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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시 평론 | 임옥상 / 풍자와 비판

김종길

풍자와 비판, 그 숭엄한 상징의 미학
- 임옥상의 미술과 지향성


임옥상(1950~ )은 서울대에서 회화를 전공했고 프랑스 앙굴렘미술학교를 수학했다. 1974년부터 1982년까지 <12월>전에 참여했고, 1977년부터 1982년까지 <제3그룹>에서 활동했다. 1980년 <현실과 발언>의 창립동인으로 들어가 민중미술 운동을 펼쳤다. 광주교육대 교수, 전주대 교수, 민족미술협의회 대표를 역임했다.


그는 <현실과 발언>이 지향했던 비판적 리얼리즘의 미학을 정치사회적 현실의 모순과 부조리를 풍자하는 미학으로 활용했다. 특히 그는 대중과의 소통을 위한 ‘공공예술프로젝트’를 작업의 한 세계로 확장해서 꾸준히 기획하고 발표하고 있다.


이 글은 1980년대부터 현재까지 그가 발언하는 것들과 기사의 일부를 모아서 인터뷰 형식으로 정리한 것이다. 말의 ‘현재성’은 지금이 아니라, 그가 발언했던 시간들 속에 존재할 것이어서 이 방식을 택했다.



건강한 삶의 회복과 리얼리즘


임옥상은 1988년 여름 가나화랑에서 <아프리카 현대사>전를 개최했다. 그 전시는 한국 현대미술사에서 가장 강렬한 사건 중의 하나일지 모른다. 50m×1.5m의 두루마리 캔버스 1장으로 전시장을 가득 채웠기 때문이다. 그 규모도 그렇거니와, 회화에 담긴 이미지도 너무나 강렬했다. 전시제목에서 들어냈듯이 그것은 아프리카의 현대사를 몽타주로 펼쳐낸 것이기 때문이었다.


그가 그 작품의 제작에 착수한 것은 1984년 유학차 프랑스로 건너간 직후부터였다. 그곳에서 그는 서구 식민주의의 희생물이 되어 비참한 삶을 살았던 많은 흑인들을 만나게 되었다. 그는 그들의 모습에서 동일한 역사적 경험을 가진 제3세계 작가로서 동변상련의 감정을 느꼈고 그것이 하나의 계기였다. 그는 그 거대한 화폭에 무엇을 담고 심었을까?


“파리에 있었던 2년 동안 꼬박 이 그림 제작에 매달렸어요. 1986년 귀국에 앞서서 ‘범인종회’라는 단체에서 초청을 받았는데 그때는 30미터 정도였죠. 미완성 작품으로 전시회를 했었습니다. 내가 말하고자 했던 것은 서구제국주의의 침략으로 고난의 역경을 걸어야 했던 아프리카 민중들의 서사입니다. 그게 우리 근대사, 아니 우리 현대사와도 무관하지 않았으니까요. 그래서 그걸 끝내고 곧장 한국 현대사 작업을 시작했습니다(중앙일보, 1988년 6월 24일자 기사 참조).


1987년 6.10항쟁 이후 민중미술가들은 한국적 현실에 대한 날카로운 질문들을 던지고 있었다. 제3세계를 인식하고는 있었으나 그 세계와의 교감이나 교류는 직접적으로 일어나고 있지 않았다. 우리 현실이 녹록치 않았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 시기에 그는 우리 사회에 ‘아프리카’를 호명한 것이다. 그 회화적 기념비는 리얼리즘이 어떻게 새로운 ‘발언의 미학’으로 확장될 수 있는지를 보여주었다.


미술평론가 이태호는 1980년대 초중반의 그의 작품을 두고 “견실한 리얼리티의 구축과 날카로운 주변 현실의 포착으로 뛰어난 시각과 정서를 보여준다.”고 평가했었다. 작품활동 초기부터 그는 사회와 예술의 관계를 고민했던 것이다. 그렇다면 그것이 그의 민중미학일까?


“당시 나는 리얼리티를 형상화시키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림이 현실과 분리되어서는 안 된다는 생각도 했고 말이죠. 예술이란, 인간 본래의 삶을 깨우쳐 주어야 한다고 생각해요. 건강한 삶의 회복과 예술이 지향하는 것은 크게 다르지 않거든요. 그렇다고 예술이 인생을 구원한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삶이 예술을 구원하면 구원했지. 민중미술은 민중이 사랑할 수 있는 미술이어야 합니다. 그때 난 그렇게 생각했어요. 민중에게 배우려는 겸허한 자세가 없이는 결코 민중미술이 될 수 없거든요. 또 민중미술이란 민중의 세계관이 투영되어 있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그 시기의 내 작품들에서 그런 것들을 찾아보기는 쉽지 않아요. 그래서 민중작가가 되는 것에 대해 스스로 부끄럽기도 했고 민중미술에 휩쓸리고 싶지 않다는 생각도 그때는 참 많이 했습니다(1984년 두 번째 개인전 서문과 《공간》, 1988년 8월호, 김영재와의 대담 참조).   



풍자미학, 사회를 바꾸는


1997년 3월의 가나화랑 개인전도 큰 화제였다. 평면과 입체, 설치, 컴퓨터 아트를 망라해서 우리 사회의 정치현실을 날카롭게 비판했기 때문이다. 역설적일지 모르겠는데, 오히려 이때의 작품들이 ‘현실과 발언’의 비판적 리얼리즘을 아주 잘 구현한 것이 아닐까 생각한다. 그는 한국 사회의 부조리를 풍자하고 싶었다. 그래서 대부분의 작품들은 ‘문민시리즈’, ‘청와대’, ‘역사 앞에서’, ‘보안, 안보’, ‘시화호’, ‘우리시대의 풍경’ 같은 제목을 달고 나타났다. 암울한 사회현실을 비판적으로 다루기 위해서는 작품이 무거우면 안 된다고도 생각했다. 그는 “뭔가 기발하게 하고 싶었다”고 했는데, 그래서 그는 시각매체가 보여줄 수 있는 다양한 미디어를 동원했다. 캐리커처는 물론 만화기법의 작품들을 제작했고, 종이부조의 초상 작품들을 벽면에 걸기도 했다. 총 4개의 방으로 구성되었는데 그는 그 각각의 방에 우리 사회에 던지고 싶은 이야기를 담았다. 


“글에 기승전결이 있듯이 전시장도 그런 개념을 적용할 수 있다고 봤어요. 그 방마다 주제와 소재를 달리해서 관객들이 공간을 돌면서 분단과 현실사회의 모순을 몸으로 체험하도록 꾸몄어요. 어떤 방은 10센티미터 높이로 물을 채운 뒤 거기에 철조망을 압축한 징검다리를 설치해 놓았죠. 관객들이 징검다리를 밟고 다니면서 물속에 비친 과거를 회상하고 또 역사와 분단을 체험을 하도록 유도한 것입니다. 방황하는 10대들의 사진과 대표적인 역사인물 30명의 그림을 대비시키기도 했는데, 나는 그 방이 역사를 반추하는 방이면서 동시에 뭐랄까, 역사의 절대성이랄까, ‘역사’라는 것의 숭엄한 상징성을 드러내고 싶었습니다. 한 방에는 컴퓨터게임을 보여주는 화면에 전현직 대통령과 야당 총재 얼굴이 등장하도록 한 뒤, 3당 합당 선언과 백담사 유배 등 그들에 얽힌 사진과 그림을 걸기도 했습니다(한국경제, 1997년 3월 24일자 기사. 동아일보 1997년 3월 28일자 기사 참조).


그는 정치를 풍자하고 사회의 모순과 부조를 까발리는데 주저함이 없다. 그는 거리로 나가 직접 퍼포먼스를 하기도 한다. 가면이 등장할 때는 그 해학적 표현이 매우 직설적이이었으나 그것의 미학은 우리 마당극의 풍자미학을 전유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는 또한 ‘참여형’ 프로젝트를 기획해 많은 시민들과 과정형 작품을 제작하기도 한다. 작가주의를 내려놓은 자리에 ‘모두의 미학’을 세우는 공공미술 프로젝트인 것이다.  


올해 전시 <바람 일다>는 제목이 풍기는 시적 느낌과 어떤 운동성이 참 좋았다. 직선보다는, 가볍게 휜 곡선의 긴장이 완만하면서도 긴장을 놓지 않고 있는 그런 느낌이랄까. 지난  해부터 올 봄까지 광화문에서 불었던 민주주의 촛불이 거기에 담겼다. 이전보다 훨씬 가벼워졌고 깊어졌다. 이 전시는 작가 임옥상이 추구해 온 리얼리즘의 열린 가능성을 보여준다. 비판과 투쟁과 발언의 미학적 사운드가 스테레오로 울리기 때문일 것이다. 그는 광장에서 무엇을 느꼈고 그것은 다시 어떤 미학으로 형성되었을까?


“이번 전시는 지난해 말 토요일마다 시위 현장에서 문화 퍼포먼스를 하면서 느끼고 생각했던 것들을 전시장으로 들여놓은 것들입니다. 그야말로 광장의 언어가 자연스럽게 작품에 스민 것들이죠. 촛불이 거대한 파도로 변하는 것을 보면서 ‘시대가 바뀐다’고 직감했습니다. ‘바람 일다’는 거기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일순간 불다가 마는 바람이 아니라 그 바람을 내가 일으키는 내 바람이고 우리의 바람이라는 거지요(서울문화재단, 문화+서울, [공간, 공감], 헤럴드경제 이한빛 기자의 글, 2017년 9월 27일자 원고 참조).


이번에도 나는 <가면무도회> 작업으로 종이부조 초상의 작업들을 다시 선 보였어요. 한반도를 둘러싼 국내외 정치지도자들이죠. 이승만, 박정희, 전두환, 노태우, 김대중, 노무현, 이명박, 박근혜, 문재인, 김일성, 김정일, 김정은, 트럼프, 아베. 현실을 직시하는 것은 ‘역사의식과 현실 인식’을 구분하지 않을 때 가능합니다. 그것을 구분하지 않을 때 풍자와 비판정신은 상징성을 획득하게 되지요. 그런데 <여기, 흰꽃>과 <여기, 무릉도원>은 좀 다른 것입니다. 그것은 풍자도 비판도 아니죠. 일종의 관념적 실경화이자 현대판 무릉도원을 표현한 것입니다. 암울한 현재를 극복하는 ‘희망’을 이야기하고 싶었고, ‘미래’의 신세계를 당기고 싶었습니다. 북한산의 산세를 흙바탕에 선묘로 그린 것은 유구한 역사로부터의 현재를 뜻하고, 그것이 자연스럽게 품고 있는 수만 개 꽃은 시대가 바뀐 자리에 핀 꿈의 꽃들입니다. 미래가 현실이 되는 꿈!(민중의 소리, 2017년 8월 29일자 기사 참조)



철기시대 이후를 꿈꾸는, 평화


1993년 제작된 <대지-어머니>는 종이에 채색한 작품이지만 흙의 질감을 보여준다. 이후 흙은 조소 작품을 위해서가 아니라 하나의 미학적 질료로서 선택되어진 것 같다. 그는 왜 그토록 흙에 집착했을까. 그는 “흙은 본성을 잃지 않기 때문이죠. 본성을 잃지 않는 그 흙으로 작품을 하고 싶었을 뿐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제작 과정에서 균열이 생기고 캔버스에 칠한 것이 떨어진다는 것입니다. 아교, 섬유질, 종이 펄프를 섞었더니 해결이 되더군요. 사람은 땅 위의 존재입니다. 흙의 정신을 잃어버리면 삭막해 질 수밖에 없어요. 난 농촌에서 자랐거든요. 흙을 느끼기에는 농사만한 게 없을 것입니다. 예술도 다르지 않아요. 하나의 생명을 키우고 보람을 느끼듯이, 예술도 그래요. 세계와의 공감을 끌어내기 위해 난 흙덩이를 던졌을 뿐입니다.”(매일경제, 2017년 8월 27일자 기사 참조)


그가 흙을 미학적 소재로 선택한 것이 오래된 사유의 결과물이라면, 철은 ‘매향리 쿠니사격장’과 직접적으로 연결되는 것이다. 그는 경기도미술관이 2007년에 기획한 <경기, 1번국도>전에 <매향리의 시간>을 출품했던 적이 있다. 그 작품은 쿠니사격장의 포탄 잔해로 만든 거대한 푸줏간이었고 그래서 그 안으로 들어가면 마치 레퀴엠을 듣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어쩌면 그가 대지와 어머니와 흙을 사유해 온 것은 거기에 이 땅의 참혹한 현실이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늘 그에게 현재진행형의 실천이고.


“1989년에 우연히 매향리를 찾았다가 시작하게 됐어요. 그것도 아주 오래 동안 지속된 작업이라고 할 수 있죠. 사실 매향리에 대해서는 어렴풋이 알고는 있었지만 막상 현장을 가보니 상황이 너무 다르더라고요. 그 마을의 상황을 박제화 된 관념으로 이해하고 있었다는 부끄러움이 앞섰고, 미술을 통해 고발하자고 마음먹었습니다. 그때부터 매향리에서 나온 폭탄과 탄피로 ‘반미 조형물’을 제작하기 시작했어요. 2000년에 폭격연습의 희생자를 기리기 위해 <자유의 여신상>을 풍자한 높이 6미터의 <자유의 신 in KOREA>를 마을 앞에 세웠고. 또 2002년에는 폭탄파편을 탁자와 조명기구 등 생활 집기로 제작해 매향리 알리기에 나섰죠(국민일보, 2004년 4월 19일자 기사 참조). 살생과 파괴의 임무를 지녔던 철기를 변신시켜 평화와 휴식의 길로 올려놓는 일이 필요하다고 생각했던 것입니다. 전시 제목을 ‘철기시대 이후를 생각한다’고 정했던 것도 그런 맥락이죠. 우리는 전쟁으로부터 더 멀리 달려가서 평화에 가 닿아야 합니다. <경기, 1번국도>전이 끝나고 <매향리의 시간>을 매향리에 가져다 설치하면서 나는 이렇게 썼어요.


푸줏간의 고기처럼 폭탄의 잔해를 진열한다.
갈고리에 꿰어 피를 흘리며 걸려있는 살덩이처럼 폭탄을 걸어 진열한다.
푸줏간이야말로 삶과 죽음을 가장 극명하게 보여주는 현장이기 때문이다.
푸줏간에 오래 머물고 싶은 사람은 없다.
그러나 매향리의 푸줏간은 탈출구가 없다. 미로다.
자반사 유리로 탈출구는 혼돈되고 은폐된다.
흥분해서 길길이 날뛴다고 길이 보일 수는 없다.
흥분할수록 폭탄의 숲에 갇히고 만다. 미아가 된다. 성찰이 필요하다.
자신의 참모습을 찾아야 길이 보인다.
찢어지고, 녹슬고, 그래도 살아야 한다고 여기에 따꺼비가 붙었던 폭탄의 잔해들,
시체들을 보며 우리는 우리의 시간을 찾을 수 있을 것이다.
매향리의 현재의 시간은 곧 오늘의 우리 모두의 시간인 것이다.
- 작가 노트 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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