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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시 서문 | 상징공간, 상상공간 DMZ 예술실천

김종길

상징공간, 상상공간 DMZ 예술실천
- <상상공간-DMZ 600리>展에 부치는 글


역사-현실공간으로서의 DMZ 600리


비무장지대(非武裝地帶, demilitarized zone)는 적대국간의 무장충돌을 방지하거나 운하 하천 수로 등의 국제교통로를 확보하기 위해 설치되는데, 말 그대로 ‘무장금지구역’이다. 그 구역의 비무장성은 국제조약이나 협약으로 완결된 것이기 때문에 어떠한 상대를 막론하고 강력한 효력을 가진다. 군대를 주둔할 수 없고 무기나 군사를 배치하는 것도 금지되며 이미 설치한 것이라면 철수, 철거해야 한다.


한국의 비무장지대를 동서로 살펴보면, “서쪽으로 예성강과 한강 어귀의 교동도(喬棟島)에서 개성 남방의 판문점을 지나 중부의 철원, 금화를 거쳐 동해안 고성의 명호리까지 155마일(약 250km)의 군사분계선(MDL)을 중심으로 남북 2킬로미터, 약 3억 평”의 지대에 해당한다. 군사분계선으로서의 첫 휴전선은 1950년 11월 27일에 확정, 발표한 바 있으나 휴전이 성립되지 않아 무효화 되었고, 그 후 1953년 7월 27일에 ‘한국군사정전에 관한 협정’이 체결됨으로써 현재의 비무장지대가 설정되었다. ‘민간인의 비무장지대 출입에 관한 협의’가 있으나 사실상 이곳은 ‘인간출입금지구역’이라고 할 수 있다. 민간인이든 군인이든 이곳을 출입하는 것은 극히 제한적이란 얘기. 만약, 이곳을 출입하고자 한다면 군사정전위원회의 허가를 받아야만 가능할 것이다.


한국전쟁 60주년. 그 긴 세월동안 금단의 땅 비무장지대는 생태계의 보고(寶庫)가 되었다. 이것은 참으로 역설이 아닐 수 없다. 반세기 전, 대지의 살육이 잔혹하게 전개되던 한국전쟁 당시 휴전선은 어느 곳보다 치열했던 격전지였다. 서로를 죽이고 죽는 초토화 작전은 그 지대를 생명이 살 수 없는 폐허의 땅, 죽음의 땅으로 바꿔 놓았던 것인데, 아군과 적군이 전진, 후퇴를 반복하며 가장 접점의 불꽃을 태웠고, 휴전을 선언한 뒤에도 엄청난 양의 지뢰를 심어 그 누구도 얼씬거리지 못하게 했다. 수십 년 동안, 철책근무의 경계태세를 확보하기 위해 드넓은 평야에 때때로 불을 질러 시야를 확보했던 것은 주목할 사건이 아니라 일상이었다. 그러나 그런 인간들의 맞선 총구와 상관없이 자연은 쉬지 않고 일어나 그 땅을 메웠다. 철책으로 가로 막힌 폐허에 나무가 솟고 물이 흘렀다. 분명히 땅에서 물에서 하늘에서 왔으나 우리는 천지만물이 어떻게 그런 조화를 이뤘는지 다 알 수 없을 것이다. 수 없이 많은 씨앗들이 싹을 틔웠고 곤충과 동물들은 새끼를 길러 숲의 주인이 되었다. 아무것도 없는 것의 밖에서 무엇이든 있는 것의 안을 만들었을 터. 결국, 남북에서 철책을 넘어 생명살림의 도솔천, 가나안으로 들어간 이들은 오직 그들뿐이었으리라.  


연천군에서 강화도에 이르는 서쪽 구간만을 살펴보면, 고왕산 초랑계곡에는 검독수리, 개구리매, 삵, 두루미, 묵납자루 등 7종이 서식하고 있고, 임진강의 지류인 사미천과 연천평야 일대에는 큰기러기, 참매, 두루미, 재두루미, 꾸구리 등 13종, 판문점 근처의 대성저수지에는 재두루미가 광범위하게 서식하고 있으며, 한강으로 유입되는 사천천에는 독수리, 쥐방울 덩굴이 살고 있다. 이것은 최근 조사된 법정보호종 서식 현황일 뿐이다(2008년 환경부 보고서). 환경부와 국립환경과학원이 다시 ‘2009년도 비무장지대 중부지역 생태계 정밀조사’를 실시한 후 그 결과를 발표한 것에 따르면, 중부지역에만 총 450종의 야생 동식물이 서식하는 것으로 확인되었다. 그 중에서도 구렁이, 삵, 참매, 새매, 사향노루, 묵납자루는 멸종위기에 있는 귀한 동식물이다. 조사 결과를 굳이 더 나열하지 않더라도 비무장지대는 충분히 생태적이며 자연적이다. 아니, 그 자체로 자연이다. 인간이 갈 수 없는 곳 비무장지대는 인간이 상상할 수 없을 만큼 자연의 생명력으로 충만한 것이다.



상징공간으로서의 DMZ 600리


그렇다면 상징공간으로서의 비무장지대는 우리에게 무엇일까? 그것은 위에서 살펴본 전쟁과 생태의 역사로서 분단체제, 생명평화의 상징일 것이다. 하나의 조국이 남북으로 갈라진 뒤, 사회주의와 자본주의, 유일체제와 다수당 민주주의라는 민족분단의 현실적 체제모순은 여전히 두 체제가 적대적 관계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는 심각성을 드러낸다. 과거, 미국과 소련을 중심으로 한 사회체제간의 냉전은 소련의 붕괴로 거의 종식되었으나 남한과 북한의 양분된 사회체제는 역설적으로 냉전의 지속을 야기했고, 강대국 간의 이해관계를 더 첨예한 방식으로 대립시키고 있다. 또한 남북의 분단체제는, 20세기 국민국가의 탄생이후 각 국가들이 성취해 온 민족모순의 갈등해소와 그로 인한 민족해방의 뜨거운 감동조차 가로막고 있다. 그것은 깊은 슬픔조차 초월하지 못하는 음울하고 무거운 장벽이다.


분단체제가 야기한 더 심각한 문제는 남북 모두에게 근대적응과 근대극복의 이중과제를 족쇄처럼 묶어놓았단 점이다. 지난 해 ‘창비’가 엮은 『이중과제론-근대적응과 근대극복의 이중과제』는 20세기 한국의 제반 현실을 지성의 무게로 길어 올린 탁월한 사회담론일 터인데, 그 핵심은 분단체제의 내연속성이 냉전과 민족모순의 문제뿐만 아니라 식민주의(일제강점기 이후 강대국 혹은 유사제국주의로부터의 정치․경제․사회․문화적 식민성), 신자유주의(강대국 혹은 유사제국주의에 의한 전지구적 자본/시장주의의 확산), 개발주의(토목국가의 성장논리가 곧 현실 유토피아라는 환상의 실체) 등의 문제로 넓게 확산된다는데 있다. 부분적으로는 타자, 근대(화), 기억, 이주(노동), 도시(화), 테러, 탐욕, 재개발, 소비(낭비), 종교, 생태와 같은 분열적 키워드가 남한사회를 떠돌고 있다.


우리는 강제로 국권을 찬탈당한 1910년의 경술국치이후 근대국가로 향한 민중의 대항로(大航路)를 상실 당했고, 그것은 1948년 5월 10일 남한만의 단독선거로 들어선 친미성향의 대한민국 정부에서부터 1980년대 군부독재정권까지 지속되었다. 민중(인민)에 의한 민중을 위한 민중의 민주주의는 실현되기 힘들었던 것인데, 남한의 반공주의와 새마을정신의 철학이 북한의 반미주의, 천리마운동과 기이할 정도로 닮았던 것은 그래서 결코 신기한 일이 아니다. ‘민중’과 ‘인민’이라는 두 단어가 남북의 체제 불화와 혁명을 상징한다는 사실도 그렇고.


우리에게 근대는 식민이나 독재보다 먼저 가난의 극복에 있었고, 극한의 긴장을 형성했던 휴전(休戰)의 극복에 있었다. 그래서 근대적 사회 형성을 위한 다양한 민주담론과 실천은 경제개발정책에 무참히 빨려들었고, 철학과 미학은 반공주의에 강력히 포섭되었으며, 민주주의 혁명의 가능성은 ‘좌파-빨갱이론’에 몰려 간단없이 숙청되었다. 납치, 실종, 감금 등 통제와 억압이 일상화된 사회로서 남북의 현실은 체제만 다를 뿐 다르지 않았던 것이다. 우리는 1990년대에 와서야 상식수준의 민주적 현실을 경험할 수 있었다. 그러나 2010년 지금, 한국의 현실은 그 이상으로 나아가지 못하고 있다. 도시 문명화의 판타지와 토목국가의 이상향에 미친 ‘폭도형’ 개발주의가 여전히 전국토에서 벌어지고 있고, 날선 남북의 대립각은 금방이라도 죽음의 화염을 토해낼 양상이기 때문이다. 신냉전의 현장으로서 한반도를 둘러싼 미국-한국-일본, 중국-북한-소련의 대립도 만만치 않다. 그것은 총성 없는 전쟁이다. 그러므로 비무장지대는 생명평화의 상징일 수밖에 없다. 생태계의 놀라운 자생력이 보여준 비무장지대의 자연뿐만 아니라 긴장의 극한 대립으로부터, 전쟁으로부터 평화의 완충지대를 형성하고 있으니까.



상상공간으로서의 DMZ 600리


상상공간으로서의 비무장지대는 분단체제, 민족모순, 생명평화의 상징을 예술적 실천현장으로 쉼 없이 되돌려 지금 여기의 육체적 공간으로 체현하려는 의지에서 비롯된다. 체현하지 못하는 비무장지대의 상징은 결국 분단의 고착화를 불러올 것이다. 분단이 고착된다는 것은 두 체제의 단순 지속이 아니라 분단인식 자체의 상실을 의미한다. 그들은 그들대로 우리는 우리대로 총구를 겨눈 채 비무장지대를 국경선으로 인식하는 순간 민족모순이니 민족해방, 생명평화, 근대극복의 담론은 허망한 모래바람이 될 것이다. 수천 년 한민족의 역사 따위는 민족과 하등 상관없는 한낱 왕족이나 귀족 지배층의 사건일지에 불과할 것이며, 이래도 그만 저래도 그만인 굴종적 하류민족으로 전락하게 될 수도 있다.


우리는 오랫동안 비무장지대를 그저 분단의 상징으로만 인식해 왔다. 이제, 우리는 21세기 새로운 민족담론의 꽃불을 위해 비무장지대를 예술적 상상공간으로 되살리는 꽃바람을 일으킬 필요가 있다. 한 줄 시의 노래가 녹슨 철길을 이을 것이며, 두 줄 시의 노래가 죽음 지뢰밭을 삭일 것이며, 세 줄 시의 노래가 이산 영혼들의 귀향과 안식을 불러올 것이기 때문이다. 시는 음악이어도 좋고 미술이어도 좋을 것이다. 지난해부터 시작된 <상상공간-DMZ 600리>는 그래서 의미가 크다.


경기민예총은 2009년 <분단의 섬 DMZ>를 기획했다. 첫 출발의 주제를 ‘분단’으로 설정하는 것은 분단현실에 대한 재인식을 통해 예술적 작업의 전초전을 제시해보자는 의도가 깔려있다. 뿐만 아니라 비무장지대가 60년 분단체제 공간의 기적적인 생태복원이라는 그 특이성으로 인해 세계적 주목을 받게 되었고, 그로인해 ‘생태평화밸트’, ‘DMZ 다큐멘터리 영화제’ 등 관광․문화적 의제들이 형성되면서 자칫 체제담론이나 근대극복과 같은 민족담론이 밀릴 수도 있다는 저항 심리도 한 몫 했다. 그렇다고 정부나 지자체의 그런 의제를 부정하거나 반대하는 것은 아니다. 그것이 어떤 의제든 간에 비무장지대가 사람들에게 새롭게 인식되고 알려지는 것은 매우 중요한 일이고 또한 필요하다. 예술가들이 모인 것은 그 바람을 더 다양하고 풍부하게 함으로써 담론의 꽃불을 활활 타오르게 하려 함이다.
두 번째 주제는 ‘상상공간’이다. 작가들은 창작의 상상공간을 위해 비부장지대의 현실을 직접 답사했다. 민족예술의 창작지는 언제나 현실이라는 첨예한 삶의 고투를 밑 개념으로 했다. 분단의 실체인 비무장지대를 보고 듣고 만지고 기숙하지 않는다면 그 상상공간의 뿌리는 빛 좋은 허울대처럼 허공에서 나풀거리지 않겠는가. 이번에도 그들은 3차에 걸쳐 현장 답사를 진행했다. 1차는 동부접경지역으로 중동부산악지역과 동해안지역인데 고성, 인제, 양구를 돌았다. 2차는 중부접경지역으로 서부내륙평야지역인데 화천, 철원, 연천을 누볐다. 3차는 서부접경지역으로 한강하구인데 강화, 김포, 고양, 파주를 걸었다. 가서 느끼고 본 것을 그리고 새겼다. 그 지역에서 자고 먹고 마셨으며, 때때로 전문 강사를 초빙해 비무장지대의 생태적, 역사적, 당대적 의미를 논했다. 한국전쟁 60년을 맞이하는 7월의 땡볕은 따갑고 매서웠으며, 답사지를 누빈 작가들의 얼굴에선 붉은 땀방울이 흘렀다.   


49명의 작가들이 길어 올린 작품들은 그래서 아름다웠다. 비무장지대의 풍경을 새겼으되 상징을 잃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들은 각자 살아온 방식대로 아니 그들이 일구고 지켜 온 창작의 형식대로 비무장지대를 그렸다. 누군가는 심원한 우주의 눈빛을 보았고 누구는 간단히 그 경계를 월경하는 새의 날개를 상상했으며, 누구는 60년의 기억을 한 치의 그림에 새겨 넣었다. 분단의 경계지대를 꿈의 현실로 바꾸어 놓거나 서릿발 같은 긴장을 가벼운 해학으로 농치는 재치도 있다. 그러나 대부분은 아직 무겁고 우울하며 생경하다. 묵언! 침묵이 그 표면을 흐른다. 그것은 분단 60년의 한국현실이 반영된 것이리라. 금강산 관광 중단, 개성공단 부분적 폐쇄, 천안함 침몰로 이어진 일련의 사건들은 우리 현실이 얼마나 깨지기 쉬운 조건들 속에 처해 있는지 보여주었으니까. 그러나 이제부터다. 그런 현실적 조건과 상황을 쉽게 초월하지 않으면서 민족의 상징공간, 상상공간으로 나아가기 위해선 비무장지대 예술현장에 대한 예술적 실천이 지속되어야 한다. 그래야 생명평화의 연대가 더 강화될 것이며 민족모순의 극복을 성취할 수 있다. 전시개막식에서 이반 선생의 벽화철거에 대한 민족예술인의 한 목소리의 선언은 그 연대의 시작이 아니겠는가!         
  
2010년 탈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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