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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뷰 | <시점.시점-1980년대 소집단 미술운동 아카이브> 기획

김종길

1. 국공립미술관에서 열리는 흔치 않은 아카이브 전시다. 전시를 준비하는 입장에서 오랜 기간에 걸친 리서치와 자료발굴, 증언 등이 있었을 것으로 보인다. 전시 준비 과정에 대해 말하는 것으로 인터뷰를 시작하자.

 

전시에 대한 구상은 정확히 10년 전이다. 2009년 동료들과 현실과 발언’(이하 현발) 공개 콜로키움을 아트선재센터에서 진행했고 그 결과로 2010년 인사아트센터 전관에서 현발 30주년 전시를 기획했다. 개막하던 날 저녁, 미술동인 두렁 선배님들이 저와 김준기 선생을 부르더니 두렁 창립 30주년을 준비해 달라고 했다. 나는 두렁만이 아니라 임술년(임술년, “구만팔천구백구십이에서), 서울미술공동체를 비롯한 주요 소집단을 연구하고 그것을 전시로 연결하고 싶었다. 2012년에 임술년 연구를 시작했으나 잘 안됐고, 2014년에 두렁 콜로키움을 힐스(한국일러스트레이션학교) 강의실에서 주말마다 진행했다. 그런데 그 무렵 나는 경기문화재단 문예진흥실장으로 근무 중이어서 전시기획으로 연결할 수는 없었다. 또 하나는 훨씬 더 전인 2005년에 경기문화재단 기초연구로 경기도 근현대 소집단 미술활동의 흐름 연구를 펴냈다는 점이다. 그 연구의 추진위원으로 참여했었다. 그 연구가 2010년 기획한 <경기도 힘>전의 바탕이 되었다. 2017년부터 민중미술 연대기 1979-1994를 집필하기 시작했는데, 소집단들의 탄생을 집중적으로 검토했다. 마지막으로 지난해에 기획한 경기천년도큐페스타 <경기 아카이브_지금,>전이다. 이 전시를 준비하는 과정에서 1980년대 소집단 미술운동 희귀자료들이 쏟아져 나왔다. 그 자료들을 보면서 때가 됐다는 생각이 들었다. 마침 1979년 소집단 탄생으로부터 정확히 40주년이 되는 해가 올해다.

 

2 .우선 방대한 자료수집이 압권인 전시다. 먼저 아카이브가 전시의 주요한 요소로서 작동하는 점은 전시를 준비한 큐레이터로서도 꽤나 모험이 아니었을까? 이른바 미술판 내부인들의 호응은 호의적일 수 있어도 우리 동시대미술사에 대한 이해가 없는 관람객이 공립미술관을 찾았을 때 당혹감을 느낄 수 있지 않을까? 그간 아카이브 전시는 그 중요성에 비해 덜 조명되었던 바를 말하는 것이다.

 

우리 현대미술사에 대한 이해는 일반 관람객뿐만 아니라 미술계 종사자도 사실 정확히 알고 있다고는 보지 않는다. 대체로 작가 연구는 어느 정도 쌓여 있으나, 1970~80년대 미술운동은 정리된 것이 거의 없다. 부분적으로만 알려져 있거나 몇몇 연구자의 결과물만 있을 뿐이다. 미술사적 관점과 주제로 기획하는 전시도 많지 않았다. 그나마 국립현대미술관에서 <근대를 보는 눈>을 연속 기획으로 보여주면서 근대미술을 어느 정도 정리했을 뿐이다. 공립미술관의 역할은 지역미술사와 한국미술사를 구분하거나 종합하면서 디테일을 살필 필요가 있다. 국립현대미술관이 우리 미술사의 백두대간을 그리는 것이라면 공립미술관은 그 줄기로서 산맥과 지세를 살피는 일이라 생각한다. 이번 전시의 부제는 경인경수지역 1980년대 소집단 미술운동 아카이브이다. 다른 지역의 미술운동은 오롯이 그 지역 공립미술관의 역할이 되어야 한다. 사실 최근에 여러 공립미술관에서 지역미술 아카이브 전시를 기획하는 걸 보는데 그건 매우 고무적이다. 아카이브 전시는 그 맥락을 모르는 관람객들에게는 곤혹스러운 일일 수 있다. 그래서 소집단 미술운동을 지도로 보여주는 연대기를 배치했고, 그물코 전시 길잡이를 만들어 제공하고 있다. 또한 각 소집단들의 공간에 결성과 활동, 참여작가, 선언문의 일부를 폼보드로 붙여 놓았다. 전시 이해를 돕기 위한 장치들이다. 1000쪽에 달하는 아카이브 북이 나오는 데 그것도 전시장에 배치해서 관람객들이 자료의 세목들을 직접 살필 수 있도록 할 것이다.


3. 전시를 준비하면서 여러 자료와 증언 등이 이어지면서 새롭게 발견된 이른바 팩트들이 있었을 것이다. 과거 잘못된 정보나 기억 등을 수정하고 재정립해 동시대미술사의 올바른 사실을 제공하는 기회가 되었을 것이다. 몇 가지 예가 있을 것 같은데?

 

이른바 정릉벽화사건이나 ‘20대의 힘전 사건등은 알려진 것에 비해 정보가 너무 빈약했다. 걸개그림 작가 최병수를 탄생시킨 정릉벽화사건의 벽화 밑그림, 사건일지, 항의서 등의 문건이 발굴되었다. 사건의 디테일이 드러난 순간이어서 처음 그 문건을 보게 됐을 때 너무 흥분했었다. ‘20대의 힘전 사건은 여러 작가들이 연행되고 작품이 탈취되는 일이 벌어졌는데, 몇 장의 사진만 남아 있을 뿐 그 전시의 전모를 알기 어려웠다. 손기환 작가는 전시 장면을 촬영한 슬라이드 일체를 보관 중이었고, 류연복 작가는 탈취된 두렁 작품 15점을 보관하고 있었다.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에는 박용수 선생이 촬영한 당시의 급박했던 상황이 사진아카이브로 등록되어 있었다. 세 곳에서 자료가 모이자 ‘20대의 힘전 사건이 보였다. 미술평론가 라원식은 최초의 걸개그림이 김봉준이 그린 <김상진 열사도>(1982)라고 한 바 있는데, 기록만 있을 뿐 확인할 길이 없었다. 그런데 이번에 사진이 처음 확인되었다. 서울대학교 정문에 걸린 열사도 사진 2점이 출품된 것이다. 그뿐 아니라 두렁의 이기연 작가도 1982년에 첫 걸개그림을 그린 사실이 밝혀졌다. <노동 신장도>가 그것인데 이 작품이 현재 전시 중이다.

 

4. 관람객을 위해 방대한 자료 중 눈여겨 볼만한 섹션 혹은 작품 혹은 자료를 소개해 달라.

 

미술동인 두렁의 창립전 장면을 재현한 공간이다. 김봉준 작가와 협의해 창립전 당시 걸렸던 <조선수난민중해원탱>을 높이 8미터 크기로 재제작 했고 그 옆으로 <동학농민신위>, <여신위>도 다시 그렸다. 두렁은 협동창작론을 주창했는데 그 결과물인 판화 작품, 만화걸개, 탈그림 등을 볼 수 있다. 또 이진경 작가가 꾸민 굿당 이미지도 흥미로울 것이다. 그의 미학적 콜라보는 두렁 창립전 장면을 새로 재현되는데 있어 가장 큰 몫이었고 그만큼 잘 드러났다. 또 하나는 시월모임 공간이다. 1985년 관훈미술관에서 창립전을 치루고 1986년에 그림ᄆᆞ당민에서 두 번째 전시를 했다. 그 전시가 <에서 하나로>전이다. 이 전시는 장안의 화제가 되었고 작가들은 이후 여성주의 미술을 전개했다. 그러다 보니 첫 전시 작품들이 잊혔다. 미술사에서 주목한 것도 두 번째 전시 출품작들이어서 줄곧 이들은 <에서 하나로>전의 전설 속 인물로만 기억되었다. 나는 첫 전시 출품작을 찾고 싶었다. 그들이 관훈미술관 전관을 채웠던 소묘 작품들을. 그 작품들 속에도 분명히 그들이 고민했던 시대의 미학이 있을 것이라 생각했다. 김인순 선생의 작업실에서 처음 소묘 작품들을 보았을 때 나는 전율했다. 너무나 힘이 있었고, 그 이후의 작업적 모태가 그 안에 있었기 때문이다. 윤석남 선생의 작품도 다르지 않았다. 가로 5미터 크기의 작품은 압도적이다. 40대 중년의 여성작가들이 예술가 주체로서 하나를 외쳤던 그 순간이 확연했다. 그 작품들이 지금 미술관에 와 있다.

 

5. 이번 전시를 달리 말하자면 1980년대 소그룹이 활동한 현장보고전이 아닐까 한다. 그들이 활동했던 그 현장에 대해 설명을 부탁한다.

 

당시 소집단 미술운동은 현장미술과 전시장미술로 갈렸다. 두 계열의 작가들은 다소 첨예하게 대립하기도 했다. 미술운동의 관점에서 보면 현장은 억눌린 시민을 다시 살리고, 숨 쉴 곳 없는 노동자와 연대하고, 그들 스스로가 미술의 주체가 되는 공유지이자 싸움터였다. 미술가는 그들과 함께 스미고 함께 뚫고 함께 뒤집어서 새 세상을 앞당기는 혁명가이자 기획자이고, 샤먼이었다. 현장이 그들에겐 창작의 제1원칙이어서 현장이 요구하는, 현장에 필요한, 현장에서의 작업을 지속했다. 깃발, 걸개그림, 플래카드, 영정도, 만장, 손수건, 판화, 만화시각매체의 한계는 없었다. 역설적으로 그런 활동들에서 미술의 형식은 해체되고 재탄생되는 사건들이 수시로 터졌다. 그러다보니 전시를 꾸리기가 너무 힘들었다. 그 미술들은 대체로 현장을 위해 소비되었기에 남아있는 것이 거의 없었던 것이다.


6. 소그룹 운동이 현재까지 이어져 오는 예도 있을 것이다. 대표적인 예가 바깥미술회나 슈룹 등이 될 것이다. 여타의 소그룹 활동이 지속되지 못한 이유는 무엇일까?

 

현재까지 지속하고 있는 소집단은 말씀하셨듯이 바깥미술회와 슈룹 뿐이다. <겨울대성리31인전>을 기획한 것은 다무그룹이었는데 1985년에 해체되었다. 1986년부터 바깥미술 동인이 그 전시를 이어받았고 현재는 <바깥미술전>으로 기획되고 있다. 수원에서 탄생한 안드로메다미술연구소는 수미술연구소를 거쳐 1990년에 슈룹을 결성하게 된다. 슈룹은 현재까지 왕성하게 활동 중이다. 두 그룹은 전위계열, 생태계열로 분류할 수 있다. 현대미술에 대한 새로운 탐색을 위해 스터디그룹으로 출발한 안드로메다미술연구소는 전위가 시대정신이었다. 바깥미술 동인의 겨울 대성리전은 시대의 탈출구 역할을 했으나, 생태문제로 접근하면서 1990년대의 시대령을 견디고 넘어올 수 있었다. 그러나 많은 소집단들은 1980년대 후반 민주화 운동을 미술운동과 결합하면서 민족미술협의회로 들어가거나, 정치적 미술운동을 지향했다. 1980년대 초반, 소집단들이 탄생할 때의 그들 선언문은 19876.10항쟁을 전후로 변화했다. 치열했던 시기는 바로 그 즈음이다. 1989년 베를린 장벽이 붕괴되고, 동구권 사회주의가 몰락하자 한국사회는 요동쳤다. 사회구성체 논쟁이 치열했고, 미술운동도 그런 논쟁에 빠져들었다. 그러나 1990년대의 전망을 찾기에는 역부족이었다. 1994년 국립현대미술관에서 <민중미술 15년전>이 끝나자 미술운동은 지역적 산개 운동으로 전화되면서 막을 내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