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고


컬럼


  • 트위터
  • 인스타그램1604
  • 유튜브20240110

연재컬럼

인쇄 스크랩 URL 트위터 페이스북 목록

특집원고 | 동시대 조각의 최전선 / 아트인컬쳐

김종길





김종길


너무나 기다렸던 기획이다. 사실, 조각 전시도 찾아볼 수 없고, 그렇다고 이제 조각만의 전시를 한다는 것도 부질없어 보였는데, 변화하는 조각의 언어를 되짚는 이 기획이 21세기 새로운 한국조각의 모습이지 않을까, 생각된다.


2009년부터 미술연감 『한국미술』의 ‘조소’ 부문 총평을 썼다. 조각 전문 미술관에서 근무했었고, 또 조각 평론을 제 비평의 전문성으로 고집하던 때여서 꾀나 열심히 자료를 수집하고 정리했던 기억이 난다. 2011년 연감이 마지막 미술연감이자 총평이었는데, 그렇게 3년을 정리하다 보니 한국 조각계의 흐름이 한 눈에 잡혔다. 하지만 미술연감은 폐간되었고 그 흐름은 거기서 끊겼다. 내내 아쉬운 것은 한 해 동안의 한국미술계 변화를 살필 수 있는 기획이 사라졌다는 것이었다.


임근준 선생이 2007/2008년을 현대미술 지형변화의 한 시점으로 보듯이 한국 현대조각의 변곡점도 엇비슷하다는 생각이다. 총평을 썼던 3년(2009-2011년)은 조각의 변화를 직접 목격할 수 있는 좋은 시기였다. 미술연감이 1년 뒤를 다룬 것이기 때문에 실제적 변화는 2008년부터라고 할 수 있다. 그 해를 정리한 글의 제목은 「현실을 투영하는 다중적이며 입체적인 조소 전시들」이다. 2009년을 정리한 2010년 미술연감에는 「신형상주의, 신개념주의의 확장」이라 썼고, 2011년 마지막 연감에는 「조각적 변태(變態)의 입체미술」로 정리했다.


2011년 미술연감에서 ‘조각’ 부문이 ‘입체’로 꼭지명이 바뀌었다. 나는 이 변화를 “근대적 조각 개념이 현대적 입체 개념으로 확장되었거나 재정의 된 현상으로 보아야 할 것”이며, “이것은 말이 엎어지고 개념이 소급된 뜻의 파계일 수 있다. 그동안 조각이 입체를 수렴했고 거기에 공간과 조형을 더했으니 말이다.”라고 적었다. 그러면서 “새로 쓰는 입체 개념은 3차원이되 다차원이며, 구체적 물질이되 비물질이고, 양감이되 비가시적인 것의 합이다. 조형은 이제 차원의 경계를 한정하지 않으며 또한 물질/물성의 통시적 감각을 요청하고 있다.”고 파악했다.


서울시립미술관이 기획한 《조각적인 것에 대한 저항전》과 김월식이 기획한 《낭만적 부락전》이 한 사례였고, 그 외에도 2010년에 열린 《김범전》, 이수경의 《Broken Whole전》, 권용주의 《부표전》, 김주현의 《뒤틀림-그물망전》, 그리고 코라아나미술관의 《기념비적인 여행전》에 출품한 김상돈의 〈불광동 토템〉과 제4회 《페스티벌 봄》은 주목할 만한 전시/작품이었다. 마지막 연감의 마지막 문장은 “입체 미술 또는 입체 조형 예술은 이러한 전방위적 혼란과 수다, 방사 및 자율적 조합과 혼합 속에서 잉태될 것이다.”로 끝난다. 그 문장으로부터 정확히 10년이 지났다. 동시대 한국조각의 실상은 그 때부터 잉태된 씨알들의 실체로 보인다. 너무나 놀랍고 경이롭다.


 


김종길


오랫동안 조각은 비좁은 몇 개의 물질에 갇혀 있었다. 물질은 조각가의 ‘언어’와 ‘상상’을 구속했다. 아직 생성되지 않은 언어와 현현되지 않은 상상이 그 물질로부터 도주와 탈주를 감행한 것은 최근의 일이다. 조각의 문법을 낱낱이 해체하며 스스로 창조적 재조각화를 시도한 조각가들의 손에는 오롯이 ‘철학하는 시의 망치’가 들려 있을 뿐이었다. 그들은 ‘시의 망치’로 물질에 갇힌 ‘조각’을 쪼개고 부수고 없앤 자리에서 철학하는 예술의 ‘리얼리티’를 드러내고 표현하기 위한 새로운 재료를 궁리했다. 조각의 개념과 그림자조차 남지 않은 자리에서 그들이 짓고 일으킨 것은 하나의 사건, 하나의 목소리, 하나의 침묵, 하나의 시공(時空), 하나의 현실, 그리고 하나의 초월이었다. 그 하나하나는 다르게 이어지는 ‘조각하기’의 굿거리다. 서로서로 이어서 일으키는 재료들의 실체는 ‘조각 해방’의 탈주로였고.


그들은 차오르는 미적 혼돈의 시학을 표현하기 위해 재료와 난투를 벌인다. 조각의 정의를 묻지 않는 자리에서 조각은 다시 어떤 뿌리로 싹을 틔우기 때문이다. 재료는 마주침의 우연성, 혹은 필연적인 것이어서 서로 당기고 밀어내고 비판한다. 그러면서 연쇄적으로 달라붙는 걸 좋아한다. 물질/비물질의 연쇄적 알레고리의 새 조각! 조각가들은 ‘조각의 근거는 이제 없다’는 판단에 이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그 ‘없는 곳’을 향해 비판적 재료의 물성을 던지고 쌓아서 아이러니를 구축하고, 엉망진창의 현실을 빗대고 뒤집는다. 이미 있는 조각의 언어는 붕괴되고 새로 탄생한 언어는 그래서 아이러니와 유머를 오간다. 때때로 그것들은 기념비적인 신화와 같아서 시제가 뒤틀린 ‘미래 현재’, 혹은 ‘과거 현재’의 동시성으로 우리 앞에 등장한다. 불현듯, 홀린 듯이, 마주한다.


 


김종길


다다의 미학이 추궁했고, 플럭서스 미학이 현실과 초월의 경계를 넘나들며 가 닿고자 했던 사건들을 떠올린다. 요셉보이스와 백남준의 네오 샤먼적 미학을 곰곰이 궁리한다. 시퍼런 칼날위에서 새로운 미의 황홀과 우주를 집전하는 자의 원시적이고 근원적인 정체성! 샤먼은 최초의 미학자였고 미의 담지자였으며 미의 대리자였다고 할 수 있을 터이다. 동시대 조각은 그런 프리미티비즘적 네오 샤먼 예술가들의 도래를 보여준다.


권용주의 예술적 촉수는 놀랍다. <폭포> 작업을 보면 예술적 오브제와는 하등 관계가 없어 보이는 일상의 하위적 물건들을 무심하게 어떤 기준도 없이 위태롭게 쌓아 올려서 작품을 구성한다. 아스라한 높이의 플라스틱 개집에서 쏟아지는 폭포수(헛짓의 가짜 폭포라는 촉)는 그 위태로운 오브제들(‘일상’이라는 한국사회의 촉)과 충돌하면서 근대화, 도시화, 문명화의 디스토피아를 비꼰다.


김상돈의 유머는 우리 앞에 직립해 있는 작품의 실체가 아니라, 그 실체의 이면에 똬리를 틀고 앉아서 이 세계와 저 현실을 샤먼의 시선으로 꿰뚫고, 꿰뚫어서 터진 구멍으로 깔깔거리는 공수의 언어를 퍼붓는 천연덕스러운 풍자에 있다. 제13회 광주비엔날레에 출품한 <행렬>에 이르기까지 그의 토템적 조형이 발산하는 미학적 줏대는 쉬지 않고 이어진다.


이병호는 조각에 ‘숨’을 넣고 빼는 방식으로 형상에 시간성을 부여해 근대조각의 천재적 리얼리티 관념을 한 방에 날려 버렸다. 또 이미 미술사에서 기념비적





하단 정보

FAMILY SITE

03015 서울 종로구 홍지문1길 4 (홍지동44) 김달진미술연구소 T +82.2.730.6214 F +82.2.730.921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