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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시리뷰 | 홀림 짓, 예감... / 아트인컬쳐

김종길



홀림 짓


안지산 개인전 《폭풍이 온다》, 허찬미 개인전 《Settlement》


꼴 지음과 그림 지음은 같은 짓이 아니다. 꼴 지음이 눈앞에 드러나 있는 ‘있(象)’의 무엇이라면, 그림 지음은 아직 나타나 있지 않아서 그저 마음에 그려지는 ‘없(狀)’의 그 무엇이다. 그러므로 꼴 지음의 ‘있’이 드러난 것이 꼴짓기(形象化)이고, 그림 지음의 ‘없’을 나타낸 것이 그리기(繪畵)일 것이다. 둘 다 그 무엇이 짓고 일으켜 어떤 꼴의 그림으로 떠올라 그려지는 점에서 다르지 않다. 뚜렷이 드러나든 마음에 솟아오르든 꼴 짓 그리는 일은 그림장이 마음이 소스라쳐 펼치는 송두리 홀림 짓일 테니까. 


안지산과 허찬미의 그림은 그 홀림 짓으로 넘실거린다. 안지산의 그림은 언뜻 보기에 억세고 모질어서 모지락스러운 데가 있고, 허찬미의 그림은 나부끼어 흔들려서 너붓거리는 데가 있으나, 그 둘의 느낌은 한데로 홀려서 솟구치는 감흥의 한 회오리다. 멍 때려 깊이 빠져들면, 헌걸찬 안지산의 그림에서 흔들리고 나부끼는 바람몰이를 더 자주 느낄 수 있고, 게다가 허찬미의 그림으로 천천히 스며들면 마음이 모지락스럽다가도 갑자기 목울대가 후끈거리며 울컥 울음이 올라온다. 이 무슨 술수 홀림의 감응인가!


나부껴 흔들리는 하늘땅이 마주한 맞둘로 어울려 비바람 몰아친다. 그 사이사이 낌새로 파고들어 얼핏얼핏 나타나 떠오른 얼 짓 잡아채 그린 안지산의 그림은 홀홀하다. 문득 갑작스럽고, 용오름으로 머리에 사슴뿔 솟는다. 휘어감아 도는 꼴 그림이 드센 떨림이니 어안이 벙벙하고 아득할 뿐만 아니라, 꼴과 그림이 서로 갈마들어 쩔쩔 끓는다. 신령하고 성스러운 환빛(靈光)이 그 위로 몽글몽글 피어오른다. 덩이진 구름들이 말랑말랑하고 매끄럽다. 물너울로 기우뚱 거리며 하늘을 뒤흔드는 구름 범벅은 예사스럽지 않다. 그는 어디서 눈 크게 뜨고 마음 뚫리어 하늘 받아들임의 높은 체험을 한 것일까? 그림 속 휘말리는 구름 범벅은 소리 울림으로 산마루와 맞붙어 어울리면서 가는 비를 뿌리고 산들바람 흘린다. 하늘은 푸르고 푸르뎅뎅하고 희뿌옇고 희끄무레하다. 그 아래 마루 바위에 기대 놓은 목동의 지팡이 하나, 깃털 나란한 붓질로 그린 바위에 박힌 새 눈, 먹구름이 우르르 굴러 내려 닿을 듯한 바위에 나부죽하게 납죽 엎드린 새들. 풍경은 그곳에서 이미 무슨 일이 일어났거나, 혹은 일어날 것이라는 예감으로 가득 차 있다. 범벅이 오르내리는 하늘땅 사이 산마루에 들임 받아 솟구친 흰 존재의 가쁜 숨결이 엿보인다.    


모질고 억세어서 풍경의 뒤꼍을 오래 견디고 서 있는 것들로 눈을 주어 그린 허찬미의 그림은 스스럽다. 아래로 아래로 눈을 내려 귀퉁이 언저리 그 흩어진 자리에 콕 박힌 것들을 그린 그림은 다 그려지지 않았다. 제 꼴을 온전히 드러내지 못하는 사물들은 그저 파닥거릴 뿐이다. 모퉁이에서 당당하게 그러나 어딘지 아파서 아린 그것들은 낮고 깊다. 늠름하고 꼿꼿하다. 그러나 이 구비 저 구비에서 기우뚱 거린다. 들썩 거린다. 무더기, 플라스틱 화분, 시멘트 블럭, 어슴푸레한 새 한 마리, 떠도는 그림자, 뚝뚝 끊긴 시간의 가지들. 하루하루 걷다가 문득 길 언저리에서 맞닥뜨린 그 모든 것들은 날아오르지 못하고 무르익지 않았다. 누구도 거들떠보지 않아서 그저 나부끼는 풍경일 따름이니까. 그는 어떻게 마음 크게 뜨고 눈 열어 땅 받아들임의 높은 체험을 한 것일까? 발붙이지 못하고 어긋나면서 어질어질하게 흘러 다니는 휘어진 삶에 다다랐을까? 긴 눈 맞춤으로 낱낱의 겉 표정을 새긴 그림이 아니라서 꾸밈없되 그늘 짙은 속살 깊숙이 가 닿은 그림들. 말의 껍데기를 벗겨야 속말이 돋듯 그는 풍경의 껍질을 벗겨 살빛으로 아릿한 몸뚱이를 그렸다. 


안지산의 그림 지음은 ‘없’을 나타낸 것이다. 마음에 솟아오른 어떤 이름 모를 ‘꼴짓’을 불러낸 것이다. 어디 어느 곳에서 실제로 체험한 높은 산마루 꼭대기의 하늘 소리 산울림이 이유였을 터이다. 그는 어쩌면 그곳에서 ‘골짜기 검은 죽지 않는다(谷神不死)’는 소리에 휘감기지 않았을까! ‘골검(谷神)’은 하늘땅의 뿌리요, 이어이어 끊임없이 낳고 되고 이루는 저절로 있는 그대로의 오롯한 숨이다. 그 숨님이 마리와 흰 새가 아닐까? ‘골검’을 일러 ‘산알 암(玄牝)’이라 한다. 산알은 신성한 생명의 혼이다. 그 생명을 낳고 기르는 것이 암(牝)이다. 그러니 한 쌍으로서의 ‘마리, 흰 새’는 뒤범벅의 꼬락서니 현실을 흘깃 보면서 슬퍼하고 안타까워하는 게 아닐까? 흥미롭게도 ‘마리, 흰 새’는 유럽의 성화(ICON) 속 마리아와 성령의 비둘기를 닮았다. <마리와 하얀 새>와 12세기에 그려진 러시아 정교회의 <블라디미르의 성모>를 비교해 보라. 그러니 마음에 솟아올라 그림 지은 이 ‘꼴짓’의 무엇은 하나의 말씀이요, 상징이며, 예언이리라. 그림들은 예기치 못한 어떤 사건들로 이루어져 있고, 어림잡지 못한 채 달아오른 풍경의 아름다움은 소스라쳐 휘돌고 있다. 돌 속의 사랑, 돌 속의 하늘, 숲 속의 눈빛, 눈 속의 우물은 휘감긴 붓질로 그려져 사건의 까닭을 맥놀이로 몰고 간다. 그러므로 그의 그림은 까닭 모를 하늘땅 우주에 솟구치는 슬픈 숭고이자 공포이며, 소름 돋는 골검의 신성이리라. 그는 그 스스로 들임 받아 거듭 난 존재처럼 위아래 뚫려 쏟아지는 말씀을 온몸으로 미리 느껴 그렸으리라. 그가 미리 느낀 예감의 언어는 무엇일까?      


허찬미의 꼴 지음은 ‘있’이 드러난 것이다. 이곳저곳 떠 밀렸으나 뚜렷이 제 꼴로 서 있기 바라는 ‘꼴짓’을 자리매김한 것이다. 꼴의 짓이 하나의 뜻이 되고 그 뜻을 다시 풀고 맺는 그의 그리기는 곧이곧대로 도드라진 ‘있’의 아로새김이다. 가장자리로 물러나 좀처럼 눈에 잡히지 않아서 삶의 테두리 바깥까지 밀려난 것들을 캔버스의 주제로 앞당겨 세운 그림은 꽃잎실로 짠 꽃천처럼 너울거린다. 범벅 현실의 그늘일지라도 꿋꿋하게 제 자리 잡고 서 있는 그것들을 그는 뒤범벅의 붓질로 새뜻하게 그렸다. 윤곽선이 아슬아슬 바들바들 부대끼며 들썩거린다. 그려진 것들은 옹색해도 돌이켜 살핀 그림은 마음이 짙어서 싱그럽다. 속살을 더듬어 새겨 넣은 색과 가뭇없이 되바라져 보이는 붓질에서 살맛이 난다. 날 비린내 나는 풍경의 살맛이요, 살내요, 살빛이다. 보는 이의 앙가슴을 쉴 새 없이 두드리는 숨결이다. 자꾸 자꾸 움터서 가쁜 숨결로 뒷덜미를 뚝 떨어뜨리는 기쁨이다. 색 범벅의 붓질로 그린 헐벗어 보이는 그림들은 그 안에서 해말끔하게 스스로의 ‘있’을 드러내는 사물들로 싱싱하다. 무엇보다 새파랗게 돋아 그늘 자리를 생명으로 채운 그림들은 모퉁이 귀퉁이 아랑곳하지 않고 그 삶을 가운데로 세운다. 어쩌면 이것이 허찬미가 그리는 꼴 지음의 이유일 것이다. 소박하되 실팍진 사물들은 한결 덜 스스러워서 당당하기까지 하다. 아무 데서나 툭 튀어나온 것같이 보이지만 그것들은 곧바르고 넉넉하다. 시름겨워 맞버틸 힘이 없어 보일 때조차 잉잉거리면서도 왁자하게 존재를 드러낸다. 도대체 자질구레한듯하면서 오히려 더 또렷하게 도드라지는 이 ‘있’의 버팀은 어디에서 비롯된 것일까?  


안지산의 눈은 풍경의 너머로 깊숙이 다다르고자 하는 ‘멈춤’에 기울인다. 멈추어야 너머를 볼 수 있다. 피어오르는 그림의 꼴짓을 끊는다. 꼴짓이 끊어진 자리에서 그는 갑자기 텅 비어 낯선 하늘땅과 마주한다. 잔결꾸민소리가 비어 빈 마음의 한구석을 휘감아 꼴짓의 껍질을 벗긴다. 그림 지음의 숨 하나가 틔워진다. 그는 어쩌면 그 숨 하나의 긴 눈 맞춤으로 낱낱의 표정을 새긴 그림을 짓고 일으켰으리라.


허찬미의 눈은 지금 여기의 풍경에 다다르고자 하는 ‘곁눈질’에 기울인다. 갓길 더미 속 노동, 시멘트 콘 기둥의 외로움, 마음의 버캐처럼 박힌 블럭, 잿빛 그늘 새의 넋두리, 잡아 뜯긴 벽의 눈빛, 떠돎으로 드센 잎들, 날카로운 슬픔과 눈치, 색 버무려 휘갈긴 샛바람. 그의 그림은 꼴짓이 피어오른 까닭에 깊이 마음 닿아 그린 기쁜 울음이다. 이름주린 것들에게 꼴짓기의 그림으로 제 꼴 잡아주는 기꺼움이다.   


그림은 짓고 일으켜 새기는 짓거리 일이다. 짓고 일으키려면 먼저 무엇에 홀려야 한다. 홀리지 않으면 그림은 그 누구도 홀릴 수 없다. 스스로 홀려야 홀림 짓의 그리기로 보는 이를 휘말린다. 안지산의 홀림 짓 그림은 고요히 귀 기울여 소리 울림의 메시지를 듣게 한다. 미리 느껴 예 온 소리의 메세지를. 듣고 보아야 마음에 어떤 꼴짓이 와 닿는다. 허찬미의 홀림 짓 그림은 화들짝 눈 열어 눈부신 사물을 보게 한다. 보고 들어야 마음에 어떤 꼴짓이 솟는다는 걸 힘주어 말하는 듯하다. 와 닿고 솟는 꼴짓이 안에서 휘몰아 쳐야 그림들과 감응으로 흥을 틔울 수 있을 것이다. 아니나 다를까. 나는 그들 그림에 사로잡혀 꼼짝도 못하고 서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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