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낭독(191218) | 이샛별의 '고집'

김종길

이샛별의 ‘고집’




작품과 제목을 번갈아 보면서 고집(固執)이란 말의 본래 뜻을 생각했어요. 고(固)는 옛 고(古)를 에울 위(圍)로 둘렀으니 그 말에 제나[ego]가 이미 굳게 버티어 섰고, 또한 그 성미를 잡아 지키고(執) 있는 꼴이니 단단하기 그지없겠죠!


그런데 말이어요. 고집을 심리학에서는 “마음속에 남아 있는 최초의 심상이 재생되는 일”이라고 하네요. 완전히 새롭게 느껴지지 않나요?


성미 사나운 고집이 ‘너들[他者]’의 관계에서 비치는 모습이라면, 심리학에서는 자신의 ‘마음속’을 바탕 삼기에 너들이 없는 ‘나들’의 우물에 비친 모습일 거예요. 나들은 ‘나의 나’를 반복할 때 스스로 홀리는 나의 미혹(幻)이에요.


이샛별의 ‘고집’은 그런 환영 이미지의 나들을 다섯 이미지로 드러내고 있죠. 이미지로 그린 나들은 서로 다른 모습이지만, 고집의 표상인 고깔이 환영의 실체를 궁금하게 해요.


이 작품은 그의 개인전 <가장 욕망하는 드로잉>에 출품되었어요. 작가는 “무언가 배제된 채 이렇게 완전해 보이는 세계, 완성되어 우리 앞에 제시된 현실 세계의 끝없는 반복을, 역시 반복을 통해 다른 가능성, 다른 사유, 다른 시간의 이접(離接)이 구성되기를 바라는 욕망에서 출발한” 것이라고 하더군요.


주목할 말은 ‘이접’과 ‘욕망’이에요.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 소망이라면, 욕망은 그런 소망이 변질한 욕구일 거예요. 욕구는 마치 소구력처럼 그것이 해소되기 전에는 절대 멈추지 않는 갈증과 같아서 이것저것에 엉겨 붙어서 출몰하죠.


그렇다면 이접은 또 뭘까요? 왜 작가는 ‘이접이 구성되기를 바라는 욕망에서’ 시작했을까요?


이 그림은 다른 ‘나’의 다섯 이미지예요. 그것들을 머릿속에서 ‘하나’의 이미지로 중첩해 볼까요? 고깔은 그대로인데, 옷이 길어졌다가 짧아지고 키도 조금 작아졌다가 커질 뿐만 아니라 자세도 흔들리지 않나요?


결국, 그에게 고집은 ‘나의 나’의 이접이 만들어 낸 그 접의 사이 차이 다름을 보는 것이고, 그것의 이미지는 고깔 속에서 ‘최초의 심상’이 불러일으키는 어떤 환영이 아닐까 생각돼요. 실제로는 고깔이 성미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우물 속 심연을 엿보듯 마음속을 보는 장치일 것이란 생각인 거죠.


‘내 속엔 내가 너무도 많아’의 가사처럼 고집은 수없이 많은 나들의 환영이 만들어 내는 우물이고 그 우물의 가장 깊은 곳에 최초의 심상이 있을 것이라는 믿음. 어쩌면 작가는 그 심상을 찾는 실패의 과정을 이렇게 표현한 것일지도 몰라요.


누군가의 실체를 밝히는 것은 제나를 둘러싼 ‘에울 위’를 벗기는 것이 아니라, 바로 그 최초의 심상을 캐내는 것에 불과할 거예요. 환영의 이접을 걷어 낸 자리, 외로운 제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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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나[ego] : 다석 류영모는 ‘나’를 제나, 몸나, 얼나로 말했다. 제나는 제 것으로서의 나인데, 제 것밖에 모르는 이기적 주체로서의 나를 말한다. 몸나는 몸뚱이로서의 나이다. 생각 없는 육신의 다름 이름. 얼나는 진인(眞人), 즉 참나를 말한다.


너들 : 나와 구분되는 ‘너의 모든 너’를 말한다. 흔히 ‘타자’로 쓴다. 타자(他者)는 그러나 그 의미가 ‘다른 사람’일 뿐 나와 정확히 구분되지 않는다.


나들 : 너와 구분되는 ‘나의 모든 나’를 말한다. 흔히 ‘주체’로 쓴다. 주체(主體)는 객관과 대립하는 주관을 뜻하고, 의식하는 것으로서 자아를 말할 뿐, 너와 정확히 구분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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