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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트(1912) | 한국영화 100년

김종길

#1. ‘나’를 깨달아 던졌던, 뜨겁고 아찔한, 그 해


장준환 감독의 영화 <1987>(2017)은 주연 조연이 없다. 스토리는 ‘1987년’이라는 시계를 뱅뱅 돌릴 뿐이다. 권력을 탐한 자의 무자비가 날폭력으로 저항을 때려잡고, 진실에 기댄자는 아슬아슬한 곡예를 펼친다. 보도지침과 호헌철폐가 맞붙고, 빨갱이와 물고문이 솟구친다. 최루탄으로 겨눈 학생이 쓰러지고 개돼지가 된 국민들은 들끓는다. 연세대 정문 앞에서, 광화문에서, 교도소에서, 고문실에서, 남영동에서 열사가 탄생했다. 김인순 윤석남 김종례 구선회 정정엽 최경숙이 공동 제작한 걸개그림 <해방의 햇새벽이 떠오를 때까지 하나되어 나아가세!>는 그 해 7월 민주시민대동제에서 시민들과 그린 것이다. “한열이를 살려내라”, “군사독재 지원하는 미국반대”, “민주노조”, “소값폭등”, “군부독재 장기집권”, “1980년 5월 광주”, “우리아기 살려주세요”, “쏘지마!” 등의 손팻말이 그림 속 장면을 이룬다. 중앙에서 춤을 추는 이는 이애주다. 박종철, 이한열의 죽음에 바친 ‘바람맞이 춤’, ‘한풀이 춤’의 춤사위, 이애주의 춤. <1987>의 장면들은 <해방의 햇새벽이…>의 장면들과 겹친다. 그러다가 그 장면들이 이우성의 <빛나는, 거리위의 사람들>(2016)로 미끄러진다. 이유는 알 수 없다. 걸개형 그림으로 다시 탄생한 이우성의 회화는 1987년의 시대가 잉태한 그 이후의 광장과 거리를 비춘다. 장면은 더 복잡하고 촘촘하다. 이애주를 에둘렀던 붉은 태양은 이곳에선 달이다. 시대의 그늘을 벗기고 떠오른 <해방의 햇새벽이…>은 <빛나는, 거리위의 사람들>에선 달그림자에 휩싸여 있다. 1987년 이후 30년 동안 우리는 어떤 삶의 진실 속에 있었던 것일까?
 
#2. 끊어진 시간의 틈에서 삶의 진리를 엿보는, 샤먼 예술가


박찬경 감독의 영화 <만신>(2014)을 보는 내내 미술동인 두렁(주필 김봉준)이 그린 <조선수난민중해원탱>(1983)을 떠올렸다. 1977년 봉원사 만봉스님에게 불화를 사사한 김봉준은 괘불(掛佛)을 변용한 ‘걸개그림’의 형식을 만들고 그 안에 감로탱(甘露幀)의 미학을 녹여서 해원탱을 빚었다. 동학에서 광주항쟁까지 조선 민중의 참혹한 수난사를 하단에 배치하고 위로 상승하면서 해원의 대동세상을 펼쳐낸 이 그림은 한마디로 굿그림이었다. 실제로 1984년 4월 그림ᄆᆞ당․민에서 두렁 창립전이 열릴 때 이 그림은 최초의 걸개그림으로 마당에 걸려서 굿을 받았다. <만신>의 장면들을 읽다가 오윤의 <원귀도>를 엿보기도 했는데, 김금화 만신이 적군묘지에서 굿판을 펼칠 때는 <원귀도>의 인물들이 스크린 허공에 떠올라서 줄지어 명계(冥界)로 넘어가는 것을 본 듯했다. 그 행렬은 무거웠고 슬픔은 깊었다. 그러다가 정신이 번쩍 들어서 살피니 방울소리에 희희낙락하는 헛것들이 허공을 빙빙 돌았다. 조습의 <쾌지나칭칭나네>의 아홉 장면들이 펼쳐지고 있었던 것. 시간이 흐르는 것은, 사건이 ‘터지는’ 아수라의 전경(全景/이승)이 사건으로 ‘기억되는’ 후경(後景/저승)이 되는 것과 다르지 않다. 전경의 현실이 쉼 없이 현실 너머로 흘러들어가 후경의 기억과 역사를 이루고 판타지를 이루며 초현실의 상상계를 이룬 것 곧 시간이다. 전경과 후경을 그러나 두부 자르듯 뚝 잘라서 ‘삶’(의 형상성)과 ‘죽음’(의 형상성)의 세계라 단정할 수 없는 이유는, 죽음에 이르기 전의 ‘삶의 지속’이라는 시간성이 마음에 영구히 축적되기 때문일 것이다. 현실이 일관성이나 통일성, 장면 구성의 치밀함, 사건의 기승전결 따위로 존재하지 않듯이 후경 또한 애당초 단일한 시간성으로 존재하지 않는다. 그것은 바꿔 말하면 전경의 삶이 일관되지 않았고 삐죽거리듯 튕겨나갔으며 예고 없이 불쑥거리는 사건들로 진창이었다는 것을 증명하는 것이기도 하다. 사람과 동물과 하늘과 나무와 새들의 시간이 분절되고 끊어져서 탱자나무 가지가 엉기듯 엉기고 또 그 가지에서 자란 가시들처럼 웃자라서 날이 선다. 오직 샤먼 예술가들만이 그 끊어진 시간들의 틈에서 삶의 진리를 엿볼 수 있다. 



추천영화
배종 감독, 웰컴 투 동막골, 2005
장선우 감독, 꽃잎, 199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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