중)으로까지 나아가게 된다. 구조를 알되 탈구조를 지향하고, 본질을 찾되 비본질을 추궁하고, 현실을 살되 초현실을 보는, 그러니까 전경(前景/현실계)과 후경(後景/초현실계․귀신계)이 맞붙은 세계를 그는 직시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것은 이분법이 아니라 서로 통어하고 회통하는 시선일 터이다. 그가 1988년 인터뷰 잡지 《보고서/보고서》의 창간호 표지에서 시작한 ‘한 눈 빛박이’의 <원-아이 프로젝트(One-Eye Project)>가 바로 그 시선의 한 증좌다.



글꼴 변신술과 우주나무


날개는 종종 말글의 글씨와 글꼴을 이미지그림으로 변신시킨 ‘문자도’를 작업한다. 그것이 하나의 작품이냐 아니냐는 크게 상관없다. 오히려 그는 ‘작’(作)과 ‘품’(品)을 나누어 ‘품’(물건)을 지우고 ‘작’(짓다․일어나다․일으키다)을 한껏 멋 짓는 즐거움을 누리고 있는 듯하다. 사실 ‘작업’(作業)은 ‘시작․기초’ 따위를 일으키는 사건이다. 그렇게 그는 완결형의 ‘사물’(品)에 집착하지 않음으로써 ‘(멋)짓기’(作)의 사건을 연기(緣起)로 확장하는 생생화화의 미학을 창출하고 있다.


그의 문자도는 민화의 문자도와 달리 한글의 창제원리를 우주나무[世界樹․宇宙木․神木]에 빗대어 그리는 것으로 이미지글꼴이라는 측면에서는 서로 비슷하나 그 뜻과 상징이 사뭇 다르다. 민화가 사람의 인륜적 도리를 효(孝)·제(悌)·충(忠)·신(信)·예(禮)·의(義)·염(廉)·치(恥)에 그 문자의 뜻과 상징의 서사를 그림으로 풀어서 담았다면, 그의 ‘문자도’는 한글의 모음체계 ㆍ, ㅡ, ㅣ에 깃들어 있는 하늘․땅․사람의 뜻을 원용했다. 거기에 한글의 다섯 기본자인 ㄱ, ㄴ, ㅁ, ㅅ, ㅇ을 나뭇가지로, 꽃으로 열매 따위로 틔워서 이었다. 효에 효자 전설의 잉어와 밀감, 죽순 등이 그려져 있고, 제에 형제의 우애를 상징하는 활짝 핀 산앵두나무 꽃과 형제의 위급함을 돕는 할미새가 그려져 있는 것 등, 그것들에는 뜻과 상징이 넘쳐날 뿐 어떤 신화적 서사의 그림자는 읽히지 않는다.


한글의 자음과 모음을 이어서 하나의 ‘나무’로 탄생한 그의 문자도는 아주 단순하고 모던한 느낌이지만, 음절과 음소의 표음체계를 뜻과 상징의 표의체계로 뒤바꿔 샤먼의 신목으로 창조되면서 오히려 깊고 풍부한 신화적 세계와 만나고 있다. ‘문자도’의 형상에서 그 신화적 세계의 형상을 유추하면 사슴뿔과 사슴뿔의 왕관, 또 고대 식물을 그린 암각화는 물론 인류 초기의 문자들인 갑골문(甲骨文/은나라), 설형문(楔形文/메소포타미아), 쐐기문(수메르), 신관문(神官文/이집트)과 리장(麗江)의 둥바문자(東巴文字)가 엿보인다. 게다가 그것들은 모두 세계의 옴니글롯(Omniglot)이 아닐까 하는 생각마저도 갖게 된다.


한글은 표음문자이나 모음체계 ㆍ, ㅡ, ㅣ에 깃든 하늘․땅․사람의 뜻처럼, 또 다섯 기본자 ㄱ, ㄴ, ㅁ, ㅅ, ㅇ이 사람의 혀와 목구멍 형상에서 비롯된 것처럼 표의로서의 뜻글자가 그 원형이다. 날개는 자음과 모음이 만나서 단어가 되기 전의 이 원형의 뜻글자를 문자도로 멋지어서 완전히 다른 우주말 혹은 세계어를 창조하고 있는 셈이다. 어쩌면 이런 시도들이야말로 날개가 궁구하는 한글 너머의 한글, 문자 너머의 문자, 생각 너머의 생각, 그러니까 불립문자(不立文字)로서의 - 진리의 깨달음은 문자를 떠나 곧바로 인간의 마음을 꿰뚫어서 본성을 보아야 한다 – 세계에 이르는 길이 아닐까 한다.


‘생각’(生角)은 ‘싱싱한 사슴뿔’이다. 동북아시아의 샤먼들은 이 사슴뿔 관을 쓰고 굿춤을 추었다. 위대한 하늘신의 말은 이 뿔로 왔다. 그 뿔의 멋이 지금의 ‘아름다움’(美)이다. 날개의 멋짓기는 그토록 오랜 신화의 서사로부터 시작된 것이다. 그리고 오늘 우리는 그의 멋과 짓이 펼쳐내는 오래된 미래의 말글을 지금 이곳에서 마주하고 있다. 
   

아트인컬쳐_2017년 6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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