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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시 리뷰 | DMZ展: 한반도, 내일을 그리다

김종길

통일로 1번지의 종울음


1920년대 일본은 대륙 침략과 수탈의 길을 뚫었다. 1번국도는 목포에서 신의주까지였으나 그 길은 옛 실크로드여서 곧장 대륙으로 파고들 수 있었다. 철도가 그 옆을 달렸다. 호남선 경부선 경의선이 경성을 축으로 남과 북을 이었다. 1947년 경성역은 서울역으로 이름을 바꿨고, 해방이후 서울 개성 구간만 남았던 경의선은 1951년에 최종 중단되었다. DMZ가 길의 허리를 끊었다.  


서울역은 사통팔달(四通八達) 교통 요충지다. ‘문화역서울284’는 구(舊) 서울역사를 문화 플랫폼으로 바꾼 곳. 그곳에서 〈DMZ〉전이 열렸다. 기획자는 전시를 구성하고 연출할 때 공간축과 시간축을 사유했다. 공간축은 역사(驛舍)와 철로(鐵路)를 비롯해, 그 선들이 DMZ에 이르는 민간인 통제선-통제구역-통문-DMZ-감시초소(GP) 등이다. 그 선들은 접경지역에 가까울수록 다시점을 이루듯 알고리즘처럼 퍼져 있을 터. 시간축은 처음 DMZ가 생길 때부터 2018년 4월 27일 남북정상회담으로 GP가 철거될 때까지다. 그 두 개의 축이 역사 중앙홀에서 교차한다. 그 교차로에 안규철의 〈DMZ 평화의 종〉이 7.2미터 종탑으로 섰다. 녹슨 GP철조망으로 제작한 300kg의 종은 둔탁한 종울음을 냈으나 그 소리는 시공을 뒤흔들어 한반도를 울렸다. 장구의 좌우 복판을 울리는 소리가 통에서 맥놀이 치듯이, 남북으로 뻗어나갔던 서울역이 평화의 진앙(震央)이 된 듯했다. 진앙이 그렇게 거대한 맥놀이가 된다면 한반도에 평화가 오지 않을까.
         


상상과 현실의 영토 


전시는 섹션A의 “DMZ, 미래에 대한 제안들”에서 진앙의 파장이 될 작은 소리들을 직조하고 있었다. 3등 대합실에 펼쳐놓은 그 소리는 먼저 중앙홀을 지나쳐야 하지만 그곳부터 보는 것이 전시를 이해하는데 편했다. 1988년 뉴욕의 스토어 프런트갤러리에서 열린 바 있는 〈프로젝트 DMZ〉와 그 이후 30여 년 동안 예술가 건축가 디자이너 철학자들이 제안한 DMZ의 미래지도였다. 그것은 가능성이기도 할 터이나, 무엇보다 상상계의 영토를 확장시키는 하나의 기폭제로서 작동했다. 무엇을 꿈꾸든지 상관없는 그것은 그들의 자유의지였고 어쩌면 그래서 DMZ는 문화지리학과 인류학 생태학 역사학 신화학 미학이 뒤엉켜서 융합하고 통합하는 창조적 생기론의 개활지라는 생각이 들었다. 승효상의 〈새들의 수도원〉처럼 실제로 그것이 구현되어도 좋겠지만, 느린 걸음으로 남북의 민중들이 한반도의 미래를 세우면서 영구혁명의 현재를 상상하는 ‘시간의 장소’가 되어도 좋겠다고 생각했다. 조민석의 〈DMZ 생명과 지식의 저장소〉는 그런 ‘장소’의 성격을 선명하게 드러낸 건축적 아이디어다. 최재은은 건축가 시게루 반과 ‘공중정원’을 공동 디자인하면서 〈대지를 꿈꾸며...自然國家〉를 시작했는데, ‘공중정원’은 철원 지역의 한탄강 지류 역곡천을 따라 이어진 길이다. 그들은 조민석에게 ‘공중정원’의 북쪽 입구 종자은행과 남쪽 입구 생태계도서관을 의뢰했고, 그는 지상의 준비 공간, ‘생명’과 ‘지식’의 안전한 보존을 위한 지하 저장소로 구성되는 공생적 두 장소를 보여주었다. 박경, 백남준, 폴 비릴리오, 레비우스 우즈, 박모의 개념적 자료들도 흥미로웠는데, 백남준은 2000년에 DMZ에서 자신이 구상한 것을 결국 실현시켰다.


섹션B는 중앙홀이고 주제는 “전환 속의 DMZ: 감시초소와 전망대”이다. 중앙홀은 독자적인 하나의 공간이라기보다는 이곳과 저곳을 연결하면서 계속 만나게 되는 공유공간이기도 했다. 들고나는 매 순간마다 종탑을 보면서 롤러시스템으로 돌아가는 트라이비전 작품 〈마이 라이프 인 워〉를 보는 것도 인상 깊었다. 백승우에게 DMZ는 이미 인식된, 혹은 세뇌된 이미지였다. 개막식에서 그는 “이념으로 갈라선 북한은 우리가 판단할 수 없는 지점, 신뢰할 수 없는 지점들에 있다.”고 했다. 세뇌로 이미 인식되어 버린 이미지는 판단 중지해야 한다. 그는 GP와 예비군 훈련장에서 채집한 여섯 개의 장면들로 트라이비전을 구성했다. 중앙홀 교차로에서 광고판으로 돌아가는 그것들은 매순간 우리를 ‘판단 중지’하라고 소리치는 듯하다. 우리가 우리 스스로를 신뢰할 수 없듯이 저 이미지들도 하나의 관념에 불과하므로.


정연두의 〈을지 극장〉은 DMZ내의 전망대에 가보지 못한 이들에게 실체로서의 비무장지대를 ‘극장’인양 보여준다. 실체를 체험할 수 없는 공간은 장소가 될 수 없고 그래서 허구적 극장일 수밖에 없다. 서부전선의 산꼭대기 한 전망대에서 연출한 파노라마형 장면은 DMZ라는 어떤 서사 어떤 풍경 어떤 공간의 ‘실체-허구’를 관람하는 국민을 ‘관람객’으로 뒤바꾸면서 동시에 ‘미인대회’라는 에피소드로 갑자기 원위치 시킨다. 50여 차례 방문하면서 계절마다 촬영했고, 평화극장(강화) 멸공극장(철원) 칠성극장(화천) 을지극장(양구) 통일극장(고성) 등에서 작업하면서 전망대와 극장을 하나의 생각으로 묶었다.   


1, 2등 대합실, 부인대합실, 귀빈예비실, 귀빈실, 역장사무실에 펼쳐놓은 섹션C는 “DMZ와 접경지역의 삶: 군인, 마을주민”이 주제다. 섹션 A와 B가 예술적 언어로 읽어야 더 잘 읽히는 미학적 구조의 메타 텍스트라면, 섹션 C는 예술이라는 언어를 내려놓고 보아야 더 잘 보이는 이미지들이었다. DMZ와 접경을 이룬 지역의 삶은 군인이든 민간이든 상관없이 ‘구체적 현실’이다. 군인의 삶과 민간인의 삶을 전투와 일상으로 구분한다고 해서 구분되어지는 것이 아니다. 접경지역의 삶은 모두 전투이니까. DMZ는 경계(Borderline)다. 휴전선으로부터 남북으로 각각 2km를 획정하는 구체적이고 공격적인 지대가 그 경계다. 경계가 미친 파장은 접경지를 사는 사람들에게 오랫동안 폭발물이 암시하는 파괴적이고 해체적인 맥락에서 ‘(다분히 비극적인)신체적 현실성’을 갖게 한다. 작가들은 그 삶의 현실과 이면과 풍경의 안팎을 들춘다. 그곳에서 일상은 표면으로만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남과 북의 GP, 정찰 군인을 기록한 사진과 영상, 한국 전쟁 이후의 군인들, 주둔하고 있는 미군들, 민간인들이 찍은 GP와 군인들에 대한 사진 아카이브, 그 외 다큐멘터리 사진, 기록물, 비디오…. 그리고 접경지대 마을 사람들의 이야기, 민북마을 주민들의 삶. 


2층은 DMZ를 회화의 눈으로 기록한 작품들과 DMZ 전시사 아카이브, 임민욱 작가의 〈비碑300-워터마크를 찾아서〉가 설치되었다. 손장섭, 이해반, 김지원, 김선두, 송창, 최진욱, 이세현, 김정헌, 강운, 허수영, 손봉채, 김선경, 이해민선, 홍순명, 공성훈, 양유연, 민정기. 그들은 1980년대 이후 지속적으로 DMZ와 분단을 고민하면서 ‘분단미술’의 개념을 전유하고 확장시켰다. ‘분단’을 하나의 미학적 개념으로 선취했던 것은 ‘현실과 발언’의 작가들이었고 그들의 일부가 이번 전시에 초대되었다. 〈비碑300-워터마크를 찾아서〉는 강원도 철원군 철원읍 사요리 옛 수도국 자리에서 사라진 300명을 찾아 나서는 진행형 프로젝트. 근대문화유산 등록문화제 제160호 안내문에 “광복과 더불어 인공치하와 6.25전쟁을 겪으면서 친일 반공 인사들 약 300여명이 총살 또는 저수조 속에 생매장” 되었다, 한다. 임민욱의 출발은 “되었다, 한다”의 [,]가 드러내는 어떤 사실과 허구에 관한 것이다. 사회학자 한성훈과 수소문 끝에 수도국에서 북한으로 끌려가 실종된 실종자의 가족을 동송에서 만나게 되면서 이야기는 다르게 전개된다. 사라졌으나 죽지 않은 이가 있다는 사실로부터. 2014년 12월 18일 진행한 퍼포먼스 씨네 라디오 버스의 기록 영상은 그런 ‘사실’의 맥락을 미학적으로 구성한 작업이다. 이 영상을 보는 동안 우리는 역사의 어떤 흔적에서 비롯된 ‘남겨진 질문’이 무엇인가를 곰곰이 생각하게 된다.



경계에서 무경계로


우리는 오늘도 종북좌파 프레임과 이데올로기의 편협성이 드러내는 야만의 정치를 날마다 목도하고 있다. 한국 현실에서 개인에게 가장 강력한 경계구속은 국가보안법이다. 평화의 종이 종울음치는 순간에도 그 법은 사라지지 않고 있다. 경계의 안과 밖이라는 분단 구조에서 한국사회는 고립된 섬이며, 섬으로서의 한국사회는 20세기를 고립무원의 세계로 살았다. 그리고 21세기다.


남북정상회담은 그 어떤 예술적 퍼포먼스보다 강렬한 평화의 메시지를 타전했다. 어쩌면 그들이 펼쳐 보여준 ‘38선 넘기’의 아찔한 순간은 노무현 대통령이 넘었던 노란선보다 더 큰 변화를 몰고 올지 모를 일이다. 변화는 시작된 듯하고, 그 변화는 ‘멈춤’ 없이 진일보(進一步)하고 있는 듯이 보인다. 21세기 한반도의 미래지도는 예술가들이 상상한 것보다 크고 확장적일 것이라는 예감이 드는 이유다. 서울특별시 중구 통일로 1번지. 서울역 본관의 주소다.


2015년 10월호 《ART》에 〈‘평행 주체’로 남북 바라보기〉를 썼다. 그 글의 마지막에 “〈리얼 디엠지 프로젝트〉에 사실 ‘북한’은 존재하지 않는다. 그곳에는 오히려 ‘남한’이라는 이데올로기가 존재한다. 남한의 눈에 북한이 어려 있는 것이다.”라고 끝을 맺었다. 이번 〈DMZ〉에서도 ‘북한’을 찾기는 어려웠다. DMZ는 남한과 북한, 두 개의 눈이 마주하는 경계지다. 우리는 DMZ로 그 두 눈을 보아야 한다. ‘평행 주체’로 그 눈을 마주할 수 있을 때 통일의 종울음이 경계를 무경계로 바꿀 수 있을 것이다. DMZ에 대한 질문이 더 필요한 이유다.     


아트 | 2019.6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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