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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시평론 | 나무몸에서 몸생명으로 - 김현준

김종길



‘나무­몸’에서 ‘몸­생명’으로
- 김현준 형상조각의 생명미학적 사유

 


형상의 지향
날숨(生命)의 다섯 회돌이(五行)에서 물이 나무를 낳고(水生木), 나무가 불을 살리며(木生火), 불이 흙으로 도는 과정은 서로살림(相生)이다. 이 서로살림의 회돌이가 동아시아 서로주체성의 공공철학을 키우는 밑동이었고, 또한 연기적(緣起的) 사유의 미학이었다. 동아시아의 미학적 그물코는 하늘땅사람을 따로 나누지 않듯이 원효의 하나마음(一心)처럼 ‘하나’로 꿰는 그물이라 할 것이다. 


꽃씨가 꽃이 되는 씨앗의 현실성은 아리스토텔레스의 철학에서 가능태(dynamis)가 현실태(energeia)로 완성되는 것이지만, 동아시아에서 현실태(형상 그 자체=순수현실태)는 자연 스스로의 무위적 혼의 활동에 의해 뒤바뀌는 기화적(氣化的) 사건에서 비롯된다. 꽃이 꽃을 낳고, 나무가 나무를 낳는 게 아니라 물이 나무를 낳는 개벽적 사건에서 비롯된다는 얘기다. 이때 물은 에네르게이아의 혼(魂)이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이 혼을 신(神)이라 하였으나, 우리는 그것을 있는 그대로의 상태라 하여 천지조화(天地造花)라고 하거나, 그냥 하늘이 하는 일이라고 생각했다. 서로살림의 날숨으로 회돌이하는 다섯 돎(五行)은 바로 그러한 이치에서 바라보아야 한다. 온갖 것들이 서로 낳고 키우고 바뀌며 사라지는 나무(木)­불(火)­흙(土)­쇠(金)­물(水)의 돌아감 사이사이에 하늘이라는 ‘살림의 함 없음(無爲)’이 작용하고 있는 것이니까. 


김현준의 형상조각을 천천히 깊게 살피면서 마음눈으로 이리저리 따져 보았는데(窮理), (미학적) 가능태로서의 나무가 형상(얼굴, 몸)으로 변화하고, 다시 그 형상이 싹을 틔우는 사건은 언 듯 보기에는 서구 철학의 미학적 전통을 따르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사실은 본래의 나무(질료적 상태. 나무라는 순수현실태이자 형상조각의 가능태), 나무가 형상조각으로 변화(질료의 미학적 전환), 형상조각에서 새로운 싹이 움틈(미학적 사건에서 생태적 사건으로 변화)은 그 각각의 사건들이 조각가의 미학적 인위와 자연의 생태적 무위로 뒤섞인 동서양의 형상미학적 조화로 생각된다. 그는 나무를 깎아서 형상을 드러내는데 그치지 않고 다시 그 ‘나무­형상’을 본래의 나무로 생성시키는 회돌이의 한 끝을 틔우고 있기 때문이다.


“나무의 갈라진 틈이 비어있는 것 같지만 그 안에는 무언가가 존재한다고 믿었어요. 아무것도 없는 것 같지만 뭔가의 시작점일 수 있다는 거죠.”_김현준


2. 나무에서 빛으로

물­나무­불­흙의 날숨 회돌이에서 엿볼 수 있듯이 나무는 불의 상상력을 키우고, 불은 끊임없이 타오르는 혼불의 끝에서 생명의 본질적 사태인 흙으로 돌아간다. 김현준의 형상조각이 추구하는 미학적 줄기는 이러한 날숨 회돌이, 즉 음양오행의 생기론적 철학과 무관하지 않다고 본다. 그가 나무판의 갈라진 틈을 비집고 빛의 알갱이를 채워 넣는 것은 ‘나무­불’의 서로살림을 떠올리게 한다. 이때 불은 활활 타오르는 장작더미의 불이 아니라, 날숨의 씨알을 깨워 일으키는 황홀한 우주 빛의 생명력이다. 그것이 하늘이다.


쭈그리고 앉은 벌거숭이 한 사람의 뒷덜미에서 생명 줄기가 솟아 푸른 잎을 틔운 작품의 경우는 ‘물­나무’의 회돌이지만, ‘나무­몸’이라는 조각적 과정과 그 과정이 빚어낸 ‘형상­몸’을 골똘히 따져 볼 필요가 있다. 몸이라는 문자는 ‘ᄆᆞᆷ’에서 왔는데 그 문자의 구조는 인간의 척추를 닮았다. 그리고 ‘ㅁ­ㅂ­ㅍ’의 자음구조는 한 바탕이다. 물­불­풀로 글자를 만들면 그것들의 바탕은 같은 뜻의 뿌리로 이어져 있는 것. 다시 그 뿌리의 한바탕을 이룬 것이 땅이요 흙인데, ‘ᄆᆞᆷ’은 땅과 흙 사이에 ‘참나’의 싹이 튼 문자 형상이니, 참으로 그 뜻의 조화가 아름답다. 나무 형상의 몸은 물이요, 불이며, 흙이지 않는가!


그런데 이러한 그의 조형적 특질은 어떤 하나의 작품에 한정되지 않고 지속적으로 등장한다. 예컨대 거대한 얼굴조각이 그렇다. 2개의 두상(頭像) 작품은 얼굴이 하나의 물이며, 불이고, 그 자체로 사유하는 대지의 어떤 매혹을 드러낸다. 머리에서 치솟은 것들은 머리카락이 아니라 작고 여린 나뭇가지다. 어떻게 이런 상상이 가능했을까?


얼굴의 느낌은 어떤 사람의 표정이 아니다. 거대한 대지를 몸으로 열반에 든 부처의 얼굴에 다름 아니다. 깊고 고요한 참올(眞理)에 든 모습이다. 두상으로 우리 앞에 나타나 있으나 그 세계는 이 현실계에 찰나의 틈을 벌리고 니르바나(涅槃)의 실체로 드러난 세계이다. ‘불어서 끄는 것’, ‘불어서 꺼진 상태’, 그러니까 번뇌의 불꽃을 지혜로 꺼버린 상태의 적요(寂寥)가 바로 이 얼굴인 것이다. 그 깊고 고요한 침묵의 텅 빈 자리에서 생명이 움트고 있다. 물은 물이요, 나무는 나무요, 불은 불이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하나의 사태를 단지 하나의 사태로만 인지하는 것은 무의미한 선언에 불과하다. 날숨의 사건은 사태와 사태들 사이에서 벌어지는 변화에 있다. ‘있없(色空/有無)’이 둘이 아닌 하나라는 것은 ‘모두(多)’와 ‘하나(一)’의 혼합이 아니다. 하나로 이어 솟았다는 것의 의미다. 김현준의 조각도 그와 비슷하다. 하나의 조각적 형상에 그치지 않고 그 형상의 본질적 질료를 재사유하면서 ‘하나’로 나아가기 때문이다.


“삶을 살아가다 보면 문득, 자신에게 질문을 던질 때가 있다. 그 질문은 시공간을 고요하게 만들고 침묵을 가져온다. 하지만 언젠가 침묵은 침묵 속 무언가에 의해 깨진다. 그것이 또 다른 도약의 시작일 것이다. 새로움을 위한 동력…”_김현준 


3. 텅 빈 몸, 가득한 진리

통나무에 결가부좌로 앉은 조각 하나. 머리가 없다. 머리가 없으니 사유조차 없을 터. 텅 비어서, 그야말로 완전한 빔(空)을 실현한 듯한 이 조각은 관객으로 하여금 무수한 생각을 낳게 한다. 이유는 작품 둘레에 쌓아 놓은 나무 부스러기 때문.


수천수만의 부스러기 더미는 조각보다 더 많은 의미를 함축적으로 발산한다. 깎고 깎아서 하나의 형상이 드러날 터인데 그가 보여주는 것은 그 형상만이 아니라 그 형상이 드러나기 위해서 무수한 껍질들이 떨어져 나와야 하는 사태를 있는 그대로 노출하고 있다. 무엇이 진리일까? 통나무일까? 결가부좌 형상일까? 나무껍질의 부스러기일까? 조각이란 무엇이며, 그 조각이 함의하는 형상의 본질은 무엇인가?


석도화론의 첫 일획장은 태고에 법이 없었고 큰 통나무도 흩어진 바 없었다고 하면서, 큰 통나무가 한 번 흩어지니 법이 생겼다고 말한다. 김현준의 통나무는 크게 흩어졌다. 흩어진 자리에 결가부좌의 형상과 껍질이 남았다. 그렇다면 석도가 말한 법은 형상일까? 부스러기일까? 사실 결과부좌의 몸이란, 상징적으로는 텅 빈 몸이다. 그 형상의 실체는 ‘없음(無我)’에 이른 한 존재의 표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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