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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시 평론 | 미장이의 소란과 매혹 - 배종헌

김종길

미­장이의 소란과 매혹
- 말로 눈트는 배종헌의 ⟪미장제색(美匠霽色)⟫


눈물이 메말라
달빛과 그림자의 경계로 서지 못하는 날
꽃 철책이 시들고
나와 세계의 모든 경계가 무너지리라.
- 함민복, 「모든 경계에는 꽃이 핀다」중에서


꼬였다. 세 가닥의 금기, 세 가닥의 쾌락이 ‘나’와 새끼줄 꼬이듯 꼬였다. ⟪미장제색⟫을 펼친 아르코미술관 전시실에서였다. 흡사 ⟪미장제색⟫의 공간은 극장이어서 그 푸른 이미지들이 내 몸을 휘감았다. 불현 듯 몽골 초원의 돌무지[ovoo/오보]에서 휘날리는 파란 천 하닥이 떠올랐고 ‘영원한 푸른 하늘(이 말은 신의 이름이기도 하다)’을 뜻하는 ‘후흐 뭉케 텡게르’가 낮게 울렸다. 또 밤이면 언덕에 올라 별들의 장엄한 노랫소리를 듣는 부시족이 아른거렸다. 그들의 잔무늬가, 희미한 그림자 따위가 물결지어 흔들렸다. (그들과 나 사이의) 경계가 사라진 곳에 싱싱한 사슴뿔이 돋았다. 휘모리가 몰아친 마음을 붙잡고 극장을 빠져나와 커피숍에 벗들과 둘러앉았다. 그들과 회오리로 꼬인 ‘미장제색’의 한 가닥을 말로 풀었다. ‘벗-그들’은 ‘없는 주체’로 늘 내 안에 선명하게 존재하는 ‘말(言)’의 주인들이다.  


‘도깨비 홀림(魅惑)’의 산수풍경


K(이미지 비평가) : ‘미장제색’에서 보이는 배종헌의 미술언어는 표층과 심층, 전경(前景)과 후경(後景)으로 대칭성을 이루면서 ‘심층․후경’의 내용이 과거에 비해 더 깊어지는 양상을 보이는 것 같죠? ‘더 깊어졌다’는 표현은 미학의 너머, 그러니까 원초적인 ‘야생의 사유’에까지 가 닿은 게 아닐까 하는 생각 때문이에요. 게다가 그는 겸재의 <인왕제색도>를 거기에 덧붙이는 걸로 보아서 ‘환(幻)’의 이미지를 ‘표층․전경’의 어떤 실체로 되돌리는 것 같기도 하고요. <인왕제색도>인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 그것들은 어떤 흔적­얼룩­표면들에서 연상된 ‘연기적(緣起的) 상상의 이미지’일 뿐이잖아요. ‘연기’에서 ‘기’는 “일어나다, 날아오르다, 분기하다, 일으키다, 소생시키다, 세우다”의 뜻을 가지고 있으니 그의 내부에서 이미지는 쉼 없이 생멸(生滅)을 거듭하고 있을 테고.


L(구조주의 인류학자) : 그대가 ‘꼬였다’고 말한 것의 진실은 배종헌의 이미지들이 그대의 무의식에 반사되어 여러 개가 꼬였기 때문일 거예요. 마치 어떤 상(象)이 카메라 렌즈를 지나 거울에 반사된 뒤 펜타프리즘에서 되비쳐 도는 것과 비슷한 원리죠. 바깥[전시실/작품]의 현실이 그대 내부로 들어갔으나 그대의 내적 상상이 혼합되면서 펜타프리즘은 현실과 비현실, 아니 현실과 초현실이 꼬이는 회오리 공간이 된 거예요. 작가는 환의 이미지로 ‘미장산(美匠山)’을 설정하고 그 미장산의 제색도(霽色圖)를 그렸으니, 전시실에 걸린 작품들은 메아리 없는 ‘헛보임(=헛뵘)’의 그림자요, 그림자의 그늘이죠. 바로 그 그늘이 이번 전시 출품작들의 실체일 것이고, 작가는 그런 그늘의 미를 창조한 ‘미­장이’인 것이고 말이오. 그래서 더 꼬였을 것이오. ‘미­장이’는 아카데미가 구축한 (체계로서의) ‘미술/미학’에 구속받지 않는 존재요! 오히려 그것의 바깥을 어슬렁거리는 자유인, 트릭스터(tricster)일 것이요.


K : ‘헛뵘’의 그림자라니 그 말의 숨은 뜻을 좀 더 풀어 주시죠. 그림자의 그늘이란 것도 잘 이해가 되지 않는군요.


L : 동아시아의 신화는 우물에 비유할 수 있소. 거울과 달리 우물면의 위아래는 아주 높고 깊어요. 우물에 어리는 이미지는 하늘이기도 하지만[표층․전경], 물밑 심연으로부터 솟구친 것이기도 해요[심층․후경]. 우물 옆에 감나무가 있다면 파란 하늘에 홍시 두어 개도 우물에 비칠 것이오. 그런데 그것만이 참 풍경이겠소? 옛사람들은 그와 동일한 상징 이미지가 물밑에서 솟아 물면에 어릴 때 그것을 ‘진경(眞景)’이라고 했어요. 참된 풍경은 전경과 후경이, 위아래의 이미지가 물면에서 ‘하나’를 이룰 때 피어나는 것이오. 환유 은유 상징이 없이는 그 어떤 것도 본래의 면목(面目)을 드러내지 못할 것이오. 자, 그런데 작가는 작업실 벽에서, 국우터널에서, 인사동(=절골)에서 어떤 풍경들을 떼어냈는데 그걸 ‘미장제색’이라고 하거나, ‘터널산수’, ‘산수’라고 하니 물면에 어린 것이 여럿 아니겠소? 현실과 상상을 덧대어 어긋 매기니 ‘헛뵘’이 아니고 무어란 말이오. 그는 무언가에 미혹(迷惑)된 것에 틀림없을 것이외다. ‘그림자 그늘’은 이런 뜻이오. 우물면의 위아래가 하나로 어려서 맺힌 것이 어떤 ‘상(象)’이라면 배종헌의 회화는 그 상의 그림자일 것이오. 그런데 그 ‘상’의 현실은 벽에서, 터널에서, 껌 딱지 따위에서 왔어요. 그것은 그늘진 것들이죠.  

 

K : ‘풍경을 떼어냈다’는 표현이 재밌네요. 작업실 벽에서 ‘인왕제색도’를 본 것은 그렇다 치고, 사실 ‘터널산수’는 부서진 녹색이잖습니까? 불도저식 토건국가의 개발논리가 만들어 낸 터널이니까요. 그 안은 대지의 충격과 환영, 자동차의 소음․사건․폭력이 카오스로 언제나 존재하는 곳이고요. 시커먼 먼지와 균열과 습기와 곰팡이와 바람결이 빚은 이미지들이니 그걸 풍경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요? 그런 측면에서 ‘그림자 그늘’이란 말이 적절하게 다가오네요.


L : 그 풍경은 상호이질적인 것들의 ‘겹쳐짐’이에요. 충격 환영 소음 사건 폭력 혼돈이 겹쳐지면서 중첩되어 결정된 것이죠(重層決定). 그것은 국우터널의 상황이고 현장이며 눅눅한 시간이죠. 상황­현장­시간의 흔적/얼룩은 어떤 이미지를 닮았고/연상시키고, 그는 그것을 떼어냈어요. 그런데 그 ‘어떤 이미지’를 응시하면서 다른 말들을 떠올리죠. 그 말들은 전시실 복도에 붙여놓은 「차례」에서 볼 수 있는데, “2장. 미의 기원”에 “의외성 상상 자기물음 대비 희소 반복 망아 서정 낭만 그리움 공포 소멸 외로움 새로움 발견 죽어간다는 것 연민 망연 / 흔적 없는 흔적 쇠락 불길한 징후 이별 아무 것도 아닌 만남”이 그거예요. 터널의 상황과 작가의 심리적 차원이 서로 겹쳐지는 걸 볼 수 있어요. 전경과 후경이 겹쳐지는 지점이랄까! 그는 뾰족한 송곳 같은 것(Needle)으로 무의식에 반사된 그런 중층결정의 이미지를 긁어서 풍경을 새겼어요. 그러니 그 풍경을 실제 풍경과 같다곤 할 수 없겠죠. 우리가 살펴야 할 것은 ‘미­장이의 소란과 매혹’이오. ‘미(美)’를 쫓는 배종헌 작가는, (서구) 미학이라는 거울에 자기 자신을 비춘 채 빠져있는 (한국미술의) 나르시시즘을 20여 년 동안 깨트려 왔어요. 그의 소란은 크게 주목받지 못했으나 무게가 작은 건 아니오. 미술이 역사를 통해 스스로 발전한다는 법칙은 허구일 수 있으며, 그 법칙을 발견하고 따르는 작가가 또한 우월한 게 아니란 걸 일깨웠으니까. 그런 측면에서 ⟪미장제색⟫은 매혹적이외다.


K : 그래도 여전히 의문은 남네요. 전시 부제가 ‘어느 반지하 생활자의 산수유람’인데다가 회화 전체를 ‘산수화’라고 이름 붙이고 있으니 말예요. 산수가 아닌 것들로부터의 풍경을 ‘산수화’라고 하니…. 내가 처음에 생각한 것은 ‘산수화’라는 풍경이 아니라 그의 사유와 언어였어요. 그는 미술(美術)에서의 ‘술’과 작품(作品)에서의 ‘작’을 더 중요하게 판단한 것 같더군요. 일종의 ‘술수적 변태’의 이미지로 ‘검댕이’를 보고, 또 단지 물질로서의 ‘품’이 아닌 짓고 일으키는 생기론적인 능동태로서의 ‘작’을 실현했으니까요. 야생의 사유는 자연에 대한 초감각적 열림에서 비롯하는 게 아닐까요? 그의 작품들이 매혹적인 것은 무언가 상상을 짓고 일으키게 하는 ‘검댕이’의 술수적 변태 이미지에서 예기치 않은 ‘산수’를 보았기 때문일 거예요. 이때 산수는 실제가 아니라 ‘환’이죠. 나는 이 ‘환’이 배종헌 미술에서 하나의 ‘특이성’을 갖는다고 생각해요. 달리 말하면 장(場)이죠. 특이성이라는 장! 그는 그곳에서 놀고 있는 듯해요. 그런데 이 놀이를 통해 그는 전경과 후경을 동시에 본다는 게 다른 점이죠. ‘전시’라는 틀과 ‘작품’이라는 물성 자체를 부정하지는 않으니까요. 그렇다면 ‘환’의 실체를 무엇이라고 해야 할까요?


틈새와 뒷장의 소외


N(언어학자) : 전시실에 들어섰을 때 ⟪미장제색⟫의 ‘미장산’은 엉뚱하게도 ‘미장센’으로 읽혔어요. 실제로 전시구성도 그렇게 놓였단 생각이 들었고요. 복도에 붙인 텍스트 「처럼: ‘미장제색’ 개념풀이 미론소설」과 「차례」는 전시 관람을 위한 시놉시스 알고리즘이자 해석을 위한 그물코 단초였죠. 그러니까 작품으로서 <처럼_‘미장제색’ 개념풀이 미론소설>은 하나의 완결된 형식으로 인식되기도 하지만, 전시를 둘러 본 뒤에 그것을 볼 때는 전체를 궁리하는 ‘작’이었던 거예요. 작품이미지에서 짓고 일으킨 ‘관객’의 상상이미지가 <처럼>과 다시 만나 한 편의 총체적 만화경을 이루니까요. 그런데 사실 <처럼>을 보고 전시실로 들어갔을 때는 모든 게 ‘몽타주’더군요. 전시실 내의 장소들마다 설치해 놓은 이미지들은 서로의 관계를 이어서 읽지 않으면 종합되지 않았거든요. 작가는 몽타주와 미장센을 적절히 섞어서 전시실을 맴돌게 해 놓았어요. 각각의 장소는 쇼트로 이뤄진 작품들의 몽타주인데 반해 전체는 하나의 ‘미장제색’의 미장센이었으니까요. ‘미장제색’의 몽타주 구조는 “4장. 미장제색”에 잘 드러나 있어요.



   콘크리트 균열   보이지 않는 반항   소극적 저항
   콘크리트 거푸집   기억하는 사물   탈역사적 기록
   콘크리트 요철, 생채기   과정   무목적적 비목적의 목적
   콘크리트 동굴벽화   폭력   반자연적 자연의 정취


K : 그렇게 볼 수도 있겠군요. 한 실마리가 풀린 느낌이에요. 몽타주의 개념어라고 할 수 있는 균열 거푸집 요철 생채기는 그대로 제작기법에 적용되었더군요. 목판에 금색을 수차례 펴 바르고 그 위에 진한 청색 유채를 두껍게 칠한 뒤, 철 핀 등으로 긁어냈거든요. 그가 산수라고 한, 아니 실제로 그렇게 보이는 이미지들은 긁어서 드러나게 한 ‘상처’잖아요. 언 듯 보기에는 금물/금니로 그린 ‘금니산수(金泥山水)’처럼 보이지만요. 음, 또, 곰곰이 생각해보면, 그는 금니산수를 의도한 게 아닐까하는 생각도 들어요.


N : 금니산수란 게 첫 시작은 비단에 금물로 불경을 필사하는 사경(寫經)에서 비롯한 것이고, 거기에 그림을 넣은 것이 변상도(變相圖)예요. 신실한 마음으로 부처의 뜻을 따르겠다는 신앙심(信仰心)의 발로죠. ‘美(미)’는 ‘큰 사슴뿔을 쓴 샤먼’의 형상을 본뜬 것이니 처음엔 ‘신의 매개자-부족장’의 의미를 품었어요. 샤먼의 공수로 쏟아지는 신의 말씀이 아름답고, 부족장의 큰 힘이 아름다운 법이죠. 미­장이 배종헌이 벽에서, 터널에서, 아니 그가 수행해 온 지난 20여 년의 미술세계는 쓸모없는 것들, 일상의 틈새와 뒷장의 주변부에서 발견한 것들의 ‘미학세우기’였어요. 대장장이 샤먼이 불과 철로 도구를 만들 듯 그는 균열과 생채기와 검댕이를 달구질해서 ‘미’를 직조한 셈이죠. 그의 도가니에는 현대인의 폭력성, 자본주의 분열증 등이 끓고 있기도 하고 말예요.
   
K : 바탕에 칠한 금색은 그런 의미로 해석할 수 있겠군요. 미학을 해체한 곳에서, 미학의 토대를 뒤흔들어 다른 가능성을 탐색하고 그의 내부에 싹튼 이미지들을 쏟아내어 다른 의미와 성질을 싹 틔운다…. 다시 말하면 그것은, 그의 작업들은 미학제도에 의문을 제기하며 시작된 철저한 자기수행이면서도 동시에 저항이었겠네요. 전시실에 비치한 아카이브를 천천히 살펴보니 그는 늘 이전의 작업들을 포월(포함하며 초월)하며 나아갔더군요. 그러면서도 후경의 구조적 골조는 비슷해 보였고요.   


L : 그가 5년 전에 제작한 『작업집서』의 시작과 끝은 변형과 생성의 문법들로 가득해요. 그 문법들이 하나의 과정을 이루면서 배종헌이라는 미­장이를 만들어낸 거죠. 그는 스스로를 포월하면서 작업의 표층과 심층의 두께를 늘렸어요. 코발트 블루와 울트라 마린 두 색을 배합해서 그린 일종의 청색산수는(뭐 그것을 금니산수라고 확정할 수도 없는 노릇이니) 소란스런 호출이에요. 현실의 배후, 풍경의 배후, 통념의 배후에 그늘져 있는 그림자들을 소환한 것이죠. 나는 그것이 배종헌 이미지의 신화이자, 우리가 상실한 가장 원초적인 미학의 사유­씨알이라고 생각해요. N이 말한 ‘틈새와 뒷장’이라는 ‘소외’의 그림자를 말하지 않고서는 이제 미술의 실체를 잊어버릴지 몰라요. 그리고 조금 더 나아가기 위해서 종교와 역사를 얘기해야 해요. 그것들이 한데로 뭉쳐서 도가니로 들어가야 합니다. 


K : 종교와 역사를 덧붙이는 건…… 다소 경계할 필요도 있다고 봐요. ‘사경’과 ‘변상도’에서 ‘금니산수’를 풀었다고 해서 불교를 언급하거나, <인왕제색도>를 참조했기에 조선을 말하려 한다면 큰 오산이죠. 그것들은 배종헌 회화의 은유적 개념에 불과해요.


N : 사실, 틈새와 뒷장이라는 말은 일상의 틈새이면서 역사의 틈새이고 뒷장이에요. 동일하게 일상의 뒷장이면서 종교적 틈새이고 뒷장이죠. 그것들을 구분하는 것은 큰 의미가 없어요. 종교가 마음의 문제라면 역사는 일상의 문제이고, 그 반대로 역사가 마음의 문제라면 종교는 일상의 문제일 거예요. 문제의 본질은 그 ‘틈’과 ‘뒤’에 있어요. 근대화 도시화 산업화의 틈과 뒤. 동양 서양 세계화의 틈과 뒤. 그의 몽타주 개념인 ‘탈역사적 기록’, ‘무목적적 비목적의 목적’은 바로 그것들로부터 온 것이죠. L이 말하려고 했던 것은 바로 그 지점이 아닐까 해요. ‘틈’과 ‘뒤’에 탈역사적 기록이 있고, ‘틈’과 ‘뒤’에 목적 없는/아닌 목적이 있는 셈이죠. ⟪미장제색⟫이 궁리했던 미학적 실체의 뜨거운 민낯으로서!

2020.02.11. 탈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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