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고


컬럼


  • 트위터
  • 인스타그램1604
  • 유튜브20240110

연재컬럼

인쇄 스크랩 URL 트위터 페이스북 목록

낭독(190925) | 한운성의 '서양 배와 복숭아'

김종길

한운성의 ‘서양 배와 복숭아’





여름 동안 달이 차고 기우는 것을 지켜보았다. 처서가 지난 뒤의 달은 맑고 투명했다.


새벽이슬이 차니 이제 과일들이 무르익을 것이다. 푸른 감 푸른 사과가 붉은 홍시와 홍옥(紅玉)으로 익어서 단내를 풍길 것이고, 밤과 대추도 씨알이 굵게 여물 것이다.


화가는 오랫동안 과일의 형상과 색과 뜻을 따져서 그림을 그렸다. 그의 그림들은 사뭇 단순하여 여러 과일들의 풋풋한 초상을 엿보게 한다. 


토마토의 인상은 토마토에 기울고 호박의 인상은 호박에 기울 듯이, 과일들은 그 과일이 가진 모양과 색에 따라 기운다.


복숭아의 설핏 감도는 붉은 홍조와 노란 살내음의 색채를 그는 놓치지 않았다. 어쩌면 과일마다의 모양과 색과 향에 매료되었는지 모를 일이다.


우리 초상화는 형(形)과 영(影)의 예술이다. 형은 형상(形象)으로 그려야 할 대상이고, 영은 그려진 초상화다. 화가는 인물을 극진하게 묘사해야 한다. 형상은 시시각각 변하지만 형상의 배후에는 불변의 본질로서 정신(神)과 마음(心)이 있고, 그래서 화가는 그것을 그림에 담아야 하기 때문이다.


과일을 사람 형상에 빗대어 말하는 것은 이치가 다를 터이나, 그의 그림을 보고 있으면 그 둘의 차이가 크지 않다는 것을 깨닫는다. 이미 오래전부터 그는 어떤 사물이 처한 어떤 형국을 살폈다. 예컨대 그는 매듭을 표현할 때조차도 사물의 정신을 보려고 했던 것이다.


이 그림 ‘서양 배와 복숭아’를 가만히, 아주 가만히 살펴보라. 무엇이 보이는가. 물론 서양 배와 잘 익은 복숭아가 보일 것이다. 그 다음은? 한 입 상큼하게 베어 먹고 싶다면 당신은 벌써 저 그림의 향에 취한 것이다.


그것이 그림의 정신이요, 마음이다. 


하단 정보

FAMILY SITE

03015 서울 종로구 홍지문1길 4 (홍지동44) 김달진미술연구소 T +82.2.730.6214 F +82.2.730.921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